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박받고 자란 어린 제인 에어는 작은 가슴 속에 불구덩이 같은 분노와 복수를 품고 산다. 하지만, 어린 아이에게 그것은 너무 가혹하게 스스로를 손발을 묶어 놓아, 비뚤게 성장시키는 원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성인군자같은 헬렌을 잠깐 등장시켰던 듯 하다.
과연 10대 초반 아이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인가?
의아스럽지만, 제인 에어는 헬렌의 세상 통달한 듯한 이야기들을 통해 조금씩 마음을 정화시켜 나가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템플 선생의 다정한 보살핌으로 제인 에어는 좀 더 성숙하고, 실력있는 여성의 면모를 갖추어 나간다.
이런 걸 보면 아이들에게 주변 환경의 모습과, 어떤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의 영향을 받느냐에 따라,
평생 갖춰야 할 인격체를 그 시기에 형성되는 것이란 생각이 미치면 조금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아. 아주 훌륭해. 너는 좋게 대해 주는 사람에겐 아주 좋게 굴고 있는 거야. 나도 꼭 그러고 싶어. 만약 잔인하고 옳지 않은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굴며 복종을하게 되면 고약한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기들 마음대로 하게 될 것 아냐. 그들은 겁 없이 굴고 고약한 버릇을 고치기는 커녕 점점 더 고약해질 거야. 까닭 없이 손찌검을 당하면 이쪽에서도 곱으로 세게 대거리를 해야 할 거야. 내생각으로는 꼭 그렇게 해야 될 줄 알아. 상대방이 겁을 먹고 다시는 손찌검을 못하도록 말이야." "너도 나이를 더 먹게 되면 그런 생각을 않게 될 거야. 아직 철부지 어린아이니까 그런 소리를 하지." "그렇지만 헬렌, 나는 이렇게 생각해. 비위를 맞추려고 애를 써도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내 편에서도 미워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애매하게 나를 벌주는 사람들에겐 반항을 - P99
해야 한다고. 그건 내게 정을 주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과 똑같이 당연한 일이야. 혹은 내가 벌을 받아 마땅할 때다소곳이 벌을 받아야 하는 것과 같이 당연해." "이교도와 야만인들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 그러나 기독교인이나 문명인들은 그럴 수 없지." "어째서? 난 이해가 안 가는걸." "미움을 가장 잘 이겨내는 것은 폭력이 아니야. 상처를 아물게 하는 최상의 것이 복수인 것도 아니야." "그러면 뭐야?" "신약성서를 읽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 또는 행동하신 것을 잘 알아보렴. 예수님의 말씀을 척도로 삼고 예수님의 행동을 본으로 삼아야 해." "뭐라고 하셨기에?" "원수를 사랑하라. 그대들을 책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그대를 미워하고 미움으로 이용하는 자에게 선을 베풀지어다." "그렇다면 난 리드 부인을 사랑해야 할 텐데 그럴 수는 없는걸. 그 아들인 존을 위해 기도를 해야 할 텐데 그건 도저히 안 돼." 이제 헬렌 번스가 내게 설명을 구할 차례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나의 고초와 분노의 얘기를 내 나름으로 즉시 시작하였다. 흥분했을 때 지독한 말을 서슴지 않는 나는 조금의 사양도 없이 느낀 대로 나오는 대로 얘기를 하였다. 헬렌은 끝까지 끈기 있게 내 말을 들어주었다.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리라 기대했는데 잠자코만 있었다. - P100
"어때, 리드 부인은 매정하고 고약한 사람이지" 하고 나는 참다못해 물어보았다. "너한텐 심하게 굴었어. 틀림없이 그이는 너의 성격이 싫었던 거야. 마치 스캐처드 선생님이 내 성격을 싫어하듯이. 그렇지만 넌 그이가 한 말이나 네게 한 짓을 너무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어. 그이의 구박이 네 가슴에 못을 박아놓은 것 같아. 나는 아무리 구박을 받아도 그렇게 뼈아프게 외워두지는 않는단다. 그이의 구박이나 거기 따른 분한 생각은 잊어버리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원한을 품거나 원통한 생각을 꼬박꼬박 외워두기에는 인생이란 너무 짧은 것 같아. 우리는 누구나, 너 나 할 것 없이 이 세상에서 결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고 또 그래야 돼. 그렇지만 우리들의 흙이 되기 마련인 육체를 벗어 던짐으로써, 결점도 벗어버리고 이 귀찮은 육체와 함께 타락도 죄도 모두 사라져 버리고 영혼의 불꽃만이, 생명과 사상의 눈에는 보이지않는 본질만이 창조자의 손을 떠나 인간에게 불어넣어졌을 당시의 순수한 형태로 남아 있게 될 그날이 올 거야. 인간을 떠난 영혼은 그것이 왔던 제자리로 돌아갈 거야. 아마도 인간 이상의 어떤 존재로 옮겨지기 위해서, 아마도 창백한 인간의 영혼으로부터 최고 천사의 위치로까지, 영광의 계단을 올라가게 되는 거야. 그와 반대로 인간에서 악마로 떨어져 내려가는 법은 없을 거야. 그래, 난 그런 것은 믿을 수가 없어. 누구에게 배운 것도 아니고 또 내가입 밖에 내는 법이 거의 없지만 내게는 다른 신념이 있어. 그러나 나는 그 신념에 매달려서 기쁨을 찾고 있는 거야. - P101
모든 사람에게 희망을 던져주는 신념이니까 말이야. 내세도 안식처로 만들어줄 거야. 공포도 아니고 심연도 아닌 커다란 안식처로 만들어줄 거야. 게다가 이 신념을 가지고 있으면 죄인과 죄가 분명하게 구별되기 마련이거든. 죄를 미워하면서도 죄인을 마음 속으로 용서해 줄 수가 있단 말이야. 이 신념을 가지고 있는 한 복수로 마음을 괴롭히는 일도, 타인의 타락에 혐오감을 갖게 되는 일도, 애매한 구박에 마음이 아스러지는 일도 없게 돼. 나는 이 최후의 시간이 오기를 기다리며 조용히 살고 있는 거야." 이렇게 끝내는 헬렌의 고개는 평소에도 다소 그랬지만 아주 푹 숙여졌다. 그녀가 그 이상 나와 얘기하고 싶은 심정이 아니며 자기 마음속에서의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는 심사임을 나는 그녀의 표정에서 엿볼 수가 있었다. 하지만그녀에게는 명상의 시간이 오래 허용되지 않았다. 큰 몸집에 거칠게 생긴 반장이 가서 심한 컴벌랜드 사투리로 외치는 것이었다. "헬렌 번스, 빨리 가서 서랍을 정리하고 일감을 치워놓지 않으면 너 스캐처드 선생님께 이른다!" 꿈에서 깨어난 헬렌은 한숨을 쉬고 일어서더니 아무 말없이 단박에 반장이 시키는 대로 하였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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