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일야화 9
전진석 지음, 한승희 그림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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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이야기 구조로 인해 원래의 천일야화는 뒷전이고 액자 형식으로 나오는 이야기들에 흥미가 당기더니 이제는 원래 이야기와 액자 이야기 둘 다 재밌어져 버렸다. 정말 판타지스러운 이야기이다.

샤 리야르나 샤 자만이나 서로 지나친 사랑의 환상 속에 매몰되어버린 사랑의 희생자들이다. 아름다운 여인 파티마를 먼저 만나고 서로 사랑했으나, 형에게 빼앗겨 버린 샤 자만의 복수는 너무 안타깝다. 그런 속사정을 모른 채 하나의 사건만으로 모든 것을 단정지어버린 샤 리야르의 상처가 애처롭다. 결국 셋이서 각기 다른 몸짓으로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을 뿐. 이러니 저러니 해도 하나의 큰 이야기는 끝이 났다. 이제 남은 건 예루살렘 탈환과 또 다른 로맨스(^^)겠지.

그래서 이번 액자 이야기는 삼국지를 무대로 한 조조의 가슴앓이(?) 인걸까. 작가가 괜히 이 이야기를 넣은 건 아닐테고. 과연 남자들만의 이야기이던 삼국지를 살짝 비틀어보니, 이렇게 착 달라붙는 이야기가 되는구나 싶었다. 카리스마 넘치는 조조가 관우의 환심을 사기 위해 삽질하는 걸 보니 어딘지 더 인간적인 것 같기도 하고... 긴 검은 생머리를 찰랑찰랑 휘날리는 관우는 어딘지 곱상한 게 중성적인 매력을 풍긴다. 하지만 가장 압권이었던 건 초선. 작가는 그녀를 가히 파격적으로 멋지게 그려놓았다. 커트머리라니... 하하

내가 본 가장 관능적이면서 유혹적인 초선의 모습이었다. 완전 반했다~

아직 이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삼국지에서 보면 관우는 결국 유비에게 돌아가지만, 작가는 과연 이 이야기를 어떻게 에로틱하게 끌어갈지 사뭇 궁금해진다. 참, 여기서 유비는 샤 리야르를 반영한 걸테고, 관우는 세하라.. 조조는 십자군을 이끌던 국왕 정도?

다음 편에 나올 유비가 어떻게 그려질지, 샤 리야르의 운명은 어떻게 될 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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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순의 천일야화 1~6권 박스 세트
양영순 지음 / 김영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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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너무 보고 싶었다. 양영순이 새로운 이야기로 그렸다는 천일야화가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이 책을 사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우연히 정말 우연히 반값에 샀다. 사자마자 앉아 다 봤다. 처음엔 지나친 기대 때문이었는지 실망스러웠다. 뭐, 생각보다 평범하네..정도?

하지만 읽다보니 나도 모르게 푹 빠져 버렸다. 비극 아닌 비극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작가가 놀라웠다. 마지막 반전은 어느 정도 예상된 바였지만, 괜히 가슴이 아팠다. 물론 이 만화가 내 생애 최고라던가, 내 인생에 획을 그은 만화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사실 여러 종류의 만화책을 놓고 단 하나만 고르라고 한다면 나는 단연코 김혜린 님의 '북해의 별'을 고를테지만, 질문을 달리 하여 천일야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이 책을 꼽고 싶다. 물론 형식만 빌려왔다지만, 오히려 더 가슴에 남는 이야기들이니까.

이 만화의 가장 큰 미덕은 질질 끄는 이야기나 괜한 눈물바람이 나게 하는 이야기가 없다는 거다. 그저 한 이야기가 끝나면 가슴 한 켠에 여운이 남아 잠시 생각하게 하는 정도...

