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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은 이해가 어려운 비밀을 머금고 있는 것같다. 규칙적인 것이나 예상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비껴감", 또는 압도하는 철벽 앞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는 순간에 그 벽의 원자 사이를 유연히 뚫고 지나가게 하는 "부드러운 스며듦", 또는 절벽 앞에서 한 걸음을 더 내딛고도 허공을 가볍게 날아로는 "이완의 날래". 비껴가고 스며들고 나풀거리는 웃음은 수많은 역설과 틈새를 자유롭게 넘나들기 때문에 더욱 아련하게 잡히지 않는 듯하다.


가끔씩 도대체 왜 웃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칠 때가 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웃을 일이 아닌데 웃음이 터져나오는 때 그런 의문이 스친다. 웃음 역시 존재가 존재자를 통해서 자신의 비밀을 드러내는 한 길이 아닐까? 다양한 상황에 따라 터져나오는 웃음들은 제각기 다른 의미와 영향을 낳는다.


절망적인 자신의 모습이나 어쩔 수 없는 한계 상황 앞에서 힘을 잃고 흘리는 자조적 웃음, 때론 그 절망을 향해 미친 듯이 퍼붓는 웃음이 되기도 한다. 이런 웃음은 극단적인 한계 상황 앞에서 어떻게 할 바를 모르는 당혹스러움과 분노를 분출시켜 그 긴장을 풀어주는 것같다. 아름다운 날들이란 영화에서 유태인 수용소에 끌려간 아버지가 아들에게 선사하는 웃음도 이와 비슷한 맥락일 것이다.


말뚝을 박다가 그 밑에 있는 대전차 지뢰를 눌러서 죽음 사병의 이야기를 들으며 폭소를 터뜨리는 중대원들을 본적이 있다. 사람이 죽었는데, 그 상황이 우습다는 이유로 웃는 그 소름끼치는 상황. 이런 면은 누군가 넘어지거나 바보같은 모습이 되면 터지는 웃음과도 그 맥이 통하고 있다. 이런 웃음은 가학적인 본능이 작용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공격하기엔 너무 강한 상대거나 공격이 허용되지 않는 상황에서 공격본능을 해소하는 장치와도 비슷한 듯하다.


공공의 적이란 영화는 웃기는 영화다. 그런데 웃기려는 제스추어를 보여주지 않고 너무나 심각한 상황들로 이어가는데, 그럼에도 너무나 웃기는 영화다. 박봉에 시달리면서도 목숨을 걸고 사건을 해결하는 강력계 형사들의 삶, 돈 때문에 자식이 부모를 무참히 살해하고 아무런 죄없는 사람들을 장난처럼 죽이는 살인마가 등장한다. 대부분의 장면이 심각하고 절망적이다. 과장된 면이 있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 그런 사건들이 있어왔고, 경찰의 삶이 힘겹다는 것도 알려진 바이기 때문에 현실적인 것으로 공감하기가 어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심각한 장면들의 육중한 무게가 자꾸만 폭소로 흩어져 버린다. 압력과 긴장의 답답함이 일순간 가볍게 날아오르기 때문에 계속 시선을 붙잡지만 동시에 씁씁한 현실에도 눈길을 머물게 한다. 주인공의 마쵸맨적 힘으로 악당을 물리치는 장면이나 희망적으로 변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실은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악당을 물리치는 그 통쾌한 모습을 기대하는 관객의 욕망을 충족시키면서도 그것이 오히려 비현실적이라는 허탈함을 뒤에 숨겨둔 것만 같다.

그리고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그 무거운 짐을 조금은 가볍게, 조금은 희망적으로 다시 바라보게 한다. 외면하기만 하는 현실에 작은 틈을 만들어내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틈은 너무나 작고 농담처럼 욕하고 마는 무력한 것이지만. 하지만 어쩌랴 정면을 돌파해서 부딪히기엔 너무나 역부족이고 그냥 두자니 너무나 절망적인 것을. 이렇게 라도 절망의 벽에 흠집을 내고 비웃어 주면서 새로운 희망을 품어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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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이 영화의 결에서는 시적 상징의 여백에서 베어나오는 깊은 고민과 슬픔이 느껴진다.

