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임금 - 몽상, 그 너머를 꿈꾸는 최고임금에 관하여
샘 피지개티 지음, 허윤정 옮김 / 루아크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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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대한민국 최저임금은 시간당 8,350원, 월 174만 5,150원이다. 최저임금제는 최하위층의 소득을 올림으로서 부의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 중 하나이다. 하지만 간격을 좁히는 데에는 또 하나의 방안이 있다. 최상위층의 소득을 내리는 것이다. 현재 정책입안자들은 이 방법을 선호하지 않는다. 정치적 영향력이 있고 시간도 있으며 돈도 있는 부자들의 저항에 직면하기 때문이다. 샘 피지개티는 둘 다 해야 한다고 말한다. 단순히 둘 다 시행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법으로 해야 한다. 최상위 소득과 최하위 소득이 연동되는 '최고임금'제다.

최상위층의 소득을 내리는 방안은 꽤 오랜 역사를 지녔다. 조지메이슨대학교 경제학과 피터 T 리슨은 《후크 선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서 해적들이 약탈품을 분배할 때 가장 많이 분배받는 선장도 가장 적게받는 선원 2인분 이상을 받지 못했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지나친 빈부격차는 조직을 붕괴시킨다는것을 알았던 것이다. 20세기 중반 미국은 현재 가치로 4억 3,000만 원 이상의 수입에 대해 20년간 평균 90%에 달하는 누진소득세를 매겼다. 이런 사회적 분배는 오늘날 초강대국 미국을 지탱해주는 중산층의 성장에 기반이 되었다.

고소득에 대한 높은 과세율은 끊임없이 도전받았다. 이해관계가 걸려있었던 부자들은 정치적 압력, 언론, 각종 협회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대응한 반면, 평범한 사람들은 자신과 관계없는 세금이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그 결과 세율은 계속해서 내려갔다. 1963년 90%의 세율이 1988년 28%까지 떨어졌다. 기업 임원들은 자신들의 연봉을 점점 가파르게 상승시켰다. 높은 연봉의 근간이 된 임원의 실적은 상당수 인원감축과 정규직의 비정규직화 등 조정을 통해 이뤄졌다. 심지어 그들은 실패를 하더라도 높은 연봉을 받았다. 부자들이 부유해질수록 세금을 많이 낼 테니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지원하면 된다는 호혜적 논리가 그런 행동을 뒷받침했다. 그 결과 최상위 1%의 실질소득은 3배가 늘었고, 미국인 절반의 실질소득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소득 상한제를 반대하는 논리는 이렇게 흐른다. 만약 사회가 부자들이 벌어들이는 소득에 상한을 두면 부자들은 지금처럼 열심히 일할 동기를 잃고, 그들은 더이상 기업가적 상상력을 발휘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일자리 창출자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창출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경제는 박살난다. 과연 타당한 논리일까? 닉 하나우어는 실제로 부자들이 일자리를 최대한 창출하지 않음으로써 진짜 부자가 된다고 말한다. - p.120

 

불평등 사회는 많은 문제를 야기한다. 리처드 윌킨슨과 케이트 피킷은《평등이 답이다》에서 불평등의 가장 극적인 영향은 수명이라고 지적했다. 불평등한 국가의 국민들은 평등한 국가의 국민들보다 빨리 죽는 것이다. 데이비드 캘러헌은《치팅 컬처》에서 불평등 사회는 사람들에게 일탈 행위를 강요한다고 지적한다. 성공해야 한다는 명제는 필요한 경우 나쁜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압력을 행사한다. 금융위기를 경고했던 라구람 G. 라잔은 임원에 대한 파격적인 보수 체계가 공격적인 리스크를 감수하도록 만들었고, 그것이 금융위기라는 비극적인 결과로 이어졌다고 말했다.

수십 년간 진행된 변화는 극심한 불평등 세계를 만들었고, 이는 다시 변화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미국은 CEO에게 과도한 연봉을 주는 회사들의 법인세율을 올리는 법안이 채택되고 있다. 인도는 최고 임원과 중간 직원 간 급여비율을 공개시키고 있으며, 영국은 정부 사업을 맡는 기업들의 임원 급여에 상한을 두는 방안을 내놓았다. 수많은 대기업들은 정부사업 등 공적 영역에 기대는 부분이 많다. 엄청난 세금이 각종 혜택과 지원금 형태로 들어간다. 이는 정부정책을 통해 얼마든지 임금제도를 견제할 수 있다는 뜻이다.