세혜라자데는 천일 하고도 하루 동안 이야기를 하면서 정말로 샤 리야르를 사랑했을까. 그래서 그의 사랑을 얻고 행복해졌을까. 그녀의 이야기로 인해 자신의 과오를 바로잡은 샤 리야르는 그녀를 사랑하고 존중했을테지.. 하지만 과연 정말로 그녀도 샤 리야르를 사랑했을까. 자신을 죽이기 위해 눈을 부라리며 지켜보던 그를, 목숨을 걸고 이야기를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말이다. 뭐, 천일야화에서 그녀의 사랑은 아무 의미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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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메트리오스 2007-04-29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인터넷으로 봤는데 처음엔 몰랐다가 점점 '어, 내가 알던 그게 아니네??' 라는 생각을 했었지요^^

꼬마요정 2007-05-01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넷에서 연재를 했었군요~^^
저도 다르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렇게 완전 다를 줄 몰랐어요~ 마지막도 제법 여운이 남더라구요~^^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전영애.박광자 옮김 / 청미래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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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희생양.이 말만큼 그녀의 상황을 잘 설명하는 말이 달리 있을까.

너무나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한 소녀가 그녀가 가진 지위에 대한 책임감이 없었다는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프랑스인이 아닌 오스트리아인이라는 이유로 혁명의 희생양으로 사라졌다. 역사의 비극적 드라마로 남은 이 사건에서 진실이나 운명은 확실히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혁명가들이, 혹은 역사가들이, 왕권옹호자들이 얼마나 그녀를 왜곡시켜 놓았는지, 좀 화가 날 지경이다. 도대체 그녀의 잘못은 무엇인가.

영리하지만 공부와는 담을 쌓은 놀기 좋아하는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과는 정반대의 인물과 결혼한다. 소심하고 사교성과 결단력이 부족한 루이 16세는 그저 공무원이 딱인데, 어쩌다 왕이 되었는지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만들기 위해서이지 않나 싶을 정도다. 더구나 결혼하고 8년간 '고자'이지 않았나. 덕분에 욕구불만에 시달린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갈망을 사치와 향락으로 달랠 수 밖에 없었으니, 운명이란 고약하기 그지없다. 그 8년이란 세월이 그녀의 이미지를 만들어 버렸다. 사치스럽고, 놀기 좋아하는 경박한 왕비로 말이다. 사실 생각해 보면 루이 14세보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더 사치스러웠을 것 같진 않다. 그 유명한 목걸이 사건만 해도 그녀가 돈을 쓴 건 아니니까. 물론 트리아농성에 들어간 돈이 무시무시하긴 하지만, 프랑스 왕실 뿐 아니라 귀족들 대부분의 재산을 거덜낸 루이 14세에 비할까. 그러나 그는 프랑스의 왕이자 남자였기에 그 사치가 눈감아졌다. 왕권을 강화한 위대한 왕으로 태양왕으로 불리지 않나. 베르사유 짓는데 든 돈이 얼마였는데...

8년 후 수술을 받은 루이 16세와의 합방으로 아이를 낳자 마리 앙투아네트는 놀랍도록 정숙하고 안정된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그렇게 되자 안달이 난 건 다음 왕위를 노리던 왕위 계승자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루이 16세의 삼촌인 오를레앙 공은 교묘히 마리 앙투아네트의 이미지를 더럽히기 시작한다. 물론 사치를 좋아한 그녀의 탓도 있지만, 그녀가 즐긴 사치에 비해 엄청나게 부풀려진 거짓된 이미지로 군중들에게 인식되어 목걸이 사건과 같은 엄청난 사기극이 연출되고, 빵을 달라는 군중들의 요청에 고기를 먹으라고 했다는 둥 이상한 루머가 돌게 된다. 혁명이 발발했을 때 왕가의 부패나 심각하게 어려운 경제는 모두 마리 앙투아네트 때문이 되어 버렸고, 곳곳에 그녀에 대한 추악한 염문이 뿌려졌다.

