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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교회 전통에서의 신화(theosis) / John Meyendorff

이 글은 오늘날 서방 기독교를 기독교 자체와 동일시하는 경향으로 인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동방교회 전통에 대해 관심을 둔다. 저자의 말처럼 동방교회 전통이 오히려 교회사의 첫 천 년간 영적으로나 지적으로도 주도적 역할을 해왔고, 오늘날 서구의 세계관들이 심각한 도전을 받는 맥락 속에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저자는 그 동방교회 전통 중에서 神化라는 독특한 신학 개념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론, 구원론, 죄론, 성령론, 그리고 삼위일체 신론과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를 규명하고 또한 神化에 대한 오해를 제거한다.


저자는 아타나시우스의 유명한 표현을 통해 첫 부분을 시작한다. "인간이 신이 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셨다" 바로 이 표현이 받았던 오해처럼 神化라는 개념이 신플라톤 철학의 언어이기 때문에 범신론, 혹은 철학적 사변의 산물인 것처럼 오해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神化는 오히려 근본적으로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종말론적인 개념이라고 한다. 여기서 그리스도 중심적이라 함은 神化라는 개념이 "그리스도가 말씀(Logos)이면서 모든 피조된 인간의 본보기"(p.324)라는, 동방교회 전통의 독특한 그리스도론에 근거한다는 의미이다. 그는 "그리스도가 완전한 하나님이시기에 완전한 인간"(p. 324)이라고 한다. 바로 神化의 모범으로서의 그리스도론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의 완전한 연합이 본보기로 제시된 것처럼 인간은 神化를 통해서 자신의 궁극적 운명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神化의 모범인 그리스도론은 서방교회와는 다른 동방교회 전통의 죄론과 구원론에 근거한다. 동방전통에서 죄는 아담의 죄에서 시작된 원죄와는 달리 아담의 죄에 의해 피조세계가 사탄의 지배에 놓이게 되었다는 개념이다. 이것은 인간이 된 하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해결된다. 이때 "구원은 죄와 사망으로부터의 해방일 뿐만 아니라 인간의 본래의 운명-"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것-을 회복하는 것"(323)이다. 동방전통이 인간성에 대한 절대적 부정인 원죄 개념을 거부하고 동시에 구원을 출발점(from)만이 아니라 완성을 향한(to) 지향성으로 꼴짓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神化의 가능성이자 토대로 제시되는 나머지 한 축은 보혜사 성령이다. 저자는 성령을 제외하고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는 부분에서 성령을 개인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공동체 내의 관계성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신앙이 개인적인 체험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성령의 개인성은 중요하지만 그것에만 제한될 수 없다. 특히 성령은 교회론의 절대적 근거로서 분별과 판단의 기준이 된다. 교회의 성직구조나 체제를 거부하지 않지만 판단과 분별의 최종적 권위는 성령에게만 속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 "성령의 신적 임재가 인간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고 세상을 구원하는"(p. 327) 神化의 근원이 된다.

그리스도론에서 출발하여 성령론으로 이어지는 神化에 대한 설명은 "하나와 셋"이라는 부분에서 결국 삼위일체론으로 확장된다. 하나님을 삼위일체로 보는 것은 동시에 하나님을 인격으로 관계맺는 위격들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위격적 삼위일체론에서 神化는 "신적 생명 안에 인간들이 받아들여지는 것으로서 그것 자체가 이미 자기들의 상호관계 안에 인간을 영접하시는 세 개의 영원하신 위격들 사이의 사랑의 교제"(p. 328)라고 본다. 결국 성령의 임재를 통해서 神化된다는 것은 신적 생명 안에서 나누는 사랑의 교제에 참여하는 것를 의미한다. 또한 삼위일체 하나님이 개인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모범이기에 神化는 인간의 다양성과 다원성을 유지하고 상호 보완성과 사랑 안에서 이뤄진다.

저자는 삼위일체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神化)이 범신론도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융화되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 피조물에게 하나님의 본질은 여전히 절대적으로 초월적이기에 부정에 의해서만 표현될 수 있고-부정의 신학, apophatic), 삼위일체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은 본질의 융합이 아니라 하나의 은사라는 것이다.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되는 神化는 그 초월성을 유지하기 위해 비인격적 융화를 거부하면서 본질과 에너지를 구분하고, 신적 교제의 실체성을 위해 위격적 삼위일체론으로 개념화하였다.

결국 神化는 그리스도의 모범를 따라 성령의 힘으로 완전한 인간을 이뤄 삼위일체의 사랑의 교제에 참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기존의 전통적인 서방 개신교 전통이 칭의로서의 믿음을 강조하면서 성화의 과정이 약화되었던 한계성에 대해 보완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전통적인 기독교 진리에 토대를 두고 있다. 즉, 하나님의 초월성과 삼위일체의 인격적 관계에 근거하면서도 서방기독교 전통에서 볼 때 새로운 차원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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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에서 깊이로; 하나님의 임재로부터 하나님 됨으로

서평; "영성 목회와 영적 지도", 하워드 라이스 저, 최대영 역(은성 출판사, 2000)

 

들어가면서


오늘날 급속한 사회의 변화 속에서 한국 개신교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는 문제의식은 이제 일반화되고 있다. 교인수의 감소추세1), 사회적 공신력 상실, 사회갈등의 원인이라는 비판, 개신교가 타종교나 비종교인으로의 유입이 가장 높은 종교라는 현실, 특히 젊은층과 고학력층의 이탈률이 높아지는 문제 등의 현실2)이 그 위기 상황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한국의 개신교회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런 문제 상황을 돌파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근본주의적 경향을 강화하면서 성령체험을 강조하는 방식에서부터 콘서트 형식을 빌은 열린 예배, 스포츠 교회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이 혼재해 있다는 것이다.

위기와 문제 상황의 심화 그리고 혼란스러울 만큼 다양한 대응 방식의 중심에는 너무도 무거운 짐을 짊어진 목회자가 홀로 서있다. 교회 전체가 즉 신앙인 모두가 함께 짊어지고 해결해 나가야할 문제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결국 문제 상황을 진단하고 급속히 변하는 현실의 문제를 바라보는 통찰력을 토대로 그에 대한 적절한 대응방식을 결정하는 지도력의 책임은 주로 목회자에게 지워져 있다.

이런 위기 속에서 목회자들은 소위 부흥된 교회들의 방법들, 주목받고 인기 있는 목회방식들을 쫓게 되기 쉽다. 그러나 각기 다른 독특한 상황 속에서 적용된 목회 방식은 자신이 사역하는 교회만의 또 다른 상황에 그대로 적용될 수 없다. 그 결과 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를 겪게 되고 자신의 무능력함을 자책하게 되는 양상들이 적지 않게 나타나게 된다. 목회자들은 뒤에는 이집트의 대군이 추격해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힌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 모세의 상황처럼 절망적인 위기에 직면한 형국이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 목회자들에게 “과연 목회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는 가장 심각한 문제가 된다. 이런 절박한 질문에 대해 하워드 라이스는 목회자이자 목회학 교수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영성 목회와 영적 지도‘라는 책에서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것은 유행하는 다양한 방식 중에 하나라기 보다는 그 모든 방법들의 토대가 될 근본에 관한 것이다. 그는 영적 성장을 돕는 섬김의 사역으로서의 목회를 제안한다. 목회란 그 무엇보다 신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동감 넘치는 임재를 체험케 하고 그 관계가 내면적인 측면으로부터 실천적인 측면으로까지 깊어지고 확장되도록 돕는 사역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그가 제안하는 ”영적 인도로서의 목회“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그것은 어떤 통찰력을 제공하는 지, 그것은 충분한 대답이 될 수 있는 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몸 글


저자는 오늘날의 목회 현장이 심각한 혼란과 혼동 상태에 있다(p.13)3)고 진단한다. 그가 제시하는 난제들은 복잡해지는 사회와 문화 속에서 교회가 자신의 역할을 상실해 가고 교인들은 줄어가는 현실과 목회자들이 너무나 다양한 신자들의 요구들에 부응해야 하는 현실이다. 결국 목회자는 실패할 수밖에 없고 권위를 상실하며 혼란과 자책에 직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 상황에 대해 저자는 교회와 목회의 정체성, 무엇보다 소명을 재확립함으로써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하려 한다.

그는 소명을 재확립하기위해 우선 교회사에 나타난 다양한 목회상과 현대교회에 나타난 목회 이미지를 비판적으로서 검토한다. 현대교회의 목회상인 교육, 상담, 사회 변화 그리고 경영으로서의 목회가 나름대로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해줬지만, 세속적인 훈련에 의존하고 적장 신학적 기초 위에 세우지 못한 한계로 인해 적절한 대안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근본적인 목사 상으로 회귀할 필요성 있다는 점을 역설한다. 곧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추구하는 영성이 성장하게 돕는 ‘영적 지도자로서의 목회’가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이런 해결책을 토대로 소명과 교회의 정체성의 근본이 될 영적 지도 방법을 영적 돌봄, 예배, 교육, 사회 참여, 교회 관리 및 경영의 구체적인 영역에 적용하고, 그 근본적인 변화의 양상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서 영적 지도라는 목회자 상이 어떻게 구체화될 수 있고 해결책으로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지, 무엇보다 목회의 신학적 기초가 될 수 있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끝으로 이 모든 창조적 변화를 이끌어낼 지도자인 목회자가 자신의 영성을 생동감있고 깊이 있게 유지할 수 있고 진정한 권위를 확립할 수 있는 방법들을 제안한다. 

