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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읽기를 권함 - 2004년 2월 이 달의 책 선정 (간행물윤리위원회)
야마무라 오사무 지음, 송태욱 옮김 / 샨티 / 2003년 11월
평점 :
뭐든지 빨리빨리 효율적으로 해치우는 것이 우리사회의 미덕이 된지 오래다. 급변하는 사회에 보조를 맞추려면, 그래서 남들에게 뒤쳐지지 않으려면 무엇이든 신속하게 해내야만 한다. 읽기의 영역도 예외는 아니다. 한 때 속독 광풍이 불었던 적이 있다고 한다. 나보다 좀 윗세대의 일이라고 하는데, 온 동네에 속독학원이 난립했을 정도였다니 알만한 일이다. 예전만큼 속독 열풍이 불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요즘도 '속독'하면 '수능 언어영역에 무척 도움이 되는 것', '짧은 시간에 많은 책을 읽을 수 있는 큰 능력'등 좋은 이미지를 떠올리며 많은 관심을 보인다. 그리고 거창하게 '속독'까지는 아니더라도 빨리 읽는 것이 좋은 것이라 생각하고 그러한 능력을 기르는 것을 권유하기도 한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많은 책을 소화해서 보고서를 쓰거나 기획안을 만들어 제출해야하는 상황이라면 책을 빨리 읽어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것이 아닌 경우에도 많은 사람들이 책을 빨리 읽어야한다고 생각하는 데에 있다. 그냥 획일적으로 모든 책을 빨리, 그래서 같은 시간에 더 많이 읽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는 것이 더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극단으로 실현한 사람이 이 책에서 계속 언급되고 있는, 그리고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다치바나 다카시일 것이다. 책은 문장 하나하나를 충실하게 읽는 것이 아니라 책 전체의 구조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 우선 그 흐름을 파악한다. 먼저 장 단위로 전체의 큰 흐름을 파악한 다음, 절 단위로 세세한 흐름을 파악해 간다. 속독으로 읽을 때에는 단락 단위로, 단락의 첫 문장만 차례로 읽어나간다. "이런 방법이라면 한 쪽을 읽는 데 1초, 좀 늦더라도 2,3초면 읽을 수 있따. 300쪽 책이라면 300초에서 900초, 그러니까 5분에서 1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뭐 이런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꽤 많은 사람들이 속독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다. 읽고 싶은 시간은 많은데 시간이 없기 때문에 속독하는 경우도 있지만 빨리 읽는 것을 하나의 능력으로 간주하고 그러한 능력을 신장시키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빨리 읽도록 자신을 닦달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 또는 읽는 것에 익숙하다보니 빠른 속도로 죽죽 읽어나가지 않으면 답답해서 견딜 수 없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저자는 우리에게 물음을 던진다. 왜 빨리 읽으려고 하는가? 꼭 빨리 읽어야만 하는가? 빨리 읽는 것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인생에서 독서의 의미는? 그리고 본인이 천천히 읽음으로써 맛볼 수 있었던 희열감을 묘사하면서 속독을 한다면 느낄 수 없을 중요한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야이로소이다>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무사태평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 속 깊은 곳을 두드려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
이 부분은 마지막 장의, 고양이 주인인 구샤미 선생 집에 메이테이, 간게쓰, 두쿠센, 도푸군 등 여러 친구가 모인 날의 일이다. 무료한 잡담 끝에 짧은 가을 해는 지고 손님들은 인사를 하고 뿔뿔이 현관을 나선다. 구샤미 선생은 서재에 틀어박히고, 아니는 바느질을 시작하며, 아이들은 베개를 나란히 하고 잠이 든다. 그리고 하녀는 목욕을 하러 간다. 석양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집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해진다. 소설도 조용해진다. 그 장면에서 앞의 한 문장이 턱 하니 나온다. 이렇게 고요한 야음의 광경이, 이렇게 적막한 말이 이 소설에 있었던가. 쓸쓸하고 절실한, 그래서 오히려 행복감마저 들게 하는 깊은 마음...... 몇 분인가 그런 기분을 맛보았다.
빨리 읽어야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과연 이런 쾌감을 느낄 수 있을까? 여유 없이 다음 글자로 내처 눈동자를 달리기만 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쾌감이 뒤따를 리 만무하다. "단 한가지, 속독을 실천하는 사람들만 맛볼 수 있는 행복이 있을 거라고 추측할 수 는 있다. 그것은 양과 속도가 가져다주는 즐거움이다. 이번 달은 서른 권을 읽었다. 쉰 권을 읽었다. 백 권을 읽었다 하고 수첩에 적어 넣는 즐거움"뿐이다.
