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21에 실은 출판기사를 옮겨놓는다. 마쓰모토 겐이치의 <일본 우익사상의 기원과 종언>(문학과지성사, 2009)을 다뤘는데, 따로 염두에 두었던 책이 잘 읽히지 않아서 원고 마감일 아침에 부랴부랴 읽고 작성한 것이다. 원제는 '사상으로서의 우익'. 읽다 보면 '사상으로서의 한국 우익'은 뭘까, 라는 의문을 갖게 만드는 책이기도 하다(일본 우익에 관한 책은 여럿 나와 있지만 한국 우익에 대한 책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한겨레21(09. 11. 09) 일본 한국 우익, 차이가 더 크다 

우익이란 무엇인가? 역사적 고찰이건 이념에 대한 분석이건 한국의 ‘우익’을 전면적으로 다룬 책은 드물다. 우익이라면 민족주의나 보수주의보다는 곧장 반공주의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 것이 한국적 현실이다. 이러한 특수성이 우익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물음까지도 봉쇄해버린 것은 아닐까? 일본의 평론가 마쓰모토 겐이치의 <일본 우익사상의 기원과 종언>(문학과지성사 펴냄)을 접하면서 갖는 궁금증이다.    

1976년에 첫 출간된 이후 여러 차례 개정판이 나왔다고 하므로 일본에서도 우익사상에 관한 대표적인 저작에 속하는 이 책의 원제는 ‘사상으로서의 우익’이다. 초점이 우익의 활동과 역사보다는 사상적 본질의 해명에 두어졌다는 걸 시사한다. 물론 그러한 해명을 위해서는 우익의 성립과 전개과정에 대한 고찰도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마쓰모토가 독특하게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근대 일본에서 권력을 장악한 지배계급은 좌익도 우익도 아닌 리버럴(liberal)이었다. 원래 자유주의자를 뜻하는 리버럴이 일본에서는 보수주의자로 나타났다고 한다. 그는 이 리버럴 세력이 좌우 양익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면서 지배계급으로 군림했다고 본다. 즉 프랑스 혁명 이후에 나타난 유럽의 좌파/우파와는 성격이 좀 다르다. 그것은 선진자본주의 열강 밑에서 일본이 뒤늦게 근대화를 추진해야 했던 특수한 사정에서 비롯됐다.  

입헌정치를 시도한 이토 히로부미 내각이 출현하면서 리버럴은 근대 일본의 지배계급이 되며, 이들은 메이지 국가체제의 근대화 노선을 적극적으로 주도해간다. 그리고 이때 이러한 노선에 반대하는 ‘반체제’로서 좌익과 우익은 마치 쌍생아처럼 태어났다. 좌익은 ‘계급’의 입장에서, 그리고 우익은 ‘민족’의 입장에서 근대화 노선에 반대했다. 사정은 전후에도 마찬가지여서 여전히 일본의 지배권력은 진주군(미군) 및 진주군과 결탁한 리버럴이었으며 이들이 처음에는 민주화를, 그리고 이후에는 우경화를 추진했다는 것이 저자의 시각이다.  

그렇다면 우익사상의 본질은 무엇인가? 좌익은 ‘마르크스교’이고 우익은 ‘천황교’라고 단순하게 정의하는 안이한 관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저자는 우익의 사상을 ‘가장 높이 도달한 지점’에서 해명하고자 한다. 그가 제일 먼저 제시하는 것은 우익의 사생관이다. 사상이란 궁극적으로 논리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문제, 곧 주체의 에토스의 문제라고 생각에서다. 한마디로 말하면, 우익의 사생관은 일본의 전통적인 산화(散華)의 미학, 곧 ‘아름다운 죽음’의 미학 위에 형성된다. 삶의 극치에서 죽어야 하며 그렇게 죽는 것이 아름답다는 식이다. 또 일본의 우익은 리얼리스트를 자임해온 좌익과는 달리 언제나 낭만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낭만(뜻)을 위해 목숨을 거는 일도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더불어 그들은 반자본주의를 지향하는 농본주의자들이었다. 벼농사를 기반으로 형성된 일본의 사직을 관장하는 사제(司祭)가 천황이기에 천황론도 자연스레 우익의 기본 사상이 된다. 다만 천황을 장악하여 국가지배의 원리로 만든 것은 우익이 아니라 언제나 리버럴이었다.   

