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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진 예수 참 사람 예수 - 인간의 가슴에 신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존 쉘비 스퐁 지음, 이계준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09년 3월
평점 :
설렘, 사실과 의미의 통합을 향하여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할 때 피할 수 없는 난제와 만나게 된다. 성서의 내용이나 교리 모두가 글자 그대로 사실일 수 없다는 수많은 증거를 접한다. 하지만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도 알게 된다. 종교체험의 놀라운 감격과 그 의미를 일상의 언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기 때문에 상징도 비유도 신화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의미이고 어디부터가 사실인가? 아무도 그 경계선을 명확하게 제시해주지 못한다. 결국 자칫하면 모든 것이 신화일 수 있다는 위기에 직면하고 만다. '사실과 의미 사이의 긴장과 갈등’이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이다. 이 난제를 배우지 않은 신학생이나 목회자는 많지 않다. 그러나 슬그머니 그 판도라의 상자를 닫아서 감춰버리곤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스스로를 속이며 살아가고 가르친다. 침묵의 전술에 모두들 방관적 공범으로 가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 스퐁은 쉬쉬하던 그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서 그 바닥을 보여주려 한다. 그렇게 해도 정직하고 진실한 신앙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오히려 비종교인들에게도 의미 있고 설득력 있게 전달될 수 있는 새로운 기독교 신앙의 가능성이라는 것이다. 그는 사실과 의미 사이의 갈등으로 인해 솟아오른, 두 개의 물줄기를 통합하는 비젼을 제시하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두 물줄기 중 하나는 ‘예수에 대한 신앙과 헌신’이고, 다른 하나는 ‘교리와 신념체계에 대한 거부감’이다. 예수를 믿고 따르지만, 예수에 대한 교리와 신념체계로부터는 자유로운 신앙을 제시하겠다는 것이다. 신앙과 신념체계 사이의 갈등을 맛본 사람이라면 설렘과 기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스퐁의 전술, 신화 해체와 원체험 재구성
그의 전술은 크게 두 가지이다. ‘신화 해체’와 ‘원체험 재구성’이다. 이것은 종교언어에 대한 하나의 전제를 가진 전술이다. 예수에 대한 원래의 체험이 있고, 신약성서는 그 체험에 대한 신화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일상적 언어에 다 담길 수 없는 초월적 경험, 곧 하나님 체험을 예수로부터 맛본 후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 종교적 상징과 신화를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 신화적 언어를 해체하면 원체험이 무엇이었는지 찾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래서 제1부는 예수의 신화들로부터 인간 예수를 분리시키는 작업이다. 여기에서 스퐁은 동정녀 잉태, 예수 탄생, 예수의 부모, 열두 제자, 기적들 그리고 부활이 신화였다는 것을 입증하려 한다. 입증의 방식은 이 모든 것들이 구약이나 유대교 문서와 전통에 근거하여 잘 엮어진 문학적 구성이라는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다. 특별히 회당 예배를 위한 구성이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이것을 통해 신화라는 입증이 충분하다고 여긴 저자는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그것은 왜 신약성서의 편저자들이 예수를 그렇게 표현했는가를 추적하는 것이다. 그들이 만난 예수가 누구였기에 구약 전통의 종교적 언어를 통해서 그런 신화로서 고백해야 했는가를, 그 의미를 추적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비종교인들에게도 제시할 수 있는 인간 예수, 온전한 인간성의 충만인 예수라고 주장한다. 2000년 전 충만한 인간성의 온전함을 통해 하나님을 보여줬고, 오늘날도 그 참사람 예수를 비종교인들에게 전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메아리, 판도라의 상자 그 밑바닥의 울림
만들어진 예수 곧 신화의 옷을 입은 예수에게서 그 신화를 벗겨내고 참 사람 예수를 드러내겠다는 저자의 뜻은 성공적으로 성취된 것일까? 그것은 그의 논지를 바라보는 시선에 따라 전혀 다른 평가를 낳을 것이다. 성서만이 아니라 모든 사건과 이야기는 바라보는 사람의 시선에 의해서 전혀 다르게 구성되고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스퐁의 고백적 관점을 통해서 예수에 대한 성서의 기사도 결국 루빈의 항아리라는 것을 확인할 것이다. 항아리를 볼 수도 있고 사람의 얼굴을 볼 수도 있는 것처럼 성서의 기사도 보고 싶은 방식대로 볼 수 있는 반전도형 같기 때문이다. 부활한 기적의 주인공인 하나님의 아들을 볼 수도 있고, 신화의 가면을 쓴 참된 인간의 아들을 볼 수도 있다. 그 평가는 이 책을 통해 긍정이든 부정이든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려 한다.