저자는 앞서 말한 다치바나 다카시 뿐만 아니라 한 달에 최소 백 권은 읽고 있다는 후쿠다 가즈야의 독서술은 그들과 같이 책을 많이 읽어야만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에게나 해당하지 모든 사람에게 적용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다치바나 다카시는 물론 모든 책을 속독해야한다고 말하고 있지는 않다. 소설같이 책 전체를 다 읽는 것이 기본인 책은 속독이 불가능하고 또 속독해서도 안 되고 다만 기본적으로 그렇게 '시간만 잡아먹어 어쩔 도리가 없는 책'은 거의 읽기를 포기했다고 한다. 이에 저자는 말한다. 나한테는 그런 읽기 방식이야말로 다치바나 다카시가 말하는 '시간만 잡아먹는'일, 즉 시간 낭비이다. 단순한 낭비가 아니라 인생의 낭비이다. 거듭 말하지만 다치바나 식, 후쿠다 식의 속독은 스스로 정보를 척척 섭취하고 배설하는 '정보 인간' 이 되려는, 그런 인생을 선택한 사람에게만 유효한 독서술이다. 저자는 에밀 파게, 엔도 류키치, 헨리 밀러와 같이 천천히 읽는 것을 가장 자연스럽고 행복한 독서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말들을 인용하면서 천천히 읽기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 '천천히'라는 말은 참으로 모호한 말이다. '천천히'란 말에 기준이 있을까? 천천히 읽으라고 함은 과연 얼마만큼의 속도를 내어 읽으라는 말일까? 그냥 본인이 읽을 때 책에서 쾌감을 느낄 수 있는 정도일까?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다. 여기에 대해 저자는 말한다. 읽는다는 것이 인간의 행위 가운데 하나인 한, 걷는 것이나 먹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생체 리듬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시각이나 지각의 미묘한 작용처럼 관련되어 있을 테고, 또 깊숙한 곳에서는 호흡의 상태 같은 것과도 관련되어 있으리라. 저자는 코끼리와 생쥐의 예를 들면서 생체 리듬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는 속독을 하는 것은 살아가는 리듬의 해체라고까지 말한다. 실제로 그런 식으로 자꾸 책장을 넘기는 동안은 숨을 죽인다거나 가쁘게 쉰다거나 해서 호흡도 상당히 흐트러진다. 저자는 서정적인 글을 인용하면서 그러한 정경을 섬세하게 마음속으로 그려낼 수 있는 정도로 책을 읽을 때가 알맞은 속도일 것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단지 책 읽는 속독에 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의 독서철학을 엿볼 수 있다. 독서를 한다고 해도 그것은 생활의 일부일 뿐이다. 책읽기가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 해도 생활 전체에서 보면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독서를 인생에서 가장 우위에 놓는 사람들, 일명 '책벌레'들이 있다. 하지만 저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의 생각은 난센스이다. 사실 그렇다. 독서를 왜 하는가? 독서는 삶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삶 없는 독서는 무의미하다. 책은 삶을 닮았고 삶의 일부이기도 하며 삶 그 자체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실재인 '삶'을 뒷전에 두고 독서를 우선시 한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 아닌가. 독서 외에도 중요한 것은 많다. 생활에는 독서 외에도 밥 먹는 것, 씻는 것, 걷는 것, 겨울 아침, 고엽을 물처럼 씻고 있는 아침 햇살을 보고 있는 것, 죽어버린 개를 묻어주는 일도 있다. 저자가 인용한 말이 그의 독서철학을 명료하게 보여주므로 재인용해본다. 식사를 하면서 책을 읽고 신문을 보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이지만, 사실 바람직한 모습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대로 된 책을 읽을 수도 없고 또 평생 감자가 익었는지 어땠는지도 모를 만큼 세상 물정에 어두운 채로 끝나버린다. 식사 시간에는 차분한 마음으로 식사를 하고, 밥이 된지 무른지, 국이 짠지 싱거운지 알맞게 된 건지, 무슨 생선을 조렸는지, 신선한지 묵은 건지 상해 가는지, 그런 일들이 모두 명약관화하게 마음에 비치듯 온 마음으로 식사를 하는 것이 좋다.(고다 로한의 <노력론>에서 나오는 한 구절)
그러므로 당연히 독서는 생활의 방식에 따라야한다. 독서하고 글 쓰는 것을 직업으로 갖고 있지 않는 한 아침이면 출근 준비를 해야 하고 직장에서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루에 독서를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그렇다고 독서를 우위에 두고 직장생활을 소홀히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또 그러한 일은 저자의 인생관에도 맞지 않다. 그러다보니 저자는 대략 일주일에 한 권 꼴로 책을 읽게 된다고 한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입장에서 본다면 독서를 안 하는 수준일 것이고 독서광이라 불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꽤 적은 분량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저자는 무리해서 책을 더 많이 읽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주기에 맞게 읽고 있고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책을 읽기 위해 주말의 모든 시간을 독서에 할애하는 저자의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월요일 아침, 새로운 한 주를 새로운 책과 함께 시작하면, 지난주와 일종의 구분을 지었다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요일이 되풀이됨에 따라 책 속의 새로운 사람들이나 새로운 풍경은, 그 보이는 방식이 바뀌기도 하고 때로 심오함이 드러나 보이기도 한다.
일요일에는 가능하면 바깥바람을 쐬고 싶다. 개를 데리고 공원을 산책하면, 공원의 넓은 연못에는 보트가 떠 있고 잉어가 헤엄치며 자라가 일광욕을 한다. 연못 위에는 붉은 부리갈매기가 날고 있따. 공원에 붙어 있는 잡목림에는, 올 때마다 나뭇잎이나 숲 속 그늘의 잡초 색깔도 조금씩 바뀌어 있다. 바람 냄새도 바뀌어 있다.
이 책은 많이, 그리고 빨리 읽어야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렸던 나에게 단비와도 같은 책이었다. 그리고 내가 왜 책을 읽고 있나 그리고 책이 내 인생에서 얼마만큼의 의미를 가지는 가에 대한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숙고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해주었다. 중간 중간 인용문들 중 낯선 것들도 있고(특히 무명 유카타 부분) 인용들이 많아 좀 산만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러한 부족한 부분을 상쇄할 만큼 좋은 생각을 담고 있는 글이라 생각한다. 빨리 읽기에만 미쳐있는 '눈동자가 흐트러진' 사람들에게 읽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