Gapping; 시적 상징의 여백 채우기

[물 위에 떠있는 암자] 어디에도 담은 없지만 다가갈 수 없는 곳. 암자에 있는 사람이 배를 저어 다가와 데려가지 않는한 다가갈 수 없는 단절..그러나 겨울의 매서운 냉기, 그 주검의 기운 앞에 모든 욕망과 집착이 굳어버릴 때면 단단해진 물결을 밟고 자유롭게 다가갈 수 있는....우리 내면 깊은 곳의 암자....

[벽없는 문] 어디로 다녀도 될 것 같지만, 어디에도 정해진 길이 없어보이지만, 그 보이지 않는 문을 통해, 길없는 길로 출입할 때 악업의 무거운 돌을 토해낼 수 있는 것일까?

[돌 먹이기] 김기덕 감독은 천진난만한 동자승의 귀여운 손이 개구리와 물고기와 뱀의 뱃속으로 밀어넣은 업보의 돌을 통해서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악함의 뿌리를 형상화한다.

[반가사유상처럼...] 그리고 그 악함의 뿌리를 어찌해야하는지를 깊이 고민하고, 부처의 반개한 명상의 그 비워진 시선으로 그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는 듯 하다.

[불교, 기독교, 혹은 희랍비극?] 이 영화는 내게 불교적 이미지에 기독교적 원죄를 투영시킨 실존적 고민의 상징으로 읽혀진다. 봄, 천진난만한 장난으로부터, 의도치 않아도 비롯되고 마는 악업. 불교에서는 욕심과 집착이 고통을 낳는다고 보는 그 관점을 희랍적 비극의 도식으로 변주한 듯 하다. "욕심이 집착을 낳고, 집착은 살의를 낳는다"는 노스님의 가르침은 집착이 고통을 낳는다는 불교적 관점을 살의라는 관계적 죄의 개념으로 변주하고 있다. 그리고 첫 봄에서 물고기와 개구리와 뱀의 몸에 실로 묶여있던 돌은 "그리고 봄"에서는 입을 통해 뱃속으로 밀어넣진다. 실로 이어진 관계적 업의 이미지가 배속에 들어있는 내적 원죄의 이미지로 변주되는 듯하다. 

이런 변주들을 통해서 김기덕 감독은 불교도 기독교도 아닌 자신의 고민을 그려내고 있다. 우리 안에 있는 근본적인 악함에 대한 실존적 고민. 겨울의 이야기에서 산 정상에 올라 반가사유상 곁에서 명상에 잠기지만, 그렇게 반가사유상의 부처처럼 악업의 고리를 초연히 바라보고 싶은 바램이 언듯 비치지만, 부처의 자리는 일상 속에서는 너무나 먼 곳, 기독교의 하느님처럼 저 높은 곳이다. 결국 주인공은 다시 이어지는 "그리고 봄"에서 어린 동자승의 얼굴을 그리고 있는 또다른 집착을 품게 될 뿐이다. 닫혀진 악업의 고리 속에 계속 이어지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불상의 얼굴]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겨울 이야기의 한 상징적 장면이다. 겨울에 자신을 비우고 또 비우는 수행중에 있던 주인공에게 아기를 안고 찾아온 여인. 보라색 스카프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그녀는 깊은 밤 아기를 두고 암자를 몰래 빠져나가다가 주인공이 세수하기 위해 뚫어놓은 얼음 구멍에 빠져 죽고만다. 다음날 아침 시체를 꺼내 얼굴을 확인하는데, 자신이 젊은 시절 집착으로 인해 살해했던 과거의 여인을 기억하게 했던 그 여인의 얼굴에서 부처의 얼굴을 본다.

이미 입적한 노스님의 사리를 넣어둔 얼음 불상이 녹아버리고,  사리를 넣어두었던 불상의 머리가 얼음 밑 물속으로 흘러들어가는 장면에 이어서 그 시체를 건져올리고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는 장면이 연결되어 있다. 노스님의 사리가 담긴 얼음불상의 머리가 흘러들어간 물 속에서 건져올린 그녀의 얼굴에서 발견하는 석불의 얼굴. 녹아 사라질 얼음 불상의 머리가 또다시 무거운 돌불상의 머리로 얼어붙은 강물 위로 솟아오른다. 그 돌 불상의 머리가 자신의 배속에 무겁게 걸려버린 듯 주인공은 또다시 악업의 얼굴을 마주하고 만다. 

