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슬픔이 나를 깨운다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90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8월
평점 :
완연한 가을이다.
작년 가을,이곳에서 누군가는 '완연하다'라는 표현을 곧잘 쓴다고 했었던 것같다.
그 후로 나도 '완연한 가을'이라는 말을 곱씹어 보게 된다.
잃어버린 물건을 뒤져 찾는 듯한 기분으로 이 책을 좀 읽다가,저 책을 좀 읽다가
나중에 고개 들어보니 내 앞에 책탑이 거대하게 쌓여 있었다.
지금 나 뭐하나? 싶은 마음이 들던차,
딸도 잔소리 한다.
도서관에서 빌려 온 책들은 그냥 도서관에 반납하면 안되냐고,
엄마책 때문에 탁자 정리가 안된다고.....
딸들은 친구를 초대해 놓고 분주하게 자기들 책상을 치우고,거실 탁자를 치우던 차,
자신들의 책을 정리해도 엄마 책탑 때문에 치운 흔적이 나질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었나보다.
그래 나 지금 뭐하는거니??
완연한 가을이기 때문에....
좀 어질러 놓고 산들??
핑계를 대고 있는데 책탑속에서 시집 한 권이 눈에 들어온다.
오래전 ㅇ님으로부터 선물 받았는데 현재 읽는 중인 책들에 밀려 나 있던 시집이었다.
문득, 가을 밤 책을 펼치니 이 시집은 내가 스무 살 시절에 나왔었던 시집이었고,
십 년 전 다른 이의 서재에서 발견하곤 읽어봐야지! 눈도장 찍었던 시집이란걸
며칠전에야 알았다.그러니까,무려 이십 년이 훨씬 지나서야 시집을 읽게 된 셈인데,
나는 그시간동안 무얼하고 살았나?잠깐 회상에 젖는다.
결코 짧은시간이 아니었건만, 내겐 왜 2년 같은 시간으로 다가오는건지...
완연한 가을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지도??
이렇게,
'가을'타령을 하면서 억지로 구색을 끼워맞추는 이유가 있다.
나는 이시집에서 '가을'이라는 단어를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다.
하늘 높은 이 가을에 의도치 않게 가을에 관한 시집을 읽은 기분이 든다.
가을
흰 빛, 흰 빛을 쏘는 돌길에
상수리가 떨어진다.
흰 빛, 흰 빛을
쏘는 돌길에
철망에 걸린 녹슨 햇빛보다
오래, 오래 버티던 가랑잎이
굴러떨어진다.
가을,
따돌려지는 듯한
편안함.
---가을, 따돌려지는 듯한 편안함.
이 대목이 가슴에 싸하게 천천히 스미는 듯하다.
축, 10월!
요 며칠 사이, 누군가 자꾸 창을 기웃거리는 것 같아
뒤숭숭해 있었다.
나무:그대에게 내
흔들리는 손 보냅니다.
작별이 아닌
안부의 손짓을.
저기 저 들판에
겸허히 꿇어엎딘 무리들 보셨나요?
햇님과 바람에 경배 드리는 낟가리들이군요.
그대도 추수를 마치셨는지?
좀더 추운 날
달님보다 창백한 햇님 아래
그대의 들을 찾을
땅뙈기 없는 이를 위해
이삭이나 넉넉히 남기셨는지?
난 한 다발 일국을 두겠어요.
내 작은 뜨락에 들를
그대를 위해.
축, 10월!
---그러고보니 10월도 중반을 넘어섰다.
축, 10월은 곧 축 11월이 될터이지만 왠지 11월은 축하받기 힘든 달이지 않은가!
10월은 완연한 가을이 될 수 있지만 11월은 가을이 물러나고 겨울이 슬금슬금 숨어 들어오기 때문에 그닥 반갑지 않다.또한 12월의 달력이 한 장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11월에 미리 체념하고 미련을 가지기 때문이다.
다시 가을
구름은 비를 쏟았다
날짜들이 흘러가고
사과나무는 여기저기 사과를 쏟고
마른 나뭇잎 속에서 늙은 거미는
연약하게 댕댕거린다
햇빛이 오래앉았다 간 자리
바람이 오래 만지작거린 하늘
새들이 날아간다
빈 하늘이 날아가버리지 못하게
매달아 놓은 추처럼.
---가을이므로 구름이 비를 쏟는 것처럼,사과나무가 사과를 쏟아낸단다.
쏟아낸 사과를 즐겁게 담뿍 담아냈으면 바라는 나의 마음을 ㅋ님께 보낸다.
ㅋ님의 새콤달콤 사과를 떠올리자니 벌써 입에 침이 고이는데,
시를 읽으면 왠지 잇몸에 침이 고인다.
꽃사과 꽃이 피었다
꽃사과 꽃이 피었다.
계단을 오르면서 눈을 치켜들자
떨어지던 꽃사과 꽃
도로 튀어오른다.
바람도 미미한데
희디흰 불꽃이다.
꽃사과 꽃, 꽃사과 꽃.
눈으로 코로 달려든다.
나는 팔을 뻗었다.
나는 불이 붙었다.
공기가 갈라졌다.
하! 하! 하!
식물원 지붕 위에서
비둘기가 내려다본다. 가느스름 눈을 뜨고.
여덟시 십분전의 공중목욕탕 욕조물처럼
그대로 식기 전에 누군가의 몸 속에 침두하길 열망하는
누우런 손가락엔
열 개의 창백한 손톱 외에
아무것도 피어 있지 않다.
내 청춘, 늘 움츠려
아무것도 피우지 못했다,아무것도
꽃사과 꽃 피었다.
--이 시를 읽고 갑자기 사과 꽃이 보고 싶어 ㅋ님의 서재로 기어 들어가 봄에 올린 사과 꽃을 원없이 보았다.사과밭이 주변에 없다.대신 어린시절 우리 동네에는 배밭이 많았다.지금은 그 배밭도 거의 없어진 상태이지만.....
사과꽃이 흐드러지게 핀 광경을 보질 못해 아쉽다가도 어린시절 보았던 배밭에 핀 하얀 배꽃의 풍경이 아련하게 일품이었는데 그런 모습이려나? 상상해보곤 한다.
시는 대체로 순하고 착하다.
예전에 쓰여진 시라서 그런건지,
아니면 내가 나이 먹은 것인지,
잘 모르겠으나
문득 그 중 강렬한 것이 눈에 띈다.
깨어진 손
깨어진 너의 손 보고 있자니
내 눈이 아리구나
한 눈에선 머큐로크롬이
한 눈에선 선혈이 흐르는구나
깨어진 너의 손 보고 있자니
네 심장만 같구나
내 심장만 같구나
깨어진 너의 손에 엉긴 피
너는 그것을 추억인 듯
모욕인 듯 핥는구나
딱정이를 떼고
배어나는 피향내를
킁킁거리는구나
그 속에 나는 없구나.
가을이라고 아이들은 어제 가을 현장학습을 다녀왔었다.
보고 있자니 그리고 듣고 있자니,
나도 가을 소풍을 다녀오고 싶구나!
나도 가을 소풍 그 속에 있고 싶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