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의 역광(Back Light)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마태복음서 14:30, 31(표준새번역 개정판)

기독교 신앙에서 의심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위의 본문이 이런 이미지의 근거가 되는 대표적인 본문이다. 이밖에도 믿음이 적은 자를 책망하는 예수의 모습이 복음서들에 등장하고 있다. 그래서 신앙이라는 '절대신념체계'에 대한 의심은 부족하거나 어리석은, 혹은 미숙한 신앙의 모습이거나, 심지어 신앙과 대치되는 죄와 같은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데생(소묘)에서 그림자가 생긴 부분의 가장 어두운 쪽 끝에 오히려 밝은 부분을 그려 넣는 역광(back light) 기법처럼 의심과 신앙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기도 한다. 오히려 의심이 신앙을 더욱 성숙하게 하고, 깊게 만드는 경우들이 있다. 이런 '의심의 역광'은 가장 어두운 부분 바로 옆에 있기 때문에 구별하기가 쉽지 않고 때론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점차 어두워지다가 갑자기 밝은 영역이 나타나기 때문에, 가장 어두운 곳에 밝은 빛이 빛나고 있기 때문에 그 두 영역이 연이어 있다고 여기기 어렵다.
하지만, 가장 어두운 곳에 밝은 빛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의심의 깊이 속에 잉태되는 성숙한 신앙도 잃어 버려서는 않될 신앙의 뿌리임에 틀림없다. 이는 혼란스러운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의심의 두 차원을 밝히 알아보기 시작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생명이 되는 의심과 주검이 되는 의심의 두 차원, 바로 '미숙한 신앙의 그늘인 의심'과 '신앙의 뿌리가 되는 의심'은 그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구별할 수 있다. 의심의 대상이 '하나님'이나 '하나님과의 만남과 체험' 자체일 때 그것은 미숙한 신앙이기 쉽다. 절대자의 무한함을 맛보지 못했거나 이미 맛본 것을 망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나 생각"이 의심의 대상인 것은 신앙을 끊임없이 새롭게 하고, 깊어지게 한다. 하나님 또는 절대자를 체험할 때, 인간은 그 놀라운 경험과 감동을 언어로 표현한다. 그것은 감탄이나 탄성, 흥겨운 콧노래처럼 자연스러운 것이고, 또한 이런 과정을 통해 여과될 때, 그 경험의 깊이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한 가지 이해나 해석, 종교적 표현만이 모든 것인양, 그 표현이 바로 하나님이나 절대적 체험 그 자체인양 오해하고, 고집하면서 다른 가능성을 억누를 때 그것은 커다란 오류가 되고 만다. 인간의 이해나 표현에 다 담길 수 없는 절대적 세계를 재단하고, 그 무한한 변화의 역동성을 화석화시키는 어리석음이자 오만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인간의 묘사와 체계화를 의심하는 것은 인간이 지녀야할 당연한 겸손이자 필연적인 구도의 길이다.

