예수의 무덤 - 역사를 뒤집을 고고학 최대의 발견
찰스 펠리그리노 외 지음, 강주헌 옮김 / 예담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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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3월 28일, 예루살렘 탈피오트. 당시 솔렐 보네 건설회사의 건설현장에서 다이너마이트의 폭발과 불도저의 실수로 한 고분이 드러납니다. 발굴명 IAA 80/500-509로 명명되고 훗날 열 유골함의 무덤이라 불리워지게 된 무덤. 발견당시 출토된 뼈단지는 총 10개였고, 1세기 유대인의 전형적인 형태의 뼈단지였습니다. 조사실로 운반도중 한개의 뼈단지가 분실되었고, 나머지 9개의 뼈단지 중 무려 여섯 개에서 사람의 이름이 새겨진 문양이 드러납니다. 500 마라 마리암네(Mara Mariamne), 501 예후다 바르 예슈아(Yehuda bar Yeshua, 예수의 아들, 유다), 502 마태(Matthew), 503 예슈아 바르 요세프(Yeshua bar Yosef, 요셉의 아들, 예수), 504 요세(Yose), 505 마리아(Maria)

과연 그 무덤은 복음서의 기록대로 아리마대 요셉이 소유한 가족 묘지이며, 예수의 무덤이였을까요? 발굴당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반응이였습니다. 마리아, 예수 등과 같은 이름은 1세기경 유대인의 이름으로 아주 흔한 것이였고, '예수의 아들 유다'와 '마리암네'는 성경에서 예수와 관련된 아무런 단어도 아니였기 때문입니다. 1996년 이스라엘 고고학회지 아티코트에 최종 보고서를 발표했고, BBC의 다큐에서 잠깐 언급했을 뿐, IAA 80/500-509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갔습니다.

그 후 2002년, 성서 유물 수집가 오데드 골란은 하나의 유골함을 공개합니다. 그 유골함엔 '요셉의 아들, 예수의 동생, 야고보' 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신약성서 갈라디아서 1:19에도 야고보가 주의 형제라고 쓰여져 있어 기록과도 일치했고, 글의 문법도 완벽했습니다. 이 유골함은 뉴욕타임즈 1면에 실렸고, 토론토의 온타리오 왕립박물관에 전시되 10만명의 관람객이 다녀갔습니다. 이 야고보의 유골함은 저자 심차와 찰스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들은 야고보의 유골함에 접근하던 도중 IAA 80/500-509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처음엔 단순한 호기심에서 정보를 알아보던 중 최근의 학설이 그들의 눈에 들어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진짜 이름이 바로 마리암네라는 것입니다.

마리암네라는 단어는 빌립행전에 나옵니다. 빌립행전은 신약성서에서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한 외전으로, 2세기에 외전은 배척받거나 비밀스런 글을 뜻합니다. 빌립행전은 초기 기독교 교부들에게 인용됬지만 대부분 소실됬었는데, 1976년 프랑수아 보봉과 베르트랑 부비에는 아토스 산 크세노폰토스 수도원에서 14세기에 판본된 빌립행전을 발견합니다. 이 행전은 4세기에 편집된 문헌을 옮겨쓴 것으로, 부활한 예수가 빌립을 멀리 파견하는 장면, 그리고 빌립의 누이인 마리암네와 바돌로메가 빌립을 옆에서 돕는 내용입니다. 세 사도는 예수가 말한대로 시리아를 지나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예루살렘 북쪽을 여행했고, 마리암네는 옛 기독교 세계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뜻하는 그리스어입니다. 빌립행전의 끝부분에서 빌립은 순교했고, 바돌로메는 소아시아로, 마리암네는 요르단 강으로 되돌아와 예루살렘에 묻힙니다.