이 모든 내용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통찰력은 먼저 현대의 세속화 상황에 직면한 교회의 문제를 분석하는 관점이다. 문제 상황에 대한 저자의 진단은 한국 개신교회의 문제 상황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기에 설득력을 지니고 있고, 문제 상황에 정직하게 직면하고 해결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도록 인도해준다. 그리고 현실적 문제에 대해 무조건 기도와 말씀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면 된다는 식의 안일한 방식보다 오히려 문제 상황을 직시하고 적극적으로 대안을 찾아야한다는 도전을 제공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진단에는 사회 변화 곧 세속화의 거센 흐름에 대한 목회자의 피해의식이 반영된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는 사회가 변했고 신자들의 다양화된 요구가 목회자를 궁지로 몰아간다는 식으로 그 상황을 분석한다. 그리고 목회자의 설교가 지배력을 상실하고 권위도 상실되면서 신분저하감을 가져다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런 문제 상황은 사회의 변화를 직시하지 못하고 신자들의 다양한 요구들 속에서 가장 근본적인 아픔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 안일함에 기인한 것은 아닌가? 섬기는 자로서의 자리를 망각하고 무의식적으로 권위적 지배자의 자리에 안주한 것은 아닌가? 이단, 신흥종교, 종파나 제의(cult) 종교라고 폄하하곤 하는 종교들은 오히려 세속화의 상황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아픔들에 적극적으로 대응함으로써 교세를 넓혀가고 있다. 이런 대조적 상황과 비교할 때 이런 반문은 부정되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무엇보다 이런 냉정하고 치열하며 정확한 자성이 토대를 이룰 때 문제의 해결이 보다 확실한 토대에 설 것이다.

저자가 개신교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다양한 전통으로부터 영성 훈련의 방법들을 자유롭고 폭넓게 가져와 제시하고 있는 것은 한국 개신교 영성의 한계를 극복기 위한 중요한 통찰과 방법을 제시하는 것이다. 사실 한국 개신교 전통에서는 전통적으로 해오던 부흥집회나 성경 묵상, 통성 기도 등에 영성이라는 이름만 붙여서 답습하는 경향이 강하다. 게다가 이런 경향은 교회의 양적 성장을 위한 도구의 차원으로 전락하여 그 궁극적 가치와 목적이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는 실정이다. 바로 이런 상황이 역자가 말하는 것처럼 영성 목회가 무엇인지 막연하기만 했던 문제점을 극복하게 하는 측면이다. 저자가 피정, 침묵 기도, 향심 기도 혹은 관상 기도, 영적 독서 등의 기독교 오랜 전통 속에 면면히 이어져오는 다양한 영성 훈련의 방식들을 제안하는 것은 한국 개신교의 한계를 극복하는 데 중요한 통찰력이 된다.

그리고 ‘제8장 영적 지도자로서의 관리’에서 교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모임들을 통해서도 영적 성숙을 추구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시한 것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저자는 일반적으로 영적인 모임으로 생각하지 않는 회의들이 교회 안에서 어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분석한다. 일반적인 회의 절차가 찬성자와 반대자를 갈라놓고 그 중에 소수인 그룹에 속한 사람들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게 만들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의무감, 불만, 좌절을 안겨줄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런 저자의 분석은 교회의 현실 속에서 많이 접했으면서도 그 문제점을 발견할 수 없었던 문제 상황을 정확하게 드러내줬다.

그리고 그에서 그치지 않고 회의의 형식으로서 ‘서로를 위한 나눔의 기도’, ‘개인의 성장력 나누기’, ‘침묵’, ‘선물 나눔; 각자가 모임에서 얻은 것’ 등을 구체적으로 제안하고 있다. 물론 이런 대안은 구체적인 적용에서 문제점이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 개신교 상황은 너무나 많은 교회 내부 활동이 신자들의 영적 힘을 고갈시키고 있다. 그런데 회의 시간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지 않은 활동들을 더 첨가하는 것은 오히려 사람들을 더욱 지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행정적이고 경영적인 측면까지 세심하고도 철저하게 영적 나눔과 성장의 장으로 활용하려는 자세 자체는 중요한 통찰력이자 도전으로 다가온다.

마지막으로 ‘제9장 인격자인 목사: 영혼을 살리는 자’에서는 목회자가 영혼을 살리는 자로서 누구보다 먼저 자신의 영성을 유지하고 성장하게 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안한다. 사실 한국 개신교 신학대학에서 목회를 준비하는 신학생들은 학문적 접근에 치중하게 되는 환경적 요인에 처해 있다. 이로 인해 구체적으로 목회를 해나가면서 닥치는 문제 상황에 대해서는 지적이고 실천적인 면에서 부족하기 쉽다. 특히 목회 현장에서 자신의 영적 깊이를 어떻게 유지, 발전시킬 수 있는가하는 구체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부족하고, 단순히 기도와 말씀을 통해 스스로 해나가야 한다는 원론적인 측면에서 머물기 쉽다. 저자가 성직자들에게 무의미해지는 예배와 설교 문제, 성직자 킬러 문제, 자신의 영적․개인적 문제를 털어놓을 사람을 찾기 어려운 문제 등 구체적으로 목회자가 겪게 될 위기가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나가야 하는지 제안하는 것은 그런 한계를 극복하는데 중요한 도움이 된다. 

물론 이 책에 제시되고 있는 영성 목회에 대한 해석과 적용은 적지않은 부분에서 너무 원론적인 측면에 국한되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로 인해 구체적인 현장에서 과연 적용될 수 있을 지라는 의심을 지우기 어려운 측면들도 있다. 예를 들어 화석화된 예배를 갱신해야 하고 예배는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거나 모든 학습 순간은 학습자의 신앙 성장을 위한 기회라거나 하는 등의 제안은 구체적인 현실에서 그리 쉽게 적용되지 않는다. 사실 잘 알고 있지만 현실의 다양한 변수들 속에서 쉽게 적용될 수 없는 것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적용되기 어렵다는 것이 이 책의 제안을 부정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그 제안의 원론적 측면이 정당하다면 오히려 그것을 현실 속에 구체화시킬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할 것이다.



나가는 글 : 하나님됨을 향한 돌파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통찰력과 그 의미 그리고 보완점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으로 나가는 글을 대신하려 한다. 그것은 교회가 처한 문제 상황에 대한 해결책을 유행하는 방법론들보다는 근본적인 토대로부터 대안을 구성하려 한 토대로부터의 갱신이다. 저자는 계몽주의 이후 다양한 인문학의 발전을 교회 내적으로 수용하면서 목회를 교육, 상담, 사회 변화 그리고 경영으로 개혁한 과정을 분석했다. 그는 이런 적극적 수용이 이전의 목회가 지닌 문제점들을 극복하게 하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각각의 방법이 한계에 부딪히게 된 현실을 제시하면서 한계를 지니게 된 것은 세속적인 방법에 치우친 나머지 목회의 근본을 신학적 기초에 세우진 못한 문제점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뛰어난 교수, 상담자, 자신의 삶을 다 바치는 혁명가, 치밀한 경영자 그 모두가 줄 수 없는 것, 곧 영적 목마름과 궁핍함의 문제를 도와주는 영적 지도자로서의 목회가 가장 근본적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런 관점을 토대로 교육, 상담, 경영 그리고 사회 변혁의 각 차원이 영적 지도로서의 목회를 통해 어떻게 변화될 수 있는 지를 이어지는 각각의 장에서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렇게 근본적인 기초를 적확하게 재확립할 때 너무나 다양하게 유행하는 방법들에 현혹되거나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교회에 필요한 목회를 창조적으로 구성해갈 수 있다. 근본 토대으로부터 급진적이고 확고한 해결의 길이 생겨난다는 측면에서 볼 때 너무나 중요한 통찰력이다.

그러나 저자가 재구성하려는 영적 목회에는 중요한 통찰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계점이 있다. 그가 정의하는 영성 개념은 이원론적이고 개인적이며 수직적인 차원에 치우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는 영성을 “하나님과의 생생한 관계를 추구하는 과정”(p.48)이고 “하나님을 향한 추구”(p.43)하는 것, 즉, 하나님의 임재를 깊이 체험하는 것으로 전제하면서 바로 그런 영성을 개발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영성 목회로 봤다. 물론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는 무엇보다 중요한 영성의 요소이자 근본적인 뿌리임에 틀림없기에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영성에는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수직적 차원과 동시에 고통받는 모든 존재자들-사람과 동물 및 무생물 모두를 포함하는-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무엇보다 그들을 위해 자신을 비우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영성의 수평적 차원도 존재한다.

