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임의 心
김영임 노래 / MFK(뮤직팩토리코리아)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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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기억 속에 가곡과 앨비스의 노래를 너무나 멋드러지게 부르셨던 아버지, 하지만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노래를 부르거나 음악을 듣는 모습을 찾기 어렵다.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기타를 배우고 피아노를 치면서 노래부는 것은 내게 호흡과도 같았다. 내 안에 그 무엇을 노래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던 그 예민하고 여린 마음.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노래부르는 내 모습을 잃어갔다. 아버지 역시 그렇게 잃어가신 걸까?

중학교 때 서랍 깊은 곳에서 겉에 영어로만 적혀 있는 카세트 테이프를 발견한 일이 있다. 호기심에 틀어보고는 그 연주음악(폴모리아)이 너무 좋아서 하루종일 그 음악만 들었던 때가 있었다. 그 테이프가 아버지의 것이라는 점이 이상했었다. 아버지가 이런 음악을? 그렇게 아버지의 삶에서 희미해진 음악의 숨결...그렇게 서랍 깊은 곳에 갇혀버리게 한 현실의 무게...

음악을 잃어가신 아버지께서 가끔씩 들었던 음악이 하나 있었다. 바로 김영임의 "회심곡(回心曲)", 내 기억에 남아있는 아버지의 노래이다. 어린 난 이해할 수 없었지만 뭔가 무척 힘겨운 일이 있으시면 아버지는 방에서 혼자 회심곡을 듣곤 하셨다. 뭔지 모를 구슬픔이 느껴지는 꽹과리 소리가 사이 사이에 울려오는 김영임의 회심곡. 가사를 알아들 수는 없었지만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향한 아버지의 깊은 회한과 자책감만은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런 모습을 직접 봤던 것인지 왜 그렇게 기억되는지 알 수 없지만 내 기억 속에 회심곡을 듣고 계신 아버지의 모습은 뒷모습을 보이고 계신다. 당당하고 강한 모습의 앞모습과는 달랐던 그 뒷모습과 회심곡은 함께 있었다. "사람의 뒷모습은 앞모습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 준다"고 했던가? "뒷모습이 측은해 보이는 것은 그곳이 무장을 해제한 곳이기 때문이다. 완고한 자아로 무장하는 앞모습과는 달리 뒷모습은 철저히 무방비 상태로 열려있다."1) 표정도 말도 없는 뒷모습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가면으로 가릴 수조차 없이 가장 진실한 모습이 비치는 마음의 얼굴이 되는 것일까? 회심곡을 홀로 듣으시던 그  뒷모습은 현실의 무게를 감당하시며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던 아버지의 속내를 느끼게 했다.

긴 병환 끝에 힘겹게 돌아가신 친구의 어머니, 친구의 뒷모습과 흐트러진 머리, 마를 대로 마른 멍한 눈망울 앞에 아무말 못하고 함께 울어야 했던 지난 밤. 먼길을 돌아오며 아버지의 회심곡을 떠올렸다.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회심곡은 그 노래를 홀로 들으시던 생전 아버지의 뒷모습이 아른 거리게 한다. 회심곡과 아버지의 뒷모습은 하나가 되어 내게 한 편의 회심곡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구슬픈 꽹과리의 공허한 울림과 함께 돌이키는 마음(回心)이 들려온다. " ...아버지전 뼈을 빌고 어머니전 살을 빌어...나를 곱게 길렀건만 어려서는 철을 몰라 부모 은공을 갚을 소냐....세상천지 동포님네 회심곡을 허수말고 부모님께 효도하며 할 일을 합시다..." 

