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홍세화 지음 / 창비 / 199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홍세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창작과 비평사, 1995)

실비에 젖어들며; 환상을 걷어내는 일상의 여행, 망명

유럽 배낭여행을 갔을 때, 그곳의 풍경들이 내겐 너무나 무미건조했다. 그 웅장한 성당들, 수많은 미술 작품들, 그 모두를 뒤통수로만 구경하는 김치-미소들, 그리고 그 수많은 풍경에 더 많은 눈도장을 찍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에 휘둘려 걷고 또 걷는 발걸음들, 그렇게 몰려 다니는 내게 유럽은 달력이나 책 속의 멋진 사진보다 더 멀리 멀어져만 갔다. 만지고 직접보는 그 모든 실제적 감각들이 오히려 그 도시가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존재들임을 확실하게 느끼게 해준 것이다. 낯설음은 일상의 단단한 타성과 무의식 속에 숨어있는 나의 알몸을 비춰준다. 새로움에 대한 기대와 불안이 내 안에 잠들어있던 미세한 감각들을 모두 깨워, 새롭게 느끼고 맛보게 한다. 그러나 유럽의 그 낯설음은 무감각한 실제였다. 아무 느낌도 느낄 수 없는 감촉의 역설을 통해서 그렇게 환상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여행은 현란한 환상을 한 꺼풀, 한 꺼풀 벗겨내는 발길질이고, 결국 더욱 짙어져가는 무미건조함의 끝에 이르러, 모든 빛깔이 사라진 검은 심연에 비친 자신의 알몸을 문득 발견하는 여정이다. 바로 그 비춤의 순간 무미건조함은 두려움과 설레임으로 도약해 오른다. 이 책은 바로 그런 여행으로 나를 인도해 주었다. 환상을 걷어내는 일상의 여행으로, 그 망명의 입구로....
저자는 빠리에 오라고 초대하면서도 자신을 찾지 말라는 묘한 이야기로 입을 연다. 그 초대장에는 빠리를 여행하는 방법들과 역사적 시선으로 바라본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마치 수다처럼 느껴지는 여행안내가 실은 진실한 대화와 만남을 그리워하는 마음의 결이란 건 얼마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망명자이자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그의 삶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온갖 오명을 씌우고 이용하며 결국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버리고 마는 사람들의 역겨운 이해관계들에 너무 많은 상처를 받았던 게다. 빠리에 오는 길에 단순한 호기심이나 이기적 필요 때문에 자신을 찾는 마음을 미리 걷어내고, 순수한 관심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마음을 그 수다스러움 너머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욕망과 필요가 다 사라진 후에도 남아있는 그리움에 이르러서야 실은 처음부터 만나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그렇게 저자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그의 얘기는 오랜 친구와의 나눔처럼 담담하고 편안했다. 어떤 과장이나 미화 따위는 찾을 수 없는 솔직함과 담백함으로 자신이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된 사연, 택시운전사로 살아가면서 스쳐간 느낌과 생각들, 프랑스 사회를 살아가는 일상에 비춰본, 한국인의 자화상, 그리고 망명자로 내몰리게 된 삶의 뿌리들과 꼬레에서의 추억들을 전해줬다. 그것은 은은해서 더 깊이 각인되는 향기처럼, 은근히 스며드는 실비처럼 전해졌다.
