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람답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영화 <바이센테니얼 맨>에서 케첩 한 방울이 가져 온 오류가 조건이 될 수 있을까? 한 때 온 몸이 인간이었으나 모두 기계로 대체된다면, 과연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은하철도 999>에서 메텔은 기계일까, 사람일까. 불과 한 세기 정도만 지난 미래에 세상은 미세먼지보다도 더 악독한 먼지로 뒤덮인 채 멸망으로 걸어가는 듯하다. 코로나19가 전세계를 혼란으로 몰아넣은 것처럼 더스트는 온 지구를 혼란과 죽음 속으로 던져버렸다. 선량한 사람들은 비열하게라도 살아남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희생되기 일쑤였고, 돔시티로 들어오는 낯선 이들을 거부하고 밀어냈다. 추악하고 이기적인 공동체들… 살고자 하는 게 죄는 아니나 타인을 희생시키는 것이 당연한 것만은 아닐테다. 그런 지옥 같은 곳에서도 사람들은 살아갔다. 아주 작은 희망이라도 품었고,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하기를 꿈꿨다. 프롤로그부터 마지막까지 이야기는 베를 짜며 노래하듯 그렇게 이어진다. 노래하듯 베를 짜는 모습을 보다 보면 어느새 훌륭한 태피스트리를 마주하게 된다. 그렇다. 추악해도 인간이고 고귀해도 인간이고 수치스러워하는 것도 인간이다. 아마라와 나오미가 우여곡절 끝에 만난 곳인 프림 빌리지의 이야기와 더스트가 종식된 후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 아영의 이야기는 날실과 씨실이 교차되듯 그렇게 이어진다. 아영의 기억 속 아름다운 푸른 먼지와 이희수는 프림 빌리지의 아슬아슬한 희망과 연결되고, 아영에게 실마리를 제공하는 그는 유기체 비율이 없어진 레이첼과 닿아있다.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지수와 자신의 감정이 시키는대로 지수를 묶어두고자 했던 레이첼의 관계는 모스바나의 역설만큼이나 혼란스럽고도 뚜렷했다. 레이첼의 감정은 단지 스위치 하나 때문에 발전한 걸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어찌할 수 없는 이런 혼란에 휩싸인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까. 기후 위기는 이미 우리 주변에서 우리를 위협하고, 장미빛 미래를 꿈꾸는 것이 어리석어 보이는 요즘, 어떻게든 함께 살아가고자 하던 이들의 마음이 엿보이는 소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