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친코 1
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 문학사상 / 201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무슨 말로 시작해야할까 고민했다. 읽는 내내 갑갑하고 화가 났으니까. 모든 것을 다 떠나서 개신교와 가부장제의 결합이 여성에게 얼마나 억압적인지, 나라를 빼앗긴 백성들이 얼마나 비참한지 이 두 가지가 화가 났다. 


188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4대의 이야기를 그린다는 이 소설은 처음부터 막 읽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엄청난 돈을 들여 만든 드라마의 원작이라고 하고, 미국에서 극찬을 받았다고 하고, 윤여정과 이민호가 나온다고 하는 와중에 판권 문제로 일시품절이라고 하는 거다. 책이 늘 있으면 나중에 읽으면 되지만 없으면 못 읽지 않나. 괜히 하나 남았어요, 이러면 사는 것처럼 책을 구할 수 없게 된다고 하자 미친듯이 읽고 싶어졌다. 물론 책이야 다시 나올테다. 어쩌면 표지도 더 예뻐지고, 번역도 더 좋아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니까. 남편의 지인분이 너무 고맙게도 구해서 남편 생일선물로 주셨다. 고맙습니다^^


아직 2권을 읽지 않은 시점에서 일단 1권은 기대보다 평범해서 놀랐다. 이 소설이 왜 그렇게 난리일까. 이건 예전에 <블라인드 사이드>를 봤을 때 느꼈던 기분이었다. 아주 미국적인, 미국 중산층 이상의 백인이 갖춰야 할 덕목을 보여주던 그 영화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 책은 미국인이 추구하는 인간상을 백인이 아닌 유색인이자 아시아인이자 식민지를 경험한 여성에게 입혀 이야기를 하는 것이 된다. '선자'는 미국이 생각하는 가치를 표현하는 인물인 거다.


그리고 개신교도 빼 놓을 순 없겠다. 이삭과 요셉에서 노아와 모세로 모세에서 솔로몬(1권에는 나오지 않지만)으로 이어지는 이들의 이야기는 성경책의 구절이 떠오른다. 하지만 또 이렇게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시경'(주 무왕의 조상들)에서도 볼 수 있고, '용비어천가'(이성계의 조상들)에서도 볼 수 있고, '고려사'(왕건의 조상들)에서도 볼 수 있다.(앗, 아들에서 아버지로 이어지는 건가..) 


이제껏 미국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 대륙으로 와서 자신과 다른 인종, 자신의 가치와 다른 가치를 지닌 사람들을 무시하고 경멸하고 파괴했다. 하지만 그들은 청교도가 뿌리에 있기에 도덕적인 가치가 그들에게 있기를 바랐다. 그랬기에 겉과 속은 다를지라도 '선'을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길 원했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럴 필요가 없다. 주인공이 피해자이니까. 


유색인, 아시아인, 식민지인, 여성, 미혼모, 가난한 이. 이보다 더한 약자가 있을까.


선자는 아버지인 훈이와 어머니인 양진이 사랑으로 키운 딸이다. 아버지의 사랑과 어머니의 훈육은 그녀를 강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식민지 시대의 가난한 평민의 과년한 딸이 세상을 아름답게만 살 수는 없었다. 어시장에서 영도로 돌아오는 길에 일본인 남학생들에게 희롱당하는 것을 '한수'가 구해주면서 선자는 남자를 알게 된다. 평범하게 가정을 꾸려 아내로서 본분을 다하기를 기대했던 선자는 현지처가 되라는 한수의 말을 거절한다. 온전히 사랑받길 원했다. 그와의 아이를 낳고 그렇게 가정을 이루며 살기를 바랐다. 게다가 아버지가 주신 사랑이 있는데, 어머니가 힘들게 일해서 자신을 키웠는데 어떻게 그들을 손가락질 받게 할 수 있을까. 선자는 강한 여성이었다. 그리고 구원처럼 그녀 앞에 이삭이 나타난다.


이삭은 고귀한 이상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고자 선자와 결혼하고, 형인 요셉이 있는 오사카로 함께 떠난다. 요셉은 목회자는 아니지만 가부장적인 사람이다. 남자라면 당연히 집안을 책임져야 하고, 아내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은연중에 양반이 아닌 선자는 일을 해도 상관없고 그녀가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걸 드러낸다. 