물론 저자 역시 이런 수평적 차원을 7장 영적 지도로서의 사회 참여에서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1장에서 6장에 이르는 과정에서 수직적 차원만을 강조하고 있다. 즉, 영혼의 돌봄, 예배, 교육, 영적 지도라는 핵심적 개념들에서 하나님과 신앙인 개인의 관계만을 중시하는 영성 개념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영성은 개인이 겪는 실존적 허무감을 채워주는 하나님의 임재에 기초한다. 그것은 비우고 내어주는 영성보다는 자신을 채우는 영성에 근거한다. 그 결과 아무리 수평적 차원을 다시 강조한다고 해도 그 두 차원의 이분화를 막기 어렵다. 즉, 수직적 차원이 근원이 되고 수평적 차원은 그 결과 중에 하나가 되는 구조로 틀지기 쉽다는 것이다. 적어도 위계적 선후관계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분화는 공동체적인 측면보다는 개인적인 것을, 동적인 것보다는 정적인 것을, 일상의 모든 영역보다는 예배나 기도 등의 성스러운 시공간을 우선시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저자가 아무리 수평적 차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해도 이웃과 모든 존재의 고통으로 인해 그리스도를 쫓아 자신을 비우는 것보다는 우선 자신의 아픔을 해결하고자 하나님을 찾게 되고, 모든 일상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하는 것보다는 예배와 찬양, 기도와 묵상에 무게를 두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한계점은 그가 공동체적인 것을 강조하면서도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향한 실천적 참여와 연대의 영성은 간과하고 단지 개인의 영성적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이웃의 개념에 머무는 것에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다. 또한 상처받고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경험하는 성육신의 영성이 영적 감수성을 개발하는 데 효과적인 방법의 차원에서만 논의되는 것에서도 단적으로 나타난다.(p.155) 그리고 영성이 정신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세계와의 연속성을 지녔다고 강조하면서도 생물과 무생물까지 포괄하는 우주적 영성의 차원에 이르지 못하는 한계 역시 나타난다. 특히 이런 한계는 믿음과 행위의 이분적 구조 속에서 신앙의 실천적 영역 곧 성화 영역이 등한시 되는 한국 개신교의 문제를 극복하는 데 도움을 주기 어렵다.

기독교 영성은 성과 속, 안과 밖, 너와 나의 구분을 허물고 모든 시공간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만나고 그 결과 자신을 비워 모든 존재자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전인적인 변화를 의미한다.4) 이런 영성은 이원론적이고 개인적이며 수직적인 분리를 극복할 수 있는 개념으로써의 ‘뿌리-은유’(root-metaphor)5)를 재구성하는 근본적 개혁을 통해서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임재라는 ‘뿌리-은유’가 내포하고 있는 이원론적 가능성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은유가 재구성되어야 한다. 하나님과 개인의 수직적 관계를 근원에 두는 영성에 기초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수직적이면서 수평적인, 그 두 차원 자체의 이분적 구조가 전제되지 않은 영성개념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뿌리-은유의 재구성을 위한 영성 모델은 중세 신비가 엑카르트의 영성에서 중요한 모범을 찾을 수 있다. 그의 영성에 대해 길희성 박사는 “우리에게 어떤 특별한 종교적 경험이나 행위에 집착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일상적 삶에 매몰되지도 않으며, 성과 속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의 영혼의 근저에 뿌리박고 활기차게 살아가는 참다운 자유의 길을 가르쳐 준다.”6)고 평한다. 엑카르트의 영성이 그 절정에서 드러내는 “하느님 아들의 삶”은 영혼의 근저에 태어난 하느님에 근거하여 '하느님 없이' 자기 충일성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삶이다. 그것은 안과 밖, 내면과 실천, 종교적 삶과 일상의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그 사이로 비껴가면서 하나로 아우르는 삶이다. 이런 하느님 아들의 삶은 철저한 자기 부정을 통해 절대적 긍정으로 도약하는 삶의 궁극적 차원을 보여준다.

'하느님 없이', '이유 없이', '목적도 없이' 등의 표현은 하느님과 나, 안과 밖 사이의 남아있는 모든 간격이 해체되는 철저한 하나됨의 경지를 보여준다. 하느님이 없다는 것은 나의 밖으로부터 나를 압도해오는 절대적 권위의 하느님을 부정함으로써 내 영혼의 뿌리로부터 샘솟아 하느님 아닌 영역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하느님에 대한 절대긍정을 이루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느님이 될 때 어디에도 하느님은 없는 것이다. 이유와 목적이 없다는 것은 완전히 나와 하나되지 않고 나의 밖으로부터 강제되는 어떤 이유도 부정하면서 동시에 모든 존재의 이유와 완전히 하나되는 절대긍정인 것이다.7)

이처럼 엑카르트의 영성의 궁극적 단계를 표현하는 “하나님 아들의 삶”이라는 뿌리-은유는 수직적 차원과 수평적 차원, 안과 밖, 나와 너의 경계를 허물면서도 내안에서 샘솟는 하나님의 신성을 통해 밖으로 확장해가는 영성을 표현해 준다. 여기서 수직적 차원인 임재의 은유는 깊이의 차원인 근저의 은유로 변이되고 있다. 하워드 라이스가 제시하는 영성은 에크하르트의 영성처럼 통전적인 영성 모델과 개념으로 확장될 수 있는 뿌리-은유를 재구성함으로써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도서

하워드 라이스 저, 영성 목회와 영적 지도, 최대형 역 (은성출판사, 2000)

김진 저, 기독교의 총체적 영성을 향하여, ‘말씀과 신학’(한국 기독교장로회 신학연구소, 1997/12 제17호), pp. 92-106.

길희성 저,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 사상 (분도출판사, 2003)

맥페이그 저, 은유신학-종교 언어와 하느님 모델, 정애성 역 (다산글방, 2001)

이원규 저, 한국교회 어디로 가고 있는가 (대한기독교서회, 2000)

한인철 저, 선교의 또 다른 문지방을 넘어서, “새길 이야기” (도서출판 새길, 2000 여름 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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Ⅷ. 하느님 아들의 삶
길희성 저,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 사상 (분도출판사, 2003), pp. 271-294.

들어가면서

앞선 장들에서 이미 살펴보았듯이 엑카르트의 영성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단계는 인간 영혼이 초탈과 돌파를 통해 자신 근저에 '하느님 아들의 탄생'을 이루는 것이다. 본 장에서 길희성은 바로 그 탄생을 통해 이뤄진 '하느님 아들의 삶'을 엑카르트의 설교나 가르침들을 통해서 살펴본다. 전체적인 논의의 흐름은 하느님 아들의 삶이 지닌 전반적 특성과 함께 '윤리적 함의'와 '활동적 삶을 향한 지향성' 등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우선 책의 순서보다는 논리적 흐름을 따라 내용을 정리하여 보다 분명하게 내용을 파악하고 그 의미를 이해해보고자 한다.