찰스는 IAA80이 인정받지 못했던 요소중 하나인 예수,마리아,요셉 등과 같은 이름이 당시 흔한 이름이였다는 것에 대해 통계학적 분석을 시도합니다. 발굴된 유골함 중에서 요셉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14%, 예수는 9%였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의 남자는 8만명 정도였기 때문에, 79명중 1명꼴로 요셉의 아들 예수가 됩니다. 마리아는 24명중 1명이였습니다. 마리암네는 유일한 유골함이였습니다. 요세도 희귀한 이름이었지만, 또 하나의 요셉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런 계산 결과 나온 답변은 저 이름들이 다 같은 무덤에 들어있는 무덤이 또 나올 확률은 250만분의 1이 됩니다. 북미의 포이어버거 교수는 통계학적으로 좀더 보수적인 접근을 합니다. 복음서에서 기록된 예수의 가족 중에서 빠진 형제들을 고려했습니다. 이런 결과 탈피오트 무덤이 나사렛 예수 가족의 무덤일 개연성이 600대 1로 현격하게 떨어집니다. 하지만 예수의 동생, 야고보의 유골함이 탈피오트의 것이였다면 3만대1로 크게 올라갈 것이라고 합니다.

심차, 찰스 그리고 제임스 캐머런은 다시 무덤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각 유골함의 원소 스펙트럼을 조사했고, 뼈조각들의 DNA를 조사합니다. 그런 결과 야고보의 유골함은 탈피오트의 다른 유골함과 동일한 원소 스펙트럼을 보여줍니다. 또한 예수와 마리암네의 유골함에서 나온 뼛조각으로 DNA를 조사한 결과, 두 DNA는 일치하지 않음이 밝혀집니다. 이것은 기록상의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와의 관계가 동일한 것이였습니다. 공통의 가족무덤에 인치된 예수와 마리아. 하지만 혈연관계가 아닌 DNA는 그 둘이 부부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음을 암시합니다.

신약성서의 인물들과 유골함의 뼈를 연계시킨다는 주장은 얼핏 보기엔 신성모독스럽고, 많은 반발을 가져오리라 예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1990년에 예루살렘에서 가야바(Gaiaphas)라는 유골함이 발굴됬는데, 예수를 박해한 대제사장의 가족 무덤이 발견됬다고 대서특필됬고 대부분의 신약성서 학자들도 인정해 이스라엘 박물관에 영구전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가야바는 통계학적으로 탈피오트 무덤에 비하면 훨씬 흔한 이름이였습니다. 또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를 짊어지던 예수를 도와주던 키리네의 시몬 또한 200대 1에 불과한 개연성을 지녔음에도 진품으로 받아들여집니다. 그에 비해 1953년 벨라르미노 바카티는 감람산에서 공동묘지를 발굴합니다. 그중에 가장 인상깊은 유골함은 시몬 바르 요나 라는 이름이 씌여져 있었습니다. 이 이름은 복음서의 유명한 사도인 베드로의 이름이였습니다. 요나라는 이름은 무척 희귀했고, 유골함에서 처음 발견된 것이였습니다. 하지만 이 유골함은 기자회견도 없었고 종교적 행사도, 과학적 조사도 없었습니다. 그 유골함은 홀대받은 채 뚜껑은 사라졌고 뼈는 버려져 현재는 20개의 유골함과 같이 뒹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겼던 것일까요?

저자는 그것이 유대-기독교파, 나사렛파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와 같이 행동한 유대인들이였지만 로마의 교부들이 기독교의 교리를 새로 정립하면서 제거해야 할 대상들이였습니다. 인간 예수와 같이 살아온 그들은 안식일을 지키고 처녀잉태설과 삼위일체설을 거부해 예수의 신성에 흠집을 낼 폭탄과도 같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도 기독교가 이방 종교가 되기 오래전에 예수를 추종한 유대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는 존재들이였습니다. 인간 예수와 가까이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금기시됬던 것입니다. 예수를 학대한 대제사장의 유골은 환영받았지만, 정작 예수는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예수의 삶을 기록한 복음서들은 기원후 75년부터 110년 사이에 씌었습니다. 신약성서에 포함된 글 중에서 가장 먼저 쓰인 글은 바울 성자의 편지입니다. 몸의 부활에 대한 정통적 해석은 바울 성자가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낸 첫 편지로, 15장 35절 이후입니다. 여기에서 바울 성자가 하신 말씀은 그리스도의 부활에도 적용됩니다. 바울 성자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부활한 몸은 영적인 몸입니다. 예수께서 생전에 가졌던 물리적이고 물질적인 몸이 아닙니다. 물리적인 몸은 썩어 사라졌을 겁니다. 따라서 뼈의 일부가 발굴돼서 확인되더라도 그리스도의 부활에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합니다. - 메르빈 페르난도 신부, p.131