최고임금제는 일정 소득 이상의 소득에 과세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자들을 거지로 만들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히 부자다. 애완용 사자를 인스타그램에 올려 과시하는 행위를 하지 못할 뿐이다. 오히려 소득정의는 그들이 원하는 것을 안겨 줄 것이다. 수만 명을 이끄는 기업의 총수는 지금보다 더 많은 존경과 대우를 받을 것이다. 부자들은 빈민가 옆에서 높은 장벽을 쌓고 보안회사의 경호를 받아야만 산책을 나갈 수 있는 곳에서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 백만장자들은 일반적으로 자녀들의 교육 기회가 유리하고, 보다 나은 생활을 누릴 수 있으며, 범죄로부터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에서 이주한다. 그곳이 바로 평등한 사회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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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18-12-24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심상정의원이 최고임금을 최저임금의 30배로 정하고, 법인이 소속 임직원에게 이를 초과하는 임금을 지급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명 ‘살찐 고양이법‘을 발의 했었습니다.

지나친 빈부격차를 줄어들고 이 사회가 조금은 더 공의롭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곳이 되기를 바랍니다.
 
실업 : 그 사회심리적 반응
피터 켈빈 외 지음, 이효선 옮김 / 인간과복지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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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수많은 실업자들이 있으며, 사회구성원 다수는 살아가면서 실업을 경험하게 된다. 이 책은 사회구조의 변화, 기술발전 등 실업이 발생하는 원인은 말해주지 않는다. 실업이 발생했을 때 실업자를 중심으로 가족, 친구와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실업과 관련된 기관은 어떻게 되어있는지, 여론은 어떻게 반응하는지 등에 대한 사회심리학적 결과들을 말하고 있다. 학문적 연구이기에 정형적 실업자, 정규직이었다가 실업자가 된 경우, 가정이 있는 경우, 남성인 경우에 한한 결과들이지만,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비정규직 상황, 여성 실업자의 경우에도 사회심리학적 변화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실업자가 실업을 마주했을 때 겪는 다양한 심경들은 문학, 예술작품에서도 쉽사리 찾아볼 수 있다. 엄청난 스트레스와 민감한 반응,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과 자책감, 자신을 이등 시민으로 지칭하는 모습, 친구 및 비경제 사회조직에서의 이탈 등은 수많은 연구결과를 통해서 이미 입증된 현상들이다. 실업자들은 실업 초기 일을 찾아보는 기관에는 비교적 낙관적이며, 자신이 휴가중인 것이라 생각하며 일의 논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면 곧 비관적이 되며, 여러 문제들을 일으킨다. 비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실업자는 운명론적이 되며 결국 삶은 붕괴한다.

타자가 실업자를 바라보는 관점은 실업자에도 영향을 미치지만, 실업을 다루는 기관의 모습, 언론의 대응, 언어의 변화까지 미친다. 개신교주의에 근간을 둔 일의 윤리는 탈종교적인 형태로 남아 노동의 가치를 획득하고, 실업자를 정의한다. 일의 윤리는 20세기 사회과학의 발명품으로서 오늘날 사회 지배적인 윤리는 부의 윤리이다. 실업의 영향 대부분은 빈곤의 영향과 일치한다. 윤리와 사회학적 논지로 구성된 사회시스템은 실업을 다루는 고용노동부의 다양한 프로그램들로 하여금 실업자의 사생활을 침해한다. 대중들과 언론이 사용하는 실업과 관련된 언어들 속에는 실업의 책임이 개인에 있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과잉노동력, 사오정, 오륙도 등의 언어들은 우리가 실업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보여준다.

