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코퍼필드 1 비꽃 세계 고전문학 16
찰스 디킨스 지음, 김옥수 옮김 / 비꽃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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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막내 동생이 소고기 사 준다고 해서 일요일 점심을 동생들과 함께 먹었다. 나는 소고기를 좋아하지 않는데 동생들이 좋아해서 먹으러 갔다. 비싼 음식 사 주고 싶어하는 동생의 마음을 외면할 수가 없어서 말이다. 그러나 역시 나는 0.3인분 먹었고, 동생은 생각보다 밥값이 싸게 나와서 놀랐고, 덕분에 커피까지 막내가 쏘게 되었다. 앗싸!!


'오디오그라피'라는 카페를 가게 됐는데, 거기는 멋진 사장님이 계셨다. 음향기기와 음악을 사랑하시는 분인데, 거기 앰프랑 스피커랑 아주 좋은 것들을 갖추고 계셨고, 일정 시간이 되면 카페 손님들을 지하 청음실로 초대해 두 곡을 들려 주셨다. 나랑 동생들이 갔을 때 들었던 노래는 <헤어질 결심>에 나왔던 '안개'와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이었다. 음.... 다들 좋다하니 좋은가보다... 했다. 나는 막귀니까. 그런데 음악을 듣고 난 뒤 사장님 말씀이 참 가슴에 와 닿았다. 그 시절의 음악을 들으면 잠시나마 그 시절을 떠올릴 수 있다고 말이다. '안개'는 내가 살던 시대가 아니니 모르겠지만, '잘못된 만남'은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했으니까. 저 노래는 무용시간 과제였는데, 그 때 얼마나 많이 들었으면 저절로 가사가 튀어나왔다. 


음악도 그 시절을 떠 올리게 하고, 냄새도 어떤 시절을 떠 올리게 한다. 그리고 책도 어떤 기억을 불러온다. 나에게 이 <데이비드 코퍼필드>가 그러했다. 


데이비드는 금요일 자정에 태어났다. 유복자였고 유복하지 못했다. 베시 대고모는 그가 딸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냥 떠났고, 데이비드는 아름답지만 유약한 어머니와 패거티 유모와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어머니가 머드스톤을 만났고, 행복한 시절은 막을 내렸다.


데이비드의 엄마인 클라라가 머드스톤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그와 결혼하자, 머드스톤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머드스톤은 먼저 자신의 누나를 집으로 들였고, 클라라를 조종하기 시작했다. 머드스톤과 머드스톤 아씨는 클라라의 재산을 모두 가로챘고, 클라라의 아들인 데이비드를 위한 일들을 못하게 했다. 머드스톤은 스스로 데이비드를 가르치려고 했고, 데이비드를 아주 나쁜 아이인 마냥 취급했다. 클라라가 아들을 두둔하려거나 위하려고 하면 나쁘고 못된 아이는 교육을 잘 시켜야 한다면서 클라라가 마치 아들의 버릇을 나쁘게 만든 것처럼 말했고, 클라라는 늘 자신이 잘못했다 생각했고 데이비드를 지켜주지 못했다. 데이비드 역시 머드스톤과 머드스톤 아씨를 두려워했고, 늘 주눅이 들어있었다. 데이비드에게 유일한 안식처는 패거티 유모였는데, 머드스톤이 둘이 같이 있는 것을 싫어해서 자주 볼 수도 없었다.


그리고 어느 날, 머드스톤은 겨우 열 살 정도인 데이비드를 아주 질 나쁜 기숙학교로 보내버렸다. 치사하고 치졸하고 비열한 머드스톤은 데이비드를 포악하고 말 안 듣는 아이로 말했고, 학교에서는 데이비드 등에 '깨무니까 조심하시오'란 벽보를 매달도록 했다. 학교로 가는 길에는 동행하는 어른이 없어서 웨이터에게 사기를 당하기도 했고, 학교에서도 그저 교장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이유로 많이 맞기도 했다. 


머드스톤에게 학대 당해 시름시름 앓다 클라라는 세상을 떠났고, 데이비드는 머드스톤이 지분을 가지고 있는 '머드스톤&그린비'에서 일하게 되면서 미코버 아저씨네서 살게 되었다. 하숙집 주인인 미코버는 채무자로 교도소에 들어가게 되었고, 마침내 데이비드는 도망치기로 결심했다. 


