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막한 사르가소 바다 펭귄클래식 38
진 리스 지음, 윤정길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여기 두 여인이 있다. 앙투아네트와 제인. 그리고 한 남자가 있다. 로체스터.

 

나는 제인의 로체스터를 기억한다. 그는 중년의 멋스러움이 있는 남자, 중후한 목소리를 가진, 이상한 부인을 가진 불행한 남자... 이 남자의 매력을 한층 더해주는 조건이 바로 불행한 결혼 생활과 그 '미친' 부인 때문에 입은 상처였다. 나는 남자라고는 모르던 순진무구한 제인을 총각인 양 가식적인 모습으로 유혹한 로체스터를 기억한다. 로체스터야말로 로맨스 소설 최초의 '나쁜 남자'일 것이다.

 

초록과 물기 가득한 자메이카에서 태어난 앙투아네트는 크리올이다. 아름다운 그녀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은 노을 지는 붉은 하늘만큼 붉게 타오르는 자신이 살던 집이다. 날개 잘린 앵무새 코코가 타오르고, 또 하나의 자신이라고 여겼던 티아가 자신에게 돌을 던졌던, 쿨리브리의 저택이 노랗고 빨갛게 타오르던 그 날의 끔찍한 기억은 절대 잊을 수 없었다.

 

앙투아네트의 유모이자, 그녀가 믿는 사람인 크리스토핀은 앙투아네트 안에 '태양'이 있다고 했다. 아름답고 자유분방하며 정열적이고 쾌활했던 그녀는 자메이카의 자연과 닮아 있었다. 그녀는 주체적이었고,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랬기에 로체스터는 무서웠을 것이다. 자신보다 더 자신만만하고, 더 자유분방하며, 더 부유한 그녀가 말이다.

 

원래 크리올은 식민지에서 태어난 순수한 영국 혈통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하지만 식민지 농장주들이 '노예 생산자'란 악명을 떨칠 만큼 흑인 여성들을 겁탈하는 일이 많았고, 얼굴은 하얗지만 흑인의 피가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가득했기에, 당시 영국 백인 남성들은 크리올 여성과의 결혼을 꺼렸다. 그래서 장남이 아닌 둘째로 태어난 로체스터는 재산을 상속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지참금을 많이 들고 올 수 있는 여자와 결혼해야 했다. 그래서 크리올이자, 삼만 파운드라는 지참금을 가진 앙투아네트와 결혼한 것이다.

 

잘 생긴 얼굴을 가진 로체스터는 제인에게처럼 앙투아네트에게도 자신의 매력을 발산했다. 앙투아네트는 로체스터를 사랑했다. 하지만 로체스터는 앙투아네트를 사랑하지도, 믿지도 않았다. 오로지 다른 사람의 말들만 듣고 믿었다. 그리고 아멜리와 밤을 보냈다. 대니얼의 말을 믿었다. 앙투아네트가 정결하지 못하고, 흑인들과도 사랑을 나누었으며, 어쩌면 그녀에게도 흑인의 피가 섞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의 모든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사랑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초록의 풍광 속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그녀를 말이다. 어떤 거짓도 없는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는 그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면 안 되는 것이었나.  

 

단 한순간도 거짓 없이 활기차게 웃던 앙투아네트는 어느 순간 '버사'가 되었다.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은 시체처럼 하얗고 텅 비었다. 앙투아네트라는 이름이 사라진 것처럼 그녀의 표정도 사라졌다. 그리고 그녀는 '광녀'가 되었다.

 

 ...그녀는 미쳤지만 내 것이야, 내 것이야. ... 그녀가 웃건 울건 혹 두 가지를 다 하건, 그건 단지 나만을 위한 것이어야 해. ... 나의 광녀. 나의 미친 여자. 구름 낀 날이 너를 도와주겠지. 작열하는 태양은 없어.

 태양은 없어....태양은. 기후는 변해 버렸다. (p.233)

 

그랬다. '버사'와 함께 영국으로 온 로체스터는 그녀를 '인형'으로 만들었다. 자신의 말만을 듣는 인형으로. 스스로 생각해서도 안 되고, 무언가를 요구해서도 안 되고, 오로지 하렘 안에서 다소곳하게 남편인 자신만을 생각하고 기다리는 '조숙한' 여자 말이다. '버사'가 되어버린 앙투아네트는 모든 것을 잃었다. 재산도 자기 자신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자신이 누구인지, 여기가 어디인지... 아.. 영국에 왔다. 그리고 자그마한 어린 여자를 보았다. '제인'에게 경고해야 했다. 로체스터는 나쁜 남자야. 도망쳐야 해. 너를 '인형'으로 만들어 버릴거야.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는 결코 건널 수 없는 바다였다.

이제 드디어 나는 내가 왜 여기에 끌려왔는지를 알게 되었고,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도 알았다. 바람이 어디서 불어왔는지 촛불이 깜박거렸고, 나는 촛불이 꺼졌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손으로 바람을 막아주자 촛불은 다시 살아나 타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가는 이 캄캄한 길을 밝혀 주기 위하여.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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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1-15 1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 리스.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작가 이름입니다. 저는 <한밤이여, 안녕>을 읽었어요. 이 소설을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와 같이 읽어봐야겠습니다.

꼬마요정 2015-01-15 12:27   좋아요 1 | URL
네 저는 이 책을 읽고 <한밤이여 안녕>을 샀답니다^^ 제인에어보다 강렬하게 다가오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