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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환상 2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87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송기정 옮김 / 민음사 / 2026년 3월
평점 :
1권에서 뤼시앵은 샤틀레의 계략으로 바르주통 부인과 함께 앙굴렘을 떠나 파리로 향한다. 정치 쪽으로 닳을대로 닳은 샤틀레는 이제 바르주통 부인을 손에 넣기 위해 두 사람을 이간질 하는데, 굳이 이간질을 하지 않아도 파리라는 곳은 서로가 서로를 촌스럽고 얼간이로 보이게 하는 마력을 가진 곳이었더랬다. 지방에서 온 그들은 때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었고, 촌스러운 몸짓을 했으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둘은 서로에게 실망했고 곧 화려하고 눈부신 다른 이들에게 눈을 돌렸다. 어쩌면 사랑이 변한 게 아니라 애초에 환상을 사랑했던 것 아니었을까.
배신이든 변심이든 어쨌든 다시 멋쟁이가 된 뤼시앵은 잘생긴 얼굴과 타고난 재치로 데스파르 부인을 사로잡았으나 샤틀레가 퍼트린 소문 때문에 파리의 사교계에서 쫓겨난다. 칙령이 없는 한 어머니 쪽 성을 따르지 못하게 된 뤼시앵은 뤼방프레가 아닌 약제사 샤르동의 아들이 되어 데스파르 부인과 바르주통 부인이 속한 곳에서 추방당했다. 가족이 마련해 준 돈을 헛되이 낭비한 뤼시앵은 한동안 자숙하며 시인의 이상을 펼치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타락하고 만다.
책을 계속 읽다보면 이토록 허영에 가득 찬 한 인간에게 이렇게나 많은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어준다는 게 놀라웠다. 잘 생겨서 그런가? 다비드도 그렇지만 파리에서 만난 다르테즈 역시 너무나 좋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다르테즈가 속한 세나클 회원들 역시 말이다. 어떻게 그런 사람들을 곁에 두고도 뤼시앵은 루스토를 따라갈 수 있었을까. 결국 그는 발자크가 클로드 비뇽의 입으로 말했던 "사상의 매음굴"인 언론의 길로 들어선다.
당시 왕정 복고기 언론은 과격 왕당파 신문, 자유주의파 신문, 정부 여당지로 나뉘어 있었다고 한다. 구독료가 비싸서 구독자는 한정되어 있었는데 총 6만 5천 명 중에 5만 명이 자유주의 신문 구독자였다고 한다. 그러니 정부는 언론을 탄압했지만 신문의 영향력과 권력은 커졌고 언론은 결국 왕정복고 체제를 무너뜨렸다. 언론이 타락했다지만 무용하지는 않은 것이다.
모든 것이 돈으로 해결되는 곳에서 신성한 비평이나 정치적 신념,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돈이 원하는 대로 기사를 작성했고 돈이 부르는 대로 기사를 받아적었다. 그리고 기이한 복수심에 사로잡힌 뤼시앵은 날카로운 펜으로 바르주통 부인과 샤틀레를 모욕했고, 카뮈조의 정부인 코랄리는 그를 나락으로 이끈다. 뤼시앵은 분명 추악해보이는 그곳의 화려함과 자신의 펜이 주는 권력에 취해 돈을 물 쓰듯 쓰고 심지어 도박에까지 손을 대며 빚을 늘려갔다.
세나클 회원들은 그의 재능을 알았기에 그의 허영에 안타까워했다. 정말 뤼시앵에게는 성실하고 선한 친구들이 많았다. 인간의 훌륭한 본성을 믿고 실천하는 이들 말이다. 하지만 뤼시앵은 인내하고 자신을 다스리는 법을 알려주는 친구들보다는 자신을 추켜세우고 화려한 곳에 데려다주고 짜릿한 한 방을 가르쳐주는 사람들을 더 좋아했다. 이토록 허영에 가득 찬 인간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한심하고 어이없었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배신이 난무하는 곳에서 뤼시앵은 상대에게 상처 받을 때마다, 어음이 거절당할 때마다, 돈이 떨어질 때마다 눈물로 참회하고 후회하고 난리 부르스를 춘다. 나는 그럴 때마다 한숨이 나오고 욕을 한 바가지 퍼부어 주고 싶은 걸 참는다. 뤼시앵은 끝까지 불행할 테니까. 이토록 만족을 모르고 허영을 쫓는 이가 만족하며 행복해할 수 있을까?
천장의 등이 꺼졌다. 이제 극장 안에는 좌석 안내원들만 남아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작은 의자들을 치우고 박스석의 문을 닫았다. 한 자루의 양초가 꺼지듯 순식간에 꺼진 무대 앞 조명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났다. 막이 걷어 올려졌다. 천장에서 램프가 내려왔다. 소방수들이 잡역부들과 함께 순찰을 돌았다. 무대 위의 요정극, 예쁜 여자들로 가득했던 박스석, 눈부신 조명과 무대 장식과 새로운 의상의 화려한 마술, 그 뒤에 남은 것은 냉기와 공포와 어둠과 공허함이었다.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247쪽)
하나의 무대가 서기까지 많은 노력이 있었을 테고, 그 결과 무대는 절정을 맞이했을 테고, 무대가 끝난 뒤 텅 빈 극장은 적막하여 공허하기도 하지만 제 할 일을 마친 충만함도 있을 테다. 뤼시앵은 앞, 뒤는 보지 못하고 오로지 화려한 돌출의 구간만을 진짜로 느끼는 지도 모른다. 그는 더 큰 자극을 원하지만 그럴 능력은 없다. 메타인지가 안 되는 그는 모든 것에 행복회로를 돌린다. 그러다 실제로 불행이 눈 앞에 닥치면 울면서 참회한다. 그리고 주변에 민폐를 끼치는데, 그러다가 또 누군가를 만나 도움을 받는다.
아니, 왜 뤼시앵에게 자꾸 도움을 주는 거지? 잘 생겨서? 이 복장 터지는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는 건 도대체 왜인지 모르겠지만 마침 주말이어서 <잃어버린 환상 2>를 하루만에 다 읽었더랬다. 세 권 중 2권은 약간 피카레스크 같은 느낌도 들고 다 망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뤼시앵은 다비드의 서명을 위조해서 돈을 마련하고, 도박을 해서 돈을 날리고 다시 누군가에게 돈을 얻어서 앙굴렘으로 향한다.
바르주통 부인을 따라 파리로 간 지 18개월 정도 흐른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