[하느님 아들의 삶이란?]
영혼의 근저로 돌파해 들어가 하느님의 아들로 새롭게 태어난 삶은 무엇보다 "이미 모든 것을 가지고 있고 전적으로 자기 자신의 것으로"(272)만 살아가는 하느님의 삶이다. 하느님의 아들은 자신의 안에 이미 하느님과 동일한 본성과 본질을 지니고 있다. 하느님과 하나된 하느님 아들의 삶이기 때문에 하느님처럼 살아갈 수 있다. 하느님이 자신의 외부에 그 어떤 것도 의지할 필요가 없고 자신 안에 모든 것을 지니고 있듯이 하느님의 아들도 하느님의 모든 것을, 필요한 모든 것을 이미 자신 안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엑카르트는 하느님 아들은 자기 밖의 어떤 것을 위해서 살아갈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살아서도 안 된다고 본다. 자신의 명예나 이익은 물론이고 봉사처럼 선한 뜻을 담은 행동들조차도 외적인 목적이라면 안 된다. 자신 밖에서 기인한 외적 원인들에 의해 행하는 모든 것은 하느님 앞에서 모두 죽은 것이고 심지어 하느님께 무엇이라도 받는 것조차 아들이 아니라 종이 되는 것이며 영생의 삶에서 이탈되는 것으로 본다. "오직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생명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271)는 것이다. 아들의 탄생을 통해서 하느님과 나의 하나됨이 탈은폐 되었기 때문에 여전히 하느님과 자신을 분리된 것으로 전제하는 모든 것들은 어리석은 망상에 고착된 것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하느님 아들의 삶의 특성]
철저한 자기 부정 곧 자신과 세상에 대해서 철저하게 죽고 하느님 아들로 새롭게 태어난 삶의 첫 번째 특성은 모든 존재들을 하느님의 눈으로 보게 되는 시각의 변화이다. 하느님의 시선으로 보게 될 때 무가치해 보이던 존재들까지도 하느님 안에서 존재를 지니는 귀하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이 세계가 하느님으로부터 일탈된 타락의 길이 아니라 하느님께 이르는 길로 보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엑카르트는 "피조물마다 하느님으로 가득 차 있고, 하나의 책"(274)이라고 한다.
두 번째 특징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하느님과 동등한 삶으로서의 자유로운 자족성이다. 하느님은 스스로가 존재의 이유이자 근거이다. 바로 그런 하느님과 동일한 본질을 지닌 하느님 아들도 역시 자신의 존재와 생명의 충일함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오는 어떤 목적이나 이유없이 자족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런 충만한 자족성은 자신 안에 어떤 분리도, 자신으로부터의 어떤 소외도 남겨두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 밖의 그 어떤 피조물도, 심지어 하느님에 의해서도 강요받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고 "타자에 의해 부과된 의무나 타자에 의해 유발된 동기나 목적 혹은 이유에 구애받지 않고 다른 누구를 위해 살지 않는다. 그는 심지어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해 살지도 않는다. 카푸토의 표현대로, 그는 하느님을 위해for God 살지 않고 자기 자신 안에 있는 하느님으로부터out of God 산다."(276, 277) 오직 스스로의 근저로부터 샘솟는 하느님의 자발적 이유와 목적을 스스로 누리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하느님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이런 자족성은 전통적인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살아가는 무신론으로 오해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저자는 엑카르트의 관점은 무신론이 아니라 "신비주의적 무신론"이라고 해명한다. 즉, 하느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나와 분리된 하느님에게 의지해서 살아가는 것이 무의미해진 차원이라는 것이다. 바로 신비주의적 휴머니즘의 차원이자 "비종교의 종교"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엑카하르트가 이런 관점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거나 하느님을 사랑하고 찬양하는 등의 종교적 행위가 지닌 표피성과 그 뒤에 숨어있는 인간의 자기 기만적 이기심과 자기애를 간파했다고 한다.
세 번째 특성은 자발성에 근거한 의지와 내적 동기에 대한 강조이다. 엑카르트는 어떤 행동이 옳은가하는 윤리학적 관심보다는 어떻게 본질적 삶을 살 수 있는가에 관심을 뒀다고 한다. 그가 "하느님과 인간의 일치", "하느님 아들의 자기 충일성에 근거한 행위"를 강조하기 때문에 당연히 "결과보다는 의지와 동기"를 "행위보다는 존재"를 중요시하게 된다. 즉, 어떤 행위를 했느냐보다는 어떤 존재이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는 "행위가 우리를 성화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행위를 성화하는 것"으로 보고 "자신의 존재의 뿌리에 근거하지 않는 한, 교회의 전통적인 신앙 행위라 해도 거부한다."(282) 그는 성례전이나 그밖의 경건한 행위들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내면적 동기를 강조하기 때문에  그가 살아가던 시대의 종교적 형식주의나 의례를 통해 교권을 유지하던 교회의 권위에 반하는 정신이 내포되어 있었다. 그에게 적용된 28개조의 최종 이단 혐의 가운데 4개조가 외적 행위의 무가치성을 강조한 발언의 문제였던 점은 이런 측면을 잘 보여준다.
네 번째 특성은 활동적 삶의 영성, 곧 비종교적 종교성이다. 엑카르트의 초탈과 초연은 결코 정적주의나 관조적 삶으로 도피하지 않고 참된 활동적 삶을 가능케 하는 근원적 힘이 된다. 이런 지향성에 대해서 저자는 불교에 빗대어 "진심眞心의 체體에 근거한 용用으로서 활기찬 삶이 전개되는 것"(287)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특성은 『루가 복음』의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에 대한 엑카르트의 독특한 해석에 잘 반영되어 있다. 그의 해석에서 마리아는 세상일을 등지고 하느님에만 집착하는 관조적 삶을 나타내고, 마르다는 오히려 하느님을 놓아버림으로써 세상일들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는 활동적 삶의 경지를 나타낸다. 그는 이 둘 가운데 활동적 삶을 더 고귀하고 우월하다고 봤고 신비한 종교적 경험보다 사랑의 실천이 더 중요하다고 봤다.
다섯 번째 특성은 실천적 삶과 관조적 삶이 하나를 이루는 관조적 실천성이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엑카르트는 하느님에 집착하지 않고 떠나서 영혼의 근저에 자리잡은 충일한 존재에 굳게 서서 흔들림 없이 세상사를 수행해 나가는 실천적 삶을 더 성숙하고 고차적 삶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런 마르타의 삶은 실천적 삶의 자리에 있을 뿐 그 실천 자체에 매몰되지 않는다. 이것은 실천을 통해 관조하는 더 높은 경지로서 "존재에 확고하게 뿌리를 두고 있어서, 어떤 일을 하든지 장애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영원한 빛에 감싸여 활기차게 수행"(288)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느님마저 떠나는 "돌파"를 통해 자기 존재의 근저에 뿌리박고 사는 하느님 아들이 살아내는 본질적 삶의 모습이다.
"여기서 성과 속, 유신론과 무신론의 이원적 대립을 초월하는 새로운 정신세계가 열린다. 도피적 세계 부정과 맹목적 세계 긍정을 넘어 관조적 삶과 활동적 삶의 이원적 대립이 극복되고 세상 안에서 완전히 편안하게 느끼는 종교적 내면성이 열리는 것이다."(289) 이처럼 어느 한 쪽만이 아니라 두 차원이 같이 가며 하나인 마르타의 경지는 관조와 활동, 초탈과 헌신이 하나인 영성인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는 당연히 신비 체험이나 영적 경험 자체에 집착하거나 도취되지 않는다. 그 결과 세상 속에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전파되는 개방적 영성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하느님 아들의 삶은 내향성과 외향성을 안과 밖, 존재와 행위를 이분적 단절이나 역설적 모순으로 남겨두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충만에 근거한 순수한 내적 자발성은 실천적 삶을 지향함으로써 존재의 심연에 뿌리를 둔 행위를 의도하고 있다. 그래서 "엑카르트의 사상은 "중세적 질서인 성과 속의 외적 구별, 종교적 일과 세속적 일의 형식적 구분을 넘어서서 인간의 삶과 행동 전체를 하나로 통일하는 강력한 인격적 윤리를 형성한다."(284) 결국 "그의 윤리학은 존재와 행위, 존재와 당위, 인식과 실천 그리고 존재론과 윤리학이 하나인 '존재의 윤리학'이며 외적 행위보다는 내적 마음의 태도를 근본으로 삼는 '내면의 윤리학'"(281)인 것이다.
여섯 번째 특성은 무엇보다 사랑의 실천을 중시하는 경향이다. 엑카르트는 하느님의 아들이 된 사람에게 여전히 어떤 참회의 행위나 어떤 수행이 필요한지에 관한 물음에 대해, 금식, 철야, 기도 등과 같은 참회의 행위보다는 "사랑의 고삐"를 매는 것이 수천 배 더 낫다고 대답했다. 그는 "사랑에 의해 잡힌 자는 가장 강한 사슬을 끌고 다니지만 하나의 즐거운 짐을 진 자이다. 이 달콤함 짐을 진 자는 사람들 모두가 할 수 있는 그 모든 참회 행위와 고행을 통해서보다도 더 많이 그리고 더 멀리 도달할 수 있다"(292)고 한다. 이런 엑크하르트의 활동적 영성이 중세적 한계 내에 있기 때문에 사회적이고 정치적 차원까지 나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길희성은 그럼에도 내적 삶의 근원적 순수성으로 사회를 위해 실천할 수 있는 활동적 영성의 가능성이 제시되어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본다.

나가는 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엑카르트의 영성이 그 절정에서 드러내는 하느님 아들의 삶은 영혼의 근저에 태어난 하느님에 근거하여 '하느님 없이' 자기 충일성으로 자유롭게 살아가는 삶이다. 그것은 안과 밖, 내면과 실천, 종교적 삶과 일상의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고 그 사이로 비껴가면서 하나로 아우르는 삶이다. 길희성은 하느님 아들의 삶에 대해 살펴본 후에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엑카르트를 평한다. "우리에게 어떤 특별한 종교적 경험이나 행위에 집착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일상적 삶에 매몰되지도 않으며, 성과 속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의 영혼의 근저에 뿌리박고 활기차게 살아가는 참다운 자유의 길을 가르쳐 준다."(293)
이런 하느님 아들의 삶은 철저한 자기 부정을 통해 절대적 긍정으로 도약하는 삶의 궁극적 차원을 보여준다. '하느님 없이', '이유 없이', '목적도 없이' 등의 표현은 하느님과 나, 안과 밖 사이의 남아있는 모든 간격이 해체되는 철저한 하나됨의 경지를 보여준다. 하느님이 없다는 것은 나의 밖으로부터 나를 압도해오는 절대적 권위의 하느님을 부정함으로써 내 영혼의 뿌리로부터 샘솟아 하느님 아닌 영역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하느님에 대한 절대긍정을 이루는 것이다. 모든 것이 하느님이 될 때 어디에도 하느님은 없는 것이다. 이유와 목적이 없다는 것은 완전히 나와 하나되지 않고 나의 밖으로부터 강제되는 어떤 이유도 부정하면서 동시에 모든 존재의 이유와 완전히 하나되는 절대긍정인 것이다.
완전한 하나됨의 삶인 하느님 아들의 삶은 종교적 형식이나 교리, 신앙의 내용 등을 강조하는 제도적 신앙에 대한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해체와 전복의 기운을 머금고 있다. 하느님 아들의 삶은 하느님과 나 사이의 어떤 매개도 남겨두지 않는다. 하느님과 나 사이의 놓인 어떤 것-내 밖에 있다면 하느님마져도-도 우상이며 참된 구원의 걸림돌일 뿐이다. 예수를 믿는 믿음이 아니면 구원될 수 없고 교회의 전통 밖이면 구원될 수 없다는 경계는 무의미해진다.
예수의 믿음이 나의 뿌리로부터 샘솟아 하느님 아들이 되었는가, 그 삶을 누리고 있는가 만이 중요할 뿐이다. 여기서 믿음이냐 행위냐의 이분법적 도식이 자연스레 해체된다. 
이렇게 엑카르트를 통해 어렴풋이 그려보는 하느님 아들의 삶은 논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어떤 빈틈을 발견하기 어려울 만큼 견고하고 또 신앙의 실존적 차원에서 직면했던 문제들-신앙이 삶의 풍성한 열매로 이어지지 못하는-을 돌이켜 볼 때도 긍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내 밖으로부터 나에게 다가오고 나를 건져주는 초월적 하나님을 부르고 의지하며 경배하는 데 너무나 익숙한 신앙의 자리에서 볼 때 너무나 낯설고 너무나 큰 괴리감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결국 문제는 초탈하여 돌파하는 경험을 통해 몸으로 깨닫는 수행인 것이다. 내 안에 하느님 아들의 삶에 대한 소망이 자리잡고, 갈급한 갈증의 요구에 직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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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5-20 23: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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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무늬 2004-05-21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공부는 않하고요, 숙제는 늘 벼락치기로...^^::
오늘 이정배 교수님께서 고3 아들 만큼만 자고 공부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분의 성실한 열정에 감동받았습니다....
어제 문자가 넘 늦게 도착해서 답장을 못했습니다.
권위주의적 종교 양태에 붙들린 집단신경증으로서의 신앙....심각하게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게 하는 통찰력이죠. 오늘 아침에 제 책꽂이에서 그 내용을 다루고 있는 에리히 프롬의 "정신분석과 종교"라는 책을 오랜만에 뽑아봤습니다. 여기 저기 설익은 비판과 비평을 적어놓은 흔적이 남아 있어서 아련한 그리움과 부끄러움이 느껴졌습니다. 혹시 필요하시면 빌려드릴께요.
향린교회는 제 친구와 깊이 관련된 교회입니다. 기장(기독교장로교)측 교회중에 가장 많이 알려진 교회죠.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친구가 기장측에서 공부마치고 전임으로 나가 있습니다. 녀석이 사역 하던 교회 이름도 향린교회였어요. 그 향린교회와 관련된 교회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교회를 일궈나가보고 싶은 욕심도 있죠. 저도 이제 살림의 신학을 읽어야겠네요.
콩나물 시루에 물뿌리듯....^^::

