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만능키?

요가인지 단학인지로 인해 기(운)를 느끼고 읽을 수 있는 후배에게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 친구는 정육점 근처에 가면 죽임당한 동물의 고통스러워하는 기운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고 했다. 그 친구가 새벽기도를 갔었는데 새벽기도를 하는 그 공간에서도 너무나 나쁜 기운이 가득해서 견딜 수 없었다고 했다.

어떤 이-주로 개신교인들-는 요가나 단학이 나쁜 영에 씌운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본다. 그러나 이런 신비스러운 이야기에서 그렇게만 보기에는 어딘지 미심적은 부분이 있었다. 그것이 어느 스님께서 불교와 기독교의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신 가르침을 통해서 조금은 명확해졌다.

새벽기도나 부흥회 등의 모임에서는 뜨겁게 부르짓는 통성기도를 쉽게 볼 수 있다. 나 역시 중고등부에서 청년에 이르는 수년간의 기간동안 그런 기도에 심취해있었다. 그런 기도의 내용은 개인적인 회개나 바램, 이웃이나 나라를 위한 간절한 기원 등으로 다양하다. 이렇게 다양해도 개인적인 회개와 성령충만, 그리고 개인적인 간구에 대한 것이 가장 간절한 기도의 영역일 것이다.

이런 간절한 기도는 요한복음 15:7의 말씀에 근거한다.
"너희가 무엇을 구하든지 다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데 무엇이든 다 이뤄진다는 이 말씀의 앞부분이 무시되곤 한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나의 말이 너희 안에 머물러 있으면..."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 말씀이 기도하는 사람 안에 있을 때에 무엇이든 다 이뤄진다는 말씀이 우리의 기도 속에서는 무시되고 뭐든지 다 이뤄준다는 식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닌지....

특히나 예수님께선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마가복음 8:34)라고 말씀하신다. 이 두 말씀을 연결하면 자기를 부인하는 사람의 기도는 다 이뤄진다는 의미를 낳는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 무수히 많은 교회 안에서 간절히 울리고 있는 기도 중에 이런 조건에 부합하는 기도가 얼마나 있을지 의심스럽다. 건강, 대학합격, 취직, 성공 등등등...가장 간절한 기도의 주제들 중에 많은 부분은 자기를 긍정하다 못해 목이 찢어져라고 집착하고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어하는 간절한 기도들이 실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인해 코 앞에 놓인 자기 십자가를 외면하는 자기기만은 아닌지. 회개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조차도 실은 자신의 구원과 하늘의 상급을 위한 욕망을 감춘 것은 아닌지. 바울은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해선 자신이 지옥에 가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했건만 어떤 목사님은 천국이 없다면 믿음도 소용없다고 까지 말한다. 그 목사님의 생각은 그 목사님만의 것인지..

붇따빠라 스님은 불교에 만연해 있는 원력(願力), 곧 부처님이나 아미타불에게 기도하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고통의 근원인 욕망과 집착을 줄임으로써 참된 자유에 이르라는 것이 핵심인데, 원력은 정반대의 방향을 향해 있다는 것이다. 기도를 하면서 이뤄달라는 것이 강해지면 '갈망', 좀 더 강해지면 '욕망', 좀 더 강해지면 '탐욕', 왕창 강해지면 '집착'이 된다. 이 모두는 같은 계열의 용어라는 것이다. 사실 불교든 기독교든 기도한다는 것은 어떤 바램을 계속 키워가는 과정이 되기 쉽다. 그 후배가 새벽기도에서 느낀 것이 어쩌면 이런 욕망과 집착의 탁한 기운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웃을 위한 기도는 자칫 스스로 행해야할 자비를 회피하는 이유가 된다고 비판하다. 부처님이 가르쳤던 자비는 이웃을 위해서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는 자비였는데, 원력의 방식에서는 아미타불 등의 절대신이 자신에게 베풀어줄 자비를 구하고, 이웃을 위해서도 베풀어주라는 구조로 변했다는 것이다. 즉, 내 것을 주는 것은 축소되고 절대자가 자비를 베푸는 것으로 자비의 내용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붇따빠라 스님은 불교의 목표가 욕망 지수를 낮추고 만족 지수를 높여가는 것이고 자신의 것을 베푸는 자비행이기 때문에 이런 기도는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은 앞서 살펴본 성경말씀과도 일맥상통한다. 자기를 부인하고 이웃을 위해서 짊어져야하는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랑으로 구하는 기도가 들어진다는 예수님의 가르침. 그것은 나를 위한 욕망과 집착을 버리고 내 것을 내어주는 기도인 것이다.

이런 기도에 실패란 있을 수 없다. 내 것을 내어주고, 모든 것을 주는 행위에 실패가 있을 수 있겠는가? 단지 받는 사람이 그 사랑의 깊은 의미를 더디게 깨닫는 오해와 무명(無明)의 틈이 있을 뿐이다.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 직전에 이미 다 이루셨던 예수님의 사랑이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 우리의 이웃에게 받아들여지기까지의 틈처럼, 그렇게 가득한 틈이...

물론 인간의 기도가 고통을 피하려는 바램, 좋은 일이 생기기를 바라는 열망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다보면 그 욕망이 정화되곤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에 그렇게도 인색했던 예수님을 따라 살려는 기독인, 곧 "예수 따름이"의 기도가 지향해야할 방향을 명확히할 필요가 있다. 자연스럽지만 미숙한 기도에서 피와 땀을 흘리지만 참된 자유를 누리는 겟세마네의 기도로, 곧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나야 한다는 것이다.

고통과 주검, 실패를 피하려 하기 보다는 당당히 마주하여 생명의 씨앗으로, 감사의 제목으로 거듭나게 하는 기도, 하나님께 이웃을 위로해달라고 기도하기 보다는 내 부끄러운 손길로 따듯하게 붙들어주는 행위의 기도, 시끄럽게 욕망을 토해내는 기도보다는 침묵으로 내 두려움의 허상을 밝히 보고 씻어내는 기도, 그런 기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적어도 내겐 간절하게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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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4-04-18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회를 다니다가 지금은 무슨 이유에선지 안 다니고 있습니다. 통성기도는 항상 저를 소외시키더군요. 썩 다가가지 못하게, 아주 낯설게 하더군요. "침묵으로 내 두려움의 허상을 밝혀보고 씻어내는 기도..." 님만큼 저에게도 간절한 것이겠지요. 교회는 제 평생의 숙제가 될 것 같아요. 시어른들과 이 문제로 갈등입니다.

물무늬 2004-04-18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적한 제 서재에서 만나는 님의 흔적이 언제나 참 소중합니다.^^
근래들어 개신교인에서 비신자나 타종교로 개종하시는 분들의 비율이 급증하고 있다죠. 아마도 7,80년대 교회가 급성장하던 때의 코드가 더이상 사람들의 마음을 울려주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 군대를 제대할 때까지만 해도 통성기도에 무척 익숙했었는데 저도 언젠가부터 어색하고 낯설어지더군요. 이젠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그렇게 기도하기 어렵게 되었죠. 아니 그렇게 기도하는게 싫어진 것 같습니다. 관상기도나 명상기도에 마음이 더 많이 끌리게 되었습니다. / 제게도 교회는 평생의 숙제입니다. 이젠 교회를 다니지시는 않지만 평생 숙제라는 님의 마음이 어쩌면 더 정직한 신앙의 한 무늬가 아닌가 싶습니다. 가족간의 신앙문제는 참 난감하고 서글픈 일인 것 같습니다. 부디 잘 풀려가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