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나는 최근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무언가 받거나 구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는 이에 대해 정말 잘 숙고해 볼 것이다. 왜냐 하면 만약 내가 하느님으로부터 무엇이든 받게 된다면, 나는 하느님 밑에서 종처럼 될 것이며 주는 그는 주인처럼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생에 있어서는 이래서는 안된다.

우리가 우리 자신 밖에서 무엇을 얻거나 받으면 이는 옳지 않다. 우리는 하느님을 자기 자신 밖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거나 간주해서는 안 되고, 자기 자신의 것으로 그리고 자신 안에 있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서든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든 혹은 자기 밖의 그 어떤 것을 위해서든, 어떤 목적을 위해 봉사하거나 일해서도 안된다. 오직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생명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 어떤 순진한 사람들은 하느님은 저기 계시고 자기들은 여기 있는 것처럼 생각해야 한다고 망상을 한다. 그렇지 않다. 하느님과 나, 우리는 하나다."

"....그는(예수) "아버지여, 나와 당신이 하나이듯이, 그들이 하나이기를 나는 원합니다"(요한 17,20)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자가 본질과 본성에서 성부와 하나이듯이 그대도 본질과 본성에서 그와 하나이며, 성부가 자기 자신 안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듯이 그대도 그대 안에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그대는 그것을 하느님으로부터 빌릴 필요가 없다. 왜냐 하면 하느님은 그대 자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대가 취하는 모든 것을 그대는 그대 자신의 것으로부터 취하며, 무슨 일이든 그대가 그대 자신의 것으로부터 하지 않으면 그 일들은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 죽은 것이다. 그런 것들은 그대 밖에 외적 원인들에 의해 움직여지는 일들로서, 생명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죽은 것이다. 왜냐 하면 자기 자신의 것으로부터 움직여지는 것만이 살아 있는 것이 때문이다. 그런적, 사람이 하는 일들이 산 것이 되고자 할진대, 외적으로 혹은 자기 밖으로부터가 아니라 자기 안에서 자기 자신의 것으로부터 해야 한다."

길희성 저, 마이스터 엑카르트의 영성 사상 (분도출판사, 2003), pp. 271-273에서 인용.

중세 신비가 에크하르트가 그려주는
신앙인의 삶, 하느님 아들됨의 삶이
내 영혼 깊은 곳까지 공명해온다.
신앙의 깊이와 방향에 대해 빛을 던져준다.
시원한 성령의 바람....
그 모습에 대해 뭐라 입을 열기도 머뭇거려지는
잔잔하며 깊은 울림.
잠잠히 입을 다물고
그냥 그대로 옮겨놓는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4-05-17 12: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무늬 2004-05-17 1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문적인 이론과 논쟁들이 공허해지지않고 일상이 표피를 뚫고 들어가는 것은 님처럼 삶의 한 부분으로 품어 안고 고민하며 기도하는 궁행을 통해서라는 생각이 스쳤습니다. 역시 오랜 기도의 힘이 추진력이 되시는게 아닌지....

전 요즘 제 생각의 여백마다 예수의 삶과 죽음에 대해, 저의 신앙과 진심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살고 죽을 수 있는지에 대해 묵상하는 "깨인 시선"을 유지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분주한 일상의 속도에 취하지 않으려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런 의지자체의 속도에도 취할 수 있다는 경계 또한 늦추지 않아야 하겠죠.

가끔은 외롭다는 생각이 의식의 표면 위로 불쑥 솟아오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 안에 또 다른 나가 있고 그의 시선과 음성에 귀기울이면서 외로움이 고독으로 변하더군요. 어차피 "나"란 의식의 수면 위에 비친 존재의 잔영일 뿐, 어차피 삶은 그렇게 자신과 모든 존재를 비춰주는 그 "님"을 만나는 사귐이라는 깨침이 봄바람처럼 살포시 스쳐갑니다.

