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의 도식(圖式); 몸의 목소리, 구애-친구의 모친상에 다녀와서...
바쁜 일상에 붙들린 어느 순간 문자메세지 하나가 늘 그렇듯이 인기척도 없이 들이닥쳤다. 친구의 어머님께서 결국은 돌아가셨다는 흑백의 화면. 오랜 병환으로 힘들어하셨고 오늘 내일 하시던 지도 꽤 되었기 때문에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친구 녀석이 마음은 아프겠지만 그래도 오랜 병환에 효자 없다고 이젠 좀 마음이 편해지겠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우선 나를 붙드는 상념은 네 다섯 시간 거리에 있는 장례식장에 가는 문제였다. 가긴 가야겠는데 바쁜 일도 있고....어쨌든 하루만이라도 가보기로 하고 길을 재촉했다.
택시, 고속버스, 지하철을 갈아타며 다섯 시간 정도의 거리를 달려갔다. 아직은 첫 날이라 한산한 분위기에 상주인 녀석 혼자 앉아 있었다. 몇 일 머리를 못감았는지 떡진 머리에 덥수룩한 수염, 오랜 병구환에 이미 지쳐버린 듯한 녀석. 헌화를 하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올렸다. 그런 순간에는 조금의 상념도 망설임도 없이 친구와 그 가족을 위한 기도가 흘러나온다. 그렇게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 녀석에게로 갔다. 녀석의 몸과 마주하는 순간 내 몸이 먼저 흐느꼈다. 내 몸이 녀석의 슬픔에 먼저 공명해버린 것이다. 깊은 한 숨을 토하고 눈물이 고이고, 녀석의 슬픔이 내게로 전해지면서 녀석을 끌어안고는 함께 흐느끼고 말았다.
장례식장을 가는 긴 시간 동안에는 바쁜 일상에 마음을 빼앗겨 분주한 상념에 시달리거나 잠들었었다. 그렇게 장례식장으로 가는 동안 내 마음은 친구를 위한 슬픔보다는 분주함에 사로잡혀있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의 흐름과는 달리 내 몸은 친구의 몸과 마주하는 순간 서슴없이 쓰라린 아픔에 공명해 버렸다. 녀석과 조용히 마주 앉아 그간의 일에 대해서 듣게 될 때도 몸이 먼저 공명하고 있었다. 친구가 극한 고통에 시달리는 어머니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의 무력함을 너무나 가슴아파하며 자책할 때 내 생각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지만 나의 몸은 이미 함께 울고 있었다. 오히려 몸이 스스로 더 소중한 것을 알고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 경험은 메를로-뽕띠의 현상학을 떠올리게 한다. '몸의 철학'이라 불리는 그의 사상은 정신이 일어나기 전에 몸이 하는 기능, 곧 몸의 원초적 기능을 철학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근원적으로 '몸을 통해 세계는 인간을 구조화하고 몸을 통해서 인간은 세계를 구조화한다'고 보고 이런 신체의 인식작용을 신체 주관의 '신체적 지각'(bodily perception)이라고 했다. 또한 몸이 세계를 하나로 통일시켜 지각하도록 구조화하는 능력을 지녔다고 보는데 이를 '몸의 도식(圖式)'이라 했다.
그가 이런 몸의 도식을 입증하기 위해 제시한 흥미로운 실험이 있다. 세상을 거꾸로 보게 하는 안경을 끼고 보름쯤 지나면 다시 세상을 똑바로 보게 되고, 그 뒤에 안경을 벗으면 오히려 세상이 거꾸로 보인다는 것이다. 몸이 외부 환경을 자신에게 알맞은 형태로 바꿔서 지각하는 것을 보여주는 실험이다.이런 실험이 아니어도 우린 일상 속에서 몸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자전거를 타거나 수영을 하거나 하는 등의 행동은 우리의 정신이 그것을 하고자 한다고 가능한 일이 아니다. 몸이 스스로 그 방법을 이해하고 알게 될 때 생각하기도 전에 혹은 생각없이만 가능한 것이다. 이처럼 메를로-뽕띠의 현상학은 몸과 세계의 관계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상호 구조화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그렇게 몸은 우리가 세계를 체험하고 살아갈 수 있는 가능근거가 되는 것이다.
친구의 슬픔에 공명하는 나의 몸은 메를로-뽕띠가 보여주는 몸과 세계의 관계의 또 다른 차원을 드러내주는 것 같다. 그 경험은 몸의 신비를 탈은폐시키는 계시처럼 다가왔다. 우리의 마음이 분주한 일상 속에서 욕망과 불안에 쫓겨 진정 소중한 것들을 망각하곤 한다. 그러나 무의식의 저 깊은 곳에 맞닿은 우리의 몸은 그것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몸은 우리의 몸과 마음에 문제가 생기면 그 위기를 병증을 통해서 알려준다. 또한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으로는 혼란스러울 때가 많다. 하지만 몸은 그 순간이 오면 이미 설레임으로 저 깊은 곳에서 울려오는 감동과 자유를 향한 근원적 직감으로 반응한다.
실은 몸이 이렇게 다양한 차원에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 몸은 존재가 존재자를 통해 자신의 비밀을 알려주는 기호가 아닐까? 몸은 생존의 차원에서는 살아갈 수 있도록 스스로를 구조화하고 세계에 적응한다. 또한 의식이 몸을 잘못 사용할 때 그 문제를 병증을 통해서 경고해준다. 의미의 차원에서는 인간 존재에게 있어서 참된 행복과 자유,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준다. 인간이 욕망에 붙들려 휘둘리고 그것을 채우려는 덧없는 몸부림(몸을 부리는)에 넋을 잃을 때도 그 끝의 허망함을 직관하게 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리석은 무명(無明)에 붙들려서 몸을 부려서 욕망만을 채우려 하는 것이 아닐까? 순수하고 헌신적인 몸의 짝사랑은 무시하고 몸을 즐기고 지배하려 하는 것만 같다. 그러나 몸도 설득하고 말을 거는데 지쳐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나이가 들면 몸은 말을 듣지 않고 몸을 잘 섬기지 않으면 늙어가면서 고생이 커진다. 몸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렇게 욕망의 지배에서 조금씩 스스로 벗어난다. 어쩌면 죽음은 욕망의 어리석은 억압에서 몸이 자유를 얻는 해방일지도 모른다.
이젠 욕망만을 채우고 쾌감에만 고착된 덧없는 '몸-부림'을 그쳐야하지 않을까? 번잡스런 마음의 소음을 잠재우고 조용히 몸의 구애를 들어야 하지 않을까? 존재와 세계의 참된 자유와 의미의 세계를 만나는 길은 몸을 부리려 하지않고 몸의 소리에 귀기울여 깊은 사귐을 나누는 것이 아닐까? 몸의 짝사랑을 받아들여 몸과 함께 사랑을 나눌때 참된 구원 혹은 열반에 이르는 것이 아닐까?
돌아가신지 삼일째, 몸을 통해 존재의 사랑과 의미를 맛보신 친구의 어머니가 이제 더 큰 몸으로 돌아가시고, 친구의 곁에 그 큰 빈자리는 이제 바라보는 모든 곳에 계신 어머니를 보여줄게다. 어머니의 몸은 주변의 모든 몸으로 스며든 것이 아닐까? 친구의 몸으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