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1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지음, 최종술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읽는 내내 불편했다. 향긋한 커피를 넘기기도 힘들었다. 도대체 게르만이라는 사람은 어떤 뇌구조를 갖고 있는걸까. 오로지 '기억'에만 의존해서 글을 쓴다는 그는 일말의 가책 하나 없이 '기억'을 나열하고 있다.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자신은 어리석음 따위 없다는 식의 어투로. 그러면서 끊임없이 의심한다. 실수가 있을리 없어..라고. 

그러나 그는 가장 어리석은 실수를 했다. 이름이 적힌 그것이 아니라 제일 처음 펠릭스를 만났을 때 그를 보고 느낀 그 어리석은 실수 말이다. 자신이 쓰고 있는 소설과 현실을 혼동하는 몽상가. 글이 먼저인지 현실이 먼저인지 구분하지 못하면서 자신의 기억을 제멋대로 조합한다.  

아아.. 나는 읽는 내내 감탄했다. 그의 표현들은 너무나 멋졌다. 멋지다는 상투적인 표현밖에 떠올리지 못하는 내가 미울 정도로.  

밤의 꿰맨 부위가 터지기 시작하고, 바이올린 같은 영혼의 소유자가 완강히 거부하는 베개를 주먹으로 쳐서 실신시키고 나서 만남과 떼어놓는 칙칙한 하얀 시간을 어떻게 처분할 지 고민하는..   

이런 표현들도 있다. 

낮이 파리해졌다. 저녁이 다 되어 굼뜬 버스가 내가 고른 곳에 나를 떨어뜨렸을 때, 나는 그런 장소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고통스러워 비명을 질러대는 뭉툭한 연필로 첫 페이지에 재빨리 그리고 단호하게

줄거리는 아주 단순하다. 어느 살인자의 고백이다. 그런데 이 줄거리가 나를 바보로 만들었다. 나는 계속 생각해야했다. 결국 난 작가에게 졌다. 나를 바보라고 불러라.. 날더러 어쩌란 말이냐.. 그렇게 외쳤다. 10장을 읽으면서 남은 쪽수를 봤다. 아직 많이 남아있었다. 게르만은 왠지 앞과 어울리지 않는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었고, 작가는 음산하게 웃고 있었다. 난 속았고, 계속해서 읽었다. 어릴 때 읽은 부활이나 죄와 벌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가 떠올라야 했을까.  

어쨌든, 다락방님 말씀처럼 50페이지까지 정말 힘겹게 읽었다. 작가의 말을 보면 영어로 번역하고 난 뒤 성질 고약한 영국인에게 번역을 읽어봐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 영국인은 첫 장만 읽고 더 이상 읽지 않았다고 하는데 작가는 주인공의 고백이 작가의 고백이 아니었을까 생각해서 그런 것 같다고 한다. 나는.. 그 영국인의 마음을 이해한다. 도대체 분신을 만나는데 온갖 현란한 수식어들과.. 알 수 없는 말들..이 가득하니까. 진전은 없고 묘사와 수식, 인용들이 읽기 어려웠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 영국인이 딱하기도 하다. 첫 장을 넘기고 계속 읽다보면 어느새 책장을 덮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텐데 그런 기회를 날려버려서. 그 힘든 산을 넘고 나니 술술 읽혔다. 이야기가 제대로 전개되니까. 물론 나는 졌지만.  

고통스러워 비명을 질러대는 뭉툭한 연필이 지금 내겐 없다. 아쉽지만 난 마조히즘에 가득 찬 내 키보드를 두들겨 쉽게 떠오르지 않아 미적대면서 리뷰 제목을 적고자 한다. 

천재가 되고 싶어한 어느 살인자의 고백. 

게르만은.. 그저 어느 살인자일 뿐, 승자는 나보코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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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쉰P 2011-06-22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왠지 이 책이 저에게 맞지 않을 듯해 구입하지를 않았어요. ^^ 자신의 기억을 멋대로 조합하는 것이 현대를 사는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이지 않을까 싶어요. 자신에게 유리하게 기억을 많이 조작하죠. ㅋ 저도 그러니까요.
흠..책이 좀 많이 난해한가 봐요. 전 그런 소설은 좀 무서워요. ^^

꼬마요정 2011-06-23 01:56   좋아요 0 | URL
루쉰P님은 왠지 이 소설 읽으시면 좋아하실 것 같은데요. 톨스토이의 부활과는 상관없지만,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과는 상당히 상관있거든요. 읽으면 그런 분위기가 느껴지거든요. 나중에 다시 한 번 더 읽어보려구요. 일단 표현만큼은 정말 멋져요~ 어쩜 저런 표현을 다 생각해냈을까요..아아~~

꼬마요정 2011-06-23 01:56   좋아요 0 | URL
제 댓글을 보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건지..ㅠㅠ

루쉰P 2011-06-27 22:10   좋아요 0 | URL
전 파악했습니다. 댓글조차 난해하게 쓰시다니 책의 영향인 듯! 표현이 멋지다! 거기서 훅하네요!

꼬마요정 2011-06-27 23:31   좋아요 0 | URL
정말로.. 표현이 죽여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