이런 어리석음를 끊임없이 파괴하는 의심, 겸손히 하나님의 무한하심에 고개숙이게 하는 의심이 바로 신앙의 뿌리이다. 어떤 고정된 신념체계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이 있을 때에만 신앙은 늘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고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은 늘 부드러운 변화를 이어간다. 오늘의 내 몸은 어제의 그 몸이 아니다. 죽어가고 태어나는 변화에 연이어 자리하고 있기에 몸은 살 수 있다. 이처럼 신앙도 끊임없는 의심 속에 그 생명의 고동소리를 울려가는 것이다. 화석으로 굳어진, 신앙에 대한 집착은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놀라움을 볼 수 없을 뿐더러, 그런 새로움을 정죄하고 파괴하려 한다. 이는 자신이 그려낸 하나님만이 최고의 유일한 절대자라고 고집하는 것이다. 곧 스스로가 하나님이 되려는 오만함이다. 물론 그 하나님은 낮은 곳을 향하여 자신을 비우시는 하나님은 모르고, 오로지 상승과 강함으로만 오해된 하나님일 뿐이다.
이렇게 오해와 집착, 욕망으로인해 "의심의 역광"을 잃어가는 것은 인식중심주의적 진리관의 영향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인식론적으로 파악되고 이해되는 진리만이 참된 진리라는 관점은 설명될 수 없고, 파악될 수 없는 것들은 진리의 영토 밖으로 추방해 버리곤 한다. 그로인해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 틀에 가둬둘 수 없는, 살아움직이는 진리를 받아들일 수도, 견딜 수도 없다. 체계적 설명은 일관된 체계로 고정시키고 이와 다른 형태의 것들을 거부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인가 확실하고 변하지 않는 것을 붙잡을 때에만 안정을 느끼는 마음의 욕망 때문이다. 늘 새롭게 변하는 것은 계속 허물고 쌓는 변화의 연속이기 때문에 긴장과 갈등의 압력을 견뎌야만 한다. 이런 압박감에 대한 두려움과 반작용으로인해 일관된 이해의 범주에 담을 수 있는 고정된 체계에 더 끌리기 쉽다.
그러나 자전거를 타는 법을 논리적으로 이해했다고 바로 탈 수 없고, 사람이 물에 뜬다는 것을 안다고 물에 빠져서 떠있을 수 없는 것처럼 인식이 삶으로, 몸으로 이어지는데는 엄청난 간격이 존재한다. 참된 앎은 논리적이고 인식론적으로 파악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때론 오히려 알 수 없는 신비의 그 긴장감을 견디면서 몸의 열매를 맺을 때까지 행할 때, 삶으로 베어나오는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 모름의 빈 공간에서 자유롭게 열매맺는 존재의 생명을 몸으로 삶으로 깨닫게 된다.
게다가 반대로 의심하지 않는 신앙은 그 대상이 인식론적인 신앙 체계인 경우에 삶과의 단절을 초래하는 맹목적인 신념이 될 위험에 처하기 쉽다. 삶의 복잡성과 다층성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생명의 기운은 고정된 체계에 담을 수 없다. 그런데 어느 한 체계만을 고집하게 되면 거기에서 이미 벗어나 새롭게 변해가는 일상의 생명과는 너무나 큰 간격을 둘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끊임없는 의심 속에 늘 새롭게 하나님을 만나고, 겸손히 알 수 없는 신비의 긴장감을 견딜 때, 삶으로 스며드는 신앙의 실천에 도달할 수 있다. 의심의 가장 짙은 그늘에 고여, 시간의 흐름마져 잊어버린 어느 순간에 홀연히 비춰오는 역광, 실은 그곳에서 신앙의 깊은 뿌리가 맑은 생명을 빨아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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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26 0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무늬 2004-04-26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쉬 비슷한 세대라 그런지 음악의 코드가....^^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정말 좋아하는 곡입니다. 오늘 느즈막하게 집을 나서는데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더군요. 흐린 하늘, 젖어드는 보슬비가 정말 흐린 가을 날씨 갔았습니다.

사람과 사람 간의 의심.....님의 글을 읽으며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가 생각났습니다. 자신만을 사랑한다고 굳게 믿었던 아내가 죽은 뒤에야 알게된 아내의 다른 모습....믿는 일, 혹은 믿어주는 일은 참 쉽지 않은 것 같아요. 하지만 내 믿음의 내용이 다 담을 수 없는 상대방의 깊이를 향해 마음을 열어주는 것은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내 믿음이 자칫 고정관념과 편견이 되기 쉬우니까요...."믿음과 의심의 긴장", 그 사이를 비껴가야 할 텐데...어느 한쪽도 어려우니...
 

이 번 주 채플에서는 성가대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노래 제목은 " We will claim Victory", 어두움 속에서 괴로움 당할 때 나에게 승리 주신 주님께 감사하고, 예수 안에서 승리를 외치는 곡이었다. 성가대 지휘자는 잘 못해도 웃으며 부를 것을 신신 당부했다.

성가대석에 올라 순서지를 보니, 장애인의 날, 장애해방을 위한 채플이었다. 그래서 예배가 시작되고 찬양을 하기 전에 학교에서 장애우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한 영상을 보게 되었다. 너무나 가파른 언덕, 계속 되는 계단, 장애인 시설이라고는 사용할 수 없게 만들어져 있고, 식당가는 길은 보통 사람도 조심해서 내려가야 하는 가파른 계단...그들은 교내에서 어디에라도 간다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었고 갈 때마다 누군가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한, 그 높은 현실의 벽 앞에서 멈춰있었다.