돈 문제가 생겼을 때, 선자는 한수가 준 시계를 팔아 빚을 갚는다. 이 때 요셉은 심하게 화를 냈는데, 그 이유가 자신의 '체면'이 깎였기 때문이다. '힘들게 일하는 아내들에게 붙어사는 다른 남자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게 생겼다.'(p.227)고 화가 난 것이다. 이는 어쩌면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구시대 인물과 변하는 시대를 살아갈 인물의 충돌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과거의 관습에 머물러 있는 요셉과 경희는 아무리 노력해도 헤쳐나가지 못하지만, 선자와 이삭은 다르다. 그리고 이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아니지만 화가 난다. 


2차 세계대전은 점점 끝으로 치닫고, 일본은 패망하기 직전이다. 전쟁으로 물자가 부족한데다 검열도 심해져 이삭은 일본 경찰에 끌려간다. 그리고 한수가 나타난다.


선자에겐 노아와 모자수 두 아들이 있고, 요셉과 경희가 있다. 아프고 힘든 시대를 잘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제발.


굳이 김창호의 성생활이 필요한 장치였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창호가 사랑하는 경희는 성녀다. 그런 그녀를 창녀의 위치로 끌어내리지 않기를. 아니, 그냥 한 인간으로 봐주길.


덧붙이자면 한수라는 인물이 신기하다. 아이까지 가지게 해놓고 아들임을 알면서도 몰아붙이지는 않는다. '거절'을, 선자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게 신기했다. 물론 계속 아이들을 미끼로 자신이 원하는 쪽으로 조종하는 것 같지만. 먹고 사는 문제는 정말 어렵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 P11

"빌어먹을 양반 나리들이 우리를 팔아버렸으이. 배짱 있는 양반이 한 놈도 없지예."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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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집 2022-05-02 2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 스탈의 소설은 아닌 것 같어요. 읽다 갑갑해서 폭팔할 듯 싶어요!! 유투브 보니 남편이 일본인이던데.. 남편이 이 작품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궁금은 해요!

꼬마요정 2022-05-03 14:50   좋아요 0 | URL
그렇네요. 저도 궁금해집니다. 남편이 일본계 미국인이라 더 일본 내 조선인에 대해 알게 됐다고 하더라구요. 일본인은 잘못을 드러내는 걸 수치스러워하기 때문에 자꾸 역사를 묻으려 한다네요. 지금 일본 젊은이들은 2차 세계대전 때 자기들이 미국 편인 줄 알고 있기도 한답니다. 그들이 역사적 사실을 알게 된다면 좋겠는데요. 사실 어찌보면 작가나 남편이나 다 미국인이니까요. 그래도 한국의 역사를 제대로 알려주면 고맙죠.

갑갑한 거에 비하면 책은 잘 읽힙니다. 재미있어요. 다만 선자가 마음에 참 걸려서요. 윤여정님 연기 얼마나 잘 하셨을지 드라마 보려구요.

scott 2022-05-09 16: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다가 집어 치우기를 수 개월! 했습니다

영상을 보니 그나마 고구마가 조금 해소 되었지만,,,,

작가님 시어머니가 현재 일본에 살고 계신데

이 책은 안 읽으셨다고 ㅎㅎㅎ

이번에 다른 출판사에서 개정판 나올때
번역 대폭 수정 한다고 하네요 ^ㅅ^

꼬마요정 2022-05-10 09:52   좋아요 1 | URL
남의 나라 이야기는 폭력이나 착취가 심해도 제국주의는 나쁘다며 읽으면서, 우리 역사인 일제강점기나 독재 이야기는 참 견디기 힘드네요. 한국사 특히 근대 이후 역사를 전공하시는 분들 대단하신 듯 합니다.

인세가 어마어마 하던데요. 다시 나와도 여전히 이슈가 되고 잘 팔릴지 모르겠습니다만 다시금 역사를 돌아보는 좋은 계기가 되네요. 아울러 세계적으로도 이런 일이 있었다 알려진 것도 고맙구요. 번역 수정 되면 또 읽어야 하나요ㅠㅠㅠ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