정말 제대로 치사한 수법이었다. 포르노그라피로 그녀를 매도한 것은. 프랑스가 생긴 이래 모든 왕들이 정부를 거느렸고, 죽기 직전 그렇게도 좋아하던 그녀들을 버렸다. 루이 15세만 하더라도 대놓고 며느리더러 자신이 아끼는 정부인 뒤바리 부인과 인사하라고 압력을 행사하지 않았나. 그런데 조심하고 또 조심하여 사랑을 키웠던 페르센과의 로맨스나 있지도 않은 그녀의 애인들에 관한 이야기로 그녀를 더럽히다니. 심지어 아들을 성추행 했다는 주장으로 그녀를 모욕했는데 그런 말이 나올 정도로 그녀는 창녀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루이 16세는 왕으로서 단두대에 올랐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더러운 오스트리아 계집으로 단두대에 올랐다.

그녀는 만나는 사람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어머니인 마리아 테레지아처럼 정치적 감각이 뛰어났다면, 지금의 프랑스는, 유럽은 많이 달라져 있겠지. 혹은 루이 16세가 결단력이 있었다거나. 그녀의 불행은 그녀 자신에게도 있었지만, 그녀의 남편과 프랑스 사회에도 있었다. 결단력이 없어 아무것도 결정짓지 못하여 혁명을 막지도, 자신의 목숨을 구하지도 못한 루이 16세의 우유부단함과 여성의 정치 참여를 철저히 거부한 프랑스 사회에 말이다. 기회는 여러 번 주어졌으나 애꿏게도 역사는 그녀를 혁명의 도화선으로 선택했다. 그것이 그녀의 운명이자 역할이었다면 차라리 좀 더 명예롭게 사그라질 수 있도록 해 주었다면 좋았을텐데. 그녀가 자신의 위치에 대한 책임감을 지나치게 늦게 깨달았기에 그녀는 그저 혁명의 희생양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역사적으로 이런 시대에는 영웅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나폴레옹의 자리를 그녀가 대신 차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건만, 역사는 그녀 대신 나폴레옹을 선택했다. 그저 베르사유의 장미로 칭해지는 그녀가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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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원 2007-09-16 1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퍼갑니다..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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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주류들은 역사가 진보한다고 믿는다. 그들이 생각하는 진보가 과학의 발달이라고 한다면 그건 맞는 말일거다. 하지만 문명의 진화, 발전이라고 한다면, 그건 틀린 말이지 않을까. 모두가 각자의 삶만을 살고, 각기 다른 이야기만을 하는, 몇 평짜리 아파트에 사느냐가 그 사람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는 시대가 결코 진보한 사회는 아닐테니 말이다. 인류는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기아에 허덕이며 살아왔다. 지금은 과학의 발달로 지구의 반은 먹을거리들로 넘쳐나지만, 여전히 지구의 반은 굶주리고 있다. 그리고 그 풍요의 대가는 지구 환경의 파괴라는 엄청난 재앙으로 모두를 덮치고 있다.

지금 우리 모두가 월든처럼 자연으로 돌아가 살 수는 없다. 그렇다고 자연과 소통하기를 거부하고 나아가 사람들끼리도 소통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각각 외로운 개체로 계속 살아갈 수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삶을 혐오하고, 끔찍해하고, 괴로워하고,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이 책이 사람들에게 감동으로 다가섰나 보다.

사람이 사회 속에 살면서 바라는 것은 자신만의 부와 명예, 편리가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이 여기 존재한다는 걸 모두가 알고 관심을 가져주는 거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으며, 관심어린 시선 없이 살 수 없다. 모리는 그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방법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에게 그 순간만큼은 모든 관심을 쏟았다. 혼자 식사를 즐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모리는 사람들과 먹는 걸 즐긴다. 모리는 물질보다는 마음을 더 중시했으며, 자연을 더 사랑했다. 남들이 더 좋은 차, 더 좋은 집, 더 좋은 직장을 찾아 정신없이 일을 하며 자신의 인생을 소진할 때, 모리는 하나라도 더 생각하고, 한 명이라도 더 가르치고, 조금이라도 더 춤추길 원했다. 그는 자신만의 기준으로 자신을 사랑했고, 남들을 사랑했다.