무거워지는 마음,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이 스쳐갔다. 그리고 이어질 우리의 찬양...."승리를 외쳐야 했다" 그것도 웃으면서...난 이미 시작하기도 전에 당황해하고 있었다. 장애학우들의 문제 앞에서, 그 힘겨운 절망 앞에서 승리를 웃으면 외치는 비장애인들의 찬양 ?...표정은 이미 굳어있었고 이래도 되나하는 상념에 붙들려 시작을 놓쳐버렸다. 간신히 쫓아가면서 혼신을 다해 지휘하는 지휘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그 분의 당부가 떠올랐다. 하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상념들 속에 "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한계 상황 속에서도 승리를 외칠 수 있는거야, 그게 믿음이고 신앙이지"하는 변명이 스쳤갔다. 하지만 강자가 약자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은....적어도 내가 장애우들을 향해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복잡한 상념 속에 찬양을 끝내고 자리에 앉았다. 그 때 모두들 박수를 쳐주었다.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치는 박수였을까? 그 때 장애우들의 특송이 이어졌다. 초등학생 쯤 되보이는 남학생-아마도 성장이 일찍 멈춘 듯 했다-이 혼자 노래를 부르고 나머지는 수화를 했다. 그 찬양의 가사는 내 마음을 울려왔다.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뜻하신 그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복받쳐 올라오는 눈물과 거친 호흡을 삼켜야 했다. 자기를 부인하고 모두를 위해 나아가야하는 좁은길 앞에서 난 아직도 두려워 서성이고 있다. 그런데 그런 내 앞에서 그들은 노래했다. 주님 말씀하시면 나아가고 멈춰서겠다고. 그 뜻 그대로 순종하겠다고. 천국은 어린 아이와 같은 이에 것이라 했던가? 그는 어린아이의 몸으로 노래했고, 다른 사람들은 몸으로 그 노래를 그려냈다. 하지만 그들은 주님 말씀하셔도 나아갈 수 없었고, 멈춰설 수도 없었다. 그들의 휠체어로는 순종할 수 없었다. 아니 그 휠체어가 문제가 아니라 그들 앞에 놓인 장애물이 문제였다. 바로 그들의 아픔에 무관심한 우리의 안일함이 순종할 수 없게 하는 장애물이었다. 그렇게 나의 안일함과 무관심이 그들 앞에 놓인 벽이요, 계단이요, 가파른 언덕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승리의 노래와 순종의 노래 사이에서 서성이는 나의 무거운 마음을 향해 설교자는 선포했다. 장애우는 "의미있는 사회적 약자" 라고. 정상인이 자신의 육체를 자랑하지 목하게 하는 의미있는 사회적 약자라고. 나에겐 그들이 나의 죄악을 비춰주는 거울이고, 그들의 약함이 나를 시험하는 걸림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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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연엉가 2004-04-21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이 뭉클합니다....

물무늬 2004-04-21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터를 찾아주셔서 감사드려요.
뭐라고 말씀드릴지....저의 부끄러움을 담은 글인데...그것이 님의 마음에 어떤 울림이 되었다면, 제가 의도치 않았은 열매이자 감사의 이유가 될 뿐입니다.^^::

다연엉가 2004-04-21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뭘유^^^^ 행복하세요~~~~

프레이야 2004-04-21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무늬님, 삶을 진지하게 살아내시는 모습이 늘 제 맘을 움직입니다. 전 찬송가를 부르거나 들으면 늘 눈물이 나곤 합니다. 다른 노래일 때도 좀 그런 편이구요.
승리의 노래와 순종의 노래 사이에서 정말 우린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물무늬 2004-04-22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종의 노래만이 승리의 노래를 잉태하건만....
약자의 순종으로 낳은 승리의 노래,
그 생명을 입양하려고만 하는 제 모습이
제게도 역시 무겁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진지한 듯한 제스쳐만 있는게 아닌지...
그 제스쳐로 나 자신으로 기만하는 건 아닌지...
님의 말씀 때문에 자신에게 반문해보게 되네요...

다연엉가 2004-04-22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언니 저도 종교는 안가졌는데 찬송가를 들으면 눈물이 나요... 가슴에서 뭐가 자꾸 밀려와요.... 요이런지... 언니도 나랑 같네요^^^^
 

신학자는 모름지기



-죽재 서남동-



신학자는 모름지기
거리를 오갈적에
빌딩 숲을 보기보다는
돌담 밑에 핀
풀잎 향기를 맡을 줄 알아야 한다.

신학자는 모름지기
책방을 서성이기보다는
마을 어귀에 서서 노인들과 장기 한 판을 두고
농부들과 막걸리 한 잔
얼큰하게 마실 줄 알아야 한다.

신학자는 모름지기
문자에 갇혀 있지 말고
손끝으로 우주를 가르키고
쌀한톨속에 미소짓는 그리스도를
몸으로 끌어안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신학자는
시인도 되며, 농부도 되고
거지도 되며, 수녀도 되어
자유한 바람으로
이쪽 저쪽 바람의 끝이 되서
신학을 살 줄 아는 자이다.

 

"쌀한톨의 그리스도"라는 아이디를 즐겨사용하는 동생이 제일 좋아하는 시. 녀석이 내게 그 시를 보내주었다. 신학도 학(學)인지라 머리와 눈으로 만지작 거리기 일수인 내게는 김진 목사님께서 말씀하시는 "얼됨과 얼함"을 향한 목마름이 필요하다.