2004-05-27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무늬 2004-05-29 1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안에서 하느님을 찾는다면 밖에 있는 하느님은 필요없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되나요: 아마도 그것과는 조금 다른 뜻인 것 같습니다. 내 안에 하느님의 아들 곧 하느님이 태어나게 되면 내가 곧 하느님이 되죠.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밖에서 찾을 필요가 없게 됩니다. 내 안에서 샘솟는 하느님의 마음으로 살아가면 되니까요. 그러나 밖에 있는 하느님이 필요없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안과 밖이 하나로 통한 것이니까요. 그 밖의 하느님과 만나게 되지만 그 하느님을 내 안에 있는 하느님의 눈으로 보게 되죠.

 또한 밖에 있는 그 하나님은 하나님의 본질이나 본성을 묘사하려는 인간 언어의 한계, 상징성 때문에 어떤 표현도 완벽할 수 없으며, 결국 왜곡된 상징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런 밖에 있는 하나님은 진정한 하나님이 아니다..:  네 그런 인식론적 맥락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닌 것 같습니다. 단순히 진짜 하느님이 누구이고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예수님의 마음을 똑같이 품을 수 있는가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밖에 있는 하느님을 정말 정확하게 묘사하고 인식할 수 있다해도 그 역시 여전히 내 마음과의 거리가 존재할 수밖에 없죠.

에크하르트 자신도 하느님을 부르고 기도하는 것 자체를 금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고 변론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

에리히 프롬이 분류하듯이 권위주의적 종교와 인간 중심적 종교를 생각할 때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권위주의적 종교는 내 밖에 나와는 너무나 다른 나와 차이가 크면 클 수록 더 능력이 있는 권위적 신을 바라보는 종교를 말하죠. 인간중심적 종교는 오히려 인간 안에 신적인 것을 눈뜨게 하고 스스로 하느님이 되도록 하는 종교를 말합니다.  에크하르트를 신비적 인본주의라고 하는 길희성 박사님의 표현이 보다 적확한 것 같습니다. 인간을 중심에 두지만 그 인간 안에 하느님과 일치되는 신비의 영역이 있고 그것이 더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는 관점이죠. 하느님의 능력이 뿌리가 되지만 그 뿌리가 내 안에 자리잡고 자라나는 것이죠.

성경 말씀에도 하느님의 마음을 품으라고...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라고...하느님처럼 온전하라는 말씀이 있죠....그렇게 생각한다면 조금은 다르게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나름대로의 영성".....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게 되는 영성, 너무나 소중한 뿌리인 것 같습니다.  


2004-05-28 2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
마더 데레사 지음, 앤서니 스턴 엮음, 이해인 옮김 / 황금가지

사랑을 채우는 비움의 기도

들어가면서; 나를 비춰주는 깨침
다양한 종류의 책이 있지만 크게 보면 책과 독자 사이의 거리가 유지되는 책과 그렇지 않은 책으로 나뉠 수 있다. 거리가 유지되는 책은 주로 합리적 이성에 근거하여 논리적인 검토를 하고 장단점을 균형있게 살펴보는 것이 중심이 되는 학문적 성향의 책들이다. 이런 책들은 가능한 한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 되고 주로 설득과 논쟁의 세계에 뿌리를 둔다. 그리고 삶의 구체적인 문제와의 간격을 줄이기 위해서는 각별한 노력이 요구된다.
하지만 이런 거리를 유지할 수 없게 하고 그 책의 주장이나 생각에 대해 논리적으로 분석해 나갈 수 있는 틈을 주지 않는 종류의 책들이 있다. 이런 책들은 내면 깊숙한 곳을 향해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고 독자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이런 책들은 자신을 향한 질문의 대답을 찾아가는 '자기 성찰'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는 '궁행(躬行)'의 세계에 뿌리를 둔다.
기도에 대한 마더 테레사의 글들을 모아놓은 "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가 바로 책과 나 사이의 틈을 허락하지 않고 나 자신을 비춰주는 거울과 같은 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에 대한 '다시-보기{review)'에는 줄 간과 여백에 비춰진 자화상과 나를 붙잡은 질문들과 깨달음들이 뒤엉켜 있을 수밖에 없다. 이제 이 책의 내용과 함께 어우러진 '자기 성찰'과 '자문자답'을 재음미(review)해보자 한다.


몸 글

기도의 두 가지 무늬: "기도만 하기"와 "기도로 하기"
이 책의 내용은 엮은이 스스로 이야기하듯이 "기도를 더 많이 하십시오"라는 마더 테레사의 "기본적인 권고와 요청을 좀더 자세하게 발전시킨" 내용이다.(p. 18)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 가장 필요한 것이 희생, 봉사, 성실, 겸손, 절제, 이웃 사랑 등이 아니라 기도라는 것이다. 모든 일을 기도로 시작해야할 필요성과 그 필요성의 의미, 기도로 모든 삶을 살아가는 방법, 기도의 열매 곧 기도의 목적은 무엇인지 등에 대한 고백적 잠언과 시들을 통해서 "기도를 더 많이 하십시오"라는 권고와 "모든 것은 기도에서 시작됩니다"라는 고백의 의미를 풀어주고 있다.
어떤 일을 이뤄가는 방법으로써 기도를 제안하는 것은 기독교 전통 내에서 무척 흔한 일이다. 우리 인간은 연약하고 악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고 모든 일은 하나님께 의지해서 이뤄가야 한다는 신앙, 모든 일은 기도를 통해서 해나가야 하고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끝내야 한다는 가르침은 교회 내에서 너무나 흔하게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가르침을 따라서 한국 개신교 교회에서는 새벽기도, 금식기도, 철야기도, 릴레이 기도 등의 다양한 기도에 열중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기도에 대한 이런 열심과 마더 테레사가 권하는 기도는 너무나 큰 차이를 지니고 있다. 한국 개신교의 기도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축복을 기도라는 만능키를 통해서 소유하고자 하는 집착의 성향이 너무나 강한 것 같다.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 건강, 장수 등을 구하고 어떤 어려움이나 고통도 피해가려는 욕망을 토해내는 기도가 가득해 있는 것 같다. 또한 어떤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도 자기 책임과 문제를 회피하려는 욕망으로 기도에 의지하고 내가 직접 돕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만 바라는 경향이 강한 것 같다. 아니 나 자신의 기도가 주로 고통에 대한 두려움과 물질적 풍요에 대한 이기적 집착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마더 테레사가 권하는 기도는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한 '자기 비움'의 기도이다. 그녀는 "우리가 기도하면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하면 비로소 봉사할 수 있"(p. 21)고 "하느님과 함께 우리가 행복하다는 뜻은 그분처럼 사랑하는 것, 그분처럼 봉사하는 것, 그분처럼 내어주는 것, 그분처럼 섬기는 것"(p. 138)이라고 고백한다. 그녀가 권하는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철저하게 자신을 비우고 다 내어줄 수 있는 삶의 실천을 위해서 필요한 기도이자 그런 삶에 대한 순수한 열망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도는 무엇인가를 달라고 미친 듯이 졸라대는 부르짖음이 아니라 자신의 두려움과 불안, 욕심과 집착을 비워내는 침묵이고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그득히 채우실 것을 믿는 기다림이며 고통 받는 사람 곁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눈물에 공명하는 실천이다.

부르짖음에서 침묵으로
마더 테레사는 이렇게 더 많이 사랑하려는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침묵이라고 강조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의 사랑스런 현존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침묵이 필요하고 그 침묵을 통해서만 기도가 샘솟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 다른 것들이 가득하면 절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걱정과 두려움, 분주함과 서두름은 침묵 속에 깃드는 하나님의 현존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침묵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것은 우리의 기도에 전제된 무명(無明)의 어리석음을 드러내준다. 중세의 신비가 마에스트 에크하르트는 이 망상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 밖에서 무엇을 얻거나 받으면 이는 옳지 않다. 우리는 하느님을 자기 자신 밖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거나 간주해서는 안되고, 자기 자신의 것으로 그리고 자신 안에 있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서든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든 혹은 자기 밖의 그 어떤 것을 위해서든, 어떤 목적을 위해 봉사하거나 일해서도 안된다. 오직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생명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 어떤 순진한 사람들은 하느님은 저기 계시고 자기들은 여기 있는 것처럼 생각해야 한다고 망상을 한다. 그렇지 않다. 하느님과 나, 우리는 하나다."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이곳에 임해주시라고, 능력을 허락해달라고 애타게 부르짖는 외침은 늘 하나님과 나 사이의 간격을 전제한다. 아직 임하지 않은 하나님의 부재, 아직 능력을 부어주지 않은 하나님의 능력의 부재. 하지만 하나님 밖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것을 요구하실 리도 없다. 단지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게 할뿐이다.
침묵은 이미 임재해 계신 하나님과 이미 가득 채워주신 하나님의 능력이 그대로 드러날 수 있도록 두려움과 불안, 분주함과 성급함 곧 나에 대한 집착을 비우는 정화이다. 침묵은 결국 일상의 모든 순간들, 모든 터, 모든 사건들 속에 이미 그득하게 임재해 있는 하나님을 발견하게 하는 무위(無爲)의 '깨인 시선'이 움트는 터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욕망과 집착에 뿌리를 둔 부르짖음을 잠잠케 하고 침묵 속에서 진득하게 기다려야만 한다. 그렇게 할 때 잔잔한 수면 위에 온 세상이 어떤 왜곡도 없이 맑게 비춰지듯 하나님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날 것이다.

