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슨 인 케미스트리 2
보니 가머스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2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세익스피어의 희극 <한여름 밤의 꿈>은 네 남녀의 꿈 같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고 도망친 허미아와 라이샌더, 그런 그들을 쫓는 드리트리오스와 헬레나의 엇갈린 사랑은 자칫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비극으로 치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요정의 왕 오베론과 여왕 타티아나 사이의 다툼과 퍽의 실수가 어우러져 모든 일들이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로 바뀐다. 이 이야기나 페로의 <신데렐라>에서 대모 요정이 개입해서 신데렐라를 왕자와 짝지어 준다든지,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에서 제우스와 아테네의 개입으로 오레스테스에게 걸린 질투의 여신들의 저주를 풀어준다든지 하는 일들은 어쩌면 '우연한 행운'에 의한 개연성 없는 이야기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책 역시 그렇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엘리자베스 조트가 얼마나 노력하고 얼마나 능력이 있는지 상관없이 성별로, 미혼모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삶을 살다가 갑자기 두둥 요정 할머니가 나타나는 것처럼 보이니까 말이다. 


우리 뇌는 특이하게도 좌뇌와 우뇌가 위험을 반대로 평가한다고 한다. 일련의 실험을 통해, 신경학자들은 우뇌가 (투쟁-도피 반응을 촉발시키는)교감신경계와 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좌뇌가 (우리를 진정시키는)부교감신경계와 더 밀접하게 연결되었음을 알아냈다. 달리 말하면 우뇌는 잘못될 수 있는 것에 더 집중하기 쉽고, 좌뇌는 잘될 수 있는 것에 더 집중하기 쉽다. 우리가 지금 당장 비관적으로 느낀다 해도, 우리 뇌는 전체적으로 비관론의 반은 비어 있고 낙관론의 반은 가득 차 있는 셈이다. 그러니 반이나 차 있는 낙관론에 접근하려면 뇌의 관점을 바꾸면 된다. 그냥 행운을 떠올리면 된다. (엥거스 플레처, 우리는 지금 문학이 필요하다, p.201)


그렇기에 우리는 문학을 읽는다고 엥거스 플레처는 말한다. 신데렐라를 읽으면서, 어느 책이든 임의로 행운이 개입된 상황을 읽으면서 우리는 아무리 힘들어도 일시적인 고통일 뿐이라 여기면서 고난을 헤쳐나갈 힘을 얻게 된다. 운에 대한 좌뇌의 강조는 회복력을 높여준다고 말이다. 여러 권선징악 이야기들을 보면 나의 고통은 왠지 내 잘못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이 어디 쉬운 곳이던가.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노력한만큼의 결실을 얻지 못하는 곳이 아니던가. 내가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노력했음에도 고통받는 것은 나의 탓이 아니다. 그냥 그런 것이다. 그러다 정말 운이 좋다면 내가 노력한만큼 대가를 받을 수 있겠지. 그리고 어쩌면 신이 개입해서 나에게도 행운이 올지도 모른다. 세상은 고통만을 주지는 않으니까. 또한 그것이 세상이겠지. 그렇기에 다가온 행운 역시 당연하지 않게 여겨 감사하게 된다. 희망하는 대로 풀리지 않아도 가끔씩 찾아오는 행운은 삶의 만족도를 높여준다. 


우리 엘리자베스 조트는 여자가 과학자가 될 수 없다 여겨지는 시대에 태어나 그래도 치열하게 살았다. 자신이 하고 싶은 화학자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재능이 있었고 끊임없이 공부했다. 그리고 자신을 알아봐 준 캘빈 에번스를 만났고 사랑했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싶었던 엘리자베스 조트는 캘빈과 결혼을 하지 않은 채 매들린을 낳아 가족을 이루었다. 나 역시 결혼식을 하고 혼인신고서를 작성하는데 상당히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아직 혼인 신고를 하지 않았는데, 엘리자베스는 어떠했겠는가.