2004-05-18 0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무늬 2004-05-18 2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로움에 너무나 힘겨워 하던 여린 감성이 세월의 흐름에 군살이 배기고 많이도 무감해졌습니다. 이런 것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인가 하는 생각이 들때면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아쉽고 그리운 느낌이 뒤엉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문득 외로움이 고개를 드니 조금은 당황스러웠어요. 오랜만이기도 하고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기도 하고. 소중히 여기는 친구는 워낙 홀로로도 충분해하는 녀석인데다가 멀리 있고.....
요즘들어 제 마음의 여백마다 묵상과 관상으로 채워가고 있었는데, 문득 그 외로움을 바라보는 제 안의 또 다른 저를 발견했습니다. 그렇게 제 안의 그 님이 함께 있다는 깨달음이 외로움을 고독으로 바꿔주더군요.
그래도 제가 고민하고 묵상하며 느끼는 것들을 함께 나누고 그런 서로의 느낌에 관심을 기울여주는 친구가 가까이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란 생각이 듭니다. 이렇게 이곳에서라도 님의 생각을 만나고 함께 나누는 것에 너무나 감사하는 이유이죠.
 

의심의 역광(Back Light)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 무서움에 사로잡혀서, 물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믿음이 적은 사람아, 왜 의심하였느냐?" 마태복음서 14:30, 31(표준새번역 개정판)

기독교 신앙에서 의심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위의 본문이 이런 이미지의 근거가 되는 대표적인 본문이다. 이밖에도 믿음이 적은 자를 책망하는 예수의 모습이 복음서들에 등장하고 있다. 그래서 신앙이라는 '절대신념체계'에 대한 의심은 부족하거나 어리석은, 혹은 미숙한 신앙의 모습이거나, 심지어 신앙과 대치되는 죄와 같은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데생(소묘)에서 그림자가 생긴 부분의 가장 어두운 쪽 끝에 오히려 밝은 부분을 그려 넣는 역광(back light) 기법처럼 의심과 신앙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기도 한다. 오히려 의심이 신앙을 더욱 성숙하게 하고, 깊게 만드는 경우들이 있다. 이런 '의심의 역광'은 가장 어두운 부분 바로 옆에 있기 때문에 구별하기가 쉽지 않고 때론 당황스러울 수도 있다. 점차 어두워지다가 갑자기 밝은 영역이 나타나기 때문에, 가장 어두운 곳에 밝은 빛이 빛나고 있기 때문에 그 두 영역이 연이어 있다고 여기기 어렵다.
하지만, 가장 어두운 곳에 밝은 빛이 깃들어 있는 것처럼 의심의 깊이 속에 잉태되는 성숙한 신앙도 잃어 버려서는 않될 신앙의 뿌리임에 틀림없다. 이는 혼란스러운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의심의 두 차원을 밝히 알아보기 시작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생명이 되는 의심과 주검이 되는 의심의 두 차원, 바로 '미숙한 신앙의 그늘인 의심'과 '신앙의 뿌리가 되는 의심'은 그 대상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구별할 수 있다. 의심의 대상이 '하나님'이나 '하나님과의 만남과 체험' 자체일 때 그것은 미숙한 신앙이기 쉽다. 절대자의 무한함을 맛보지 못했거나 이미 맛본 것을 망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하나님에 대한 표현이나 생각"이 의심의 대상인 것은 신앙을 끊임없이 새롭게 하고, 깊어지게 한다. 하나님 또는 절대자를 체험할 때, 인간은 그 놀라운 경험과 감동을 언어로 표현한다. 그것은 감탄이나 탄성, 흥겨운 콧노래처럼 자연스러운 것이고, 또한 이런 과정을 통해 여과될 때, 그 경험의 깊이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한 가지 이해나 해석, 종교적 표현만이 모든 것인양, 그 표현이 바로 하나님이나 절대적 체험 그 자체인양 오해하고, 고집하면서 다른 가능성을 억누를 때 그것은 커다란 오류가 되고 만다. 인간의 이해나 표현에 다 담길 수 없는 절대적 세계를 재단하고, 그 무한한 변화의 역동성을 화석화시키는 어리석음이자 오만함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인간의 묘사와 체계화를 의심하는 것은 인간이 지녀야할 당연한 겸손이자 필연적인 구도의 길이다.

