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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걷힌 자리엔
홍우림(젤리빈) 지음 / 흐름출판 / 2022년 2월
평점 :
세상은 변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인류가 '신화'라는 이름으로 신이든 자연이든 섬기던 때부터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어떻게 보면 눈 깜짝할 사이일지도 모르지만, 또 어떻게 보면 아주 오랜 시간일지도 모른다. 인간의 염원이 모여 신이 된 영물(靈物)들은 이제 인간에게 잊혀져 사라지거나 자유로워지게 될 것이고, 인간은 그 영물(靈物)의 자리를 과학 또는 또 다른 신에게 맡긴다.
두겸은 오월중개소의 중개인이다. 골동품을 주로 취급하는 오월중개소는 보이지 않는 무언가도 거래한다. 경성 한 가운데에 있는 찻집 '티 하우스 1'의 주인 역시 오월중개소에 물건을 넘겼다. 청나라 광저우의 번창한 상점에 걸려 있었다던 세화(歲畵)를 비싼 값에 구해 가게에 걸어놓았는데, 하필 그 그림의 눈길이 손님들을 내보낸다니 말이다. 그리고 두겸은 또 신기한 인연을 만난다. 토지신과 그 토지신이 데리고 있는 인간의 혼령인 고오. 고오는 아들 귀한 양반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반골이라는 이유로 여자로 길러졌다. 고오의 아버지는 문중의 뜻에 따라 작은집에서 태어난 아들을 양자로 들여 대를 이으려고 했으나 그 아들이 후사 없이 죽어버리자 스물네 해를 여자로 살게 했던 고오를 다시 남자로 살게 해서 후사를 잇고자 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고스란히 겪으며 지켜보던 고오는 자신의 배필이 정해졌다는 발표를 하는 날, 문중 어른들을 한 방 먹인다.
"저더러... 이 돼먹지 못한 집안을 대표하는 말씀입니까?"란 말을 하며 탈피를 하여 여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더 놀랍고 황당한 일은 집안 사람들이 고오가 여자가 되었다는 사실보다 집안의 대가 끊겼다는 것에 더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집안이 무엇이길래, 숱한 사람들의 피와 눈물과 한을 빨아들이는 것일까. 반골을 낳아 집안의 죄인이 된 고오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과연 죄인인가. 왜 아들만 집안의 대를 이어야 하는 것인가. 그야말로 고오의 반격은 순간은 통쾌하였다. 그러나 고오 대신 종손이 되었던 주오의 아내인 은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여자로 태어나 남자가 아니었다는 이유로 존재를 부정당한 이에게 고오의 반란은 배부른 투정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 시대 여자의 존재 이유는 남자를 낳는 것 외에는 없었던 것일까. 그러니 망했지.
그렇게 여자가 된 고오는 또 다시 집안의 도구가 되어 지랄병에 걸린 조 씨 가문의 차남 기와 혼례를 올린다. 고오는 기에게 자신의 지참금인 땅을 주고 자유를 찾아 떠났다. 그러나 세상은 추악했다. 남녀를 떠나 그저 한 인간으로 살아가고 싶었던 고오는 또 다시 좌절을 만났다. 계급은 착취와 함께 고오를 압박했다. 땀 흘려 수확한 농산물은 7할이 양반의 곡식 창고로 들어갔다. 그런 불평등을 견딜 수 없었던 고오는 양반의 창고를 털었지만 연인과 이별해야 했다. 고오의 거침없는 성격과 올곧음, 용기는 그 시대 일반인이 감당하기 어려웠을테니까. 그런 식으로 몇 번의 인연들과 헤어지고 문득 고오는 남편인 '기'를 찾아갔다. 그리고 기와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지주가 된 기는 소작료를 싸게 하여 모두가 함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고 세상에게 버림 받았다. 그리고 고오는 기의 복수를 하고 죽음에게마저 반항을 시도했다. 그리하여 죽음을 유예하던 차 토지신에게까지 느껴진 것이다. 고오의 사정을 알게 된 토지신은 그렇게 고오의 사연에 감응하여 고오의 저승길을 가려준다.
이런 이야기들이 하나 둘이겠는가. 두겸이 어찌해서 이렇게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되었는지, 저 우물 안에서 사람들의 어둠을 먹던 용이 될 상이었던 치조는 어쩌다가 신령한 뱀에서 산산조각이 난 인간 모양이 되었는지 하는 이야기들도 있고, 신령한 힘을 가진 영물을 우물에 넣어 나쁜 기운을 잡아 먹게 하여 인간 세상을 정화하려 했던 비구니는 어쩌다가 흑화하여 복수만을 외치게 되었는가 하는 이야기도 있다. 오월중개소에서 일하는 유호의 고향에서 일어난 일은 또 얼마나 안타까운가. 귀가 큰 나그네 신이 가진 비밀은 또 얼마나 참혹한가. 개갈촌 사람들의 그 비정함과 이기심은 더럽다 못해 썩은 오물 그 자체였으며, 어린 아이와 여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화를 풀던 수일의 새아빠는 또 얼마나 비겁했던가. 사고로 떨어져 죽은 정덕재의 몸을 빌어 사람 행세를 하던 샘의 사랑은 또 얼마나 아스라한가... 그에 비하면 담비 동자의 사연은 얼마나 귀여운지 모른다. 절에서 보살님들이 담비에게 다정하여 담비 동자라 부르며 보살펴 주었더랬다. 보살님들이 너무 좋은 담비 동자는 보살님들을 힘들게 하는(?) 부처란 작자가 맘에 안 들어 불상을 부수고는 벌벌 떨며 두겸을 찾아 온 것이다. 두겸은 웃으며 보살님들께 사실을 말하라고 하고 그렇게 불상을 부순 사건은 마무리가 된다.
이야기는 늘 그렇다. 태평성대한 세상은 잠시 뿐이고, 늘 난세(亂世)에 어려운 시절이 가득하다. 그런 세상에서 고통 받는 이들을 가엾게 여기고 그들을 구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난세를 만드는 욕망에 충실한 이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추악한 인간들 때문에 상처 받은 이들이 복수에 매몰되고 마는 그런 슬픈 이야기들 말이다. 하지만 그 슬픔의 끝은 슬픔이 아닌 희망이다. 나락에 떨어져도 남을 해치는 일을 하지 않으려는 마음, 살아있는 것들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 내 상처를 남에게 주고 싶지 않은 마음... 이런 마음들이 결국은 저 추악한 것들을 이길 것이라는 그런 희망.
세상은 변하고 변한 세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또 자연스럽게 변화에 휩쓸려 변화를 따라가는 이가 있다. 혹은 그 변화 때문에 사라지는 이도 있다. 어쩌면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우리의 말과 간절히 바라는 바를 들어주던 많은 존재들은 다 사라졌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존재들이 어쩌면 치조처럼 우리와 공생하는 법을 알아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우리만 사는 것이 아니라 모두와 함께 살고 있는지도. 제발 그러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