냉혹한 겨울의 냉기에 두껍게 얼어버린 강의 수면은 어떤 흔들림도 일렁임도 없이 욕망과 고통마져 꽁꽁 얼려버린 의식의 표면을 상징하고, 구멍으로 솟아오른 돌불상의 머리는 무의식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다가 그 의식의 표면을 뚫고 솟아오른 악업의 얼굴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무거운 악업을 상징하던 =그 악업을 정죄하는 불상=그 악업을 정죄하던 노스님의 가르침이 맺힌 사리(돌)=얼어붙은 수면 위로 건져올려진 불상, 곧 욕망마져 얼어버린 비워진 마음도 어쩔 수 없는 악업의 순환...

주인공의 시선에 비쳐진 불상의 얼굴은 어떤 수행으로 비우고 또 비워도 해결되지 않는 악업을 비춰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봄에 장난으로 매달았던 돌맹이가 개구리, 물고기, 뱀을 죽이고 말았고 그것을 보던 노스님은 동자승의 등에 돌을 매달은 후에 만일 그 동물들이 죽었다면 일생동안 그 등에 매단 돌을 마음에 지고 살거라고 엄하게 가르쳤다. 그런데 스스로 마음의 고통과 분노를 비우려 애쓰고 있던 그 겨울에 세수하기 위해 파놓은 구멍이 누군가를 죽이고 마는 것이다. 그런 수행을 통해서도 해결되지 않는 악업의 닫혀진 순환. 그 절망적인 실존의 현실을 비춰주는 불상의 얼굴에서 어릴적 엄한 가르침을 주던 스님의 얼굴을 마주친 것은 아닐까? 아직도 비워지지 않고 해결되지 못한 마음 속의 돌이 부처의 가르침으로 새겨진 석불의 얼굴로 솟아오른 것은 아닐까?

결국 이 영화에 등장하는 부처의 얼굴은 해탈의 길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듯하다. 인간이 갇혀버린 악업의 절망적 현실을 비춰는 거울인 것 같다. 이미 해탈의 세계에 들어간 부처의 존재가 그런 해탈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 시선에 비친 한계 상황의 절망을 보여주는 듯 하다. 마치 기독교의 초월적 하나님이 인간의 한계와 죄성을 드러나게 하는 절대타자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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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적어도 내게는 흥미나 재미를 주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이 "기타노 특유의 유머"라고 하는 것이나 "그만의 스타일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했다"는 등으로 긍정적인 평을 하는 것이 나와는 거리가 있었다. 지루하고 밋밋한 줄거리, 유머같지도 않은 썰렁함, 검술장면에 사용된 어색한 컴퓨터 그래픽....

하지만 이 영화에는 마음에 남는 요소들이 있었다. 우선 이제까지 접했던 무술영화와는 전혀 다른 검술장면. 다른 영화들은 화려하고 멋지게 짜여진 검술 대결을 보여주었지만,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전광석화처럼 단칼에 베어버리고 사람의 살이 베어지고 피가 솟구치는 모습을 정나라하게 보여준다. 물론 실제와 다른, 또 다른 과장의 요소가 있겠지만 그럼에도 실제로 검으로 싸우면 저럴 것같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투사와 황소의 대결에서 그 화려한 복장으로 최후의 일격 직전까지 이어지는, 황소와 투우사의 춤은 사라져 있었다. 짧은 침묵의 순간으로 압축된 대결 구도와 단칼에 솟구치는 핏줄기 속에 화려하게 과장된 긴장감은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 속에 늘 무표정한 얼굴로 일관하는 주인공 자토이치. 이런 새로운 형식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잔혹함과 그것이 일어나는 풍경의 냉혹한 무심함을 보여주는 듯했다.

다른 요소는 이런 냉혹함과는 대조적으로 사소하고 비천한, 약한 존재들이 중심으로 옮겨지는 전복의 표현들이었다. 사무라이들의 행렬과 스쳐가는 자토이치의 장면은 줌아웃되면서 배경 구석에 있던 밭에서 일하는 농부들이 중심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그들의 괭이질 소리는 배경 음악의 리듬을 형성한다. 또 길가에 세워진 허수아비(사실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가 뽑혀 굴러다니자 자토이치는 적을 죽이러 가다가도 길을 멈추고 원래 자리에 꼽아둔 후에 다시 길을 간다 .

