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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미치 앨봄 지음, 공경희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 사회의 주류들은 역사가 진보한다고 믿는다. 그들이 생각하는 진보가 과학의 발달이라고 한다면 그건 맞는 말일거다. 하지만 문명의 진화, 발전이라고 한다면, 그건 틀린 말이지 않을까. 모두가 각자의 삶만을 살고, 각기 다른 이야기만을 하는, 몇 평짜리 아파트에 사느냐가 그 사람을 평가하는 척도가 되는 시대가 결코 진보한 사회는 아닐테니 말이다. 인류는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기아에 허덕이며 살아왔다. 지금은 과학의 발달로 지구의 반은 먹을거리들로 넘쳐나지만, 여전히 지구의 반은 굶주리고 있다. 그리고 그 풍요의 대가는 지구 환경의 파괴라는 엄청난 재앙으로 모두를 덮치고 있다.
지금 우리 모두가 월든처럼 자연으로 돌아가 살 수는 없다. 그렇다고 자연과 소통하기를 거부하고 나아가 사람들끼리도 소통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각각 외로운 개체로 계속 살아갈 수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삶을 혐오하고, 끔찍해하고, 괴로워하고,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이 책이 사람들에게 감동으로 다가섰나 보다.
사람이 사회 속에 살면서 바라는 것은 자신만의 부와 명예, 편리가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이 여기 존재한다는 걸 모두가 알고 관심을 가져주는 거다. 인간은 혼자 살 수 없으며, 관심어린 시선 없이 살 수 없다. 모리는 그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방법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사람에게 그 순간만큼은 모든 관심을 쏟았다. 혼자 식사를 즐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모리는 사람들과 먹는 걸 즐긴다. 모리는 물질보다는 마음을 더 중시했으며, 자연을 더 사랑했다. 남들이 더 좋은 차, 더 좋은 집, 더 좋은 직장을 찾아 정신없이 일을 하며 자신의 인생을 소진할 때, 모리는 하나라도 더 생각하고, 한 명이라도 더 가르치고, 조금이라도 더 춤추길 원했다. 그는 자신만의 기준으로 자신을 사랑했고, 남들을 사랑했다.
여기 등장하는 미치는 전형적인 중산층 미국인이다. 예술? 돈이 안 되는 직업은 버리고 한 푼이라도 더 벌고자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출장을 가고 밤새 야근하고... 가족과 함께 할 시간은 조금도 내지 못한 채 집에 돌아오면 파김치가 되어 곯아떨어지는 평범한 -어째서 이게 평범하게 된 걸까- 미국시민 말이다. 미치는 자신이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하려고 애쓰지만, 그의 은사인 모리의 투병 소식은 그의 전부를 흔들어 놓았다.
모리가 교수였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사는 게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긴 그가 가르치는 직업을 선택한 게 남을 착취하기 싫었기 때문이니 모리 자체가 그런 삶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우리 모두 모리처럼 살 수 있지만, 용기가 없는 건지도 모른다.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남에게 마음을 열지도 못하고 그저 남들처럼 사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며 말이다.
얼마 전 뜨거운 관심이라는 책을 읽었다. 상대방에게 감동을 주는 하나의 방법. 관심. 모리는 자신을 덮쳐오는 죽음에게조차 뜨거운 관심을 쏟았다. 그리고 죽음과 대화를 나누고, 죽음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갔다. 물론 그가 죽음을 극복하거나 초월한 건 아니지만, 그는 평온한 마음으로 세상을 떠났다. 자기 자신이 뭘 원하는 지 알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했으며, 그 사랑을 모두에게 나눠준 훌륭한 은사의 모습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금기 중 하나가 바로 죽음이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과거에는 죽음이 오늘날처럼 금기시 되지 않았다. 그 때는 죽음이 '모두의 죽음'이었고, 지금은 '나의 죽음'이다. 모리는 그 금기를 깼다. 자신의 죽음을 통해 모두가 삶을 돌아볼 계기를 만들어 주었으니까.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는 모습, 자기 연민에 빠진 모습, 슬퍼하는 모습, 안타까워하는 모습... 모든 부정적인 모습을 그대로 표현해도 된다고, 그리고 다시 자신의 삶을 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멋진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