일본 우익은 또한 내셔널리즘(민족주의)과 아시아주의를 동시에 주창했는데, 아시아주의란 서구 열강에 대항하여 아시아 민족의 내셔널리즘과 연대하는 것을 뜻했다. 하지만 정작 일본 자신이 제국주의화되면서 우익의 내셔널리즘과 아시아주의는 충돌하게 된다. 일본의 제국주의 또한 아시아 내셔널리즘의 타도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때 우익은 아시아주의를 포기한다. 그런 사실을 공표하지 않고 우익이 체제에 편입하면서 타락한 형태로 아시아주의를 표방한 것이 ‘대동아공영권’이란 저자의 지적이 흥미롭다. 한국어판의 머리말에서 저자는 내셔널리즘을 대의명분으로 한 일본 우익과 한국의 우익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궁금해하는데, 실상 공통점보다는 차이점이 더 많은 게 아닌가도 싶다. 민족주의보다는 국가주의적 내셔널리즘을 견지하고 있는 한국 우익의 견고한 반공주의와 현실주의가 떠올라서다. ‘사상으로서의 한국 우익’이란 무엇일까? 

09.11.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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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W 2009-11-03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기사를 읽으니 한국 우익 청년의 성장기를 다룬 장정일의 신작, <구월의 이틀>이 떠오르네요..
장정일 소설은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 로쟈님은 읽으셨는지 궁금합니다.

로쟈 2009-11-05 10:34   좋아요 0 | URL
덕분에 출간 소식을 알게 됐습니다.^^

자꾸때리다 2009-11-04 1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비-스트로스가 타계했네요.

자꾸때리다 2009-11-04 1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 대입 논술에 구조주의가 나오지 않을까...

로쟈 2009-11-05 10:34   좋아요 0 | URL
그런 순발력이?^^

드팀전 2009-11-04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겨레21에서 리뷰를 봤습니다. 종이가 눈에 더 잘 들어와요. 일본의 사생관이라는 관점과 오른쪽의 마루야마 마사오 리스트가 오버랩됩니다.

로쟈 2009-11-05 10:35   좋아요 0 | URL
장정일 신작 소설도 우연찮게 우익을 다루고 있어서 오버랩시켜볼 만할 듯해요...

2009-11-16 07: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16 2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강상중의 <청춘을 읽는다>(돌베개, 2009) 때문에 다시금 읽어볼 생각을 갖게 된 책은 마루야마 마사오(1914-1996)의 <일본의 사상>(한길사, 1998)이다. 오래전 처음 구입할 당시 머리말과 해제 정도를 읽어두었던 듯싶은데, 이미 소장본은 박스에 들어간 지 오래고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도 너무 낡았기에 2003년에 나온 3쇄를 다시 구입했다. 최근에 마쓰모토 겐이치의 <일본 우익사상의 기원과 종언>(문학과지성사, 2009)도 훑어본 터여서 마루야마를 진득하게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더 들었는지도 모른다. 오래 전부터 숙제로 안고 있는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문학동네, 2007)까지 읽으면 성공이겠는데, 아무래도 그건 겨울로 넘어갈 듯싶다. 그래도 내친 김에 마루야마 마사오 읽기 리스트를 만들어둔다(참고로 최근 선정된 '동아시아 100권의 책'에는 마루야마의 <강의록>이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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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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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9-11-03 01:19   좋아요 0 | URL
<문명론의 개략을 읽는다> 읽고싶네요. 언제 읽을지는 알 수 없지만... -_-

로쟈 2009-11-03 20:23   좋아요 0 | URL
후쿠자와의 책은 왜 다시 나오지 않는지 의문이예요...

