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마태복음서 14:30, 31(표준새번역 개정판)
기독교 신앙에서 의심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위의 본문이 이런 이미지의 근거가 되는 대표적인 본문이다. 이밖에도 믿음이 적은 자를 책망하는 예수의 모습이 복음서들에 등장하고 있다. 그래서 신앙이라는 '절대신념체계'에 대한 의심은 부족하거나 어리석은, 혹은 미숙한 신앙의 모습이거나, 심지어 신앙과 대치되는 죄와 같은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데생(소묘)에서 그림자가 생긴 부분의 가장 어두운 쪽 끝에 오히려 밝은 부분을 그려 넣는 역광(back light) 기법처럼 의심과 신앙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기도 한다. 오히려 의심이 신앙을 더욱 성숙하게 하고, 깊게 만드는 경우들이 있다. 이런 '의심의 역광'은 가장 어두운 부분 바로 옆에 있기 때문에 구별하기가 쉽지 않고 때론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점차 어두워지다가 갑자기 밝은 영역이 나타나기 때문에, 가장 어두운 곳에 밝은 빛이 빛나고 있기 때문에 그 두 영역이 연이어 있다고 여기기 어렵다. 하지만, 가장 어두운 곳에 밝은 빛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의심의 깊이 속에 잉태되는 성숙한 신앙도 잃어 버려서는 않될 신앙의 뿌리임에 틀림없다. 이는 혼란스러운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의심의 두 차원을 밝히 알아보기 시작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생명이 되는 의심과 주검이 되는 의심의 두 차원, 바로 '미숙한 신앙의 그늘인 의심'과 '신앙의 뿌리가 되는 의심'은 그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구별할 수 있다. 의심의 대상이 '하나님'이나 '하나님과의 만남과 체험' 자체일 때 그것은 미숙한 신앙이기 쉽다. 절대자의 무한함을 맛보지 못했거나 이미 맛본 것을 망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나 생각"이 의심의 대상인 것은 신앙을 끊임없이 새롭게 하고, 깊어지게 한다. 하나님 또는 절대자를 체험할 때, 인간은 그 놀라운 경험과 감동을 언어로 표현한다. 그것은 감탄이나 탄성, 흥겨운 콧노래처럼 자연스러운 것이고, 또한 이런 과정을 통해 여과될 때, 그 경험의 깊이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한 가지 이해나 해석, 종교적 표현만이 모든 것인양, 그 표현이 바로 하나님이나 절대적 체험 그 자체인양 오해하고, 고집하면서 다른 가능성을 억누를 때 그것은 커다란 오류가 되고 만다. 인간의 이해나 표현에 다 담길 수 없는 절대적 세계를 재단하고, 그 무한한 변화의 역동성을 화석화시키는 어리석음이자 오만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인간의 묘사와 체계화를 의심하는 것은 인간이 지녀야할 당연한 겸손이자 필연적인 구도의 길이다.
이런 어리석음를 끊임없이 파괴하는 의심, 겸손히 하나님의 무한하심에 고개숙이게 하는 의심이 바로 신앙의 뿌리이다. 어떤 고정된 신념체계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이 있을 때에만 신앙은 늘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고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은 늘 부드러운 변화를 이어간다. 오늘의 내 몸은 어제의 그 몸이 아니다. 죽어가고 태어나는 변화에 연이어 자리하고 있기에 몸은 살 수 있다. 이처럼 신앙도 끊임없는 의심 속에 그 생명의 고동소리를 울려가는 것이다. 화석으로 굳어진, 신앙에 대한 집착은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놀라움을 볼 수 없을 뿐더러, 그런 새로움을 정죄하고 파괴하려 한다. 이는 자신이 그려낸 하나님만이 최고의 유일한 절대자라고 고집하는 것이다. 곧 스스로가 하나님이 되려는 오만함이다. 물론 그 하나님은 낮은 곳을 향하여 자신을 비우시는 하나님은 모르고, 오로지 상승과 강함으로만 오해된 하나님일 뿐이다. 이렇게 오해와 집착, 욕망으로인해 "의심의 역광"을 잃어가는 것은 인식중심주의적 진리관의 영향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인식론적으로 파악되고 이해되는 진리만이 참된 진리라는 관점은 설명될 수 없고, 파악될 수 없는 것들은 진리의 영토 밖으로 추방해 버리곤 한다. 그로인해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 틀에 가둬둘 수 없는, 살아움직이는 진리를 받아들일 수도, 견딜 수도 없다. 체계적 설명은 일관된 체계로 고정시키고 이와 다른 형태의 것들을 거부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인가 확실하고 변하지 않는 것을 붙잡을 때에만 안정을 느끼는 마음의 욕망 때문이다. 늘 새롭게 변하는 것은 계속 허물고 쌓는 변화의 연속이기 때문에 긴장과 갈등의 압력을 견뎌야만 한다. 이런 압박감에 대한 두려움과 반작용으로인해 일관된 이해의 범주에 담을 수 있는 고정된 체계에 더 끌리기 쉽다. 그러나 자전거를 타는 법을 논리적으로 이해했다고 바로 탈 수 없고, 사람이 물에 뜬다는 것을 안다고 물에 빠져서 떠있을 수 없는 것처럼 인식이 삶으로, 몸으로 이어지는데는 엄청난 간격이 존재한다. 참된 앎은 논리적이고 인식론적으로 파악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때론 오히려 알 수 없는 신비의 그 긴장감을 견디면서 몸의 열매를 맺을 때까지 행할 때, 삶으로 베어나오는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 모름의 빈 공간에서 자유롭게 열매맺는 존재의 생명을 몸으로 삶으로 깨닫게 된다. 게다가 반대로 의심하지 않는 신앙은 그 대상이 인식론적인 신앙 체계인 경우에 삶과의 단절을 초래하는 맹목적인 신념이 될 위험에 처하기 쉽다. 삶의 복잡성과 다층성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생명의 기운은 고정된 체계에 담을 수 없다. 그런데 어느 한 체계만을 고집하게 되면 거기에서 이미 벗어나 새롭게 변해가는 일상의 생명과는 너무나 큰 간격을 둘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끊임없는 의심 속에 늘 새롭게 하나님을 만나고, 겸손히 알 수 없는 신비의 긴장감을 견딜 때, 삶으로 스며드는 신앙의 실천에 도달할 수 있다. 의심의 가장 짙은 그늘에 고여, 시간의 흐름마져 잊어버린 어느 순간에 홀연히 비춰오는 역광, 실은 그곳에서 신앙의 깊은 뿌리가 맑은 생명을 빨아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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