여기 등장하는 미치는 전형적인 중산층 미국인이다. 예술? 돈이 안 되는 직업은 버리고 한 푼이라도 더 벌고자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출장을 가고 밤새 야근하고...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은 조금도 내지 못한 채 집에 돌아오면 파김치가 되어 곯아떨어지는 평범한 -어째서 이게 평범하게 된 걸까- 미국시민 말이다. 미치는 자신이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려고 애쓰지만, 그의 은사인 모리의 투병 소식은 그의 전부를 흔들어 놓았다.

모리가 교수였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사는 게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긴 그가 가르치는 직업을 선택한 게 남을 착취하기 싫었기 때문이니 모리 자체가 그런 삶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우리 모두 모리처럼 살 수 있지만, 용기가 없는 건지도 모른다.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남에게 마음을 열지도 못하고 그저 남들처럼 사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얼마 전 뜨거운 관심이라는 책을 읽었다. 상대방에게 감동을 주는 하나의 방법. 관심. 모리는 자신을 덮쳐오는 죽음에게조차 뜨거운 관심을 쏟았다. 그리고 죽음과 대화를 나누고, 죽음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갔다. 물론 그가 죽음을 극복하거나 초월한 건 아니지만, 그는 평온한 마음으로 세상을 떠났다. 자기 자신이 뭘 원하는 지 알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했으며, 그 사랑을 모두에게 나눠준 훌륭한 은사의 모습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금기 중 하나가 바로 죽음이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과거에는 죽음이 오늘날처럼 금기시 되지 않았다. 그 때는 죽음이 '모두의 죽음'이었고, 지금은 '나의 죽음'이다. 모리는 그 금기를 깼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 모두가 삶을 돌아볼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니까.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는 모습, 자기 연민에 빠진 모습, 슬퍼하는 모습, 안타까워하는 모습... 모든 부정적인 모습을 그대로 표현해도 된다고, 그리고 다시 자신의 삶을 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멋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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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망스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슬픈 사랑 이야기
이명옥 지음 / 시공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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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과 교회에 종속되어 천국으로 가기 위한 삶을 살던 중세인들에게 이런 사랑이 허락되다니.. 정말 놀라울 뿐이다. 금기에 대한 반동은 극단으로 치닫는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나 보다. 드러내놓고 불륜을 칭송하고, 그 사랑을 영웅시하는 분위기... 물론 그건 모두 상류계층에게나 해당하는 말이겠지만.

작가는 정말 감탄스러울 정도로 이야기를 잘 구성했다. 처음 우리는 맞이하는 이들은 파울로와 프란체스카. 시오노 나나미나 단테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알고 있겠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몰랐으리라 생각한다. 그들은 단테와 같은 시대 사람들이며, 정략결혼의 희생자이자 세속적이고 정열적인 사랑을 나누다 비참하게 죽은 로맨티스트들이다. 우리에게 그들의 애절한 사랑을 알려준 건 단테 알리기에리. 이야기는 신곡에서 시작한다. 지옥에서 같이 붙어있는 영혼들을 본 단테는 그들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를 듣고 감동에 겨워 실신하고 만다. 형수와 시동생이었으나 서로를 이해하고 그리워하던 그들은 결국 파울로의 형이자 프란체스카의 남편인 지안치오토에 의해 처형된다. 파울로와 프란체스카의 사랑에 불을 붙인 건 갈레오토의 책 중 귀네비어와 란슬롯의 키스 장면이었다. 그리하여 다음 이야기는 서로에 대한 사랑을 신에 대한 사랑으로 대체하고자 했으나 결국 실패한 아름다운 귀네비어와 용맹한 란슬롯의 사랑이 이어진다.

