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 있는 나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4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송은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직업의 품위가 인간의 품위를 희생시키던 시대가 저물어가건만, 직능만 남은 직업 속에서 인간의 품위는 어이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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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아마 모르실 거예요, 스티븐스 씨. 그때 제가 이 집을 떠나는 문제를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했었는지. 저한텐 정말 충격적인일이었어요. 감히 말씀드리지만 제가 만약 약간이라도 존경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벌써 오래전에 달링턴 홀에서 나갔을 거예요." - P187

떠난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저기 바깥 세상에서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고 관심도 가져 주지 않는다는 현실을 절감하고 있는 내 모습만 떠올랐어요. 그 수준이에요, 나의 고상한 원칙들을 다 합쳐 본들 그 정도밖에 안 되죠. 나 자신이 너무나 수치스러워요. 하지만 끝내 떠날 수없었어요, 스티븐스 씨. 도저히 용기가 나지 않았어요."
- P188

어느 정도 자질을 갖춘 집사라면 완전하게 그리고 전적으로 자신의 역할 속에 사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마땅하다. 자신의 역할이 무슨 판토마임 의상이라도 되는 양, 아무 때고 벗어 던졌다가 다시 착용하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품위를 중시하는 집사가 역할의 짐을 벗어도 무방하다고 느끼는 상황은 한 가지뿐이며 오직 그 상황에서만 가능한 밥인데 그것은 즉, 그가 온전히 홀로 있을 때이다. 따라서 여러분도 이해가 되겠지만, 내가 나 혼자여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내 입장에서는 그다지 무분별한 판단이 아니었던 그때 켄턴 양이 불쑥 들어온 사건의 경우에 원칙의 차원, 아니 품위의 차원에서 중대한 문제가 되는것은 그때 내가 완벽한 본연의 역할 속에 사는 모습이 아니었다는데 있다.
- P208

사실, ‘전환점‘이 어쩌고저쩌고 하지만 내가 그런 순간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돌이켜 볼 때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오늘날 그런 상황들을 되돌아보면 내 인생에서정말 중요하고 소중한 순간들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물론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나와 켄턴 양의 관계에서 엉뚱한것들을 솎아 낼 수 있는 날이, 달이, 해가, 끝없이 남아 있는 줄만 알았다. 이런저런 오해의 결과를 바로잡을 기회는 앞으로도 무한히 많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처럼 사소해 보이는 일들이 모든 꿈을 영원히 흩어 놓으리라고 생각할 근거가 전혀 없는 것 같았다.
- P221

"달링턴 나리는 나쁜 분이 아니셨어요. 전혀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에게는 생을 마감하면서 당신께서 실수했다고 말씀하실 수 있는 특권이라도 있었지요. 나리는 용기 있는 분이셨어요. 인생에서 어떤 길을 택하셨고 그것이 잘못된 길로 판명되긴 했지만 최소한 그 길을 택했노라는 말씀은 하실 수 있습니다. 나로 말하자면 그런 말조차 할 수가 없어요. 알겠습니까? 나는 ‘믿었어요."
나리의 지혜를, 긴 세월 그분을 모셔 오면서 내가 뭔가 가치 있는일을 하고 있다고 믿었지요. 나는 실수를 저질렀다는 말조차 할 수없습니다. 여기에 정녕 무슨 품위가 있단 말인가 하고 나는 자문하지 않을 수 없어요." - P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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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마치 점잖은 신사가 정장을 갖춰 입듯 자신의 프로 정신을 입고 다니며, 악한들이나 환경이 대중의 시선 앞에서 그 옷을 찢어발기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는다. 그가 그 옷을벗을 때는 오직 본인의 의사가 그러할 때뿐이며, 그것은 어김없이그가 완전히 혼자일 때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품위‘의 요체이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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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품위‘는 자신이 몸담은 전문가적 실존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 집사의 능력과 결정적인 관계가 있다. 모자라는 집사들은 약간만 화나는 일이 있어도 사적인 실존을 위해 전문가로서의 실존을 포기하게 마련이다. - P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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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내가 신경 쓰고 있던 대상은 루스가 아니었다. 내 가슴은 약간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내게 맞장구치며 터뜨린 그 웃음으로 모든 세월을 뛰어넘어 토미와 내가 다시 가까워진 듯한 느낌이들었던 것이다.
- P305

침대에 누워 있는 그녀의 얼굴에는 기증자들에게서 흔히 본 적이있는 그런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자기 내부로 돌리고 싶은 듯했다. 그럼으로써 자기 몸속에 별도로 자리 잡고 있는 고통의 영역을 더 잘 살펴보고 정돈하려는 것이었다. 마치 사려 깊은간병사가 전국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서너 명의 병약한 기증자들을 바삐 왔나 갔다 하며 돌보는 것처럼. 엄밀하게 말해서 그녀는 아직 의식을 잃지 않은 상태였지만 철제 침대 옆에 서 있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의자를 끌어와 그 옆에 앉은 다음 두 손으로 루스의 한 손을 쥐고, 그녀가 고통의 파도에 휩쓸려 손을 비틀어 빼내려 할 때마다 잡은 손에 힘을 주곤 했다.
- P324

시간이 그런 식으로 서서히 녹아들고 우리가 서로에 대해 그렇게 편안해지는 것은 정말이지 경이로웠다.
- P327

했지만 나는 그를 붙들고 놓지 않았다. 이윽고 그의 비명이 잦아들고 분심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다음 순간 나는 그 역시 나를두 팔로 얼싸안고 있음을 깨달았다. 우리는 바람이 휘몰아쳐 우리옷을 잡아당기는 그 들판 꼭대기에서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시간 동안 말없이 그렇게 서로 부둥켜안고 서 있었다. 마치 그렇게 서로 안고 있는 것이 우리가 어둠 속으로 휩쓸려 가는 것을 막을 유일한 방법이기라도 한 듯.
- P376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캐시. 너는 정말이지 좋은 간병사야. 만약네가 나한테 이런 존재가 아니었다면, 나한테도 완벽했을 거야." 그는 웃음을 터뜨리고는 내 몸에 팔을 둘렀다. 우리는 나란히 앉은 채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어딘가에 있는, 물살이 정말이지 빠른 강이 줄곧 떠올라. 그 물 속에서 두 사람은 온 힘을 다해 서로 부둥켜안지만 결국은 어쩔 수가 없어. 물살이 너무 강하거든. 그들은 서로 잡았던 손을 놓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거야.
우리가 바로 그런 것 같아. 안타까운 일이야, 캐시, 우린 평생 서로사랑했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영원히 함께 있을 순 없어."
- P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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