마지막 장면에서 탭댄스로 표현된 마을 축제에는 이런 전복의 상징이 집약되어 있다. 주인공 자토이치와 악당들을 제외한 조연들이 함께 추는 탭댄스에서는 조연들이 중심으로 등극한다. 동시에 영화 전체의 배경 속에 감춰졌던 발걸음 소리, 그 나막신 소리가 축제의 리듬을 엮어간다. 배경에 억눌려있던 미세한 소리가 축제의 흥을 돋우는 주인공이 된 것이다. 이렇게 영화의 소품과 배경이 중심으로 등극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맹인 검객의 보지못함은 이런 전복의 강한 상징성을 압축하고 있는 것 같았다. 보지 못하기에 오히려 더 많이 볼 수 있는 역설. 볼 수 있다는 교만이 놓쳐버리고 억압해 버리는 세미한 소리와 감각들이 오히려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살아 꿈틀거리고 있다. 게다가 이 새로운 자토이치는 못보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보지 않는다. 영화의 끝장면에서는 오히려 눈을 뜨고 걷다가 길가의 작은 돌맹에 걸려 넘어지면서 자토이치 스스로 "이러니까 장님이라는 소릴 듣지"라는 자조 섞인 독백으로 영화를 끝낸다. 본다는, 아니 "다 보고 있고 보이는 것이 전부"라는 자기 기만이 오히려 장님이라는 자조.

그리고 이 영화에서 악당 두목은 배후의 인물에 조정을 받은 것이었고, 그 배후의 악당 조차도 더 깊이 감춰진 뜻밖의 인물의 지시를 받고 있었다. 자토이치는 이중으로 감춰진 배후의 두목을 찾아내지만 단지 그의 눈만을 베어버린다. 모든 악행의 배후이자 근원은 바로 눈으로 상징되는, 시각적 세계에 붙들린 욕망과 집착이었음을 은유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너와 나를 나누고 보이는 것에만 그리고 그 중에서 더 좋은 것에만 집착하며 연약하고 무가치하게 "보이는" 너를 억누르는 차별지(差別知)가 모든 악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보지 않음으로 인해 보이는 "새로운 세계"는 쾌검의 현실성과 함께 '해체와 재구성의 한 흐름'을 형성한다. 검술의 화려한 치장을 해체하여 현실의 잔혹함을 드러내주고, 교만한 시선(모든 걸 볼 수 있다는)이 놓친 주변을 중심으로 등극시키는 흐름은 중심을 주변으로, 주변을 중심으로 전복시키는 새로운 재구성의 미학이다.

또한 그 잔혹함과 배경의 침묵에 속에 방치되있던 일상의 소품들이 중심으로 등극하면서 그 냉혹한 침묵을 잔혹함으로 보는 것이 편견임을 드러내준다. 우리의 삶이 살아가는 현실이 잔혹함으로 가득하지만 그 잔혹함을 무정하게 방관하는 듯한 주변의 풍경이 오히려 자기 살을 내어주며 그 모두를 살려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주변의 침묵은 냉혹한 방관이 아니라 고통과 눈물을 삼키며 모두를 살려내고 새로운 생명을 싹틔우는 인고의 신음소리인 것이다. 봄이 피어나는 소리, 숲이 숨쉬는 소리, 지구가 우주의 공간을 춤추는 소리.... 그 거대한 신음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모든 것을 본다는 어리석은 욕망이 귀를 닫고 그 소리를 억누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이 영화는 배경으로 깔려있는 소품의 소리를 역동적인 리듬으로 전면에 내세운다. 발바닥에 깔려있던 나막신 소리가 함께 어울어져 축제를 이루듯 냉혹한 침묵 속에는 엄청난 생명의 박동소리가 깔려있었던 것이다.

현실의 참된 생명과 변방의 다양한 중심들은 자토이치처럼 두 눈을 질끈 감고 억눌렸던 세미한 소리와 감각을 되찾고, 중심의 권력을 독점한 모든 허상과 자신도 그 중심에 편입되어야만 살 수 있다는 무명(無明)의 두려움을 단칼에 베어버릴 때만 복권될 수 있을 것이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눈을 찌르듯 욕망과 차별의 눈을 단칼에 베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설사 그것이 자신의 눈일지라도...

