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광야에라도 가보나. 예루살렘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의 황량한 사막이거든. 예수가 요한교단에 몸 바쳐서 수도한 장소임에는 틀림없어. 거기서 출발하는 게 에수의 진짜 모습을 조금은 알게 될지도 모르니까.... ." - P61

안드레아도 그들과 섞여 돌을 주워서는 예수의 무리에게 던졌다.
그가 던진 돌이 예수의 살 꺼진 볼에 맞아 한줄기의 피가 그의 얼굴에 흘러내렸다.
"쓸모도 없는."
사람들과 같이 안드레아도 소리를 질렀다.
"무능한 사내."
예수는 그저 쑥 들어간 눈으로 슬프게 모두를 바라볼 뿐 참다못한제자 한 사람이 양팔을 벌리며 대꾸했다.
"대관절 이 사람이 당신들한테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거요?"
"아무 것도 안 했어.‘
누군가 말했다.
"아무 것도 못했단 말야."
"그렇지만 이 사람은 당신들을 사랑하려고 했잖았소, 당신들의 고통을 나누려고 하지 않았느냔 말이오?"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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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의 예술은 그의 인생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뭉크는 평생 외롭고 고독했다. 어린 시절엔 죽음의 그림자가 늘 드리워져 있었고, 청년이 되어서는 사랑을 갈구하고 그에 집착했다. 비극적 이별과 좌절을 겪고, 병마에 시달리면서 정신병을 앓기까지 했다. 공황 장애, 우울증, 불면증, 정신 분열, 불안 장애, 환각, 피해망상 등의 정신병적 증상들은 뭉크의 작품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예민하고감수성이 풍부한 사람이었기에, 그는 자신에게 닥친 불운과 불행에대해 보통의 사람들보다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는 자신의 감정에 집중했고, 자기 내면의 심연으로부터 그림의 대상을 찾았다. 대표작 <절규>를 비롯하여 〈마돈나> <불안〉 〈아픈 아이〉 〈이별〉 〈키스> 등의 모티프를 그는 몸소 겪은 경험에 가져왔다. 그래서 그의그림은 마치 그림으로 된 일기장을 보는 듯하다.
뭉크의 작품이 담고 있는 사랑, 불안과 공포, 외로움과 고독의 감정들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삶의 근원적인 감정들이다. 따라서사람들은 그의 그림에서 뭉크라는 한 개인이 아닌,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아내게 된다. 나와 나의 가족, 나의 친구의 이야기를 뭉크의 그림에서 보는 것이다. 그의 그림에서 많은 이들이 동감과 교감의 지점을 찾는 것은 이 때문이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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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주의자들은 뉴스의 첫머리를 장식했지만, 다른 성서학자들은 평화의 영성 안에 더욱 전통적인 성서적 영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애썼다. 1940년대에 유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1878 ~1965년)는 성서란 사람들이 신이 부재하는 것처럼 느꼈던 바로 그시기에 현존하고 있었음을 증언한 경전이라고 생각했다. 즉 성서는 신과 인간 사이에 계속되고 있는 소통을 말하고 있기에, 성서주석 역시 고정되지 않은 것이었다. 성서 연구는 변화된 삶의 모습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한다. 성서를 펼쳐서 말씀을 들음으로써자신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것을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부버는 랍비들이 성서를 ‘부름‘이라는 의미의 ‘미끄라‘라고 부르는 것에 놀랐다. 그것은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을 세상의 문제들로부터 추상화시키는 것을 허락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훈련시켜 현재의사건들에 맞서고 또 귀 기울일 수 있도록 하는 부름이었다.
- P254

성서는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의 역사에서 다른 시점에,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또한 그들의 주석도필연적으로 각각의 독특한 환경 속에서 다르게 채색되었다. 만약해석이 오직 성서의 저자가 원래 말한 뜻이 무엇인지에만 집중된다면, 그리고 수많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이해했던방식에 대해서 무시한다면, 이는 성서의 중요성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 P259