기독교인들에게 이러한 주장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는 모르겠습니다. 저자들 또한 기독교문화권의 사람인 터라 책 여러군데에서 독자들, 기독교인들, 유대인들의 반발을 우려하는 부분이 드러나 있습니다. 하지만 발굴 전부터 여러 신부, 목사, 랍비들과 논의를 해본 결과 예수의 뼈가 발견된다고 하더라도, 현재의 기독교와 별 상관이 없다는 반응이였습니다. 이러한 인간예수의 모습은 저같은 비 기독교인에게는 오히려 예수에 대해 호감을 가지게 만드는 글이 아닌가 합니다. 예수의 유골함에서 발견된 섬유, 그리고 그의 유골함. 그것은 지금까지 발견된 수의와 유골함중에서 가장 소박한 형태였습니다. 너무나 소박했기에 이 유골함은 미완성이 아닐까? 하는 주장까지 제기됬던 유골함. 가장 유명한 사람이였고, 한 민족의 구세주라고도 불리웠지만 하나의 십자가 외엔 어떤 장식도 없는 유골함. 그런 소박한 '인간 예수'의 모습이 성경에서 기적을 베푸는 모습보다 오히려 더 저에게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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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주례사 - 행복한 결혼생활을 위한 남녀 마음 이야기
법륜스님 지음, 김점선 그림 / 휴(休)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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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결혼을 앞둔, 혹은 이미 결혼한 사람들을 위한 책이지만 아직 결혼을 고려하지 않았거나 애인이 없는 사람도 읽어볼만한 책입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결혼이란 무엇인가, 더 나아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책에선 여러 이야기가 나옵니다. 배우자를 고르는 과정, 부모의 결혼 반대 문제, 나이차가 많은 문제, 과잉 집착 문제 등과 같은 경우에 생기는 결혼갈등, 부모가 되고 나서의 부부, 자식문제 같은 갈등에 대해 스님의 조언이 담겨 있습니다. 저자인 법륜스님이 남자다 보니 사랑과 결혼을 이야기할때 여성을 예로 드는 경우가 많았다고 생각이 드는데, 그런 이야기들도 바꿔 생각해보면 남자에게도 전부 통용되는 말이기 때문에 페미니스트들이 보더라도 큰 불만은 가지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현재의 많은 부부갈등은 상대방의 조건을 많이 따지는데서 비롯된다고 말합니다. 결혼할 때 서로의 속마음은 이것저것 따져 보게 되고, 이때의 근본 심보는 상대방 덕을 보자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돈은 얼마나 있나, 학벌은 어떤가, 지위는 높은가, 차는 좋은가, 외모는 아름다운가 등과 같은 조건을 너무 따지다보면 결혼후 기대심리가 무너지며 실망감이 크게 다가올 뿐만 아니라 흔히 신데렐라 증후군이라 부르는 것처럼 상대방의 조건을 너무 잘 잡은 경우 결혼 후에 더 큰 갈등과 열등감, 피해의식이 뒤따라 온다는 것입니다. 결혼후에도 상대방의 바람이 의심된다던지 실제로 바람을 피우는 문제, 낮은 봉급의 문제, 시부모 문제, 부부간의 종교문제 등의 문제로 갈등이 계속됩니다.