이런 어리석음를 끊임없이 파괴하는 의심, 겸손히 하나님의 무한하심에 고개숙이게 하는 의심이 바로 신앙의 뿌리이다. 어떤 고정된 신념체계에 대한 끊임없는 의심이 있을 때에만 신앙은 늘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고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은 늘 부드러운 변화를 이어간다. 오늘의 내 몸은 어제의 그 몸이 아니다. 죽어가고 태어나는 변화에 연이어 자리하고 있기에 몸은 살 수 있다. 이처럼 신앙도 끊임없는 의심 속에 그 생명의 고동소리를 울려가는 것이다. 화석으로 굳어진, 신앙에 대한 집착은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놀라움을 볼 수 없을 뿐더러, 그런 새로움을 정죄하고 파괴하려 한다. 이는 자신이 그려낸 하나님만이 최고의 유일한 절대자라고 고집하는 것이다. 곧 스스로가 하나님이 되려는 오만함이다. 물론 그 하나님은 낮은 곳을 향하여 자신을 비우시는 하나님은 모르고, 오로지 상승과 강함으로만 오해된 하나님일 뿐이다.
이렇게 오해와 집착, 욕망으로인해 "의심의 역광"을 잃어가는 것은 인식중심주의적 진리관의 영향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인식론적으로 파악되고 이해되는 진리만이 참된 진리라는 관점은 설명될 수 없고, 파악될 수 없는 것들은 진리의 영토 밖으로 추방해 버리곤 한다. 그로인해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어느 한 가지 틀에 가둬둘 수 없는, 살아움직이는 진리를 받아들일 수도, 견딜 수도 없다. 체계적 설명은 일관된 체계로 고정시키고 이와 다른 형태의 것들을 거부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인가 확실하고 변하지 않는 것을 붙잡을 때에만 안정을 느끼는 마음의 욕망 때문이다. 늘 새롭게 변하는 것은 계속 허물고 쌓는 변화의 연속이기 때문에 긴장과 갈등의 압력을 견뎌야만 한다. 이런 압박감에 대한 두려움과 반작용으로인해 일관된 이해의 범주에 담을 수 있는 고정된 체계에 더 끌리기 쉽다.
그러나 자전거를 타는 법을 논리적으로 이해했다고 바로 탈 수 없고, 사람이 물에 뜬다는 것을 안다고 물에 빠져서 떠있을 수 없는 것처럼 인식이 삶으로, 몸으로 이어지는데는 엄청난 간격이 존재한다. 참된 앎은 논리적이고 인식론적으로 파악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때론 오히려 알 수 없는 신비의 그 긴장감을 견디면서 몸의 열매를 맺을 때까지 행할 때, 삶으로 베어나오는 변화를 체험하게 된다. 모름의 빈 공간에서 자유롭게 열매맺는 존재의 생명을 몸으로 삶으로 깨닫게 된다.
게다가 반대로 의심하지 않는 신앙은 그 대상이 인식론적인 신앙 체계인 경우에 삶과의 단절을 초래하는 맹목적인 신념이 될 위험에 처하기 쉽다. 삶의 복잡성과 다층성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생명의 기운은 고정된 체계에 담을 수 없다. 그런데 어느 한 체계만을 고집하게 되면 거기에서 이미 벗어나 새롭게 변해가는 일상의 생명과는 너무나 큰 간격을 둘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끊임없는 의심 속에 늘 새롭게 하나님을 만나고, 겸손히 알 수 없는 신비의 긴장감을 견딜 때, 삶으로 스며드는 신앙의 실천에 도달할 수 있다. 의심의 가장 짙은 그늘에 고여, 시간의 흐름마져 잊어버린 어느 순간에 홀연히 비춰오는 역광, 실은 그곳에서 신앙의 깊은 뿌리가 맑은 생명을 빨아올리고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2004-04-26 08: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물무늬 2004-04-26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쉬 비슷한 세대라 그런지 음악의 코드가....^^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정말 좋아하는 곡입니다. 오늘 느즈막하게 집을 나서는데 날씨가 많이 쌀쌀해졌더군요. 흐린 하늘, 젖어드는 보슬비가 정말 흐린 가을 날씨 갔았습니다.