제일 처음 나왔던 베시 고모님에게 가기까지, 데이비드의 시간은 너무 비참하고 안타까웠다. 겨우 열 살짜리가 겪어야 했던 일들이 너무 가혹하여 머드스톤이 증오스러웠지만, 더 안타까운 사실은 당시 어린 아이들이 공장에서 일하고, 길거리에 나앉는 일이 흔했다는 것이다. 찰스 디킨스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데이비드 코퍼필드>를 썼다. 물론 자신의 다른 책들에도 그 경험들이 녹아 있지만, 이 책만큼 자전적이지는 않다고 한다. 실제로 디킨스는 금요일에 태어났고, 미코버 아저씨는 디킨스의 아버지가 모델이며, 세일럼 기숙학교는 디킨스가 다니던 학교가 모델이고, 머드스톤&그린비에서 일했던 것은 디킨스가 열 두살 때 다니던 공장의 일을 가지고 왔다. 


데이비드가 패거티 유모에게서 은화 열 냥을 빌려 베시 대고모님께 가는 길은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길이었다. 순식간에 열 냥을 강탈당한 뒤 옷을 팔아가며 밥을 먹고, 노숙을 하면서 걸어야 했던 데이비드는 얼마나 아팠을까. 


그런 데이비드를 보며 나 역시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데이비드가 하얀 공백으로 가득한 유년기라는 표현을 썼다면, 나는 내 어린 시절을 까맣게 기억한다. 까만 와중에 좋았던 기억, 나빴던 기억들이 드문드문 머릿속에 그려진다. 마치 드라마 <어쩌다 발견한 하루>의 스테이지와 쉐도우처럼. 냄비 뚜껑부터 라디오까지 다 분해하는 장면이 기억나고, 밥 안 먹어서 발가벗겨진 채 쫓겨난 일이 기억나고, 여섯 살 때 혼자 버스 타고 수영장 가다가 내려야 할 정류장에 사람이 많아 못 내려서 다음 정거장에 겨우 내려서 걸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가장 가슴 아팠던 일은 머드스톤이 데이비드에게 했던 것처럼 잘 하는 게 하나도 없다는 식의 말들이었다. 내 성적이 좋은 건 하필 그 시험에 다른 애들이 시험을 못 쳤기 때문이고, 시킨 대로 안 하면 무조건 여상에 가야 할 것이고, 니가 무슨 글을 쓸 수 있냐며 하던 말들 말이다. 무슨 일이든 일단 다 내가 잘못해서 벌어진 일이 되기에, 어느 순간부터 부모님께 힘든 일이든 좋은 일이든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베시 고모님이 머드스톤에게 퍼붓는 말들이 좋았다. 


"지금 당신이 하는 행동을 보고 당신이 하는 말을 들엇는데 그동안 당신이 어덯게 굴었는지 내가 모를 것 같소, 솔직히 말해서 당신과 대화하는 자체가 이렇게 역겨운데? 그래요, 당신은 처음에 정말 부드럽고 나긋나긋하게 굴었겠지! 불쌍하고 어리석고 순진무구한 아기는 그런 남자를 처음 보고. 참으로 다정하게 행동하며 숭배하는 남자. 남자는 아기 아들을 덮어놓고 예뻐했겠지...... 다정하고 부드럽게! 친아들처럼 보살피겠다고, 그러니 장미정원에서 함께 살자고 했겠지. 그죠? 흥! 어서 나가요, 어서!" (p.344)


"그래서 불쌍하고 귀여운 멍청이를 -이렇게 부르는 걸 하느님, 용서 하소서!- 확실하게 장악한 다음에는 멍청한 여자와 그 아들을 그동안 충분히 학대하지 못한 몫까지 덧붙여서 여자를 훈련하기 시작했겠지, 그죠? 새장에 가둔 불쌍한 새처럼 상처를 주고 당신 가락에 맞춰서 노래하도록 가르치는 식으로 미혹에 빠뜨리며 생명력을 조금씩 앗아갔겠지!" (pp.344-345)


"머드스톤 선생, 당신은 단순한 아기한테 폭군으로 군림하면서 심장을 갈가리 찢어발겼어. 그 애는 정말 사랑스러운 아기였어. 내가 잘 알아. 당신이 그 애를 보기 훨씬 전에 내가 보았거든. 그런데 당신은 그 애가 지닌 치명적인 약점을 이리저리 활용하며 상처를 주어서 죽인 거야. 당신이 그걸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걸 통해서 위안을 느낀 건 사실이야. 당신은 그걸 당신 앞잡이와 함께 최대한 활용했어."(p. 345)