IMF상황만큼은 아니라지만, 우리 곁에는 이미 수많은 실업의 결과들이 누적되어 있다. 자신을 자책하는 사람들, 작은 자극에도 민감하게 대응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타인에게 분노하는 사람들,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들이 있다. N포세대 현상, 결혼기피현상 등은 미래의 결과가 보이기에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사전적 대응일 것이다. 실업의 결과들을 마주하면서 과연 개인의 차원에선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사회의 차원에선 어떻게 만들어야 할 것인지 시급히 생각해봐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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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4일 근무시대 - 왜 노동시간 단축이 저성장의 해법인가?
피에르 라루튀르 외 지음, 이두영 옮김 / 율리시즈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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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7월 1일부터 주52시간 근무제가 시행된다. 주52시간 근무제는 노무현 정부 당시 법정근로시간을 주 44시간에서 40시간으로 줄인 이른바 주5일 근무제 이후 가장 인상적인 변화다. 몇몇 경제지에선 주52시간 근무제로 인해 대혼란이 일어날 것이라며 위기설을 주장한다. 하지만 그렇게 큰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거라 보는 학자들도 많다. 주5일제 도입 당시 노동계는 임금 삭감을 우려했고, 경영계는 생산성을 떨어뜨리고 인건비 부담이 심각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원가와 인건비 상승으로 기업의 경쟁력이 약화되고 중소기업의 줄도산 사태가 일어난다고 호들갑을 떨던 것이 무색하게도 기업들은 무너지지 않았고 근로자의 임금이 대폭 줄어들지도 않았다. 주5일 근무제는 노동자의 휴식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변화시켰지만 총 노동시간의 면에서 보면 큰 변화는 아니였다. 주52시간 근무제 역시 현재 주 68시간을 일하는 사례는 예외적이고 대부분 53~54시간을 일한다는 점에서 총 노동시간의 변화는 크지 않다. 한주에 1~2시간 더 쉬는 것,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 앞에 다가올 변화이다.

컴퓨터, 인공지능, 소프트웨어, 기계는 우리에게 높은 생산성 향상을 가져다주었다. 현재 추진중인 제조업 혁명, 4차산업혁명이 이론대로 정착된다면 우리는 또 한번의 높은 생산성 향상을 마주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높은 생산성 향상은 우리에게 달갑지 않은 선물을 주었다. 바로 높은 실업률이다. 업무에 필요한 사람 수는 점점 줄어들었고, 계속해서 줄어들 것이다. 생산성 증가에서 나오는 이윤의 대부분이 적은 수의 사람들에게 돌아간다. 높은 실업률은 노동자들의 교섭력을 약화시킨다. 전문직, 대기업 사원 등 높은 구매력을 가지는 사람들은 계속해서 줄어들 것이다. 실직에 대한 두려움으로 여가를 즐기지 못할 것이며, 다수의 소비자는 생산성 혁명에서 발생한 재화와 서비스를 구매할 능력이 줄어드므로 소비경제는 점점 멈출 것이다.

이것은 경제문제이면서 동시에 사회정의의 문제이다. 우리는 다시 귀족정으로 돌아갈 것인가? 능력주의를 찬미하며 위대한 인간들에게 종속되어 세계의 부를 모두 몰아주는 사회를 만들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생산성 혁명의 이윤을 분배해야 한다. 이를 위해 기본소득제, 증세 등의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중 하나가 바로 노동시간 단축이다. 현재의 임금을 유지하면서 적게 일하는 것,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일할 수 있게 함으로서 사회 전체의 부를 조정하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임금교섭력을 강화시키고 더 많은 소비자들에게 구매력을 돌려주는 것이다. 이러한 방향은 주주들, 특히 대주주들의 단기적 이익에 반하는 것이지만, 어쩌면 장기적 관점에서 봤을 땐 부합하는 것일수도 있다.

노동시간 단축은 생산성 향상에 대응해왔던 역사성을 지닌 운동이다. 1차 산업혁명의 대량생산은 결국 경제공황으로 이어졌다. 대공황을 견뎌낸 것은 성장의 이윤을 분배하기 위한 전국노동관계법, 사회보장, 보험 등의 사회적 안전망 구축이었다. 주5일 40시간 노동의 공유, 최저임금 등을 통해 노동을 공유하고 이윤을 분배했다. 이후에도 우리는 계속해서 생산성을 향상시켜 왔으며 금융위기 등 다양한 형태로 폭발하고 있다. 전 세계적 실업난은 이러한 변화에 아직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저자 피에르 라루튀르와 도미니크 메다는 실질적으로 주 39시간을 일하는 프랑스에서 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시간 단축을 이야기한다. 주4일 32시간 노동이다. 과거 프랑스의 노동시간 단축 시도는 효과가 있었다. 노동시간 단축은 일자리를 창출했으며, 프랑스의 경쟁력을 가로막지 않았고, 사회보장 분담금 경감 비용과 세무 분담금 추가징수, 실업 보상 수당 등 경제적 부담도 적었다.