기도를 잃은 시대: "사랑없이 일하는 것은 노예 행위와 같다"(p. 24)
기도를 가장 필요한 것으로 권하는 마더 테레사의 마음은 기도를 잃어버린 우리 시대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준다. 르네상스 시대와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우리 인류의 문명은 기도를 미신이나 주술쯤으로 치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인류는 합리적 이성과 과학적 사고에 힘입어 놀라운 기술문명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파괴된 생태계로 인한 지구의 위기, 과식으로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과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함께 공존하는 불의 등으로 그 발전과는 반비례로 오히려 지구상의 고통과 문제는 더욱 커지고 심각해져 가고 있다.
이 모든 위기와 문제들의 중요한 원인 중에 하나는 '기도의 상실'로 볼 수 있다. 바로 기도를 잃은 것은 침묵의 기도를 통해서만 우리 안에 샘솟았던 사랑을 상실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사랑은 이웃과 온 우주의 모든 존재를 향한 사랑이었다. 그 하나됨과 사랑을 상실하였기 때문에 놀랍게 발전한 문명의 힘이 더욱 파괴적으로 사용될 수밖에 없었다는 통찰력을 부정할 수 있을까?
그녀의 말처럼 "사랑없이 일하는 것을 노예 행위와 같"고 "물질이 우리의 주인이 되었을 때 우리는 참으로 빈곤한 사람들(p. 31)"이 되는 것이다. 물질적 풍요와 이기심에 붙들린 노예가 되고 넘치는 풍요 속에서 오히려 절망하게 되는 것이다. 기도를 잃은 시대 속에서 우리는 가족에게 필요한 물질에만 고착되기 쉽다. 가족과 친구, 이웃 그리고 자연의 모든 존재들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지 못하는 결핍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마음을 만나기가 너무나 어려워졌다. 그녀는 우리 시대가 바로 사랑에 굶주려 있고 그 무엇보다 사랑받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큰 고통이고 가장 비참한 가난이라고 가슴 아파한다. 그리고 이런 시대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사랑이라고 강조한다. 우리 모두는 사랑하고 사랑받는 고귀한 일을 위해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사랑의 회복으로서의 구원과 관용
한국 개신교의 주류를 이루는 보수적 정통주의의 구원은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이면서 인간인 절대유일의 구원자로 믿어 천국에 들어가 영생을 소유하는 것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물론 성화의 과정이나 예수의 본을 따르는 것을 강조하지만 그럼에도 일반 신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에 대한 믿음과 영생임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마더 테레사는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무엇보다 기도해야 한다고 말한다.(p. 37) 하나님을 사랑하고 기도하는 것을 통해 이뤄지는 구원은 한국 개신교에 주류를 이루고 있는 구원관과 너무나 다른 차원을 드러낸다. 그녀가 말하는 구원에는 절대 유일의 구세주 예수에 대한 믿음이나 영생에 대한 언급은 찾아볼 수가 없다. 아니 이 책 전체에서 예수나 영생에 대한 내용을 읽은 기억이 없다. 그녀가 강조하는 구원은 하나님처럼 사랑하게 되는 것일 뿐이다.
그녀는 "기도가 주님과의 일치를 가능하게 하고 이웃에게까지 넘쳐 흘러가게 하는 힘"이고 "우리가 하는 애덕의 일은 하느님 안에서 흘러나오는 그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한다.(p. 160)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얼마나 많이 사랑했는가를 물으시고, 그분의 사랑을 위해서 우리가 최선을 다하는 그것만이 중요하다(p. 162)고 한다. 그녀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되는 행복과 해방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구원에서는 타종교인이나 신앙이 다른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없어도 자신의 신앙과 구원관만 고집하는 이기적 집착이 부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에게 종교의 다름은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느 종교이든, 하나님을 어떻게 부르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자신의 삶을 내어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또한 이런 구원에서는 영생을 소유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의 사랑에 얼마나 가까워지는 매 순간의 과정이 중요하고 그 사랑 때문에 내 영생을 포기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일치되는 해방의 구원은 일체의 차별과 비교로부터 자유함을 선사한다. 그녀는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하느냐가 중요하고,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사소한 것이란 없다고 강조한다. 특히 마음에 남는 것은 "거창한 일들을 할 수 있는 이들은 많지만 사소한 일들을 즐겨하는 이들은 별로 많지 않다(p. 163)"는 그녀의 통찰력이다. 자기 과시욕과 비교 우위에 대한 어리석은 집착은 무의식 깊이 뿌리내려 우리를 지배하곤 한다. 그 결과 왜 하느냐 보다는 남보다 얼마나 잘하느냐에 집착하게 되고 목적을 망각하게 된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사랑의 이유이다. 사랑으로 행할 때에만 나를 비워 남을 채워주는 십자가가 행복이 될 수 있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모든 것을 주기 때문에 실패하지 않을 수 있다. 

아직도 남아 있는 간격
마더 테레사의 고백과 권고가 내 영혼 깊은 곳을 울려오고 너무나 깊은 통찰력으로 내 삶을 되돌아보게 하며 나로 하여금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녀의 영성 가운데는 내가 완전히 동화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그녀의 기도와 영성이 하나님의 사랑과 일치되는 것을 추구하면서도 여전히 하나님과의 간격을 유지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분을 기쁘시게 할 일만 생각(p. 116)"한다고 하거나 "주님은....여러분의 믿음을 요구하십니다(p. 128)"라고 하는 등의 표현들에는 하나님과 나의 차이, 하나님에 대한 대상화가 늘 남아있다. 물론 이것은 단순히 표현상의 문제일 수 있지만 그 간격에 대해서 보다 명확하게 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즉, 앞서 언급하였듯이 내 안에 이미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분을 기쁘게 하는 것은 곧 나와 내 이웃를 기쁘게 하는 것이고 믿음은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자가 본질과 본성에서 성부와 하나이듯이 그대도 본질과 본성에서 그와 하나이며, 성부가 자기 자신 안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듯이 그대도 그대 안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무슨 일이든 그대가 그대 자신의 것으로부터 하지 않으면 그 일들은 하느님 앞에서 모두 죽은 것이다"라는 에크하르트의 말처럼 내 밖의 무엇인가에 의한 것은 참된 생명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과 내가 완전히 일치되는 차원이 이뤄지기 전까지는 그 간격이 남아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간격이 하나의 완성으로 고착되어서는 안되고 끊임없이 그 간격을 좁혀가야 한다. 즉, 그 간격은 늘 궁극적인 일치를 향한 긴장 속에 유지되야 한다는 것이다.


나가는 글: 비움의 기도를 향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일치되기 위한 비움의 기도는 결국에는 내 기도의 자리를 되돌아 보게 한다. 인간의 기도가 고통을 피하려는 바람, 좋은 일이 생기기를 바라는 열망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다보면 그 욕망이 정화되곤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에 그렇게도 인색했던 예수님을 따라 살려는 기독인, 곧 "예수 따름이"의 기도가 지향해야할 방향을 명확히 하는 것은 중요하다. 자연스럽지만 미숙한 기도에서 피와 땀을 흘리지만 참된 자유를 누리는 겟세마네의 기도로, 곧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나야 한다는 것이다.
고통과 주검, 실패를 피하려 하기보다는 당당히 마주하여 생명의 씨앗으로, 감사의 제목으로 거듭나게 하는 기도, 하나님께 이웃을 위로해달라고 기도하기보다는 내 부끄러운 손길로 따듯하게 붙들어주는 행위의 기도, 시끄럽게 욕망을 토해내는 기도보다는 침묵으로 내 두려움의 허상을 밝히 보고 씻어내는 기도, 그런 기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적어도 내겐 간절하게 요구된다. 무엇보다 나 자신과 우주의 모든 존재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사랑이 간절히 요구된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내 안에 가득 채울 수 있도록 침묵하는 기도가 필요하다.

참고도서 : 길희성 저,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 사상" (분도출판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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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찾은 날개옷"

서평: "그 세가지 신학의 유형으로 살펴본 기독교 사상사"

, J.L. 곤잘레스 저, 이후정 역(컨콜디아사, 1991)

 

들어가면서

곤잘레스의 “세 가지 신학의 유형으로 살펴본 기독교 사상사”는 현대 기독교인들이 겪는 문제 상황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하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다. 저자는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두 가지 점에서 혼란을 겪고 있다고 본다. 첫째는 전통적인 자유주의/근본주의 또는 카톨릭/프로테스탄스 사이의 대립에 의한 혼란, 둘째는 전통적인 신학으로 대처할 수 없는 현대의 새로운 상황들이다. 그는 초대 교회에서 현대 근본주의와 자유주의 이외에 세 번째 다른 신학 유형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이 성서와 그 메시지를 다르게 읽을 수 있게 하고 오늘날의 혼란들에 대처하는 데 있어서 의미와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p.24) 우선 이 책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한 후에 저자의 분석과 주장이 얼마만큼 설득력이 있는지, 또 저자의 의도는 성공적으로 성취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내용 요약

[제1부 세 가지 유형-그 고전적 정형(定型)]

곤잘레스는 제1부에서 2세기 말~ 3세기 초경에 기독교 교회에서 정통으로 여겨진 세 가지 주된 신학적 관점에 대해 설명한다.