데이비드가 베시 고모님께 오기 전에는 그를 이끌어 줄 수 있는 어른이 없었다. 웨이터에게 조롱을 당하고, 학교에서는 가련한 선생님 편을 들어줄 줄도 몰랐고, 이기적이고 거만한 선배를 멋지다고 좋아했다. 교장 선생님은 기분 따라 애들을 학대했고, 하숙집 주인은 채무를 잔뜩 지고는 돈 한 푼 갚지 않으면서 피해자인 척 불쌍한 척 행동했다. 심지어 돈이 없어서 미코버 아저씨는 교도소에 가면서 아내와 아이들을 다 데리고 갔다! 교도소 독방은 월세를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나보다. 그나마 패거티 유모 가족이, 특히 사랑스러운 에밀리가 데이비드에게 안식처를 줬는데, 자주 볼 수 없었다.  


산업혁명 이후 영국의 사회상은 어째서인지 그리 멀지 않은 때의 우리나라와 비슷한 점이 많은지 신기했다. 불과 5~60년 만에 엄청난 발전을 이룬 것은 대단한 일이지만 그 안에 있는 온갖 부조리하고 가혹하고 비참한 일들을 해결하지 못한 것 역시 사실이다. 전쟁이란 참혹한 일부터 시작해서 개발이나 독재 등을 통해 누적된 사회의 아픈 기억들은 여전히 모두의 집단 무의식에 남아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데이비드는 베시 고모님을 만났고, 안식처를 얻었고,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새롭게 가게 된 학교는 점잖은 선생님들과 학생들이 있었고, 함께 살게 된 위크필드 씨는 좋은 사람이었다. 여전히 어리지만, 그래도 많이 배웠고 풋사랑도 하게 됐다. 이제 데이비드는 열 일곱이 되었고, 세상을 구경할 준비가 되었다.


'고통은 누구보다 훌륭한 스승이다.  

 나는 고통을 겪으면서 인간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는 부러지고 깨졌지만, 훨씬 멋진 모습으로 태어났다.' 라고 찰스 디킨스는 말했다. 


그의 말처럼 나 역시 내가 겪은 고통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 고통스러운 기억 때문에 여전히 용기를 내야만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은데 말이다. 하지만 또 그 기억 때문에 어떤 일들은 그다지 힘들지 않기도 하다. 어쩌면 찰스 디킨스의 저 말은 이야깃거리가 풍부해졌다라는 것은 아닐까. 나 역시 내가 겪은 일을 이야기 할라치면 아주 많은 말들을 할 수 있을테니까.


우리 사회가 겪은 그 고통들이 우리 개개인을 보다 단단하게 만들 수 있을까. 그것은 각자 개인의 몫이기도 하겠지만, 데이비드가 베시 고모님의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사회 안전망이 그런 역할을 해 줄 수 있다면 좋겠다. 


자, 이제 데이비드의 다음 이야기를 읽으러 가야겠다. 더 이상 그가 힘들지 않기를, 사랑의 고통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절대로 치사한 사람이 되지 말고, 절대로 거짓말하지 말고, 절대로 잔인하게 굴지 말렴. 세 가지 악덕을 조심해, 트롯, 그럼 나는 너한테 언제나 희망을 품을 거야. - P361

하지만 나는 네가 육체를 단단하게 다진 만큼 정신적으로도 단단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아주 단단하고 훌륭한 사람, 의지가 뚜렷한 사람, 결단성 있는 사람, 단호한 사람. 강인한 사람, 트롯..... 합당한 명분 외에는 누구에게도, 어떤 상황에도 영향을 안 받는 강인한 사람. 나는 네가 그런 사람이 되길 원해. 너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렇게 살았더라면 훨씬 좋았을 거야. - P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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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3-09-29 10: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데이비드 코퍼필드 저는 찍먹 수준으로 권마다 체험판으로 읽었는데 재미있던 기억이 납니다 ㅎㅎ 디킨스의 글빨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추석연휴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꼬마요정 2023-09-30 00:01   좋아요 2 | URL
정말 디킨스는 글을 잘 쓰는 것 같아요. 1권의 유년 시절이 너무 가슴 아팠는데, 이후의 삶은 또 어떨지 궁금합니다.

서곡 님도 추석 연휴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다락방 2023-09-29 11: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너무 읽고 싶네요. 사야겠어요. 불끈!!

꼬마요정 2023-09-30 00:01   좋아요 1 | URL
아아 얼른 사세요!! 그리고 다락방 님의 리뷰를 들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