신학은 머리로 다 파악할 수 없는 삶의 신비 속에서 모름의 깊이를 지키는, "모름지기"로 익어가는 얼의 "됨과 함"의 삶.....그렇게 신학자는 "얼됨과 얼함의 모름지기"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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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7-28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갈게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지음 / 창비 / 199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홍세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창작과 비평사, 1995)

실비에 젖어들며; 환상을 걷어내는 일상의 여행, 망명

유럽 배낭여행을 갔을 때, 그곳의 풍경들이 내겐 너무나 무미건조했다. 그 웅장한 성당들, 수많은 미술 작품들, 그 모두를 뒤통수로만 구경하는 김치-미소들, 그리고 그 수많은 풍경에 더 많은 눈도장을 찍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휘둘려 걷고 또 걷는 발걸음들, 그렇게 몰려 다니는 내게 유럽은 달력이나 책 속의 멋진 사진보다 더 멀리 멀어져만 갔다. 만지고 직접보는 그 모든 실제적 감각들이 오히려 그 도시가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존재들임을 확실하게 느끼게 해준 것이다. 낯설음은 일상의 단단한 타성과 무의식 속에 숨어있는 나의 알몸을 비춰준다. 새로움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내 안에 잠들어있던 미세한 감각들을 모두 깨워, 새롭게 느끼고 맛보게 한다. 그러나 유럽의 그 낯설음은 무감각한 실제였다. 아무 느낌도 느낄 수 없는 감촉의 역설을 통해서 그렇게 환상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여행은 현란한 환상을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내는 발길질이고, 결국 더욱 짙어져가는 무미건조함의 끝에 이르러, 모든 빛깔이 사라진 검은 심연에 비친 자신의 알몸을 문득 발견하는 여정이다. 바로 그 비춤의 순간 무미건조함은 두려움과 설레임으로 도약해 오른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여행으로 나를 인도해 주었다. 환상을 걷어내는 일상의 여행으로, 그 망명의 입구로....
저자는 빠리에 오라고 초대하면서도 자신을 찾지 말라는 묘한 이야기로 입을 연다. 그 초대장에는 빠리를 여행하는 방법들과 역사적 시선으로 바라본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마치 수다처럼 느껴지는 여행안내가 실은 진실한 대화와 만남을 그리워하는 마음의 결이란 건 얼마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망명자이자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그의 삶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온갖 오명을 씌우고 이용하며 결국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버리고 마는 사람들의 역겨운 이해관계들에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았던 게다. 빠리에 오는 길에 단순한 호기심이나 이기적 필요 때문에 자신을 찾는 마음을 미리 걷어내고, 순수한 관심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마음을 그 수다스러움 너머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욕망과 필요가 다 사라진 후에도 남아있는 그리움에 이르러서야 실은 처음부터 만나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그렇게 저자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그의 얘기는 오랜 친구와의 나눔처럼 담담하고 편안했다. 어떤 과장이나 미화 따위는 찾을 수 없는 솔직함과 담백함으로 자신이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된 사연, 택시운전사로 살아가면서 스쳐간 느낌과 생각들, 프랑스 사회를 살아가는 일상에 비춰본, 한국인의 자화상, 그리고 망명자로 내몰리게 된 삶의 뿌리들과 꼬레에서의 추억들을 전해줬다. 그것은 은은해서 더 깊이 각인되는 향기처럼, 은근히 스며드는 실비처럼 전해졌다.
사랑을 배우기도 전에 증오를 배웠는데, 바로 그 증오의 대상이 되어 죽어간 사람들 속에서 동생을 발견하고, 또한 자신조차도 바로 그 증오의 대상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는 저자. 그는 그 분열에 저항하고 모두를 사랑하고자 했을 뿐 혁명가나 이론가 혹은 정치가 등의 거대한 꿈과는 거리가 멀었건만, 우익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은 좌익으로 몰아세우고 억압하는 한국의 부조리함에 떠밀려 망명자가 된다. 그리고 이어진 빠리의 택시운전사로서의 삶은 꼬레에서 이론과 사상으로만 사회의 문제를 바라보던 지식인의 허상을 벗겨내고, 생존의 문제를 온몸으로 부딪혀가는 노동자의 삶의 자리에서 몸으로 바라보게 해주었다. 그렇게 망명의 여행은 또 다른 환상을 벗겨준 것이고, 증오의 마음으로 지식인의 자리에서 서서 연대한다는 오만과 자기기만에서 벗어나 같은 삶의 자리에서 살아움직이는 연대를 품게 만들어준 것이다. 그는 이런 망명의 여정을 전하는 과정을 통해서 대단하고 정교한 이론이 아니라 일상의 사소한 사건들 속에 비춰진 한국인 모두의 자화상을 구체적으로 전해준다. 우리가 얼마나 부조리한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에 붙들려 살아가고 있는지를, 그 집단무의식의 음흉한 실체를 일상의 사건들을 통해 의식의 표면으로 끄집어 낸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 난 나의 자화상을 본다.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온몸으로 부딪혀간 소중한 사람들의 땀과 눈물에 비친 나는 방관적 공범이자 가해자이고, 그 귀한 희생의 열매를 은근 슬적 훔쳐먹기만 하는 도둑이었다. 그리고 내가 선 삶의 자리가 어떤 음험한 뿌리 위에 자라고 있는지 바라보지 못한 장님이었다. 이제 우리가 선 일상은 생존의 문제에 대한 과도한 불안으로 점점 더 역사적 맥락이나 사회의 구조적 문제들에 대해서 무관심해가고 있기에 더더욱 나의 이런 한심한 모습이 망막하게 다가온다. 저자가 처음 망명의 삶에서 어떻게 생존해갈지 망막해 하던 그 무력감이 내겐 이런 왜곡된 생존의 문제들 속에서 어떻게 깨인 삶으로 살아가지에 대한 망막함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저자가 생존하기 위해 일한 택시 운전사 일이, 그런 평범한 일상이 또 다른 진실을 깨닫게 해준 것을 생각하며 난 나의 일상에서도 또 다른 망명을 꿈꿔본다. 내가 살아가는 일상의 사건들 속에서 가끔씩이라도 한 걸음씩 벗어나 되돌아보는 망명의 시선이 우리 모두의 고통에 조금씩이라도 연대하게 하는 힘이 되길, 그리고 정직한 나의 알몸을 가꿔가고, 다른 나 속에 있는 모든 나를 사랑하고 싶어하는 열정의 불꽃을 지켜주길 꿈꿔본다. 이미 이 땅의 택시 운전사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변한 것은 내게 작은 위로가 된다.