이 영화는 감독과 관객의 관계성에서도 전복의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타노 타케시의 "자토이치"는 전통적인 자토이치 영화와는 단절적인 거리를 두고 있다. 금발머리, 장님이 아닐 수도 있다는 설정, 잘 짜여진 검술 장면의 전통성보다는 단칼에 끝나버리는 잔인함, 탭댄스로 표현된 마을 축제 장면...등.

기타노 다케시의 독특한 시대극 자토이치는 "무엇을 이야기 하는가?"보다는 "어떻게 이야기하는가?"에,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만의 독특함 새로움으로 이야기하려는 집착이 드러나 있다. 감독 스스로도 "영화를 만들되, 검술에 달인이고 주사위 노름의 천재인 맹인 안마사 자토이치라는 주요 캐릭터만 남기고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하겠다"는 의도를 인터뷰를 통해서 밝혔었다.

그렇기에 이 영화가 관객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은 지를 읽어내려면 그 줄거리가 아니라 그 스타일을 느껴야 할 것이다. "새로움에 대한 집착"

내용보다는 형식이, 줄거리보다는 표현방식을 중심에 놓는 변화는 그 무게 중심을 전통적인 관점에서 감독의 창조성으로 옮겨온다. 이런 창조적 해체와 재구성은 관객에게도 감상의 새로운 틈을 열어준다. 영화가 보여주려던 것보다는 관객이 느끼고 읽어내고 싶은 것이 중심에 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전통적 자토이치에 대한 해체가 오해가 아니라 창조이듯이 관객이 자유롭게 오해하는 것 역시 창조적 감상일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이 영화의 스타일에는 보여주는 대로 봐야했던 관객이 보고 싶은 대로 볼 수 있는 자유를 내포하고 있는게 아닐까? 그렇지 않아도 이미 그렇게 보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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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창성, 혁신성, 현실에 관한 진리에 집착하면서 사람들과의 만남은 도외시하는 천재의 이야기. 그 천재는 결국 독창적인 이론으로 능력을 인정받지만, 정신분열증으로 모든 것을 잃게 될 위기에 처한다.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약을 끊고 환상을 이겨내려는 고된 노력과 이를 돕는 부인의 사랑으로 결국에는 말년에 노벨상을 수상하게 된다는 이야기. 그와 부인은 해답이 머리에 있지 않고, 가슴에, 아름다운 마음, 사랑에 있다는 진리를 보여준다. 참된 논리는 수학이 아니라 사랑이라고.

이 영화는 수학, 논리, 독창성, 현실에 관한 진리에 집착하는 천재의 정신분열증이라는 상징을 생각해보게 한다.

수학은 가장 명확한 논리와 진리의 세계이다. 현실의 우연과 혼돈, 복잡성은 수학의 순결한 세계에 발딛일 틈이 없다. 늘 유일하고 정확한 정답이 있는 세계. 그 세계의 힘으로 미국은 2차 세계 대전에서 원자폭탄으로 전세를 역전했고, 우리가 누리는 현대의 문명들도 수학이라는 굵은 뿌리로 지탱되어있다.

하지만 수학적 논리는 현실과 너무나 큰 간격을 지니고 있다. 현실 속 어디에도 순결한 수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 점에서 일정한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인 원도, 직선도, 삼각형도 존재하지 않고, 1+1이 2가 아닌 현실들로 가득하다. 그럼에도 수학적인 논리로 생각하고 분석하는 것이 가장 강력한 진리로 작용하고 있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수학이 진리로 작용하는 우리의 일상은 결국 너무나 강력해서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정신분열증의 환상이 아닌가?

이런 수학적 논리에 집착하는 주인공은 스스로의 대단함을 인정받고자 하는 강박적 욕망에 짙눌려, 허상의 인물과 사건들을 현실로 보기 시작한다. 뭔가를 소유하려는 강박적 욕망은 우리들로 하여금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지배할 수 있는 도구를 찾게 한다. 바로 수학적 논리가 그런 도구가 아닌가? 그 강력한 도구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또 다른 환상임에도, 우리의 욕망은 그것을 통해서 현실을 재단하고 측정하며 계산하게 한다.

