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 여 편의 시를 쓴 에밀리 디킨슨.
정작 살아있을 때는 출판되지 않았지만,
사후에 파시클에 보관된 그녀의 시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기존에 쓰여지지 않은, 일반적인 문법을 따르지 않고 압축된 시어로 풀어 낸 그녀의 시는 사랑, 자연, 죽음, 불멸이 주된 주제이다. 집에서 오랜시간 바깥 출입을 제한하고, 흰옷을 입고 머물러 있었다 하여, 은둔자, 우울증 환자 취급한 비평가들이 많았지만 그녀는 결코 그렇게 폄하될 시인이 아니었다.

정원을 가꾸는 것에 있어 거의 전문가적 손길을 가지고 있어, 정원을 손질하며 자연을 노래한 시들이 제법 보인다.
연애도 못하고 죽은 노처녀 취급하지만 디킨슨은 남자와도 썸을 두 번이나 탔으며, 아픔과 시련도 시로 승화시킨 참 시인이다.
시를 읽어보면 디킨슨 시인은 의지가 강하고, 통통 튀는 듯한 느낌이다. 내겐 통통 튀는 디킨슨 시인이라 더없이 참 좋다.

디킨슨의 시는 쉬우면 쉬운대로,
어려우면 어려운대로 그냥 읽는다.
그러라고 시로 존재하는 게 아닌가 싶다.





시 288 난 무명인이오! 당신은 누구시오?


난 무명인이오! 당신은 누구시오?
당신도-무명인-이오?
그렇다면 우리는 한 쌍이군요?
말하지 마시오! 사람들이 떠들어댈 테니-잘 아시잖소!

유명인이 되는 게 - 얼마나 처량한지! - P44

시 318. 해가 어떻게 떠오르는지를 내가 말해주지

해가 어떻게 떠오르는지를 내가 말해주지 -
"처음엔 리본 모양이었어 -
첨탑은 자수정 속에서 헤엄쳤고ㅡ
소식은 다람쥐처럼 -
보닛 모자를 풀어놓은 산을 달렸고-쌀먹이 새들은 하루를 시작했지
그래서 나는 혼자 속삭였어-
"저건 일출임에 틀림없어!"
하지만 해가 어떻게 지는지 - 난 알 수가 없어-노란 옷을 입은 꼬마 소년 소녀들이
- P49

보랏빛으로 된 울타리의 밟고 넘어가는 계단을
내내 기어 올라왔고ㅡ
이윽고 울타리 반대편 계단에 이르자
회색 옷을 입은 목자가-
저녁 빗장을 살그머니 건 뒤-
양 떼를 몰고 가는 것 같았으니까. - P50

시 510. 그것은 죽음은 아니었네

그것은 죽음은 아니었네, 왜냐하면 죽은 자들은
모두 누워 있는데, 나는 서 있었으니까-그것은 밤은 아니었네, 왜냐하면 모든 종들이
정오를 알리느라 혀를 내두르고 있었으니까-

그것은 서리는 아니었네, 왜냐하면 내 살에
시로코 열풍이 - 기어가는 것을 느꼈으니까-불도 아니었네ㅡ왜냐하면 대리석 같은 내 발이
교회의 성단소라도 냉각시켰을 테니까-

그렇지만, 그것은 그 모든 것들처럼 느껴졌다네.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매장을 위해 잘 손질된 유해에 대한 기억이
나의 매장을 상기시켰네-

마치 내 생명이 대패질되어
관에 맞추어 들어감으로써, - P65

열쇠 없이는 숨도 쉬지 못할 것 같았네.
그것은 여느, 자정 같았네-

째깍거리던 모든 것이 - 멈추고 -
공간이 사방을 응시하거나-아니면, 초가을 아침에 소름 끼치는 서리가,
고동치는 대지를 고동치지 못하게 하는 그런 때 같았다네ㅡ

아니, 차라리, 어떤 가망성도 없고, 구원의 돛배도 없는ㅡ
육지가 보인다는 소식도 없는-
단지, 절망을 정당화하는--
춥고-망망한-혼돈의 바다 같았다네. - P66

시 528. 하얀 선택의 권리에 따른 내 사랑!