홍세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창작과 비평사, 1995)

증오의 사회에 무모하게 저항하는 바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실존이었고 삶이었다.……
나는 투철한 혁명가도 아니었다. 이론가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 어떤 정치적 욕구도 나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내 삶의 의미를 되새겼고 그에 충실하고자 했다. 나를 사랑하고 나 아닌 모든 나를 사랑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분열에 저항하여 하나로 살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내 가슴의 요구였다. 그뿐이었다.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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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20 1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무늬 2004-04-20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세화씨 관련된 행사가 학교에서도 있을 것인가 봐요. 광고 붙어 있었습니다.
서평과 페이퍼를 상당히 많이 올렸습니다. 상품권 탈려고 애 좀 썼죠. ^^:: 5000원 주더군요. 이제 상품권 좀 모였으니 책을 살 수 있을 것 같아요...ㅋㅋㅋ
차근 차근 읽으실만한 글일지 걱정이군요....오래전에 썼던 것들 모아서 올린 대부분이라.....
저도 오늘 하루 남은 시간 최선을 다해보려는데 잘 될지...그 부담감이란 게 뭔지...
낭군님께서도 함께 아프셨나보군요. 크 지극한 애처가이신가봐요...
제가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게 되서 기쁩니다.^^ 화이팅...
 

 몸의 도식(圖式); 몸의 목소리, 구애-친구의 모친상에 다녀와서...