실존인물인 주인공이 노년에 노벨상을 수상하고 나오다가 정신분열증으로 보게 되었던 환상의 인물들을 여전히 발견하는 장면이 있다. 그는 평생 그 환상을 제거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어리석은 욕망에 의해 붙들린 수학적, 경제적, 소비적 논리로 그려진 환상을 보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주인공보다 더 큰 문제는 주인공처럼 "환상임을 알고, 보여도 무시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환상임을 아예 모르기에 그것이 참된 진실인양 쫓으며 살아가고 있다. 이렇게 이 영화는 우리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정신분열증, "참된 진실을 구별해내지 못하고, 우리 욕망이 투사된 환영들에 붙들린 마음의 병"을 돌아보게 했다.

그러나 그 욕망과 환상은 우리 삶에서 쉬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이 평생 정신분열증을 안고 살아가듯이. 하지만 그 환상을 구별해내고 무시하는 길을 치열하게 찾아보고, 연습해야 할 것이다. 그 길이 너무나 힘겹고 고되겠지만, 우리에겐 그 길을 가야할 절박한 이유가 있다. 참된 현실의 진리란 우리가 서로를 만나고 나눌 수 있는 유일한 터이다. 서로가 보는 현실이 제 각각의 욕망일 뿐일 때 우린 서로를 파괴할 뿐이다. 우리에게 소중한 존재들이 있기에 그들과 함께 숨쉬며 아름다운 생명을 누릴 현실을 되찾아야 한다.

또한 우리 눈를 가린 환상의 힘이 너무나 강력하기에 힘겹겠지만, 우리에겐 가녀리나마 희망이 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한 존재 한 존재가 이미 온 우주와 하나로 이어져 그 모든 존재의 사랑스런 흐름이 잠시 한 몸으로 맺혔다 스러질 뿐임을 깨닫는 사랑, 그 아름다운 마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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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그제 홍삼수 감독의 [오! 수정]이란 영화를 뒤늦게 봤습니다. 흥미로운 묵상꺼리와 우리 일상의 속내를 있는 그대로 비춰주고, 신학적인 문제에 대한 화두도 던져주는 영화였습니다.

1,2, 3,4부로 구성된 이 영화는 -영화에서는 다른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하루종일 기다리다:", "어쩌면 우연","1","2"...등- 1,2와 3,4부가 같은 시간에 있어난 사건인데, 전반부는 남자 주인공, 후반부는 여자 주인공의 시점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시점만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사건들이면서 사건 그 자체도 조금씩 차이가 나죠. 그건 남, 여 주인공의 기억에 다르게 각색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재미난 발상은 우리 일상의 기억들과도 닮아있습니다. 우리도 같은 일을 함께 겪고도 다르게 기억하는 일들이 종종 있죠. 제 안사람과 연애시절얘기를 할 때, 이런 경험을 하곤 합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도 앞에 나왔던 장면인데 후반 이후에 다시 나오면서 뭔가 다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무엇 무엇이 다르다고 생각한 후에 확인하려고 되돌려보니까, 그것을 영화로 방금 본 제게도 조금씩 다르게 기억되어 있더군요. 영화의 두 주인공의 기억과는 또 다른, 저의 기억이었던 거죠. 이렇게 영화를 보는 관객도 한 사건을 나름대로 각색하여 다르게 기억하는 재미난 상황을 경험했죠.

하지만 이런 재미난 경험은 심각한 문제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중요하고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경험들도 기억에 의존해 있기 때문이죠. 그 기억들이 실은 있는 그대로의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욕망에 의해서 재구성된 왜곡들이고, 의미들은 이런 왜곡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욕망은 비릿하고 역겨운 우리의 모습들은 지워버리고, 필요한 부분만을 곱게 다듬어서 집어넣죠. 우리의 약속과 희망, 만남들은 그렇게 각색된 장면들을 배경으로 숨쉬고 있던 것입니다.

이 영화는 특히 남녀간의 사랑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기억의 왜곡을 있는 그대로 담고 있습니다. 그런 각색과 왜곡들이 우리 일상의 연애와 사랑 속에도 별다르지 않게 꿈틀거리고 있다는 진실을 대면하게 만듭니다.

얼마전에 메멘토라는 영화도 바로 사실(fact)와 기억(memory)이라는 문제를 천재적인 구성으로 다뤘었죠. 그 영화는 근대철학의 주객 이원론의 문제의식을 퍼즐 맞취기에 기댄 추리적 상상력으로 그려낸 매혹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오! 수정"은 사실과 기억에 관한 문제를 우리의 일상 속에서 담담하고 때론 씁씁한 미소에 담아 보여주는 영화입니다.