1) 김승철 저, "전시회에 간 예수, 영화관에 간 부처"(시공사, 2001) pp. 161, 162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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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26 08: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무늬 2004-04-26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버지의 삶과 죽음이 세월이 흐르면서 제 일상에서는 오히려 무표정한 이야기가 되버린 듯합니다. 물론 어떤 순간에는 저도 모르게 제 몸이 아버지를 기억하고 눈물을 흘리기 때문에 당황하기도 합니다. 아마도 제 아버님의 이야기가 우리 존재의 무의식 깊은 곳에 흘러오는 아름다움과 맞닿아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살과 피를 모두 주시고 이제는 우리의 숨결이 되셨습니다."라고 우리 가족의 고백을 아버지의 묘비에 새겨넣었죠. 제 아버지의 죽어가시는 시간들은 제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어가시고 그리스도로 부활하시는 모습을 재체험케 해주었습니다. 님의 말씀처럼 인생의 무게를 더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홀로 남으신 어머님 앞에서 효자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아요. 부모 가슴에 응어리로 남게 될까봐 두렵다는 님의 마음이 제게도 두려움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확신 속에서도 마음 깊은 곳에 불확신과 절망, 상처들이 뱀처럼 도사리고 소리없이 돌아다닌다는 님의 생각이 어쩌면 제 마음을 그리도 명확하게 비춰주시는지....일영에서도 새벽2시까지 서성이고, 옥상에서 혼자 별을 보게 되고, 잠시 눈을 붙이다 5시경에 다시 나와 홀로 산 꼭대기 까지 오르며 계속 제 마음 깊은 곳을 응시하게 되었습니다. 뱀처럼 소리없이 돌아다니는 혼돈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바울의 말씀처럼 이제까지 이뤄온 것에 대한 집착과 교만은 다 놓아버리고 늘 다시 시작하는 듯이 푯대를 향해 낳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절망스럽기도 하지만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로드무비 2004-08-10 13: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김영임의 <회심곡> 사서 즐겨 들었어요.
김영동의 <먼 길>도 참 좋아한답니다.^^

물무늬 2004-08-18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셨군요.
전 아버님 덕분에 마음 붙이게된 곡이었네요.
참 마음 깊이 울려오는 곡이죠...*^^*
 
어떤날 I
어떤날 노래 / 신나라뮤직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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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린 날개짓, 그 가녀린 떨림의 풍경

처음으로 음반을 사고 늦은 밤 라디오의 음악에서 귀기울기 시작하던 때, 내게는 음반을 고르고 듣는 나름의 무늬가 있었다. 그 가사가 내 가슴 깊이 울려와야 했고, 그 음반 전체에 한 곡도 버릴 곡이 없어야 했다. 그래서 내 가슴에 와닿은 음반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게 낯가림이 심한 편이어서 어려웠지만 일단 사귀게 되면 몇 시간이고 그 앨범을 듣고 또 들었었다. 어떤날Ⅰ은 그렇게 사귀어 내 어린 감성 깊이 뿌리내린 몇 않되는 앨범 중에 하나였다.

어떤날의 노래가 마음 깊이 울려온 것은 그 앨범 전체에 베어있는 너무도 여린 감수성과 일상의 사소한 소품들에까지 마음을 빼앗기는 순수한 시선 때문이었던 것 같다.

창 밖의 빗소리에도 잠 못이루는 그 여린 가슴, 소리없이 떠나간 그 많은 사람들을 아직도 기다리는("하늘") 여린 감수성. 지친 마음으로 붙잡을 수 없었던 많은 꿈에 너무 아쉬워하지 않으려 애쓰고, 곁에서 떠나갈 모든 것을 자신의 어두운 마음으로 사랑할 수 없기에 길모퉁이 조그만 화랑에 걸려있던 그림처럼, 여행길에 차창밖에 스치는 풍경처럼 그 모습들을 자신의 기억 속에 그대로 남아있게 하려 안간힘 쓰는("너무 아쉬워 하지마") 마음의 결, 그 상처받기 쉬운 영혼. 그리고 "햇빛, 따뜻한 한숨, 눈을 쓰는 싸리비 소리, 녹슨 기타줄, 지난 밤 거친 꿈 씻겨주는 빗소리..." 어떤날의 음악은 이렇게 일상의 구석에 숨겨진 사소한 소품들에까지 애정어린 시선을 빼앗기고 마는 마음의 무늬를 느끼게 해준다.