현재 대한민국 실업자는 실질적으로 5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도 다수는 미래가 없다. 구성원의 다수가 가난하고 비참한 사회는 결코 번영하고 행복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가 만들어낸 사회이다. 여러 경제지에서 대혼란이 올 것이라며 호들갑을 떠는 것과 달리 주52시간 근무제는 변화의 일각에 불과하며 효력도 적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경제적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 더 근본적이고 격정적인 변화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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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소고기 맛에 빠지다 - 소와 소고기로 본 조선의 역사와 문화
김동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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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국 사람들은 역사상 가장 풍족한 시대를 살고 있으며, 그에 걸맞게 많은 양의 고기를 먹고 있다. 한국의 연간 1인당 육류 소비량은 OECD평균엔 못 미치지만 51.3㎏로 결코 적지 않은 양을 먹는다. 한국 사람들은 돼지고기(24.4㎏)를 가장 많이 먹고, 그 다음은 닭고기(15.4㎏), 소고기(11.6㎏) 순이었다. 육류 선호도를 고려할 때 가격이란 요소를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돼지는 맛있는 고기이고 치킨 또한 국민음식이라 부를만 하지만, 만약 같은 가격이었다면 소고기 선호도는 더 오를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 사람들의 소고기 사랑은 하루이틀 전의 이야기가 아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소고기 사랑은 집착에 가까웠다. 기쁜 일이 있을 때도, 슬픈 일이 있을 때도, 언제나 조선인들의 곁에는 소고기가 있었다. 역사학자 김동진은 조선시대 1인당 소고기 섭취량이 20세기 말 한국인들보다 많았다고 주장한다. 현대사회의 발달된 축산업 기술 덕에 넘치도록 많은 소고기보다도 더 많은 양의 고기를 조선시대 사람들이 즐겼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조선 정부에게 소 육성은 중요한 국가적 과제였다. 김동진은 조선 초부터 중점적으로 소 보유량을 늘린 결과 세조8년에 조선에서 사육하는 소는 30만~45만 마리였으며, 16세기 중엽에 조선은 60만 마리의 소를 사육하는 것으로 추정한다.

농업사회에서 소는 식량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조선 초에 소를 키우는 마을은 부자 마을이었고, 소를 키우는 집은 부잣집이었다. 부농의 대두는 사회 전반의 발전에 중요한 요소이며, 부농은 소와 같은 가축의 힘이 있어야 가능했다. 개인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소는 주요 자산이기에 조선 정부는 소고기 섭취의 무분별한 남용을 금지해야 할 때도 있었다. 정부의 소고기 금령에 율곡이이 같은 학자는 명을 충실히 지켜 평생 소고기를 먹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그런 금지령은 다양한 반발에 부딪히게 되며 사람들은 어떻게든 금지령을 피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비공식적인 도살장들이 열렸고, 소고기를 먹다가 귀양을 가는 일이 생겨도 조선사람들은 소고기를 즐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동국세시기》(1849)에 따르면, "서울 풍속에 음력 10월 초하룻날, 화로 안에 숯을 시뻘겋게 피워 석쇠를 올려놓고 소고기를 기름장, 달걀, 파, 마늘, 산초가루로 양념한 후 구우면서 둘러앉아 먹는 것을 '난로회'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조선의 탐식가들》p.73