기사도 정신, 귀부인 숭배, 성배 전설 등이 융합된 흥미진진한 이야기, 아더 왕과 원탁의 기사에 나오는 그들은 멋진 연인이다. 아더 왕은 빛이 나는 사람이다. 그러함에도 귀네비어가 란슬롯을 선택한 이유는 귀네비어가 모계 사회를 이끌던 여신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아더 왕 전설은 종교와 가부장제의 확립을 나타내는 이야기인 것이다. 모계 사회의 수장 귀네비어가 선택한 다음 왕은 란슬롯이지만, 그들의 사랑은 부계상속으로 바뀌어버린 사회 속에서 불륜으로 치부되었다. 물론 이 책에서는 이러저러한 것들을 다 빼고 둘의 사랑만을 부각시켜 놓았지만, 사실 그들의 사랑을 사랑만으로 보기엔 함축된 의미가 지닌 농도는 너무 짙다. 그래도 서로를 그리다 그리다 신에게 참회하고자 각각 수녀와 수도사가 되었으나 그리움에 몸부림치다 결국 죽어버린 사랑에 가슴이 아프다.

다음 이야기는 여전히 아더 왕 이야기와 관련이 있다. 아더 왕의 원탁의 기사 중 한 명이었던, 란슬롯과 비교하여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용사이자 음유시인이었던 트리스탄. 로미오와 줄리엣의 원형이라 불리는 이 이야기는 내가 정말 좋아하는 이야기였다. 아더 왕에게 관심을 가진 것도 트리스탄과 이졸데 때문이었으니. 사랑의 묘약 때문에 삼촌의 아내가 될 여자를 사랑하게 된 트리스탄과 원수이자 시조카인 트리스탄을 사랑하게 된 이졸데. 그들의 운명은 실로 아이러니였다. 둘이 사랑하게 되면 절대 안 되는 거였으니까. 자신이 자랑스러워하던 사촌오빠를 죽이고 자신의 나라를 모욕한 트리스탄을, 사촌동생으로서 한 나라의 공주로서 용서해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팔려가다시피 마크 왕과 결혼해야 하는 데, 그 치욕적인 결혼을 성사시키러 온 사람이 트리스탄인데... 어떻게 둘이 서로를 사랑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사랑의 묘약이 등장했나 보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래서 사랑은 위대한가 보다. 깊은 증오를 환희로 바꾸어 놓았으니. 그러나 둘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 불멸의 사랑을 한 그들은 결국 죽음으로써 같이 있게 되었다.

자, 이제 마지막이다. 마지막은 단테와 베아트리체.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이야기이지 않은가. 평생을 베아트리체 단 한 명만을 사랑하였고, 그 사랑으로 그녀를 신의 위치에까지 올려놓은 단테의 순애보. 평생에 걸쳐 두 번 만난 여인을 그렇게까지 사랑할 수 있었다는게 놀라울 따름이다. 짝사랑도 이런 짝사랑이 없다. 첫사랑도 이런 첫사랑이 없다. 사랑... 그것이 무엇이기에 한 사람의 생애를 뒤흔들어 놓았을까. 이야기는 신곡에서 시작하여 신곡으로 끝이 난다.

중세시대 교회에서는 사랑을 위험한 감정으로 보고 금기시했다. 개인적인 감정인 사랑을 허용했다간 공동체적 사랑을 강조하고 내세를 준비하도록 이끄는, 획일적인 가치 체계를 장악하고 있던 교회세력이 흔들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현대에서는 사랑의 가치가 상당히 높다. 개인의 삶을 살고자 한 노력이자, 사랑을 신의 뜻이 아닌 개인의 마음을 스스로 선택한 자주적인 그들의 노력 덕분이다. 

이 책에 나오는 갖가지 그림들을 감상하는 일 또한 즐거움이었다. 사랑 이야기도 네 가지만 있는 게 아니다. 화가들과 관련된 사랑 이야기도 나오고, 그 시대의 문화도 간접 체험할 수 있어 기뻤다. 볼 거리, 읽을 거리가 다양한 책이라고나 할까.

아직도 치열하게 살다 간 이들의 사랑이 내 감수성을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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