하얀 선택의 권리에 따른- 내 사랑!
왕의 옥새로 증명된- 내 사랑!
법의 창살로도-막을 수 없는
주홍빛 감옥의 옥새로 인증받은- 내 사랑!


이 세상에서는 금지된 - 환상인-내 사랑!
무덤 폐지령을 받은-
작위를 부여받은- 승인을 받은-
황홀한 특허장인 - 내 사랑!
흐르는 세월만큼 오래갈- 내 사랑! - P71

시 633. 종소리가 멈추고 교회가 시작될 때

종소리가 멈추고-교회가 시작될 때-
그건 바로, 종소리의 궁극.
톱니바퀴가 멈추고-원이 될 때 -
그건 바로, 바퀴의 궁극. - P80

시 754. 장전된 한 자루의 총인 나의 생명이

장전된 한 자루의 총인-나의 생명이
모퉁이에 서 있었네 - 주인이 지나가다
내 존재를 알아보고-나를 데리고 나가는 그날까지-

이제 우리는 장엄한 숲 속을 헤매고 다닌다네 -이제 우리는 암사슴을 사냥한다네-
내가 그를 대변할 때마다-
산이 곧장 맞받아 대답을 한다네-

아주 따스한 햇살이 계곡에 반짝일 정도로
나는 미소 짓는다네-
그 미소는 베수비오 화산이
만면에 기쁨을 분출했을 때와 같다네-

우리의 멋진 낮이 끝나고-밤이 되면
나는 내 주인의 머리맡에서 경비를 선다네- - P96

함께했던 낮 시절이
푹신한 오리털 베개보다 더 좋다네 -

주인의 적에게 나는 치명적인 적이라네-
내 노란 눈알을-
아니, 내 힘찬 엄지 낙점을 받으면ㅡ
다시 꿈틀거릴 자가 없기에ㅡ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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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2-12-13 02: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이 다 똑같이 살지 않아도 괜찮겠지요 다르게 살면 어떤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 사람 마음을 다 알기는 어렵기도 하잖아요 그 사람 나름대로 즐겁게 살기도 하겠지요 에밀리 디킨슨도 밖에 나오지 않았을 뿐이고 자연과 함께 사랑도 잊지 않고 살았을 것 같습니다


희선

책읽는나무 2022-12-13 07:56   좋아요 1 | URL
디킨슨은 은둔자였다곤 하지만 부러 은둔한 것이 아니고, 그저 집순이 스타일이었지 싶어요.
집순이들은 집에 있어도 할 일이 너무 많잖아요?^^
정원도 가꾸고, 베이커리도 하고, 시도 쓰고...넘 바빴을 것 같아요.
아직 디킨슨의 책을 다 읽진 못했는데 디킨슨 관련 책을 읽으니 재밌네요.

stella.K 2022-12-13 12: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1800편...?! 대단하네요.
살아있을 땐 빛을 보지 못하고. 왜 그랬을까요?
디킨슨이 요즘에 살았더라면 SNS에 시 막 올리고
얼굴없는 시인이 됐을지도 모르는데 시대를 잘못 태어난 탓도 있을 것 같네요.
역시 책나무님을 비롯한 몇몇 알라디더 덕분으로 디킨슨의 시가
다시 주목을 받는 건 좋은 일이네요.^^

책읽는나무 2022-12-13 17:52   좋아요 2 | URL
대단하죠?
1800편이면 거의 매일 시를 썼다고 봐야겠죠??^^
시가 제법 당차고, 절대 기 죽지 않는 당당함이 느껴지던데 제 느낌적 느낌인 건지?
한 번 페이퍼로 정리해본다는 게 계속 미루다 보니 읽은 시들은 다 까먹고~ㅜㅜ
그렇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