사람과 사람 간의 의심.....님의 글을 읽으며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가 생각났습니다. 자신만을 사랑한다고 굳게 믿었던 아내가 죽은 뒤에야 알게된 아내의 다른 모습....믿는 일, 혹은 믿어주는 일은 참 쉽지 않은 것 같아요. 하지만 내 믿음의 내용이 다 담을 수 없는 상대방의 깊이를 향해 마음을 열어주는 것은 더 어려운 것 같습니다. 내 믿음이 자칫 고정관념과 편견이 되기 쉬우니까요...."믿음과 의심의 긴장", 그 사이를 비껴가야 할 텐데...어느 한쪽도 어려우니...
 

이 번 주 채플에서는 성가대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노래 제목은 " We will claim Victory", 어두움 속에서 괴로움 당할 때 나에게 승리 주신 주님께 감사하고, 예수 안에서 승리를 외치는 곡이었다. 성가대 지휘자는 잘 못해도 웃으며 부를 것을 신신 당부했다.

성가대석에 올라 순서지를 보니, 장애인의 날, 장애해방을 위한 채플이었다. 그래서 예배가 시작되고 찬양을 하기 전에 학교에서 장애우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한 영상을 보게 되었다. 너무나 가파른 언덕, 계속 되는 계단, 장애인 시설이라고는 사용할 수 없게 만들어져 있고, 식당가는 길은 보통 사람도 조심해서 내려가야 하는 가파른 계단...그들은 교내에서 어디에라도 간다는 것 자체가 너무 힘들었고 갈 때마다 누군가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한, 그 높은 현실의 벽 앞에서 멈춰있었다.

무거워지는 마음,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이 스쳐갔다. 그리고 이어질 우리의 찬양...."승리를 외쳐야 했다" 그것도 웃으면서...난 이미 시작하기도 전에 당황해하고 있었다. 장애학우들의 문제 앞에서, 그 힘겨운 절망 앞에서 승리를 웃으면 외치는 비장애인들의 찬양 ?...표정은 이미 굳어있었고 이래도 되나하는 상념에 붙들려 시작을 놓쳐버렸다. 간신히 쫓아가면서 혼신을 다해 지휘하는 지휘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그 분의 당부가 떠올랐다. 하지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혼란스러운 상념들 속에 "그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한계 상황 속에서도 승리를 외칠 수 있는거야, 그게 믿음이고 신앙이지"하는 변명이 스쳤갔다. 하지만 강자가 약자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은....적어도 내가 장애우들을 향해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복잡한 상념 속에 찬양을 끝내고 자리에 앉았다. 그 때 모두들 박수를 쳐주었다.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치는 박수였을까? 그 때 장애우들의 특송이 이어졌다. 초등학생 쯤 되보이는 남학생-아마도 성장이 일찍 멈춘 듯 했다-이 혼자 노래를 부르고 나머지는 수화를 했다. 그 찬양의 가사는 내 마음을 울려왔다.

"주님 말씀하시면 내가 나아가리다. 주님 뜻이 아니면 내가 멈춰서리다. 뜻하신 그곳에 나 있기 원합니다.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며 살리니..."