바쁜 일상에 붙들린 어느 순간 문자메세지 하나가 늘 그렇듯이 인기척도 없이 들이닥쳤다. 친구의 어머님께서 결국은 돌아가셨다는 흑백의 화면. 오랜 병환으로 힘들어하셨고 오늘 내일 하시던 지도 꽤 되었기 때문에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친구 녀석이 마음은 아프겠지만 그래도 오랜 병환에 효자 없다고 이젠 좀 마음이 편해지겠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우선 나를 붙드는 상념은 네 다섯 시간 거리에 있는 장례식장에 가는 문제였다. 가긴 가야겠는데 바쁜 일도 있고....어쨌든 하루만이라도 가보기로 하고 길을 재촉했다.
택시, 고속버스, 지하철을 갈아타며 다섯 시간 정도의 거리를 달려갔다. 아직은 첫 날이라 한산한 분위기에 상주인 녀석 혼자 앉아 있었다. 몇 일 머리를 못감았는지 떡진 머리에 덥수룩한 수염, 오랜 병구환에 이미 지쳐버린 듯한 녀석. 헌화를 하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그런 순간에는 조금의 상념도 망설임도 없이 친구와 그 가족을 위한 기도가 흘러나온다. 그렇게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 녀석에게로 갔다. 녀석의 몸과 마주하는 순간 내 몸이 먼저 흐느꼈다. 내 몸이 녀석의 슬픔에 먼저 공명해버린 것이다. 깊은 한 숨을 토하고 눈물이 고이고, 녀석의 슬픔이 내게로 전해지면서 녀석을 끌어안고는 함께 흐느끼고 말았다.
장례식장을 가는 긴 시간 동안에는 바쁜 일상에 마음을 빼앗겨 분주한 상념에 시달리거나 잠들었었다. 그렇게 장례식장으로 가는 동안 내 마음은 친구를 위한 슬픔보다는 분주함에 사로잡혀있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의 흐름과는 달리 내 몸은 친구의 몸과 마주하는 순간 서슴없이 쓰라린 아픔에 공명해 버렸다. 녀석과 조용히 마주 앉아 그간의 일에 대해서 듣게 될 때도 몸이 먼저 공명하고 있었다. 친구가 극한 고통에 시달리는 어머니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무력함을 너무나 가슴아파하며 자책할 때 내 생각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지만 나의 몸은 이미 함께 울고 있었다. 오히려 몸이 스스로 더 소중한 것을 알고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 경험은 메를로-뽕띠의 현상학을 떠올리게 한다. '몸의 철학'이라 불리는 그의 사상은 정신이 일어나기 전에 몸이 하는 기능, 곧 몸의 원초적 기능을 철학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근원적으로 '몸을 통해 세계는 인간을 구조화하고 몸을 통해서 인간은 세계를 구조화한다'고 보고 이런 신체의 인식작용을 신체 주관의 '신체적 지각'(bodily perception)이라고 했다. 또한 몸이 세계를 하나로 통일시켜 지각하도록 구조화하는 능력을 지녔다고 보는데 이를 '몸의 도식(圖式)'이라 했다.
그가 이런 몸의 도식을 입증하기 위해 제시한 흥미로운 실험이 있다. 세상을 거꾸로 보게 하는 안경을 끼고 보름쯤 지나면 다시 세상을 똑바로 보게 되고, 그 뒤에 안경을 벗으면 오히려 세상이 거꾸로 보인다는 것이다. 몸이 외부 환경을 자신에게 알맞은 형태로 바꿔서 지각하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이다.이런 실험이 아니어도 우린 일상 속에서 몸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자전거를 타거나 수영을 하거나 하는 등의 행동은 우리의 정신이 그것을 하고자 한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다. 몸이 스스로 그 방법을 이해하고 알게 될 때 생각하기도 전에 혹은 생각없이만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메를로-뽕띠의 현상학은 몸과 세계의 관계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상호 구조화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그렇게 몸은 우리가 세계를 체험하고 살아갈 수 있는 가능근거가 되는 것이다.


친구의 슬픔에 공명하는 나의 몸은 메를로-뽕띠가 보여주는 몸과 세계의 관계의 또 다른 차원을 드러내주는 것 같다. 그 경험은 몸의 신비를 탈은폐시키는 계시처럼 다가왔다. 우리의 마음이 분주한 일상 속에서 욕망과 불안에 쫓겨 진정 소중한 것들을 망각하곤 한다. 그러나 무의식의 저 깊은 곳에 맞닿은 우리의 몸은 그것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몸은 우리의 몸과 마음에 문제가 생기면 그 위기를 병증을 통해서 알려준다. 또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으로는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하지만 몸은 그 순간이 오면 이미 설레임으로 저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감동과 자유를 향한 근원적 직감으로 반응한다.
실은 몸이 이렇게 다양한 차원에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 몸은 존재가 존재자를 통해 자신의 비밀을 알려주는 기호가 아닐까? 몸은 생존의 차원에서는 살아갈 수 있도록 스스로를 구조화하고 세계에 적응한다. 또한 의식이 몸을 잘못 사용할 때 그 문제를 병증을 통해서 경고해준다. 의미의 차원에서는 인간 존재에게 있어서 참된 행복과 자유,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인간이 욕망에 붙들려 휘둘리고 그것을 채우려는 덧없는 몸부림(몸을 부리는)에 넋을 잃을 때도 그 끝의 허망함을 직관하게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리석은 무명(無明)에 붙들려서 몸을 부려서 욕망만을 채우려 하는 것이 아닐까? 순수하고 헌신적인 몸의 짝사랑은 무시하고 몸을 즐기고 지배하려 하는 것만 같다. 그러나 몸도 설득하고 말을 거는데 지쳐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나이가 들면 몸은 말을 듣지 않고 몸을 잘 섬기지 않으면 늙어가면서 고생이 커진다. 몸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렇게 욕망의 지배에서 조금씩 스스로 벗어난다. 어쩌면 죽음은 욕망의 어리석은 억압에서 몸이 자유를 얻는 해방일지도 모른다.
이젠 욕망만을 채우고 쾌감에만 고착된 덧없는 '몸-부림'을 그쳐야하지 않을까? 번잡스런 마음의 소음을 잠재우고 조용히 몸의 구애를 들어야 하지 않을까? 존재와 세계의 참된 자유와 의미의 세계를 만나는 길은 몸을 부리려 하지않고 몸의 소리에 귀기울여 깊은 사귐을 나누는 것이 아닐까? 몸의 짝사랑을 받아들여 몸과 함께 사랑을 나눌때 참된 구원 혹은 열반에 이르는 것이 아닐까?