메멘토는 끝나고 나면 도대체 어떻게 된 건지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해하게 되는 순간 그 천재적인 구성에 감탄이 터지게 하죠. 이와 달리 "오! 수정"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에 기초한 의미"같은 것은 현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진실과 맞닥드리게 합니다. 그리곤 그럼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라는 실존적 질문을 만나게 하죠. 맛있지만 뒷맛이 씁씁한 커피맛 같은 영화죠.

"사실과 기억", 그리고 "이것에 기초한 의미들"의 문제는 신학에서도 중요한 화두죠. 신학을 배우다보면 성경에 나오는 사건들이 단순하게 모두 사실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죠. 그속에는 상징적이고 시적인 이야기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를 통해서 성경의 의미를 더 깊고 넓게 맛보는 기회를 얻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경의 내용 중에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가 의미인지 구별하기 어렵게 된다는 점입니다. 특히 복음서를 배우다보면, 각 복음서마다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습이 모순되고 상반되기도 하는 것을 알게 되면서는 심각해 지죠. 이 영화는 바로 이런 신학적 문제도 다시 생각해보게 하고,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화두적인 단서를 던져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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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jy814 2004-03-22 2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신약이해 숙제 할 책 읽다가 꾸벅꾸벅.. 잠 깰려고 감신대원 까페에 들어왔다가 원우님의 알라딘 서재 소개하는 글을 읽고 링크했더니... 우와 대단하십니다. 지나번 신약이해 시간에 역사적 예수를 읽고 교수님께 하셨던 질문( 뒤에 앉아서 원우님 질문의 처음 부분을 잘 못들었습니다. 지금도 궁금합니다.)을 듣고.. 음 범상치 않군 했는데 진짜 범상치 않으시군요.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 저도 인상깊게 보았습니다. 요즘은 흔한 말로 포스터 모더니즘이라고 하지요. 이미지가 지배하는 세상.. 지난주 종교사회학 시간 도입부에 교수님께서 루이 암스트롱의 "

"what a wonderful world'를 틀어주시며 교수님은 음악에서 신을 느낀다고, 이런 감정도 종교가 아니냐고  했을 때 전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저에게 있어 그 음악은 절연한 '저' (이생이 아니라 말그대로 속세죠) 세상에 대한 향수 내지는 그렇게 버리려 애쓰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확 엄습해 오는 걸 느끼기 때문이죠. 교수님이 너무 순수하신 것인지 제가 너무 세속적인 것인지.. 저것도 종교냐.. 하고 속으로 투덜대다가 제가 종교사회학이라는 과목을 기독교 사회락이라는 과목으로 오해하고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하여튼 하나의 현상에 이렇게 다른 느낌을 갖는 세상, 진리나 원칙은 사라져 가고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는 세상- 이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세상을 구원해야 하죠 거창하게 말하면..

무슨 말하다가 이렇게 삼천포로 빠졌나.. 아 오 수정.. 홍상수 감독의 다른 영화 '강원도의 힘' '생활의 발견'도 볼만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별로 안좋아 합니다만. 그래도 영화는 관객에게 꿈과 희망을 줘야 한다는게 제 지론이라서..

숙제에 묻혀 사는 인생입니다. 우리 모두 열심히 화이팅..

추신. 잠 깼습니다. 그것도 확-

 

 


물무늬 2004-03-23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군신지 이렇게 흔적을 남겨주셔서 너무 감사드려요^^ 아직은 혼자 노는 곳이라 누군가 찾아오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군요. 혹시 또 오시면 누구신지 알려주세요. 역사적 예수에 대한 질문 학교에서 직접 나누면 좋을 것 같아요^^
루이암스트롱 노래....사람마다 주관적인 직관이 다르니까 님처럼 느끼시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제 생각에도 교수님께서 그 감정을 종교라고 한 것은 약간의 과장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광의의 의미에서 보는 종교라면 뭐든 종교가 아니겠습니까?
참 님께서 제 글들을 보고 잠이 확 깨셨다니 정말 놀랐습니다. 보통은 잠않올때 도움을 많이 받는 편인데....^^::