복받쳐 올라오는 눈물과 거친 호흡을 삼켜야 했다. 자기를 부인하고 모두를 위해 나아가야하는 좁은길 앞에서 난 아직도 두려워 서성이고 있다. 그런데 그런 내 앞에서 그들은 노래했다. 주님 말씀하시면 나아가고 멈춰서겠다고. 그 뜻 그대로 순종하겠다고. 천국은 어린 아이와 같은 이에 것이라 했던가? 그는 어린아이의 몸으로 노래했고, 다른 사람들은 몸으로 그 노래를 그려냈다. 하지만 그들은 주님 말씀하셔도 나아갈 수 없었고, 멈춰설 수도 없었다. 그들의 휠체어로는 순종할 수 없었다. 아니 그 휠체어가 문제가 아니라 그들 앞에 놓인 장애물이 문제였다. 바로 그들의 아픔에 무관심한 우리의 안일함이 순종할 수 없게 하는 장애물이었다. 그렇게 나의 안일함과 무관심이 그들 앞에 놓인 벽이요, 계단이요, 가파른 언덕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승리의 노래와 순종의 노래 사이에서 서성이는 나의 무거운 마음을 향해 설교자는 선포했다. 장애우는 "의미있는 사회적 약자" 라고. 정상인이 자신의 육체를 자랑하지 목하게 하는 의미있는 사회적 약자라고. 나에겐 그들이 나의 죄악을 비춰주는 거울이고, 그들의 약함이 나를 시험하는 걸림돌이었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다연엉가 2004-04-21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이 뭉클합니다....

물무늬 2004-04-21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터를 찾아주셔서 감사드려요.
뭐라고 말씀드릴지....저의 부끄러움을 담은 글인데...그것이 님의 마음에 어떤 울림이 되었다면, 제가 의도치 않았은 열매이자 감사의 이유가 될 뿐입니다.^^::

다연엉가 2004-04-21 2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뭘유^^^^ 행복하세요~~~~

프레이야 2004-04-21 2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무늬님, 삶을 진지하게 살아내시는 모습이 늘 제 맘을 움직입니다. 전 찬송가를 부르거나 들으면 늘 눈물이 나곤 합니다. 다른 노래일 때도 좀 그런 편이구요.
승리의 노래와 순종의 노래 사이에서 정말 우린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물무늬 2004-04-22 0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종의 노래만이 승리의 노래를 잉태하건만....
약자의 순종으로 낳은 승리의 노래,
그 생명을 입양하려고만 하는 제 모습이
제게도 역시 무겁게 다가옵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진지한 듯한 제스쳐만 있는게 아닌지...
그 제스쳐로 나 자신으로 기만하는 건 아닌지...
님의 말씀 때문에 자신에게 반문해보게 되네요...

다연엉가 2004-04-22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혜경언니 저도 종교는 안가졌는데 찬송가를 들으면 눈물이 나요... 가슴에서 뭐가 자꾸 밀려와요.... 요이런지... 언니도 나랑 같네요^^^^
 

기도, 만능키?

요가인지 단학인지로 인해 기(운)를 느끼고 읽을 수 있는 후배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정육점 근처에 가면 죽임당한 동물의 고통스러워하는 기운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그 친구가 새벽기도를 갔었는데 새벽기도를 하는 그 공간에서도 너무나 나쁜 기운이 가득해서 견딜 수 없었다고 했다.

어떤 이-주로 개신교인들-는 요가나 단학이 나쁜 영에 씌운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본다. 그러나 이런 신비스러운 이야기에서 그렇게만 보기에는 어딘지 미심적은 부분이 있었다. 그것이 어느 스님께서 불교와 기독교의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신 가르침을 통해서 조금은 명확해졌다.

