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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기와 우연의 역사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휴머니스트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을 접할 때마다 느낀다. 내가 독일어를 잘 해서 원서를 읽을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번역한 책의 문체가 이토록 유려할진대, 원서로 읽으면 그 감동이 사뭇 더 깊어지지 않겠는가. 허나 나는 그냥 번역된 책이라도 열심히 뒤적일거다. 배우고픈 언어가 어디 독일어 뿐이겠는가.
슈테판 츠바이크가 뽑아 올린 12가지 이야기들은 세계사, 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서양사에서 유명한 사건들이다. 오직 하나, 천년 제국 비잔틴을 무너뜨린 내가 좋아하는 마흐메트 이야기만이 동양과 서양을 관통한다고나 할까. 그래서 인류 역사를 바꾼 순간들이란 제목은 뭔가 맞지 않다는 생각이다. 나라면 칭기즈칸 이야기도 넣었을텐데. 광기와 딱 들어맞는 인물이 아닌가. 여전히 우리사회에 깔려있는 서양 동경하기가 남아있는 제목이다.
너무나도 유명한, 그래서 음악 교과서에도 나오는 헨델의 메시아. 그가 생애를 통틀어 단 한 번, 신의 은총을 입어 작곡했다는 그 신성한 곡. 내가 신자가 아니라서일지도 모르지만, 내겐 그다지 큰 영감을 주지 못했다. 남들이 좋다고, 불멸의 곡이라고 하니까 그런가보다 할 뿐. 프랑스 혁명을 달군 노래 라 마르세예즈 역시 마찬가지다. 제대로 들어보지 못한 그 곡이 내게 광기로 다가올 수는 없다. 하지만 위의 두 곡 모두 한 세대를 통과해 아직까지 그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는 걸 보면, 역사는 츠바이크의 말처럼 어느 순간 별처럼 나타나 모든 에너지를 응축하여 한 인간을 통해 광기로서 그 빛을 퍼뜨리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역사는 한 사람 한 사람 살아가면서 만들어가는 것인데, 한 사람의 천재에게만 그 짐을 지우는 건 오만이 아닐까. 한 사람의 천재가 나기 위해 수없이 스러져간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 어쩌면 천재는 그들의 에너지를 모아 그들 모두를 대표하여 그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게 맞지 않을까.
이 책 전체를 통틀어 우연이란 존재가 역사를 좌지우지 한 건, 어쩌면 그건 필연일지도 모르지만, 두 가지 이야기다. 마흐메트의 비잔틴 제국 함락과 나폴레옹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고 만 것. 역사가 결정지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이 두 사건은 어처구니없는 일이 한 시대를, 한 국가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놀랍게도 전쟁 중에 성문 하나를 잠그지 않는다는 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 열린 성문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비잔틴은 망했을테지만, 그 천년 명성에 전혀 어울리지 않게 한 줌의 재로 화해버리다니.. 마치 한 편의 블랙 코메디를 보는 듯하다. 워털루 전투는 또 어떠한가. 역사는 이미 결정을 내린 게 아니었을까. 나폴레옹이 더 이상 세계를 호령할 수 없도록 말이다. 그러니 극적 탈출을 감행한 그의 곁에 결단력 있는 장군이 아무도 없었다. 그의 패배가 결정지어진거다.
톨스토이의 작품에 덧붙인 에필로그는 인상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글에서 신을 섬기고 노동자로 돌아가라고 외치고 있지만, 정작 자신은 대지주에 백작이라는 귀족이다. 이런 괴리를 어쩌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다 마침내 생의 마지막에 와서야 끝장을 내버리는 게 인상적이었다. 뭐, 작품을 볼 때 작가까지 보지는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딜가나 탐욕은 화를 부른다. 황금에 대한 광기에 휩싸여 결국 좋지 못한 결말을 맞이한 두 사나이, 발보아와 수터. 둘 다 불한당이었으니, 역사에 이 정도라도 이름이 남아있는 걸 감사하게 생각해야겠지. 물론 침략 당한 자들의 입장에서는 수치스러운 역사일테고. 특히 발보아. 이 사람은 시대의 죄인이라고 해주었으면 좋겠다. 그와 그가 이끈 사람들이 죽인 원주민의 숫자를 떠나서 그들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그들이 짓밟은 문명의 가치가 얼마나 되는지. 제발 그네들의 입장에서 개화이니 문명을 전달했다느니 하는 개소리는 집어치워주길. 황금 때문에 눈이 멀어 서로를 살상하는 게 어딜 봐서 문명인가. 이들이 발견한 땅은 그들의 땅이 아니다. 스페인의 땅이 아니다. 그 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땅이다.
차라리 불굴의 의지로 대양 간 케이블을 깐 사이러스 필드야말로 영웅이지 않을까. 모두가 불가능이라고 외치던 일을 여러 번이나 실패하고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이루어낸 그 집념.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광기라고 생각한다.
레닌의 이야기가 너무 짧게 다루어져 아쉬웠다. 역사는 사람을 선택하는 게 틀림없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 게 바로 레닌이었으니. 그런 방식으로 러시아로 돌아올 생각을 하다니. 그가 탄 봉인열차야말로 새로운 한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