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내 영혼을 위한 선물

공지영님이 "온기가 사라진 영혼 또한 죽음"이라 했던가?(294) 얼어 죽기 일보직전이던 내 영혼을 따스하게 감싸 안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생의 마지막 학기를 마친 자신에게 주는 두 번째 선물로 이 책을 골랐다. 그러나 몇 가지 걸림돌이 있었다. "베스트셀러에 대한 거부감", 그 대중성에 대한 자기 기만적 엘리트의식, 종교적인 것에 둘러 쌓인 일상으로부터 오는 "종교적 체취에 대한 도피", 사형수와 자살미수인 부유한 여인, 그리고 수녀의 만남이라는 구도에서 풍겨나는 진부한 상투성...

그러나 공지영님이 산고 끝에 낳은 글이기 때문일까?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준비하는 힘겨운 과정 속에서 그녀는 문득 자신에게 묻는다. "곧 죽는다면 너는 무엇을 할 것이냐?"고. 이 소설이 그 물음에 대해 "글을 쓰고 싶다"고 답하게 한 글이어서 였을까? 결코 진부하지 않은 "진짜 이야기"가 나의 고질적인 지적 유희를 살며시 발가벗기고 내 진심을 시리도록 맑게 비춰줬다. 진실의 눈물 어린 아름다움은 자신의 심연에 있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다시 고동치게 한다. 이 진짜 이야기의 맥동은 결국 내 욕망의 역겨운 뿌리들을 잘라내게 했다. 그 욕망이 언제 다시 돋아날지 모르지만...그렇게 진부한 이야기를 진실한 이야기로 부활시켜서 내게 직면시켜 준 것이다.

진부로부터 진실로

이 이야기에는 진부한 것, 상투적인 것에 대한 역겨움, 거부감이 처음부터 끝까지 베어있다. 상투적인 것의 거짓과 진부한 것의 허망함에, 그 녹슨 칼날에 베었던 상처가 채 아물지 못하고 남아있다. 그 쓰라림이 진홍빛으로 서려있는 것이다. 케케묵어 썩어가는 진부함, 뜨거운 피가 말라버린 상투적인 것에 대한 거부감은 파격적이고 참신 것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지곤 한다. 그렇게 또 다른 자기기만의 덫에 걸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진짜 이야기는 진부한 것에 감춰진 "아주 오래된 새로움의 향기"를 탈은폐하고, 파격적인 것에 감춰진 "어설픈 부패의 악취"를 폭로했다. 때론 진부와 상투 속에, 그 한결같음 속에 한결 같기에 깊디 깊은 의미가 발효되어 있음을 깨닫게 했다. "아주 오래된 파격, 묵혀진 새로움"이 깃들어 있음을 전해준 것이다. 결국 "진부"는 "파격"이 아니라 "진실"로 변해야 함을, 그럴 때 진부는 진실로 파격적이 된다고 고백하고 말았다.

진부한 것에 역겨워하며 파격적인 것에 목말라 하는 것만큼 진부한 것이, 껍질의 파격을 향해 꿈틀거리는 상투적인 것이 또 있을까? 그렇게 자문하게 한 것이다. 진부, 상투보다 파격을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미숙하고 비뚫어진 유희일지도 모른다. 상투, 진부, 파격 등에서 어떤 의미심장한 화두를 찾아내지만 그것을 통해 내 영혼을 어떻게 정화시킬가 보다 그것을 만지작거려 만들어낼 언어유희와 그것을 타인에게 자랑하려는 전시욕, 나 스스로에게 자신을 대단하게 보이려는 나르시시즘이 도사리고 있다. 파격, 참신함이라는 자기기만적 자위를 즐기고 전시하고 싶었는지도, 그렇게 내 겉을 치장하고 싶었던 내적 궁핍이었을지도...

어쩌면 이런 이야기에 진부함이란 낙인을 찍어 회피하고 싶었던 무의식적 욕망이 감춰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상투, 진부는 진실이 거세당한 껍데기여서 역겨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껍데기를 버려선 않된다. 오히려 살을 채워 되살려야 한다. 그럼에도 우린 껍데기라고 비난하고 버리면서 자신의 살로 채워내는 희생을 회피하는 것이 아닐까? 진정한 파격은 진부한 것에 감춰진 아주 오래된 새로움을 솔직하게 직면하는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닐까? 진부함이라는 껍질 속을 내 살로 채우는 정직함이 필요하지 않을까? 나의 아픔으로 채워진 진부함만이 진실함으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진부함을 진실함으로 전할 수 있을 때에만, 그때에야 진정한 파격이 스며나오기 때문이다.

슬픔을 통한 행복의 재분배

"누구에게나 슬픔은 있다. 이것은 자신이 남에게 줄 수 없는 재산이다. 모든 것을 남에게 줄 수 있지만 자신만은 남에게 줄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나 자신이 소유한 비극은 있다. 그 비극은 영원히 자신이 소유해야 할 상흔이다. 눈물의 강, 슬픔의 강, 통곡의 강, 슬픔은 재산과 달리 모든 사람에게 공통으로 분배되어 있다."

박삼중 스님(공지영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126)

만일 슬픔이 어떤 기회라면, 괴로움을 틈탄 초대장이라면, 그렇다면 이 세상이 아주 조금일지라도 공평하고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고통을 통한 행복의 재분배가 이처럼 조금이라도 가능하다면 고통과의 연애를 꿈꿀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죽음이 꿈틀거리는 서식지가 생명의 태반으로 고통치지 않을까?

그렇기만 하다면, 그것을 온몸으로 맛볼 수만 있다면, 주검이 원하지 않았어도 유혹하여 설레게 하지 않을까? 생존의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 주검과 감미로운 키스를 나누지 않을까? 공지영님이 들려준 이 진짜 이야기는 진부함 속에 감춰진 그 가능성을 엿보게 했다. 그 아름다운 유혹으로 인한 떨림을 맛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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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6-06-28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통을 통한 행복의 재분배,, 생각하게 하네요.. 좋은 리뷰, 추천합니다.^^

물무늬 2006-06-28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서재의 주인장인 제가 여기에 들렸던 게 일년도 더 넘었던 것 같은데...
첫 번째 글을 올리자 마자 남아있는 님의 댓글에 감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