새벽기도나 부흥회 등의 모임에서는 뜨겁게 부르짓는 통성기도를 쉽게 볼 수 있다. 나 역시 중고등부에서 청년에 이르는 수년간의 기간동안 그런 기도에 심취해있었다. 그런 기도의 내용은 개인적인 회개나 바램, 이웃이나 나라를 위한 간절한 기원 등으로 다양하다. 이렇게 다양해도 개인적인 회개와 성령충만, 그리고 개인적인 간구에 대한 것이 가장 간절한 기도의 영역일 것이다.

이런 간절한 기도는 요한복음 15:7의 말씀에 근거한다.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든 다 이뤄진다는 이 말씀의 앞부분이 무시되곤 한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나의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 말씀이 기도하는 사람 안에 있을 때에 무엇이든 다 이뤄진다는 말씀이 우리의 기도 속에서는 무시되고 뭐든지 다 이뤄준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닌지....

특히나 예수님께선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마가복음 8:34)라고 말씀하신다. 이 두 말씀을 연결하면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의 기도는 다 이뤄진다는 의미를 낳는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무수히 많은 교회 안에서 간절히 울리고 있는 기도 중에 이런 조건에 부합하는 기도가 얼마나 있을지 의심스럽다. 건강, 대학합격, 취직, 성공 등등등...가장 간절한 기도의 주제들 중에 많은 부분은 자기를 긍정하다 못해 목이 찢어져라고 집착하고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하는 간절한 기도들이 실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인해 코 앞에 놓인 자기 십자가를 외면하는 자기기만은 아닌지. 회개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조차도 실은 자신의 구원과 하늘의 상급을 위한 욕망을 감춘 것은 아닌지. 바울은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해선 자신이 지옥에 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했건만 어떤 목사님은 천국이 없다면 믿음도 소용없다고 까지 말한다. 그 목사님의 생각은 그 목사님만의 것인지..

붇따빠라 스님은 불교에 만연해 있는 원력(願力), 곧 부처님이나 아미타불에게 기도하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고통의 근원인 욕망과 집착을 줄임으로써 참된 자유에 이르라는 것이 핵심인데, 원력은 정반대의 방향을 향해 있다는 것이다. 기도를 하면서 이뤄달라는 것이 강해지면 '갈망', 좀 더 강해지면 '욕망', 좀 더 강해지면 '탐욕', 왕창 강해지면 '집착'이 된다. 이 모두는 같은 계열의 용어라는 것이다. 사실 불교든 기독교든 기도한다는 것은 어떤 바램을 계속 키워가는 과정이 되기 쉽다. 그 후배가 새벽기도에서 느낀 것이 어쩌면 이런 욕망과 집착의 탁한 기운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웃을 위한 기도는 자칫 스스로 행해야할 자비를 회피하는 이유가 된다고 비판하다. 부처님이 가르쳤던 자비는 이웃을 위해서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는 자비였는데, 원력의 방식에서는 아미타불 등의 절대신이 자신에게 베풀어줄 자비를 구하고, 이웃을 위해서도 베풀어주라는 구조로 변했다는 것이다. 즉, 내 것을 주는 것은 축소되고 절대자가 자비를 베푸는 것으로 자비의 내용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붇따빠라 스님은 불교의 목표가 욕망 지수를 낮추고 만족 지수를 높여가는 것이고 자신의 것을 베푸는 자비행이기 때문에 이런 기도는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앞서 살펴본 성경말씀과도 일맥상통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이웃을 위해서 짊어져야하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랑으로 구하는 기도가 들어진다는 예수님의 가르침. 그것은 나를 위한 욕망과 집착을 버리고 내 것을 내어주는 기도인 것이다.

이런 기도에 실패란 있을 수 없다. 내 것을 내어주고, 모든 것을 주는 행위에 실패가 있을 수 있겠는가? 단지 받는 사람이 그 사랑의 깊은 의미를 더디게 깨닫는 오해와 무명(無明)의 틈이 있을 뿐이다.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 직전에 이미 다 이루셨던 예수님의 사랑이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의 이웃에게 받아들여지기까지의 틈처럼, 그렇게 가득한 틈이...

