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작품
윤고은 지음 / 은행나무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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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란 무엇일까. 언제부터 예술은 '돈'이 되었을까. 누군가의 재능이 '돈'이 되는 결과는 당연하다 싶으면서도 씁쓸한 이유는 무엇일까. 작품 그 자체가 아니라 화가가 나이가 많은지, 이미 작품이 많은지, 여자인지 이런 조건들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는 것 때문일까. 


안이지는 그림을 그리지만, 안이지의 주변 친구들도 그림을 그리지만 팬데믹 등 주변 환경이 그들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하나 둘씩 그림 그리는 일을 접고 다른 일을 할 때, 안이지는 두려웠다. 그림을 그리는 그 자체마저 잊어버리게 될까봐. 


안이지란 이름은 신기하다. 'not easy'로 보이기도 하고 '아니지'라고 읽고 싶기도 하고. 모두가 '맞다'고 할 때 혼자 '아니다'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일까. 그런 사람이 자신의 앞에 놓여진 상황 때문에 끊임없이 자기검열을 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로버트 재단에서 안이지 작가를 후원하기로 했으면서 로스앤젤레스 공항에 나타나지 않은 것은, 정확히는 다른 사람을 데려간 것은 재단의 잘못이다. 거기다 안이지는 혼자 버려져서 겨우 허름한 호텔 하나 잡고 재단에 연락했으나 재단은 담당자가 없다는 이유로 계속 그녀를 방치했다. 로스앤젤레스는 사상 초유의 산불로 교통도 막히고 물자도 부족하고 공기도 매캐했다. 이런 상황에서 안이지는 재단 측 사람이 오는 것을 기다리기보다 재단으로 직접 가기를 결정했다. 이런 실행력이 있는 사람인데, 재단은 안이지에게 왜 재단을 기다리지 않고 급하게 왔는지, 왜 말을 안 들었는지 무례하다며 질책했다. 재단의 실수를 지적당하니 실수를 지적한 사람을 탓하다니. 아니, 이건 재단 책임이라고!! 재단이 한국인 작가와의 첫 계약이라고 하니, 아마 한국인의 특성을 잘 몰랐던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든 난처한 상황을 스스로 헤쳐 나온 사람을 탓하다니. 하지만 안이지는 낯선 곳에서 황당한 일을 겪으며 자기 자신을 검열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을 의심하고 자신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상황은 이상하다. 이상한 건 이 뿐만이 아니다. 


로버트 재단은 로버트라는 이름을 가진 개 앞으로 떨어진 유산으로 만들어진 재단이다. 부자였던 발트만 회장이 자신의 딸 리나를 찍은 로버트에게 유산을 남겼고, 여러가지 규칙 속에서 재단은 운영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쯤되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로버트'는 몇 살까지 살지?


로버트는 힙하고 로버트가 좋아요를 누른 예술가는 대스타가 된다. 갖가지 소문에도 로버트 재단은 돈과 명예를 거머쥐고 있었고, 많은 작가들을 배출했다. 그 유명세는 창작 기간 동안 후원한 예술가의 작품 중 하나를 기간 마지막 날 불태우는 의식 때문에 생긴 것이기도 했다. 예술가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든 작품을 불태워야만 그 가치가 올라가는 이상한 상황...


이는 점 하나 찍어놓고 평론가들이 의미를 부여하며 좋은 작품이라고 하면 비싸게 팔리는 것과 다를 게 없어보인다. 불태운 작품은 더 이상 볼 수도, 판단할 수도 없다. 하지만 가장 값어치가 나가는 작품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로버트 재단이 누리는 막강한 부와 권력, 재단이 두르고 있는 권위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그 안에 가장 핵심인 개 로버트는 '개 같지' 않아야 하고, 그 '개 같지 않음'을 유지하기 위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아니 애초에 그 '개 같지 않음'이 존재하기나 했을까.


발트만과 로버트의 두 시계는 불공평했다. 한 쪽이 물구나무를 서야만 같아지니까. 누군가가 희생을 해야만 하는 구조는 슬펐다. 자신의 슬픔과 체면에 매몰되어 자신의 시선으로만 물건을 해석하게 하는 건 폭력이지 않을까. 가진 게 많다는 이유만으로 그럴 권리는 없으니까.


안이지는 역시 대단했다. 자기검열 끝에 자기 자신을 찾았다, 그림을 사랑하는 자신을. 이런 재능이 알려질 기회가 없어 묻혀버리는 경우는 아주 많을테다. 세상은 불공평하고, 그래서 기회를 잡기 위해 불의에 눈 감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 결국은 다 뻥이고, 다 똥이었어. 내가 대단하다 여기는 것들이 다 허상일지도 모르지. 멀리서 보면 커다란 것이 사실은 실제가 아닌 그림자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예술을 사랑하고, 그 똥마저 사랑하는 마음은 허상이 아니라 진실이었다. 그 마음이 있다면 여전히 예술은 무엇인가란 질문이 유효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 마음이 예술을 예술로 남게 하는 것이 아닐까. 

서재에는 발트만과 로버트가 전시 관람 후 만들어둔 흔적이 놓여 있었다. 아날로그 시계 두 개가 나란히 붙어있는 흔적. 얼핏 보면 같은 시간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하나는 3시, 다른 하나는 9시 30분. 그럼에도 두 시계가 같은 각도로 보이는 건 둘 중 하나가 물구나무를 서고 있기 때문이었다. 기사에서 읽었던, 바로 그 시계 작품이었다. 오래 전 발트만을 울렸던 로버트의 마음. 내가 기사에서 읽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샘이 얘기해줬는데 지금은 뒤에 배터리가 빠져 있다고 했다. 발트만이 배터리를 빼냈고, 그 두 시계는 영원히 같은 시간을 가리키는 사물로 남게 됐다.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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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12-04 10: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이거 너무 읽어보고 싶네요?! (또 산다..)

꼬마요정 2023-12-04 11:06   좋아요 0 | URL
재밌게 읽었어요. 영상화 되면 안이지가 작품 만드는 과정이 재미있을 것 같아요 ㅋㅋ 제가 상상력이 부족해서 상상이 잘 안 가서 궁금하긴 하네요.

나와같다면 2023-12-05 0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꼬마요정닝 서재의 달인 선정되심 축하드립니다. 항상 좋은 글 감사히 잘 읽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꼬마요정 2023-12-05 23:02   좋아요 1 | URL
나와같다면 님 고맙습니다. 저도 항상 좋은 글 감탄하며 읽고 있습니다. 문제의식을 잘 표현해주셔서 같이 공감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연말 행복하게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