그리고 남자도 하기 힘들다는 '조정'을 한다. 얼마나 멋있던지. 조정을 할 때 물리학이 도움이 되는 것을 보고 나도 물리학을 공부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했다. 힘의 방향을 잘 몰라서 지렛대 원리를 이용하지 못하는 나니까, 오른쪽 왼쪽 헷갈리는 나니까, 바깥쪽 발이 어딘지 헷갈리는 나니까. 하지만 엘리자베스 조트는 나와 달리 힘의 방향도 알고 힘의 원리도 알았기에 조정도 제법 잘했다. 결국 나중에는 메이슨에게 인정받게 된다. 


캘빈 에번스가 유명하고 뛰어난 과학자였기에 엘리자베스 조트의 능력은 그의 이름 아래 가리게 된다. 캘빈의 여자친구이기에 예산을 배정 받고,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당시에 엘리자베스가 하는 연구에 받는 예산은 캘빈의 도움이 컸다. 하지만 그것은 엘리자베스가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지만, 불행히도 세상은 그렇게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그리고 비극적인 사건이 터지고, 캘빈은 죽고 엘리자베스는 연구실을 떠난다. 


매들린과 한 반인 어맨다는 매들인의 도시락을 먹었고 매들린의 영양 상태를 걱정한 엘리자베스는 어맨다의 아버지인 월터를 찾아가게 된다. 그러면서 엘리자베스는 TV쇼의 진행자가 된다. 화학자인 그녀가 요리연구가가 된 것이다. 요리는 화학작용의 산물이니까 그녀가 잘 해내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덮을 때까지 그녀가 내려주는 커피가 정말로 궁금했다.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었고, 수많은 슬픔과 좌절이 있었다. 그런 가운데 엘리자베스가 살 수 있었던 것은 의무감, 책임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자신을 보살펴주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매들린과 '여섯시-삼십분'과 해리엇이 있었기에, 월터가, 메이슨이, 웨이클리가 있었기에 엘리자베스는 살아갈 수 있었다. 세상은 이렇게 생각이 달라도, 너무 혁신적이라 해도 지지해주는 이들이 있다. 어쩌면 그것이 진짜 '행운의 반전'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 뚝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돈 많은 누군가의 생모가 아니라 말이다.   


엘리자베스 조트가 살아가던 시대에는 그녀가 자신의 연구 분야인 '화학진화'를 계속 주도적으로 연구할 방법이 저런 조력자가 나타나는 수밖에 없는 건지도 모른다. 실력을 실력으로 인정해주지 않는 시대이니까, 그녀는 '그'가 아니니까. 그렇기에 이런 행운이라도 반갑다. 에이버리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서 대리인을 내세워야 했기에 이렇게 늦어졌지만 말이다. 아버지가 아니었기에 엘리자베스를 이해할 수 있었고, 이 행운 덕에 이렇게라도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지만 좋다. 엘리자베스 조트가 노벨화학상이라도 받으면 좋겠다. 그래서 수많은 여자 아이들의 우상이 되면 좋겠다.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평균적 욕구는 남성이 여성보다 더 크지만(능력과는 상관없다),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진 여성은 여성 지도자를 보면 리더십을 추구하는 경향이 높아진다고 하니까 말이다. 

"조상이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네가 중요하거나 똑똑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니란다. 너를 너답게 만드는 건 조상이 아니야."
"그럼 나를 나답게 만드는 건 뭐예요?"
"네가 선택하는 것들이지. 네가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이 너를 너답게 만든단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는 방식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해요. 노예처럼요."
"뭐, 그것도 사실이구나."
아이의 말에 담긴 단순한 진리에 목사는 어쩐지 분해졌다. - P60

"적응하지 못한다는 느낌은 끔찍합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소속감을 느끼고 싶어 하는 게 자연스러우니까요. 그건 생물학적 현상입니다. 그러나 사회는 우리가 소속감을 느끼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곳이라는 생각이 들죠.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압니까, 필? 우리가 자신을 쓸모없는 잣대에 맞추려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성별과 인종, 종교와 정치, 학연 등등, 심지어 신장과 체중도-" - P104

