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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그라드의 성모마리아
데브라 딘 지음, 송정은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월
평점 :
품절
당신은 부모님의 과거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이 작품은 내게 이렇게 묻는 것 같이 다가왔다. 마리나가 전쟁 중에 에르미타주 미술관 지하에서 지낸 참혹한 면보다는 마리나가 알츠하이머에 걸려 끊임없이 과거의 그 미술관으로 돌아가 그곳에서 피난을 가고 남은 빈 액자들을 보며 그곳에 걸려 있던 그림을 회상하고 잊지 않으려 기억하고 사람들에게 상상력을 동원해서 설명해주는 것보다 그 빈 액자가 내가 알지 못하는 내 부모의 과거의 한 장면 한 장면이 수록된 그 분들만을 위한 보물 전시장같이 느껴졌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많이 부모의 지난 시절을 알려고 애쓸까? 그들의 지나가는 얘기로 하는 것들을 얼마나 귀담아 들을까? 그들이 무심코 하는 행동이나 삶의 방식이 그들의 과거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고 알아내거나 이해하려고 해본 적이 있을까? 나는 그래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어린 시절 얘기, 가난하던 시절 얘기, 살면서 고단했던 얘기, 누군가와 나누고 싶지만 나눌 사람이 없어 어린 자식이 못 알아듣는 걸 알면서도 얘기하시던 날들... 그때 난 왜 좀 더 잘 들어 드리지 못했을까. 웃으며 말씀하시는 그 속에 들어 있는 슬픔과 그리움을 왜 알지 못했을까.
마리나는 그 잔인하고 고통스러운 전쟁으로 돌아가서 그래도 세상이 아름답다 느끼며 말하고 있다. 그녀는 알츠하이머에 걸려 왜 하필 멀쩡하던 시간동안엔 잊으려 애를 쓰며 절대 입 밖에 내지 않던 그 순간으로 가버린 걸까. 남편은 아내가 자신의 고향이고 조국이었다고 말한다. 아내에게도 자신은 그런 존재였으리라 믿었다. 그런 아내가 하필이면 자신이 존재할 수 없는 기억 속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남편은 자신이 없던 그 시간을 알 수 없다. 자신에게도 아내가 없던 시간이 있었지만 그 시간은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기억 속에서 빼내고 싶은 시간이다. 근데 왜 아내는 자신만을 현실 속에 놔둔 채 그곳으로 혼자 떠나버린 것일까? 남편의 슬픔이 군데군데 얼룩져 마음 아프게 한다.
그것은 어쩌면 남편에게 당신이 없던 그 시간 나는 잘 있었노라고, 그러니 내가 없을 시간에 당신도 내가 비워갈 액자를 내 기억으로 채우면 그 시간도 아름다울 수 있을 거라는 것을 전해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또한 자식들에게, 아니 자신에게 그 고통이 그저 고통만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말했어야 했는데 말하지 못하고 살아온 것에 대한 뉘우침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이제 어미의 빈 액자를 자식들에게 채워달라고, 내가 기억하고 있고 잊지 않으려 애를 썼던 것처럼 너희들도 나를 그렇게 아름답게 기억해 달라는 바람은 아니었을까. 분명 남편과 아이들은 아내와 그리고 어머니와 함께 찍은 사진이 담긴 액자를 보며 그리움에 잠길 테니까. 마리나가 가족과 이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메시지라고 생각된다.
오늘 나는 내 안에 남아 있는 나쁜 기억들은 몰아내고 아름다운 기억으로 내 방의 빈 액자와 비어 버린 액자, 그리고 부모님과 가족의 액자를 채우리라 결심한다. 당신 앞에 빈 액자가 있다. 또한 액자들은 차츰 비어갈 것이다. 당신은 그 액자 속에 어떤 것을 채울 것인가? 그것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려 애쓰며 그 모든 기억이 기억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지금을 살아가는,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당신의 몫이다.
삶의 빈 액자를 어떻게 채울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해주는 작품이다. 마리나를 통해, 전쟁을 통해, 그림을 통해, 헬렌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다시 한 번 바라볼 수 있다. 주변에 혹 알츠하이머를 앓고 계신 분이 있다면 그 분들에게도 한때 아름다운 시절이 있었음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들에게 비어가는 액자 속에도 그들이 간직했던, 그리고 기억하고 싶어 했던 소중한 보물이 있었음을, 그래서 그분들은 여전히 소중한 분들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