현재 우리는 종교적, 세속적 영역 모두에서 과도한 확신을 발견한다. 우리는 동성애자, 자유주의자, 여성 성직자들을 비방하기 위해 성서를 이용하기보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믿음의 원칙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성서 주석가는 언제나 본문의 가장 너그러운 해석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현대의 해석가들은 성서를 과거의 정통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하기보다는 미드라쉬의 본래의미, 즉 ‘무언가를 찾기 위한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주석은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찾기 위한 모험이다. 부버는 각각의 독자들이성서를 대할 때 마치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 섰던 것과 같은태도로 서야 한다고 말했다. 그들은 주의 깊게 듣고, 과거의 편견들을 버리게 하는 계시를 맞을 준비를 해야 한다. 만약 이것이 종교체계를 거스르는 행위라면, 발타자르가 주장한 대로 종교기관들역시 성서의 미끄라에 대해 책임이 있음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 P2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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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감동이란 예술 작품 뒤에 모습을 감춘한 인간을 향한 진한 감정 같은 것이었죠. 예술은 비범한 천재가 만들어 낸 기적적인 무엇이 아니라, 삶과 죽음이라는 조건 안에서 한 발짝도 벗어날 수없는 우리와 똑같은 한 인간이, 어쩌면 평범 이하로 과민하고 나약했을지 모를 개인이 세상에 남길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교신이 아닐까요?
...
노동의 고단함, 노화를 통해 겪는 허무, 질병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 욕망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사회와 제도, 시대와 계급에 얽매일수밖에 없는 보편적인 인간의 목소리가 예술 작품의 형태와 색깔 속에 살아있을 때, 관객은 작품 너머에 숨겨진 예술가의 존재를 만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진지한 갈등과 삶에 대한 애착이 한 편의 그림이 되어 말을 걸어올때, 관객은 아름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이죠. 예술적 체험은 누군가의 삶의고뇌가 아름다움으로 승화되었음을 느끼는 순간의 경험이 아닌가 합니다.
- P10

화가는 이 보이지 않는 마음속 사건들을 보이는 이미지로바꾸는 과정에서 자신의 감정을 직면하고 이해해 나가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뭉크가 진실하게 그려 낸 삼각관계 속 질투의 경험은 우리에게도 인간의감정에 대한 또 다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 P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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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점은 시내산에 관해 읽는 것이 아니라, 시내 산을 경험하는 것이었다.
...
하시딤은 마음속에서 성서를 위한 고요한 장소를 만들면서 각자의 거룩한 성서 독법인 렉치오 디비나를 발전시켰다. 하시딤은 본문을 분석해서 여러 갈래로 찢어놓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비판적인 생각들을 잠재웠다. 도브 베르는 종종 ‘토라를 가장 잘 가르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겠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느끼지(의식하지) 않고, 말하고 있는세계의 잠잠한 음성에 귀 기울이며, 말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다. 성서 주석가는 신적인 현현의 그릇이 되어야 한다. 자신이 마치 토라의 악기인 것처럼, 그것을 반드시 자신을 통해 움직이게 만들어야 한다. - P223

이와 같이 하나의 본문은 전혀 다르게 이해될 수 있었다. 사람들이 점차 성서를 영성의 핵심으로 삼기 시작하자 핵심적인 메시지를 찾는 일은 더욱 어려워졌다. 동시에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자유와 관련된 신학을 만들기 위해 성서에 의지하자,
KKK단(Ku Klux Klan[큐 클럭스 클랜]) 은 성서를 이용해 흑인을 향한 폭력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광야에서 모세에게 대항한 이스라엘인들은 결국 제거되었다. 가나안 원주민들은 여호수아의 군대에 의해 전멸했다. 흑인 페미니스트 신학자들은 이스라엘인들이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신은 그들의 딸들을 노예로 파는 것을 허락했으며, 실제로 아브라함에게 이집트인 노예 하갈을 광야에 버리는 것을 허락했다고 주장했다. 5 ‘오직 성서로만의 원칙은 사람들의 관심을 성서로 돌릴 수는 있었으나, 절대적인 조항들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사람들은 언제든지다른 관점을 제시할 수 있는 성서의 본문들을 찾아내어 사용했다. 17세기에 이르러 종교적인 사람들은 성서가 매우 난해한 책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이러한 인식이 명확성과 합리성을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시기에 등장했다는 점이다. - P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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