저기 끝없이 바라볼 수 있는 하늘, 저렇게 다가온다고, 어둡고 지루했던 어제라는 꿈 속에서 어서 올라오라고("하늘"), 언제일지 모르지만 그날엔 우리 머리 위에 뜨거운 태양이 뜰거라고 위로해준다. 그리곤 수없이 다짐하고 또 허물어온 푸르른 꿈 위해 오늘도 조용히 일어나 혼자 걷는 너에게 저 파란 하늘 위에 나는 법을 배우는 작은 새라고 불러준다.("그날")

그렇게 어떤날의 노래는 스치가는 사람들과 풍경에 빼앗겨버린 마음의 상처와 함께 울어주고, 위로해주었다. 이제 세월이 흘러 많이도 무뎌진 시선으로 다시 들어본다. 내 어린 영혼에 깃들었던 작은 새의 여린 날개짓과 그 가녀린 떨림의 풍경이 아련하게 느껴진다. 내 가슴 깊은 곳 어딘가에서 아직도 나는 법을 연습히고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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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oustic Band
유니버설(Universal) / 198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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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과 비상

숨막히는 여린 떨림을 견디지 못하고 매일밤 바위산을 오르던 시절의 이 있었다. 그렇게 오래동안 벼랑끝을 서성이던 그 시절 세 번의 우연이 칙 코리아의 음악 만나게 했다. 

라디오 공개방송에서 어느 가수가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뮤지션의 이름으로 칙 코리아를 이야기했을 때 스치듯 들었던 첫 번째 우연. 답답한 마음의 바닥에 가닿을 때면 무작정 레코드 가게에 가서 처음 보는 앨범 중에 아무렇게나 끌리는 음반을 사고는 그 우연에서 만나는 설레이는 의미를 기대했던 습관이 있었다. 그렇게 목마름을 달래려 레코드 가게에 들렸다가 칙코리아 앨범을 만났던 두 번째 우연. 그런데 친구를 사귀듯 조심스럽게 틀어본 칙코리아의 음악은 피아노와 드럼과 베이스가 난잡하게 뒤엉킨 선율을 토해내는 것만 같았다. 이번엔 완전히 잘못 선택했구나 하는 실망이 있었지만 왠일인지 그 뒤로 가끔씩 별 생각없이 그 음반을 틀어놨던 세 번째 우연.

그렇게 무심결에 틀어놨던 칙코리아의 음악이 어느 순간 내게 너무나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 난잡함과 복잡함이 중력의 힘을 받아들이면서도 오히려 그 힘을 타고 자유롭게 노니는 나비의 날개짓 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정해진 코드와 선율의 틀이 있지만 그것에 고착되지 않고 각 악기마다 자신들만의 자유로운 감정을 따라 노닐며 다른 악기의 날개짓과 함께 어울어지는 자유가 어느 순간 내 가슴 깊이 스며들어버렸다. 그렇게 Jazz에 대한 나의 첫사랑이 시작된 것이다.

칙 코리아의 연주는 내게 추락의 틈을 뚫고 도약해나가는 비상의 이미지를 그리게 했다. 추락하는 존재자들은 중력의 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허나 그 절대적 힘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지만 추락의 절망에 함몰되지 않고 새로운 가능성으로 도약할 수도 있다. 떨어지는 속도가 불러들인 바람을 타고 획일적인 직선에서 일탈하며 자신만의 곡선을 그려낼 수 있는 것이다. 그 과정에는 추락의 절망을 타고 노니는 역설적인 자유와 자신만의 영혼이 깃들 수 있다. 이렇게 칙 코리아의 음악을 통해 만난 Jazz는 추락 속에서 비상하는 도약의 미학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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