"반면 <6시 저녁 식사>는 인간의 공통점이 화학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 시청자들이 이제껏 배워온 사회 규범, 즉 ‘남자는 이렇고 여자는 저렇다‘식의 케케묵은 관념에 저도 모르게 얽매여 있더라도, 우리 방송은 문화적 단일성을 넘어서 생각하도록 격려해주는 겁니다. 분별력을 갖추고 과학자처럼 생각하라고 말입니다." - P105

"마저리도 이 점엔 분명히 동감하겠지요. 제일 어려운 일은 학업을 다시 시작하는 게 아니라 그럴 용기를 갖는 거란 사실을요."
그녀는 종이를 얹은 이젤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마커를 쥐고 "화학은 변화다"라는 문장을 쓰고서 방청객을 돌아보았다.
"자신에 대한 의심이 들 때마다, 두려움을 느낄 때마다 이것만 깅거하십시오. 용기는 변화의 뿌리라는 말을요. 화학적으로 우리는 변화할 수 있게 만들어진 존재입니다. 그러니 내일 아침 일어나면 다짐하십시오. 무엇도 나 자신을 막을 수 없다고. 내가 뭘 할 수 있고 할 수 없는지 더는 다른 사람의 의견에 따라 규정하지 말자고. 누구도 더는 성별이나 인종, 경제적 수준이나 종교 같은 쓸모없는 범주로 나를 분류하게 두지 말자고. 여러분의 재능을 잠재우지 마십시오, 숙녀분들. 여러분의 미래를 직접 그려보십시오. 오늘 집에 가시면 본인이 무엇을 바꿀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시작하십시오."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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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0-03 22: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문학이 우리의 뇌에 하는 역할이 흥미롭네요. 문학이 우리가 뇌를 낙관적으로 만들어주고 고난을 헤쳐나갈 힘을 준다는데 동의합니다. 저는 그걸 심리적으로만 생각했는데 뇌 역시 그걸 돕는다니 더 문학이 좋아질듯합니다. 어쨌든 저도 이 책 읽고 싶어요. 뭔가 좀 우울할때 행운과 해피엔딩이 있는 소설은 기분전환이 확 되지 않을까 싶은데 왠지 이 소설이 그럴거 같거든요. ^^

꼬마요정 2022-10-04 22:48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 읽으면서 실제로 문학이 뇌에 작용하기 때문에 우리가 감동 받는건가 싶더라구요. 읽는 중인데 재미있고 신기합니다. 이 책이랑 로버트 차알디니의 사회심리학이 책 읽는데 도움이 많이 되네요. 이 소설도 어찌보면 너무 잘 풀리는건가 싶지만 또 그런 행운이 우리에게 희망을 줄 수 있으니까요. 저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바람돌이님께도 행복한 기운 전해지면 좋겠어요^^

책읽는나무 2022-10-04 08: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이 자주 올라오던데 흥미로운 책이군요?
좌뇌, 우뇌...그리고 비관론의 반은 비어 있고, 낙관론의 반은 가득 차 있는 셈이다.
그리고 뇌의 영향을 위해 문학을 읽는 이유!
모두가 흥미롭습니다^^
비가 오는 화요일입니다. 즐거운 하루 되세요. 요정님~^^

꼬마요정 2022-10-04 22:50   좋아요 1 | URL
그쵸 그쵸. 너무 신기하고 흥미로워요. 제가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들이 뇌의 작용이라니… 사실 뇌가 작용하니까 느끼는 건데 괜히 마음이 움직이는 거라고 생각하잖아요 ㅎㅎㅎ 우울할 땐 우뇌를 살짝 때려도 좋대요. 그보다는 문학을 읽는 게 더 좋다고 하구요.
즐거운 밤 시간 보내세요. 기분 좋은 꿈 꾸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