kjy814 2004-03-24 0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피드백이 빠르다니.. 자주 들러야 겠는 걸요.. 내가 누구게..알아맞혀 보세요.
낄낄
저도 1/6 학기 18번 김진연 이랍니다. 이제야 신약이해 숙제가 막 끝났어요. 어찌보면 조교가 휙 보고 나눠주는 것 같은데, 미련인지 집착인지 일주일 내내 신약이해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아 다른 과목들이 좀 불쌍하기도 합니다. 이러다 다른 과목들에게 된 통 당할 것 같기도 하고. 내일은 교회사가 있는 날이죠. 할렐루야 열심히 부르고(그런데 그렇게 단순한 성가곡(?)을 반복해서 부르면 정말 신비한 단계에 이를 수 있을 것 같나요. 저도 개인적으로 주기도문을 반복해서 계속 외우고, 그것이 기도에 도움이 되는 것 같기는 한데.. 교수들이 말하는 영성이 어떤건지.. 왠지 가톨릭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요.) 내일도 기대가 되네요

오늘 신학 입문,, 재밌지 않았나요. 신창원 교수님은 아들에게 창조신학하는 교회 가지말라고 하셨다죠. 우리 엄만 조직 신학은 듣는 그 자리에서 잊어버리라고 신신당부 하셨는데... 그냥 이런 저런 이유로 웃었답니다.

그런데 질문이 있었어요. 교수님이 창조신앙과 진화론의 공통점을 찾아야 된다고 하면서 그 공통점이 원창조/계속창조/공명적 일치라는 담론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는데 왜 구체적인 입증은 하지 않으셨을 것 같아요?. 쉽게 말하면 공통점의 구체적 사례랄까..1)수업시간이 모자라서 2)신학의 임무는 자연과학의 구체적 사실을 입증하는게 아니라 입증할 수 있는 담론/가설을 찾는 것으로 만족하고 나머지는 과학자의 몫이기 때문에 3)다른 이유가 있다.

자야 겠네요
good night

물무늬 2004-03-24 01: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넘 놀랍고 기쁩니다. 이렇게 빨리 님의 또 다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어서요^^
김진연님...이제 얼굴과 맞춰보면 되겠습니다. 내일 꼭 찾아야쥐....
대부분은 그냥 대충해서 내기 급급한 것 같은데 열심히 하시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그만큼 신약 과목에 대한 통찰력이 익어갈거라 믿습니다.
할렐루야 성가곡이요?...박익수 교수님께선 우리 나라의 독송문화가 무의미하다고 보시죠. 한 구절을 봐도 깊이 제대로 봐야 한다는 관점이시니까요. 하지만 누천년 내려온 독송문화의 저력을 체험해보지 못하신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수도원 전통의 영성 훈련법은 또 다른 깊이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일치를 맛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반복되는 노래 역시 마찬가지이고요. 그런 영성 훈련을 맛보신 개신교인 분들과 얘기를 나눠보면 쉽게 무시하지 못하게 되더군요. 겸손히 배우고 경험해본 후에 판단할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신학입문 시간, 창조론과 진화론 문제라....글쎄요. 교수님께서 제가 듣기엔 워낙 불명료하고 산만한 설명으로 일관하셔서 그 이유를 정확히 추측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 추측으로는-실은 더 궁금해서 서점에 가서 [과학과 종교], 그리고 그 교수님 글이 실린 책까지 읽어 봤습니다- 시간도 없었을 뿐더러 더 이상의 입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으신 것 같습니다. 창조신앙과 진화론 사이에 공동점은 단지 진화적 발전과 계속-창조를 통한 완성의 과정과의 유사성 자체인 것 같습니다. 유사한 발전의 운동 방향을 가졌다는 것 자체에서 끝나는 것이죠. 단지 모순되거나 대립된다고만 볼 것이 아니라 유사성을 통해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죠. 계속-창조니까 진화론이 모두 옳다거나, 진화론이 옳으니까 계속-창조가 입증되었다는 식의 단순한 일치가 아니라, 서로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통해서 서로가 새로운 관점을 구성해나갈 수 있는 공조가 가능하다는 것이죠. 공명적 일치는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았습니다.

맞나? 사실 잘 모르겠군요. 괜히 모르는 것 아는척 했나봅니다. 제 추측일 뿐입니다. 과학과 종교에 대해서는 저도 처음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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