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이 영화의 결에서는 시적 상징의 여백에서 베어나오는 깊은 고민과 슬픔이 느껴진다.
Gapping; 시적 상징의 여백 채우기
[물 위에 떠있는 암자] 어디에도 담은 없지만 다가갈 수 없는 곳. 암자에 있는 사람이 배를 저어 다가와 데려가지 않는한 다가갈 수 없는 단절..그러나 겨울의 매서운 냉기, 그 주검의 기운 앞에 모든 욕망과 집착이 굳어버릴 때면 단단해진 물결을 밟고 자유롭게 다가갈 수 있는....우리 내면 깊은 곳의 암자....
[벽없는 문] 어디로 다녀도 될 것 같지만, 어디에도 정해진 길이 없어보이지만, 그 보이지 않는 문을 통해, 길없는 길로 출입할 때 악업의 무거운 돌을 토해낼 수 있는 것일까?
[돌 먹이기] 김기덕 감독은 천진난만한 동자승의 귀여운 손이 개구리와 물고기와 뱀의 뱃속으로 밀어넣은 업보의 돌을 통해서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 악함의 뿌리를 형상화한다.
[반가사유상처럼...] 그리고 그 악함의 뿌리를 어찌해야하는지를 깊이 고민하고, 부처의 반개한 명상의 그 비워진 시선으로 그 죄책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는 듯 하다.
[불교, 기독교, 혹은 희랍비극?] 이 영화는 내게 불교적 이미지에 기독교적 원죄를 투영시킨 실존적 고민의 상징으로 읽혀진다. 봄, 천진난만한 장난으로부터, 의도치 않아도 비롯되고 마는 악업. 불교에서는 욕심과 집착이 고통을 낳는다고 보는 그 관점을 희랍적 비극의 도식으로 변주한 듯 하다. "욕심이 집착을 낳고, 집착은 살의를 낳는다"는 노스님의 가르침은 집착이 고통을 낳는다는 불교적 관점을 살의라는 관계적 죄의 개념으로 변주하고 있다. 그리고 첫 봄에서 물고기와 개구리와 뱀의 몸에 실로 묶여있던 돌은 "그리고 봄"에서는 입을 통해 뱃속으로 밀어넣진다. 실로 이어진 관계적 업의 이미지가 배속에 들어있는 내적 원죄의 이미지로 변주되는 듯하다.
이런 변주들을 통해서 김기덕 감독은 불교도 기독교도 아닌 자신의 고민을 그려내고 있다. 우리 안에 있는 근본적인 악함에 대한 실존적 고민. 겨울의 이야기에서 산 정상에 올라 반가사유상 곁에서 명상에 잠기지만, 그렇게 반가사유상의 부처처럼 악업의 고리를 초연히 바라보고 싶은 바램이 언듯 비치지만, 부처의 자리는 일상 속에서는 너무나 먼 곳, 기독교의 하느님처럼 저 높은 곳이다. 결국 주인공은 다시 이어지는 "그리고 봄"에서 어린 동자승의 얼굴을 그리고 있는 또다른 집착을 품게 될 뿐이다. 닫혀진 악업의 고리 속에 계속 이어지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불상의 얼굴]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겨울 이야기의 한 상징적 장면이다. 겨울에 자신을 비우고 또 비우는 수행중에 있던 주인공에게 아기를 안고 찾아온 여인. 보라색 스카프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그녀는 깊은 밤 아기를 두고 암자를 몰래 빠져나가다가 주인공이 세수하기 위해 뚫어놓은 얼음 구멍에 빠져 죽고만다. 다음날 아침 시체를 꺼내 얼굴을 확인하는데, 자신이 젊은 시절 집착으로 인해 살해했던 과거의 여인을 기억하게 했던 그 여인의 얼굴에서 부처의 얼굴을 본다.
이미 입적한 노스님의 사리를 넣어둔 얼음 불상이 녹아버리고, 사리를 넣어두었던 불상의 머리가 얼음 밑 물속으로 흘러들어가는 장면에 이어서 그 시체를 건져올리고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는 장면이 연결되어 있다. 노스님의 사리가 담긴 얼음불상의 머리가 흘러들어간 물 속에서 건져올린 그녀의 얼굴에서 발견하는 석불의 얼굴. 녹아 사라질 얼음 불상의 머리가 또다시 무거운 돌불상의 머리로 얼어붙은 강물 위로 솟아오른다. 그 돌 불상의 머리가 자신의 배속에 무겁게 걸려버린 듯 주인공은 또다시 악업의 얼굴을 마주하고 만다.
냉혹한 겨울의 냉기에 두껍게 얼어버린 강의 수면은 어떤 흔들림도 일렁임도 없이 욕망과 고통마져 꽁꽁 얼려버린 의식의 표면을 상징하고, 구멍으로 솟아오른 돌불상의 머리는 무의식 깊은 곳에 도사리고 있다가 그 의식의 표면을 뚫고 솟아오른 악업의 얼굴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
무거운 악업을 상징하던 돌=그 악업을 정죄하는 석불상=그 악업을 정죄하던 노스님의 가르침이 맺힌 사리(돌)=얼어붙은 수면 위로 건져올려진 석불상, 곧 욕망마져 얼어버린 비워진 마음도 어쩔 수 없는 악업의 순환...
주인공의 시선에 비쳐진 불상의 얼굴은 어떤 수행으로 비우고 또 비워도 해결되지 않는 악업을 비춰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봄에 장난으로 매달았던 돌맹이가 개구리, 물고기, 뱀을 죽이고 말았고 그것을 보던 노스님은 동자승의 등에 돌을 매달은 후에 만일 그 동물들이 죽었다면 일생동안 그 등에 매단 돌을 마음에 지고 살거라고 엄하게 가르쳤다. 그런데 스스로 마음의 고통과 분노를 비우려 애쓰고 있던 그 겨울에 세수하기 위해 파놓은 구멍이 누군가를 죽이고 마는 것이다. 그런 수행을 통해서도 해결되지 않는 악업의 닫혀진 순환. 그 절망적인 실존의 현실을 비춰주는 불상의 얼굴에서 어릴적 엄한 가르침을 주던 스님의 얼굴을 마주친 것은 아닐까? 아직도 비워지지 않고 해결되지 못한 마음 속의 돌이 부처의 가르침으로 새겨진 석불의 얼굴로 솟아오른 것은 아닐까?
결국 이 영화에 등장하는 부처의 얼굴은 해탈의 길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듯하다. 인간이 갇혀버린 악업의 절망적 현실을 비춰는 거울인 것 같다. 이미 해탈의 세계에 들어간 부처의 존재가 그런 해탈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초월적 시선에 비친 한계 상황의 절망을 보여주는 듯 하다. 마치 기독교의 초월적 하나님이 인간의 한계와 죄성을 드러나게 하는 절대타자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