행복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불행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진실로 행복과 불행, 다른 사람이 만드는 게 아니네 

이런 상황에 대해 문제에 대해 정확하고 진실되게 인지할 것, 상대방을 자기에게 맞추려 하지 말것, 무엇보다 스스로 정진하고 정신적 수행을 통해 홀로 있어도 괜찮을 자존감 높은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결혼은 혼자 살아도 외롭지 않고, 같이 살아도 귀찮지 않을때 하는것이 바람직하며 그런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선 열배, 백배는 더 열심히 수행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많은 갈등을 빚는 가정들은 그것이 사랑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일방적이기 때문에 성추행에 가까우며 상대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있어야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스님의 조언이다 보니 아무래도 불교식 색채도 많이 느껴지긴 하지만, 한번쯤 결혼이라는 가장 깊은 타인과의 교류라는 것에 대해 잔잔히 생각해 볼수 있을만한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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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선
브라이언 다이센 빅토리아 지음, 정혁현 옮김 / 인간사랑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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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 중 우리는 기독교와 불교를 사랑의 종교, 자비의 종교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사랑의 종교와 자비의 종교는 사랑과 자비만을 낳지 않았습니다. 종교는 폭력도 낳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종교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폭력의 역사가 씌여졌는지 알고 있습니다. 이 책을 쓴 일본 불교 소토선의 승려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는 종교와 폭력의 역사 가운데 최근의 역사,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군국주의와 종교가 어떻게 결탁했는지, 사랑과 자비의 논리가 어떻게 폭력을 정당화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본의 불교는 6세기 중반 한국에서 전래된 이래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본불교는 도쿠가와 시대에 그 세력이 절정에 달했으며, 사실상 국가 종교 역할을 수행합니다. 일본정부는 기독교를 축출하기 위해 불교 촉진책을 펼쳤고, 사찰의 구조를 피라미드식 형태로 만들어 중앙 사찰에서 모든 종단을 통제하는 체제를 확립합니다. 불교는 정부의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승려들은 정부의 충직한 부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본불교의 특징은 사실 불교의 전래 당시의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한국의 호국불교는 신성 왕권에 강력히 집중된 국가를 건설하는 원인으로 기능했던 정치,종교적 이데올로기로서 유용했습니다. 일본에서 나타나는 불교의 국가에 대한 복속은 한국 불교의 모방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1868년 천황에게 권력이 넘어가자 새 정부는 칙령을 공표해 불교 탄압책을 폈습니다. 이는 불교가 한국, 중국에서 건너온 것이기도 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신적인 권력을 불교에서 천황으로 집중시키기 위함이였습니다. 칙령을 통해 전국의 신사에서 거의 대부분의 불교 승려들을 몰아냈습니다. 정부의 탄압에 대해 불교계는 당시 자금이 부족하던 정부에 자금을 지원해 회유책을 폈고, 반기독교 운동과 같은 민족주의에 공조함으로서 생존을 모색합니다. 메이지 정부는 명목상 종교의 자유를 부여했을 뿐, 어떤 종교의 추종자라도 민족적 도덕성과 애국주의에 반드시 맹세하게 했습니다. 일본의 종교 신도는 종교학자의 표현대로 본질적으로 민족주의가 새롭게 날조한 종교였으며, 불교는 이러한 신도에 편입됩니다.

국가 신도는 신사들에 대한 정부의 지원과 규제, 천황의 사제 역할, 국가신도의 의식 창출과 후원, 일본과 해외 식민지의 신사 건립, 취학 아동들에 대한 신도 신화에 입각한 교육과 그에 따르는 강제적인 신도 의식 참여, 그리고 타종교집단의 확립된 신도 신화의 일부 양상들에 대한 노골적인 경멸에 근거한 그들에 대한 박해를 포괄하는 체제적 현상이었다. - p.44 

일본이 군국주의 국가로 변모하고 전쟁을 일으키면서 불교계에선 신불교 운동이 전개됩니다. 이 운동은 일본은 세계 유일의 참된 불교 국가이며 동양의 몰락에 대한 책임이 일본의 어깨 위에 놓여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일본 불교가 아시아의 모든 불교 중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일본의 불자들은 중국과 한국의 불자들을 깨어나게 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논리를 폄으로서 전쟁을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를 제공합니다. 이런 변화 덕분에 일본 불교는 견원지간이였던 기독교와 화해합니다. 일본 불교와 기독교는 힘을 합쳐 전쟁을 야기한 애국주의를 찬양했고, 죽음과 파괴를 미화시킵니다. 러일전쟁 당시 지휘관들은 종교의 신앙과 전장에서의 용맹성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종교는 칼보다, 총알보다 효과적인 학살무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의 군국주의에 대해 주류 종교계는 모두 애국적인 충성을 바쳤지만, 사람들의 생명을 희생하는 제국주의적인 정책을 펴는 정부에 반대하는 소수의 승려도 있었습니다. 조동선종의 승려 우치야마 구도는 정부의 정책에 반대하며 천황을 암살하려 했고, 불교부흥청년연맹과 같은 양심적인 종교인들의 조직이 반전운동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은 소수에 불과했고, 정부는 이런 저항을 효과적으로 차단했습니다. 결국 청일전쟁부터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주류 종교계는 이데올로기적인 지지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지원을 함으로써 전쟁에 관여합니다. 당시 종교계의 입장은 D.T.스즈키가 말한 짧은 대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종교는 무엇보다 국가의 존속을 추구해야 한다.'