물론 인간의 기도가 고통을 피하려는 바램, 좋은 일이 생기기를 바라는 열망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다보면 그 욕망이 정화되곤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에 그렇게도 인색했던 예수님을 따라 살려는 기독인, 곧 "예수 따름이"의 기도가 지향해야할 방향을 명확히할 필요가 있다. 자연스럽지만 미숙한 기도에서 피와 땀을 흘리지만 참된 자유를 누리는 겟세마네의 기도로, 곧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나야 한다는 것이다.

고통과 주검, 실패를 피하려 하기 보다는 당당히 마주하여 생명의 씨앗으로, 감사의 제목으로 거듭나게 하는 기도, 하나님께 이웃을 위로해달라고 기도하기 보다는 내 부끄러운 손길로 따듯하게 붙들어주는 행위의 기도, 시끄럽게 욕망을 토해내는 기도보다는 침묵으로 내 두려움의 허상을 밝히 보고 씻어내는 기도, 그런 기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적어도 내겐 간절하게 요구된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프레이야 2004-04-18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회를 다니다가 지금은 무슨 이유에선지 안 다니고 있습니다. 통성기도는 항상 저를 소외시키더군요. 썩 다가가지 못하게, 아주 낯설게 하더군요. "침묵으로 내 두려움의 허상을 밝혀보고 씻어내는 기도..." 님만큼 저에게도 간절한 것이겠지요. 교회는 제 평생의 숙제가 될 것 같아요. 시어른들과 이 문제로 갈등입니다.

물무늬 2004-04-18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적한 제 서재에서 만나는 님의 흔적이 언제나 참 소중합니다.^^
근래들어 개신교인에서 비신자나 타종교로 개종하시는 분들의 비율이 급증하고 있다죠. 아마도 7,80년대 교회가 급성장하던 때의 코드가 더이상 사람들의 마음을 울려주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 군대를 제대할 때까지만 해도 통성기도에 무척 익숙했었는데 저도 언젠가부터 어색하고 낯설어지더군요. 이젠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렇게 기도하기 어렵게 되었죠. 아니 그렇게 기도하는게 싫어진 것 같습니다. 관상기도나 명상기도에 마음이 더 많이 끌리게 되었습니다. / 제게도 교회는 평생의 숙제입니다. 이젠 교회를 다니지시는 않지만 평생 숙제라는 님의 마음이 어쩌면 더 정직한 신앙의 한 무늬가 아닌가 싶습니다. 가족간의 신앙문제는 참 난감하고 서글픈 일인 것 같습니다. 부디 잘 풀려가시길...
 

용서해야 용서되는...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있을 때만 나의 죄도 용서된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마치 죄가 용서되는 것은 어떤 조건부의 사건인듯 보인다. 하나님의 사랑은 조건없는 사랑이고, 조건없이 다 용서해 주신다는데.....이상하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는 당연한 결과지, 조건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마음이 넓어지는 아량의 차원이 아니어야 한다. 그것은 또 다른 함정이다. 자기 의와 교만의 함정.
용서는 그 사람이 그런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인간적, 사회적 한계를 이해하고, 그것이 나와 똑같은 모습임을 체감하는 깨달음의 당연한 결과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을 깊이 체감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자신의 죄도 용서될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남의 죄를 용서하는 것이 곧 나의 죄를 용서하는 깨달음이 아니겠는가? 결국 남과 나의 인간적 사회적 존재적 한계를 깨닫는 순간 남과 나는 하나가 되고, 남을 용서하는 것은 동시에 나를 용서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용서해야 용서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되어야 그 결과 일어나는 인과관계가 아니라, 이 양자는 동시에 일어나는 동시 발생적 상황이다. 나를 용서하는 것과 동시에 너를 용서하는...용서가 일어나는 그 순간 양자는 함께 해결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 5 | 6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