[제1장 지역과 인물]에서는 각 유형이 형성된 지역과 중심인물의 측면에서 각 유형을 설명한다.

유형A는 로마화, 라틴화된 도시 카르타고에서 형성되었다. 대표적 인물은 라틴계 신학의 시조 터툴리안이다. 유형A 신학의 특징은 만유의 지배적인 질서인 자연법과의 조화로운 삶을 지향하는 “스토아 철학”과 우주의 궁즉적인 법인 계시, 곧 하나님의 법을 중시하는 “법률주의”를 통해 도덕적인 측면에 주된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선구자로는 로마의 클레멘트와 헤르마스, 제2클레멘트가 있다.

유형B는 가장 헬라적이고 다양한 철학적, 종교적 조류들이 혼합된 지적 중심지 알렉산드리아에서 형성되었다. 대표적 인물인 오리겐을 통해서 알 수 있는 유형B 신학의 특징은 플라톤 철학의 영향으로 감각세계 너머의 ‘불변의 일자’, 곧 진리를 추구하는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영향을 준 선구자로는 필로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있다.

유형C는 안디옥을 중심으로한 소아시와 시리아에서 형성되었다. 이 지역은 카르타고보다 덜 로마화되고 알렉산드리아보다 덜 헬라화되었으며 신약성서의 많은 부분과 관련된 곳이었다. 대표자인 리용의 이레니우스를 통해 알 수 있는 유형C 신학의 특징은 목회적인 관심과 하나님의 미래로 인도되는 역사가 중심주제였던 점이다. 선구자로는 신약의 대부분과 이그나티우스, 폴리캅, 데오빌로가 있다.

[제2장 하나님, 창조 및 원죄]에서 저자는 이단들과 이교의 도전과 박해 속에서 각 유형의 신학이 형성된 맥락을 살핀다. 이교의 다신론에 반대한 논쟁의 맥락과 영지주의와 마르시온 같은 이단 사상의 이원론이 물질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 그리스도의 성육신, 몸의 부활 등의 신앙의 핵심을 위협하는 것을 막으려했던 의도와 그 방식들을 통해서 각 신학 유형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형A의 터툴리안은 마르시온에 반대하여 신론과 창조론과 원죄에 대한 신학을 형성한다. 마르시온이 은혜를 강조하여 율법의 역할을 멸절시키는 것에 반대하여 터툴리안은 재판관과 법제정자로서의 하나님, 모든 존재에 대한 완전하고 완료된 질서로서의 창조를 강조한다. 그리고 역사는 율법을 어긴 죄의 결과일 뿐이고 죄가 유전된다는 원죄관을 형성한다.

유형B의 오리겐은 플라톤 주의에 근거해 이교 다신론과 영지주의에 반대하는 신학을 형성한다. 그로인해 유형B신학에서 하나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一者, 절대적 초월자이다. 그리고 오리겐에게서 창조는 원래의 영적인 창조와 타락에 의한 물질 창조의 이중창조였다. 죄는 一者에 대한 명상과 교통에서의 이탈이고 원죄는 둘째 창조에 의해 모든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 이미 죄인임을 의미했다. 

유형C의 이레니우스는 아버지이시고 창조의 역사와 역사의 인도에 있어서 세상에 관여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한다. 이는 그의 관심이 실천적이고 목회적임을 보여준다. 그에게서 창조는 역사의 시작을 의미하고 역사는 죄의 결과가 아니다. 죄는 인간이 하나님과 더 가까운 교통으로 성장하게 하려던 신적 질서를 앞지른 불순종이고 원죄는 인간의 유대성 즉, 아담 안에서 모두가 범죄한 것을 의미했다.

[제3장 구원의 길]에서는 구원의 길과 목표를 세 유형이 각각의 방식으로 형성하는 것을 보여준다.

유형A의 터툴리안은 인간의 곤궁은 보상해야할 법적인 빚으로서 회개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스도는 회개의 새로운 법을 전해주는 율법수여자가 된다. 세례는 죄인을 씻는 행위로서 기독교 생활의 시작을 의미하고 그 효과는 의식에서 끝난다. 성찬은 세례의식에 충실하겠다는 결심을 강화하는 데 필요한 양분을 포함한다고 봤다. 최종적 완성은 하나님의 질서와 법이 회복된 나라이다.

유형B의 알렉산드리아적 관점에서 인간의 곤궁은 하나님을 명상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다.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기능은 一者의 관상으로 돌이키게 하는 조명을 제공하는 것이고 결국 세례와 성찬은 영적 실재를 상기시키는 상징의 역할을 한다. 오리겐에 의하면 최종적 회복은 모든 타락한 존재까지 포함하는 보편적인 것이고 다시 타락할 가능성이 남아있게 된다.

유형C의 이레니우스는 인간의 곤궁을 사탄에 종속된 것으로 본다. 신성과 인성의 연합이 중심인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 종속으로부터 해방시켜 새창조의 몸의 지체로 연합시키는 것이다. 세례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 만드는 접붙임이고 삶 전체를 통해 유효하며, 성찬은 그 몸의 지체인 신자에게 양분을 공급하는 수단이다. 인간의 최종 목표는 창조주를 닮아가는 神化이고, 최종적 완성은 모두가 주권자의 공동상속자가 되며 자유와 정의 및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서 계속 성장하게 될 나라이다.

[제4장 성경의 사용]에서는 이단과의 논쟁 속에서 형성되었던 세 유형의 성경관을 살펴본다.

유형A의 터툴리안은 이단들과의 논쟁에서 법률가의 방식으로 성경에 접근하는데, 이를 통해 드러나는 유형A신학에서의 성서의 기능은 기독교의 정통성을 증명하는 예언과 신앙인이 지켜야할 도덕적 법칙과 원리를 제시하는 것이다. 유형B의 오리겐은 성경 본문이 문자적 의미와 영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면서 특히 알레고리적 해석을 통해 궁극적이고 영적인 의미를 지닌 철학적 교리의 체계를 찾는 것을 중시했다. 유형C의 이레니우스는 유형론적 해석으로써 성경에서 신적 경세(oikonomia) 즉,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성서적 계시의 빛에서 세계와 역사에 대한 전적인 비젼을 읽어낸다.

[제5장 관점의 문제]에서는 세 신학 유형을 형성된 사회, 경제적 상황과의 관계를 통해서 각 유형이 수용되거나 사라지게 된 맥락을 살펴본다.

유형B는 기독교 신앙과 헬라철학의 조화를 보여주려는 동기에서 형성되었다. 그리고 신자들의 낮은 사회적 지위와 기독교 신앙이 멸시당하는 문제에 대해 변증함으로써 전도의 기능을 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상류계급의 욕구에 기독교를 적응시키는 길을 열었다. 유형A의 터툴리안은 기독교 신앙이 로마의 도덕적 성취와 조화될 수 있음을 변증하려 했다. 이는 기독교가 비도덕적이라는 유언비어에 대한 변증이되었지만 동시에 기독교가 현존하는 도덕적, 법적 질서의 지지 체계로 변할 수 있게 되었다.

유형C 신학의 소아시아와 안디옥 교회는 주변 사회로부터 배척당했고 사회 질서의 선함을 용납하지 않았다. 이레니우스는 교회 밖을 향해 변증하지 않았고, 가장 비천한 자들의 神化와 하나님에 의한 새로운 나라를 강조했다. 정치, 사회적으로 수용되기 어려운 이런 관점들로 인해 수세기 이후에 유형C 신학은 잊혀지게 되었다. 유형A가 법과 질서를, 유형B가 철학을 통해 Graeco-Roman사회에 적응하고 결국 권세있는 지식인 계층의 이익에 봉사하게 되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제2부 서구 신학의 경과]

곤잘레스는 제2부에서 각 유형의 신학이 중세를 거쳐 종교개혁과 그 이후의 시기까지 어떻게 변화되고 수용되는지를 보여준다.

[제6장 후기 교부신학: 어거스틴의 역할] 콘스탄틴 개종후에 제국과 교회가 서로 얽히게 되면서 유형A와 B는 지지되고, 권력과 조화되기 힘든 유형C신학에는 큰 압력이 가해졌다. 그것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인데, 그는 오리겐의 추종자로서 제국과 하나님의 계획이 완전히 조화를 이룰 수 있다고 봤다. 그리고 제국에 대립하는 기독교의 경향 때문이었던 박해를 단순히 제국 측의 오류로 평가하고 유형C신학의 종말론적 기대를 낮게 평가하였다. 이런 식으로 그는 부지불식간에 기독교 신앙을 권세있는 자들의 관점에 맞게 해석해온 전통의 일부가 되고 말았다.

이런 흐름 속에서 서방신학은 복음에 대한 다수의 유형B의 요소들을 유형A의 본질적인 것에로 병합시켰다. 이런 과정에 탁월할 역할을 한 어거스틴은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으로 신론, 영혼론, 악의 이해를 형성한다. 그러나 복음의 본성 및 구원받는 것의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기본적 견해를 보여주는 은총론과 예정론에서는 터툴리안의 유형A신학을 반영했다. 즉 구속에 있어서 은총의 우위와 우선성을 강조하고 여 구원이 빚의 탕감이라는 유형A의 근본적인 이해를 반영했다는 것이다. 이런 어거스틴의 신학은 중세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졌고, 그의 위계질서에 대한 이해와 지배자의 관점을 옹호하는 “정의로운 전쟁”과 같은 관점들은 교회가 법과 질서를 보전해야하는 요구에 적당한 것이었다. 이런 측면은 또한 법과 질서에 대한 유형A신학의 관점과 일맥상통하는 점이다. 