그러나 스퐁의 도전과 그 결과물에 대한 실망이나 거부감은 오히려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것이 아닐까? 실망이나 거부감은 진정한 바람이 무엇인지, 무엇이 필요한지 깨닫게 하는 강렬한 음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퐁의 관점이든 그것을 부정하는 관점이든 어느 한쪽만이 진리라고 확증할 수 있는 객관적인 방법은 없다. 단지 보고 싶은 것을 보고 고집하는 것일 뿐이다. 부활한 기적의 주인공만을 고집하는 시선은 초월적 권위를 필요로 하는 근원적 불안의 시선이 아닌가? 반대로 참 인간의 얼굴만을 고집하는 시선은 비이성 혹은 초이성적인 영역에 대한 거부감의 시선이 아닌가? 그러나 어느 한쪽을 택하고 아무리 치밀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한다 해도 분명 성서는 양쪽을 향해 다 열려있다. 결국 성서는 최종적 대답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을 비춰주고 되물어 온다. 왜 실망하는가? 왜 확고한 하나의 진리를 원하는가? 그 어떤 것도 확실한 것이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화두를 들다, 나의 예수체험을 찾아서
결국 스퐁의 고백적 관점에 대한 어떤 응답도 자기물음으로 되돌아온다. 끊임없이 메아리쳐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화두가 된다. 스퐁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해도 성서의 기사들이 문학적 재구성의 결과물이라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성서의 기사들이 객관적 사실이라고 입증할 객관적 근거는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 최소한의 결론 앞에 정직하게 선다면 신앙의 근거는 어디에 둘 것인가? 모든 것이 신화라면, 신앙의 근거는 어디에 둬야 할까? 초자연적인 기적들이 신앙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인가? 기적이 없이 하나님을 믿고 참인간 예수의 길을 따라 살 수는 없는 것인가?
초자연적인 사건들을 통해 고백할 수밖에 없게 한 그 예수체험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진실이다. 그 놀라운 체험 때문에 당시에 수많은 종교운동이 사라지는 과정 속에서 기독교는 살아남았고 2000년을 이어져 성장해왔다. 그렇다면 언제나 새로운 출발점은 예수체험뿐이 아닌가? 그런데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체험이 있는가? 그 체험들을 통해서 새로운 인간성을 살아가고 있는가? 지금 여기에 예수 체험이 없고 그로 인한 변화된 삶이 없다면, 기적과 교리에 대한 믿음이든, 참인간 예수에 대한 동경이든 그 자체의 진실여부와는 상관없이 거짓일 뿐이다.
스퐁 감독이 성직자이자 성서학자로서 평생을 다해 연구한 결과물로 이 책에서 주장하려는 핵심이 바로 그 예수체험의 문제이다. 비록 극단적인 주장이긴 하지만 그가 왜 그렇게 극단적인 주장을 하려 하는지 그 뜻에 귀 기울여야 한다. 성서를 문자 그대로 사실이라고 믿어야만 한다고 고집하면서 잃어버린 예수체험, 그 신앙의 뿌리를 되찾아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까지도 돌려주려는 것이다. 그 뿌리는 예수를 통해 초기 기독교인들이 경험한 참 사람과의 만남이었다. 그 만남을 통해 자신안에서도 신성 곧 참된 인간성이 깨어나 예수처럼 살게 되었던 경험이었다. 그 예수체험을 되살리려는 것이다. 바로 그 예수체험을 오늘 기독교인들과 비종교인들 모두의 삶 속에 참으로 부활시키려는 것이다. 결국 스퐁의 관점에 동의하든 반대하든, 그 양측 모두는 대답해야만 한다. 제자들을 변화시킨 예수체험을 오늘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를. 이렇게 스퐁의 질문과 대답 앞에 정직하게 선다면 결국 스스로의 삶으로 대답해야하는 화두를 짊어지게 된다. 나의 예수체험은 무엇인가? 궁극적인 의미를 향해 온 삶을 바칠 수 있도록 나를 매혹시키는, 예수체험을 어디에서 어떻게 만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