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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식물원에서 데지마박물관까지 - 과학사가 이종찬의 유럽·일본 자연사박물관, 식물원 탐방기
이종찬 지음 / 해나무 / 2009년 11월
평점 :
절판
몇년 전 산림청에서 닷새 간 연수를 받을 때였다. "런던에 갔다오신 분 손들어 보세요." 여기저기에서 쭈삣쭈삣 손을 들어올린다. "그러면 런던에서 큐 식물원 가보신 분 손들어 보세요." 물론 아무도 없었다. 나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다. 런던이라면 두 번 갔다왔고 약 한 달에 걸쳐 영국 일주도 해봤으니 좀 안다고 생각했었다. 알긴 뭘....
닷새 간의 산림청 연수를 통해 접해본 강의는 그간 내가 들어본 대학 강의나 온갖 직무연수(주로 교사의 전공 교과와 관련된 교과 연수) 중에서 제일 즐겁고 유익한 강의였다. 문과로 살아왔던 나에게 나무와 식물 분야인 이과 강의는 경이롭기까지했다. 숨 죽인 채 푹 빠져 들었던 이 연수는 그러나 그것 뿐이었다. 되지도 않는 영어 단어 대신 나무나 풀 이름을 외웠더라면 내 인생의 방향이 달라졌을텐데, 하는 가지 못한 길에 대한 원망만 남았을 뿐이었다.
이 책 <파리식물원에서 데지마박물관까지>를 읽는 동안 나는 몇년 전의 산림청 연수 때처럼 숨을 죽여가며, 때론 깊은 한숨을 쉬어가며, 때론 환희에 넘치는 즐거운 순간 순간을 보냈다. 별 깊이도 없는 문과 출신인 내게 이 책에 소개된 뭇 과학자들은 생소함 그 자체였지만 그래서 더 흥미로웠다고할까.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는 경이롭기까지했다. 익숙한 세계에 대한 낯선 해석도 도발적인 깨달음을 주었다. 익히 알고 있는 화가의 그림도 이과형 지식인이 보는 각도로 보면 새롭게 다가왔다.
한마디로 이 책은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열정이 그대로 느껴지는 책이었다. 일단 완독을 끝냈지만 머잖아 한 번 더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와 닿았던 부분을 인용해둔다.
p.255 옆에 있는 나라라고 해서 일본을 아시아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도쿄, 교토, 오사카, 요코하마, 삿포로 등을 다녀왔다고 일본을 아는 체하면 큰코 다친다. 일본은 지리적으로는 아시아이지만 문화적으로는 유럽이다. 세계에서 일본을 선진국으로 인정하지 않는 유일한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그러나 일본은 한국이 한참이나 배워야 할 나라이다.
p.216 "역마살이 끼었다." 한국 문화에서는 부정적인 뉘앙스이다. 하지만, 한국에도 이미 여러 번 다녀갔던 자크 아탈리가 말한 대로, 지구화시대에서 역마살은 누구나 갖추어야할 덕목이다.
요즘 읽은 기행 형식의 책들. , 토니 휠러의<나쁜 나라들>. 그리고 이 책. 하나같이 내 얄팍한 여행 의지를 마구마구 꺾어버리고 있다. 자타공인 여행 중독증 치료에 이 책들 만한 것이 없을 듯싶다. 아. 괜히 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