돌아가신지 삼일째, 몸을 통해 존재의 사랑과 의미를 맛보신 친구의 어머니가 이제 더 큰 몸으로 돌아가시고, 친구의 곁에 그 큰 빈자리는 이제 바라보는 모든 곳에 계신 어머니를 보여줄게다. 어머니의 몸은 주변의 모든 몸으로 스며든 것이 아닐까? 친구의 몸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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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25 2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무늬 2004-04-26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뎌 오셨군요^^

저도 시험 전부터 쌓여온 피로가 교회실습까지 이어져서 이제야 좀 회복된 듯해요. 
"삶의 속도를 높이는 것, 그 이상의 의미가 삶에는 있다."라는 간디의 말이 스쳐갑니다. 게으름은 어수선한 마음을 정화시키는 중요한 틈이 아닐까 싶어요. 저의 게으름에 대해서 늘 그렇게 자위하곤 했죠. 님께도 그 게으름이 다시 채워갈 중요한 비움이 되실거라 믿어요.^^   

제게도 일영에 다녀온 것 후에 몇 가지 후유증이 남았습니다. 오래동안 잊고 지냈던 밤하늘 가득한 별의 풍경, 새벽미명 그 어스름한 공간에 가득했던 잎사귀들의 포근함, 오랜만에 오른 산의 정상에 봤던 일출의 붉은 빛깔, 그 모습을 맞이하며 부끄러운 듯, 설레이는 듯, 홍조를 띤 산과 숲.....그 모든 것이 제 마음에 깊은 여운을 남겼습니다. 너무나 오래동안 잊고 지냈던 산에 대한 그리움,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매일밤 산을 올랐었거든요. 얼마나 오래동안 잊고 지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군요......무엇보다 지식과 감동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준 김경옥 선생님의 모습이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제가 어디에 있는지, 어디로 가는지, 내가 원하는 것은 정직하게 무엇인지...정말 소중한 화두 하나 받아들고 내려왔네요. 저 역시 물음만 붙들었을 뿐 결정한 것도 대답한 것도 아직 없네요. 하지만 너무나 소중하고 중요한 물음인 것 같습니다. 

 
신약준비라? ^^ 어제까지는 혼자 지낸 아내와 뒹굴 뒹굴 놀고....오늘은 장모님 생신 때문에 온양갔다와야 하고....결국 신약도 교회사 꼴이 될 것 같은 강렬한 예감이....^^::


2004-04-26 1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무늬 2004-04-27 18: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표현을 그렇게 해서 그렇지 사연이 많았습니다. 마음이 복잡해져서 앞 마당을 서성이다가 밤하늘의 별들에 시선을 빼앗겨버렸죠. 한 참을 별을 바라보고 또 서성이고 또 바라보고...새벽2시 경에 겨우 마음 달래고 방에 들어갔는데 새벽 5 경에 누군가의 핸드폰 진동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바로 밖으로 나와 어스름한 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 어스름한 새벽 산과 숲의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웠죠. 오랜만이라 몇 번이고 쉬어서 정상에 올랐고, 일출의 풍경에 넋을 잃었습니다. 산을 오르는 동안 화두를 붙들고 묵상하고 기도하며 거기까지는 좋았는데....내려오다가 길을 잃어서 화두고 뭐고 길도 없는 숲 속을 헤매고 또 헤매다가 간신히 내려온 곳은 어딘지도 모르겠더군요. 유스호스텔은 보이지도 않고....새벽이라 물어볼 사람도 없고....도로를 따라 한 참을 걷다가 자가용을 타고 지나는 사람에게 물어서 간신히 숙소로 돌아왔죠...^^::