[제7장 중세 신학] 어거스틴 이후 로마의 평화는 무너지고 교회가 사회 질서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되면서 법과 도덕을 강조하는 유형A신학이 가치있는 것으로 여겨지고 로마의 감독 대그레고리 시대에는 지배적 신학이 되었다. 중세의 유형A신학적 경향은 참회제도와 죄의 보상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개념에 잘 나타난다. 유형A의 주된 범주가 법과 도덕질서이기 때문에 죄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빚인데, 중세에는 이를 사면해주는 참회제도가 발전하게 되고 결국 연옥과 ‘공로의 보고’라는 교리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사역도 인류의 죄에 대한 대속적 보상의 십자가에 배타적으로 집중되고 결국 그리스도에 의한 유일한 구속교리가 서방 신학에서 통상적인 것이 되었다. 

유형A신학이 중심이 된 중세의 흐름에 반대하는 서방신학자들은 주로 유형B의 관점에 의지하였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플라톤 철학 전통에 영향을 받은 요한 스코투스 에리게나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전통에 영향을 받은 피터 아벨라드가 있다.

[제8장 종교개혁과 그 이후]에서 저자는 종교개혁 시기부터 20C 기독교 사상사의 다양한 흐름 속에서 각 유형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추적한다. 루터, 쯔빙글리, 칼빈 등의 종교개혁자들의 전통에는 유형C신학의 부분적 재발견이 있었으나 결국은 유형A신학이 중심이었다. 합리주의 전통은 유형B신학의 경향을 보이고 경건주의는 유형C의 요소를 지니지만 중심은 유형A의 영역이었다.

19C에 이르러 역사 개념이 발전하면서 많은 학자들이 유형B 신학의 성향을 지닌 자유주의 신학을 선택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근본주의과 카톨릭 교회의 반응은 유형A신학의 재긍정이었다. 20C에는 뛰어난 신학자들-폴 틸리히나 루돌프 불트만 등-에게서 유형B의 새로운 판이 나타났다. 이처럼 20C는 유형A와 유형B신학 양자의 연속과 부흥의 과정이었다.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이런 과정은 과거에 있었던 유사한 논쟁들과 재연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제3부 현대적 의미]

저자는 3부에서 20C에 유형C신학이 다양한 방식으로 회복되는 재발견의 과정을 살펴본다.

[제9장 20세기의 유형C신학] 20C의 기독교인들은 보편적인 교회의 성장, 제국과 문명의 지지를 받았던 콘스탄틴 시대가 지나간 변화, 북반구의 백인중심의 비젼의 실패라는 세 가지 커다란 변화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다양한 현대신학의 조류가 유형 C의 재발견을 통해 형성된다. 바르트, 디트리히트 본회퍼, 판넨베르그, 몰트만 등의 신학자들을 통해서 역사가 다시 개혁신학의 중심에 위치하고 유형C신학의 재긍정을 보여주었다. 유형C의 재발견은 스웨덴 루터파 전통인 룬트신학에서도 나타났다.

카톨릭에서도 떼이야르 샤르뎅, 칼 라너 등이 그런 재발견을 보여주었고 바티칸 제2공의회는 다양한 방식을 허용함으로써 유형C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런 흐름이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에 자극제가 되었다. 해방신학은 역사의 중심성, 해방자 그리스도, 성서에 대한 유형론적 해석 등 유형C신학의 다른 관점들을 재발견해냈다.

이런 재발견들은 전례(예배, 예전)의 갱신을 통해서 교회의 실천적 영역에 영향을 주었다. 예를 들어 세례에는 죄와 악에 대한 거부의 의미가 포함되었고, 성찬도 그리스도의 수난만이 아니라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축하의 의미가 포함되었다. 이런 경향은 유형C신학의 관점으로 돌이켜진 것이다.

곤잘레스는 이런 유형C의 재발견이 불일치와 분열을 낳을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유형C신학이 기독교가 직면한 현대의 문제상황에 도움을 줄 것이기에 21C는 인류가 정의와 평화의 주된 논제들과 씨름하면서 유형C신학이 충분히 재발견되는 것을 바라고 있다.


나가는 글; 되찾은 날개옷, 입을 때와 벗을 때

살펴본 바와 같이 저자는 기독교 사상사의 복잡한 흐름들을 세 패턴의 신학으로 유형화하고 그 중에 유형C 신학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기독교 역사는 복잡하고 무질서하게 뒤엉킨 듯 보이기 쉽다. 그러나 저자의 이런 유형화는 기독교 역사의 심연 깊이 감춰져있던 거대한 사상의 흐름들을 엮어내는 대가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그는 근본주의 혹은 정통주의의 원류인 유형A신학과 자유주의의 원류인 유형B신학이 현대의 새로운 문제 상황에 적절한 대답이 되지 못한다고 본다. 그리고 오히려 잊혀졌던 유형C신학-목회적이고 역사적이며 해방을 통해 새 인간과 새 나라의 비젼을 지녔던 초대 교회의 또다른 신학유형-이 새로운 대안이라는 것이다. 마치 선녀가 잃어버린 날개옷 이야기처럼 전통의 옷을 벗고 그 날개옷-유형C신학-으로 갈아입을 때 현대의 문제라는 높은 벽을 날아올라 넘을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역사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끝없는 대화를 통해서 미래를 그려보는 해석이다. 이렇게 볼 때 저자의 해석은 무엇보다 현재 한국 교회의 위기 상황과 미래을 향해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한국 개신교는 그 성장이 정체되고, 다른 종교나 비종교인으로 개신교를 이탈하는 비율이 가장 높은 종교이고, 사회적 신뢰도 역시 가장 낮은 종교로서 젊은 층이 급격히 감소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이런 위기는 한국 개신교가 급속한 사회변화에 휩쓸려 사사화(私事化)되면서 사회적 참여에 무관심하고 더욱 배타적이며 보수적인 신앙만을 강화해온 경향과 깊이 연관되어 있을 것이다.1) 바로 한국 개신교의 주류를 형성해온 그런 배타적이고 보수적인 경향은 곤잘레스가 말하는 유형A신학에 속한다.

곤잘레스의 세 유형의 관점은 한국 개신교 전통에서 현대의 위기를 초래한 중요한 원인인 정통주의 신학이 기독교 사상사를 통해 흘러온 세 흐름 중에 하나일 뿐이라는 진실을 폭로한다. 절대적인 신앙의 척도로 군림해온 정통주의 신학의 한계를 보여주고, 근본주의 혹은 정통주의, 자유주의 등의 다양한 관점 중에 어느 한 전통만을 절대시하는 우상화의 오류를 드러내준다. 그리고 유형A신학에 속하는 그 전통이 초대교회 전통의 유형C신학이 지녔던 해방과 승리의 복음, 사회를 향한 구체적 실천을 가져오는 역사적 관점 등을 상실하게 했다는 점도 폭로하고 있다. 또한 그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초대교회의 유형C신학의 전통을 회복해야할 급박한 필요성을 알려준다. 이런 면에서 현대적인 문제들에 대처하는 대안을 제시하고자 한 저자의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저자는 세 유형이 모든 하나의 신학 유형으로써 어느 하나가 규범이 될 수 없다는 스스로의 관점을 유지하지 못했다. 저자가 세 유형으로 기독교 사상사를 유형화하는 과정에서 A와 B유형의 신학 자체가 뭔가 문제를 내포한 관점이거나 적어도 유형C신학보다는 부족한 관점으로 보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것은 “전통적인 신학들은 자유주의든 근본주의든 현대의 혼란에 대처하는 데 큰 도움이 못된다”(p. 24)는 저자의 언급에 단적으로 나타나있다. 유형C신학이 현대적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서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역시 어떤 특정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만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하나의 신학 유형이다. 구체적 역사성을 초월하는 절대 보편의 관점은 아닌 것이다. 즉, 날개옷은 허공을 날아올라 벽을 넘을 때에만 유용하지 깊은 강물 속을 헤엄칠 때나 목욕할 때는 벗어둬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저자는 자유주의/근본주의 또는 카톨릭/프로테스탄스 사이의 대립이 초래한 혼란에 대해 대안을 제시하고자 했었다. 그러나 저자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이런 두 유형의 대립에 오히려 세 번째 대립의 축을 안겨줌으로써 더 혼란스러운 형국이 되었다. 자유주의와 근본주의 사이의 혼란은 어느 유형도 규범화하지 않고 각 유형의 통찰력과 한계를 균형있게 전달해주는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 자유주의와 근본주의 등의 각 유형들은 자신의 시대에 기독교가 새롭게 대처해나간 방법으로서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각 유형이 문제가 된 것은 적합하지 않은 역사적 상황을 향해 절대화되고 규범화되었기 때문이지 그 유형 자체의 문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 맥락 속에서 지녔던 각 방법들의 장단점은 무엇이었는지를 정확히 규명해야 한다. 그럴 때 현대의 문제들에 접근하는 다양한 모범으로서 역사적 실례를 제공하는 의미를 지니고 양자택일의 혼란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럴 때 상황과 용도에 맞는 옷을 자유롭게 골라 입고 창조적으로 만들어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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