소고기를 즐기는 사람들의 행동은 사회, 경제, 문화 전 분야에 있어서 변화를 가져왔다. 소고기 음식이라는 조선시대 식문화에 대한 이해 뿐만 아니라 도시의 생성, 정치 시스템, 종교 시스템 등을 이해함에 있어서 소고기는 빠질 수 없는 요소인 것이다. 조선시대에 소를 어느정도 키웠으며, 어느정도 먹었느냐는 그래서 대단히 중요하다. 역사학자 김동진은 조선시대 사람들이 못 먹고 굶주렸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에 반해 오히려 현대인 못지 않게 소고기를 즐기는 조선인들의 삶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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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가 줄어들면 경제가 망할까 - 맬서스부터 케인스, 슘페터까지 다시 배우는 인구의 경제학
요시카와 히로시 지음, 최용우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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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부인과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2017년 출산율은 1.15명에 불과했다. 지금과 같은 추세라면 2300년엔 대한민국이 사라질 것이라고 언론은 경고한다. 정부는 2006년부터 2016년까지 저출산정책에 100조 원을 투입했다. 저출산의 공포는 사람이 없으면 결국 경제성장이 멈추고 경제가 망할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비롯된다. 이런 생각이 확고한 사실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에는 어느정도 역사적 사실을 기반으로 한다. 과거 사회는 인구가 곧 노동력이며 국력이었다. 고대 로마, 송나라, 그 외 수많은 역사들은 인구팽창과 경제성장은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여기게 했다. 바로 최근까지도 한강의 기적과 베이비붐 세대의 등장은 궤를 같이했다.

경제학자 요시카와 히로시는 저출산에 대한 이런 흐름이 너무 지나치다고 말한다. 급격한 인구 감소는 분명 사회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임은 틀림없지만, 국가가 생존을 걸고 해결해야 할 문제까지는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 예로 일본의 1870년대부터 2000년까지 경제 성장과 인구의 동태는 연관성이 없었다. 인구가 큰 변화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는 급격하게 성장한 것이다. 인구가 변화한 것은 그 뒤의 일이었다. 경제성장이 인구 증가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 요인이었을까? 요시카와 히로시는 인구와 경제에 대한 맬서스, 케인스, 뮈르달, 슘페터 등의 논의를 들며 성장은 이노베이션에 의해 발생한다고 말한다.

인구 감소가 큰 문제인 건 맞지만 경제의 성장에서 인구감소 비관주의가 너무 지나친 것도 문제다. 인구가 줄고 있는 경제에 미래는 없다는 의견이 팽배한데, 이는 착각이다. 선진국의 경제 성장은 기본적으로 노동력 인구가 아닌 이노베이션에 의해 창출되기 때문이다. - p.62

 

최근 청소기 시장은 무선청소기라는 새로운 흐름이 수요를 주도하고 있다. 다이슨을 비롯해 LG, 삼성 등 가전제품 메이커들은 전부 자사의 핵심 상품으로 무선청소기를 내놓고 있다. 사람들은 이미 청소기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 상품이 가져다주는 편리성으로 인해 지갑을 연다. 수요 포화에 다다른 선진국에선 제품 혁신이 성장을 이끄는 것이다. 경제성장은 노동생산성 상승으로 비롯되며, 노동 생산성 상승의 요인은 새로운 설비 투자 같은 자본 축적과 넓은 의미에서 기술 진보, 이노베이션이 필요하다. 물론 이노베이션의 요소가 사람을 전혀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스티븐 랜즈버그가 지적했듯이, 번영의 엔진이 기술 진보라면, 기술 진보의 엔진은 사람이다. 아이디어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사람이 많으면 아이디어도 많아진다. 저출산 문제를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 요시카와 히로시의 논의는 어디까지나 핵심은 이노베이션이며, 저출산의 공포에 휩싸여 불합리한 정책이나 비관주의를 가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인구가 감소하더라도 기술 진보를 이끌만한 높은 노동 생산성을 유지할 수 있다면 경제적으론 문제가 없는 것이다.

생산능력에 대한 사회적 나이 인식, 노동시간, 비정규직과 같은 노동조건의 열악화 문제, 사회보장제도의 재정적자 등 다양한 문제들이 산적해있다. 요시카와 히로시는 이런 인구경제 문제에 초고령화 사회를 먼저 경험하는것은 때론 유리한 면이 있다고 말한다. 미래의 아이들은 필요하다. 다만 출산율을 1.15명에서 2명으로 끌어올린다 하더라도 그것이 경제성장을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다. 목표가 경제성장이라면 주어진 자원 하에서 출산율과 노동생산성의 효과적 조율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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