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철학과에서 알게 된 선배랑 우연찮게 대화할 기회가 생겼다. 열심히 이야기하다가 문득 강연 이야기가 나와서 내가 "저두 강연 많이 들으러 다니구 해야 하는데.. 그래야 사고의 폭이 넓어질텐데 말이죠.."라고 말을 던졌다. 그랬더니 그 선배 왈. "책 많이 읽어.. 그러면 사고의 폭이 넓어지거든"

순간 나의 기분은 솔직히 더러웠다. 격한 표현이라 생각되지만 사실이다. 그 선배가 나쁘다거나 잘난 척하는 사람이라거나 그러지는 않다. 사실 우리는 안 지 몇 개월 밖에 안 됐고, 수업 시간에나 보는 그런 겉만 아는 사이다. 그리고 그 선배는 나에게 조언의 형식으로 다정하게 이야기 한 거다. 그런데 내 기분은 왜 그렇게 나빴을까...

책을 많이 읽으라고? 거기에 내 자존심이 다친거다. 겉으로는 내가 겸손한 척, 모르는 척 잘 했는데, 막상 그런 말을 들으니 나의 가식이 가면을 벗어버린 거다. '남들보다 책 많이 읽었어.. 당신보다 많이 읽었을걸..이거 왜 이래?' 그 때 내 맘속의 대답이었다. 겉으로는 "네.. 그래야겠죠.. "라고 가식을 떨었지만 말이다.

오만한 나...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언제부터 남의 호의마저 나의 잘난 자존심의 방정식에 맞춰 답을 내는 그런 허영덩어리에 가식쟁이가 된 것일까... 처음에는 자존심이 다쳐서 기분이 상했지만, 잠시 후 나의 이러한 거만함에 역겨워졌다. 내가 잘난 게 뭐가 있다고... 너무 아팠다. 나 자신안에 이런 의식이 있다는 건 너무 아팠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내가 지향하는 나는 이런 나가 아니었는데... 

나 혼자 나란 인간에 실망하면서도 남이 모르겠지란 안도감이 밀려왔다. 그리고..나는 다시 나의 이런 어리석음에 몸서리쳤다.

우울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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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perfrog 2004-06-16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비슷한 경험을.. 대학 동기 녀석이 직장 그만두고 집에서 일한다 했더니 대뜸 하는 말이 '이번 기회에 책 많이 읽어라!'였어요. 그 순간 '뭐야! 너보다 10배는 더 읽을 거다! 지는 유부남 주제에 바람이나 피워놓고 말야말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그래, 하고 말았죠.. 흠.. 저도 전화 끊고 나서 불쾌하기도 하고 우울하기도 하고.. 복잡복잡..;;;

꼬마요정 2004-06-16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ㅠ.ㅠ 서글퍼요..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사실 이 세상에 하고많은 책들 중에 읽은 책은 극히 일부분인데..그런데도 잘 났다는 생각을 하니까.. 그래도 저만 그런게 아니라는 데 또 다시 안도감...ㅋㅋㅋ 울다가 웃으면 어디어디 털 난다던데...

superfrog 2004-06-16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심히 내공을 쌓아야 겠죠... ?^^;;;

로렌초의시종 2004-06-16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삼 제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저 같은 경우는 제가 워낙 잘난척을 했는지(저는 물론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만^^;) 누가 저보고 책을 더 읽으라고 하지는 않더군요. 꼬마요정님도 한번쯤은 님의 독서량을 적절한 때에 한번쯤 드러내시면 아무도 그런 말 안할꺼에요!, 물론 겸손이 미덕이지만 말이죠. 만약 제가 누가 그런 말을 한다면 저는 한마디 하고 넘어갔을 것 같은데 꼬마요정님은 잘참으셨네요^^ 맘에 드는 글을 써주셨기에 추천하고 퍼갑니다^^ 저도 언제 한번 비슷한 주제로 써봐야겠네요(언제쯤일지는...... ㅡ ㅡ;)

꼬마요정 2004-06-17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맘에 드셨다니 다행이네요.. 추천도 감사^^*
물장구치는금붕어님 말씀대로 내공을 키워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