조동선종의 총무원장이자 소지사의 주지였던 세키젠은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평화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이상이다. 평화는 인간 최고의 이상이다. 일본은 평화를 사랑한다. 우리는 평화와 근본적인 평등을 주장하면서도 우리가 속해 있는 국가를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만일 인류에 대한 사랑 때문에 국가를 잊는다면 진정한 평화는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조국에 대한 의무를 잊어버린다면 우리가 인류에 대한 사랑을 주장하는 방식에 관계없이 진정한 평화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전쟁에 참여하기는 해도 언제나 일본의 전쟁은 평화의 전쟁이다." - p.125 

전쟁이 끝난 직후에도 종교계는 전쟁에 종교가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일본 불교계가 전쟁의 책임이 있음을 인정한 것은 전쟁이 끝나고도 시간이 흐른 1987년에 와서야 공식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군국주의에 사용되었던 종교의 이데올로기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상급자에 대한 규율과 복종 그리고 충성이라는 전쟁 이데올로기는 고스란히 기업의 문화로 변모해 전후 산업계에서 활용되고 있습니다. 언제든지 대량학살을 벌일 수 있는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학교를 통해, 기업을 통해 전파되고 유지되며 우리의 피에 흐르고 있습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인류는 바로 이 순간에도 종교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쟁엔 성스럽거나 거룩한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리처드 도킨스는 그의 유명한 저작《만들어진 신》에서 '불교는 종교라기보다는 오히려 윤리 또는 철학 체계로 볼 수 있고 그래서 내가 분노를 표현할 주 공격대상이 아니다' 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도킨스가 보기에 불교는 다른 종교에 비해선 인류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낮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브라이언 다이젠 빅토리아가 말하듯이, 그런 불교마저도 광란의 역사에 얼마든지 동참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교가 자정능력을 잃어버린 원인 중 하나로 일본에서는 승가가 독립성을 유지하는데 불가능했기 때문에 군사정부들이 국가적인 필요에 따라 종교적 수행을 규제하고 종속시켰다고 지적합니다. 저자는 폭력의 역사를 비춤으로서 군국주의와 민족주의, 애국심과 같은 전쟁의 이데올로기는 불교의 자비와 비폭력에 관한 가르침에 대한 배신임을 보여줍니다. 또한 불자들에게 교리들을 윤리적 결과를 통해 사고하며, 부처의 본래 가르침에 의거해 검토할 것을 촉구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불교가 전파된 이래 단 한번도 본모습 그대로 지켜진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석가모니 자신은 국가의 이상적인 형태로 공화제를 찬양했지만, 불교는 불교가 전파된 나라에서 공화제를 만드는데 도움을 주지 못했습니다. 저자는 불교가 그 초기의 가르침에 충실한 채로 남아 있었다면 불교는 그것을 받아들인 나라들 속에서 번창하기는 커녕 살아남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불교의 모든 윤리적 행위의 바탕에는 보편적 사랑과 자비라는 개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석가모니의 근본적인 가르침대로라면 전쟁이라는 인간의 대량살상 행위에 참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국가의 이름을 외치며 총을 잡고, 언제든지 적이라고 설정된 대상을 향해 살인을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불교가 진정한 자비의 종교, 평화의 종교가 되고자 한다면, 이런 모순속에 해답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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