역사적 예수와 신앙의 예수의 관계에 대해서 명확하고 자세하게 설명하는 자료가 있었으면 좋을텐데, 쉽게 찾아지지 않는군요. 어쨌든 여러 자료들을 보면서 스스로 생각을 정리하는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제 밤새 씨름해봐야겠습니다. 님도 힘내시고 좋은 결과 있으시길^^

2004-04-28 2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무늬 2004-04-29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저녁은 외식을 했습니다. 어머니, 저, 여동생 셋이서 아버님 산소에 갔다가 오면서....
묘비 바로 앞에 심어놓았던 이름모를 들꽃들이 예쁘게 번지고 있어서 참 반가웠어요. 내 년에는 더 많이 번져 있을 모습이 기대됩니다.
딸기와 테스...참 순진했던 우리 세대....일상의 사소하고 담백한 이야기에서부터 설레이는 추억의 장면으로 이어지는 님의 글이 제게 아늑한 쉼을 줍니다.
전 심각하게 순진했던 것 같아요...^^:: 뭔지도 모르면서 얼굴이 빨개졌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미소가 번져나옵니다.
제 답안지요? 보여드리는 건 어렵지 않죠. 내일 보여드리죠 뭐....하지만 기대하실 만한 것은 없을 겁니다. 아주 비효율적인 방식으로 준비를 하면서 잠도 한 30분 눈만 붙인게 다여서 아마 많이 지쳐보였을 겁니다. 괜한 욕심에 엉뚱한 곳에 시간을 쏟고 결국 시험은 망쳤으니까요. 벌써 두번째...저 역시 두번의 시험으로 겸손해집니다.
새벽에 길 잃은 제 모습^^:: 어떻게 찾아왔는지 말씀드릴께요^^ 내일 뵐께요...

2004-04-30 0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무늬 2004-04-30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보여드리고 이야기 들려드리려 했는데 발제로 분주하신 모습이어서...끝나고도 바쁘신 것 같았고, 게다가 제가 작성한 내용이 사실은 좀 부끄럽기도 하고....다음 기회로 미뤘습니다. 죄송^^:: 지금쯤 웨슬리 영성 세미나에 참성하고 계시겠군요. 으~ 부러워라....체험기를 통해서 제게도 그 감동과 경험 나눠주세요.
페미니스트의 문제를 생각하면 결국 각자가 자신의 것을 희생할 것인가의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많이 공론화되어서 무엇이 옳은지는 적지 않게 알려져 있지만 결국 그것을 이뤄나가는 과정에서 여자분들이 자신의 것을 희생해야만 한다는 것이 문제인 것 같습니다. 물론 그런 여자분들을 도와주는 남자들 역시 자신의 것을 희생해야만 하죠. 알고 계신 분들이 그 희생을 감수하지 않기 때문에 변화가 늦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여자도 남자도 다 방관적 공범이라는 혐의를 지울 수 없네요.
한가지 어제 수업에서 스쳐간 생각은 여성 문제와 동성애 문제의 연관성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여성 억압, 폄하와 관련된 성서의 내용은 쉽게 버리고 비판하면서 동성애와 관련된 것은 그렇게 못하는 것은 자기 모순이 아닌지, 남성이 여성에 대해서 행하는 억압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의 문제로 보면서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는 이데올로기로 보지 못하는 것 역시 자기 모순은 아닌지 라는 의문이 스쳐갔습니다.
그래서 동성애와 관련된 자료와 글을 다음 카페에 올려놨습니다. 공론화되길 바라는 마음이었고, 관심있으신 분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었죠. 그래도 역시 걱정은 저의 이런 관점이 제 밥그릇에 흠집을 내는 것은 아닌지, 이제 조금씩 친해지고 있는 동기들과의 관계에 난기류를 만드는 것은 아닌가하는 점이네요^^::
어쨌든 님께서도 아늑한 주말 보네세요....

2004-05-06 0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무늬 2004-05-06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자신도 이곳에 오랜만입니다. 발을 다치고 나서는 피씨방에 가기가 힘들어서....지금도 학교 도서관 자료실에 들렸다가 잠깐 들렸습니다. 너무나 반가운 소식이 남아있어서 급히 읽어만 보네요. 영성 여행 체험기 넘 감사해요^.^ 이제 기차시간이 얼마남지 않아서 긴 이야기를 남기기는 어렵네요.
지난번 시험 이야기부터 함께 나눌 이야기들이 쌓여만 가고 있네요. 발이 좀 편안해지면 식사라도 하면서 담소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오늘 남겨주신 이야기들에 대해서도 몇 마디 남기지 못해서 넘 아쉽습니다. 그럼 평안한 주일 보내시고 더 맛깔스럽게 익어갈 이야기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