사랑을 배우기도 전에 증오를 배웠는데, 바로 그 증오의 대상이 되어 죽어간 사람들 속에서 동생을 발견하고, 또한 자신조차도 바로 그 증오의 대상이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닫는 저자. 그는 그 분열에 저항하고 모두를 사랑하고자 했을 뿐 혁명가나 이론가 혹은 정치가 등의 거대한 꿈과는 거리가 멀었건만, 우익이 아닌 다른 모든 것은 좌익으로 몰아세우고 억압하는 한국의 부조리함에 떠밀려 망명자가 된다. 그리고 이어진 빠리의 택시운전사로서의 삶은 꼬레에서 이론과 사상으로만 사회의 문제를 바라보던 지식인의 허상을 벗겨내고, 생존의 문제를 온몸으로 부딪혀가는 노동자의 삶의 자리에서 몸으로 바라보게 해주었다. 그렇게 망명의 여행은 또 다른 환상을 벗겨준 것이고, 증오의 마음으로 지식인의 자리에서 서서 연대한다는 오만과 자기기만에서 벗어나 같은 삶의 자리에서 살아움직이는 연대를 품게 만들어준 것이다. 그는 이런 망명의 여정을 전하는 과정을 통해서 대단하고 정교한 이론이 아니라 일상의 사소한 사건들 속에 비춰진 한국인 모두의 자화상을 구체적으로 전해준다. 우리가 얼마나 부조리한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에 붙들려 살아가고 있는지를, 그 집단무의식의 음흉한 실체를 일상의 사건들을 통해 의식의 표면으로 끄집어 낸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 난 나의 자화상을 본다. 우리 사회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온몸으로 부딪혀간 소중한 사람들의 땀과 눈물에 비친 나는 방관적 공범이자 가해자이고, 그 귀한 희생의 열매를 은근 슬적 훔쳐먹기만 하는 도둑이었다. 그리고 내가 선 삶의 자리가 어떤 음험한 뿌리 위에 자라고 있는지 바라보지 못한 장님이었다. 이제 우리가 선 일상은 생존의 문제에 대한 과도한 불안으로 점점 더 역사적 맥락이나 사회의 구조적 문제들에 대해서 무관심해가고 있기에 더더욱 나의 이런 한심한 모습이 망막하게 다가온다. 저자가 처음 망명의 삶에서 어떻게 생존해갈지 망막해 하던 그 무력감이 내겐 이런 왜곡된 생존의 문제들 속에서 어떻게 깨인 삶으로 살아가지에 대한 망막함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저자가 생존하기 위해 일한 택시 운전사 일이, 그런 평범한 일상이 또 다른 진실을 깨닫게 해준 것을 생각하며 난 나의 일상에서도 또 다른 망명을 꿈꿔본다. 내가 살아가는 일상의 사건들 속에서 가끔씩이라도 한 걸음씩 벗어나 되돌아보는 망명의 시선이 우리 모두의 고통에 조금씩이라도 연대하게 하는 힘이 되길, 그리고 정직한 나의 알몸을 가꿔가고, 다른 나 속에 있는 모든 나를 사랑하고 싶어하는 열정의 불꽃을 지켜주길 꿈꿔본다. 이미 이 땅의 택시 운전사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변한 것은 내게 작은 위로가 된다.



홍세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 (창작과 비평사, 1995)

증오의 사회에 무모하게 저항하는 바보였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실존이었고 삶이었다.……
나는 투철한 혁명가도 아니었다. 이론가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 어떤 정치적 욕구도 나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내 삶의 의미를 되새겼고 그에 충실하고자 했다. 나를 사랑하고 나 아닌 모든 나를 사랑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분열에 저항하여 하나로 살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내 가슴의 요구였다. 그뿐이었다.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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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4-20 17: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무늬 2004-04-20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세화씨 관련된 행사가 학교에서도 있을 것인가 봐요. 광고 붙어 있었습니다.
서평과 페이퍼를 상당히 많이 올렸습니다. 상품권 탈려고 애 좀 썼죠. ^^:: 5000원 주더군요. 이제 상품권 좀 모였으니 책을 살 수 있을 것 같아요...ㅋㅋㅋ
차근 차근 읽으실만한 글일지 걱정이군요....오래전에 썼던 것들 모아서 올린 대부분이라.....
저도 오늘 하루 남은 시간 최선을 다해보려는데 잘 될지...그 부담감이란 게 뭔지...
낭군님께서도 함께 아프셨나보군요. 크 지극한 애처가이신가봐요...
제가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게 되서 기쁩니다.^^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