비로자나 2009-11-03 13:35   좋아요 0 | URL
소장본이 박스에 들어간 지 오래, 라서 새로 사야 하는 지경이라... 로쟈 님의 서고(서재보다 서고가 더 적확한 말이 되겠군요 ^^)가 더더욱 보고 싶군요. ㅎㅎ

로쟈 2009-11-03 20:24   좋아요 0 | URL
번듯한 서고를 가질 형편이 못 돼서 이런 일이 벌어지니다.^^;
 

매주 월요일 한겨레신문에 전면광고로 나가는 휴머니스트 북리뷰 3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김용석의 <서사철학>(휴머니스트, 2009)에 대한 소개를 청탁받고 쓴 것이다.  

휴머니스트 북리뷰(09. 11. 02) 스토리텔링, 그 비밀의 문을 열다

‘문화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을 아우르면서 유례없는 ‘깊이와 넓이’의 인문학적 사색을 펼쳐온 철학자 김용석의 새로운 책이 출간됐다. 이번엔 아주 묵직하다. 제목부터가 한푼의 에누리도 없다. 서사철학! 일단 육중한 책의 무게가 월척의 손맛을 느끼게 한다. 마치 거대한 향유고래가 수면으로 솟아오르는 걸 보는 기분이랄까. 이건 ‘책’이라기보다는 그냥 ‘강적’이다!   

‘서사’에다 ‘철학’이 붙었다. 무엇을 다루는 것인가? 사실 이야기에 대한 저자의 관심은 틈틈이 보아온 것이어서, 제목을 통해 나는 ‘이야기에 대한 본격적인 철학적 탐구’ 정도를 떠올렸다. 그러고는 폴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나 노에 게이치의 <이야기의 철학>을 얼핏 상기했다. 하지만, 저자의 스케일은 이 두 사람을 훨씬 뛰어넘는다. 그가 다루는 일곱 가지 이야기 장르 가운데 ‘만화’와 ‘영화’는 물론 ‘진화’까지 포함된 걸 보고서 나는 저자의 상대가 그 자신밖에 없음을 알아차렸다.  

저자 또한 그런 자부심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철학자들이 지혜를 사랑하는 ‘필로소피아’의 정신으로 찾고자 한 세상의 이치가 크게 ‘원리’와 ‘윤리’, ‘진리’라고 말하면서 이제 네 번째 탐구의 대상으로 ‘설리(說理)’를 내세울 때 그는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것이니까 말이다. 철학의 제4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요컨대 그는 ‘이야기의 철학’을 주창하며, ‘설리의 철학자’를 자처한다.   

물론 계보가 없는 건 아니다.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이야기 철학’ 또는 ‘서사철학’의 원조로 꼽는다. 하지만 알다시피 <시학>은 ‘비극’이라는 한 가지 장르만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다.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것은 서사철학의 가능성이지 그 전모가 아니다. 그 서사철학이 거대한 윤곽을 드러내면서 이름에 걸맞은 규모를 자랑하게 된 것은 전통적인 서사 장르뿐만 아니라 대화와 혼화, 만화까지 포괄하여 서사철학의 집대성을 시도한 <서사철학>에 와서이다. “이야기에 대한 철학적 관심과 연구를 총괄하여 서사철학이라고 부른다”는 정의 그대로다. 과연 저자가 그어놓은 서사철학의 경계 바깥이 가능할지 궁금할 정도로 저자는 다양한 장르와 범위에 걸친 이야기들을 다룬다.  

‘서사’ 또는 ‘이야기’라고 했지만 요즘 뜨는 말로는 ‘스토리텔링’이다.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는 옛말이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옛말이다. 요즘 이야기는 상종가다. 어디서나 주문하고 이야기를 보챈다. 사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건 이야기를 말하며 이야기와 만난다. 리쾨르의 말을 빌면, 우리의 정체성 자체가 이야기로 구성되는 것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서사 장르에 한정하더라도 우리의 주변은 온갖 신화적 이야기와 중세적 판타지와 마술적 이야기들로 넘쳐난다. 우리의 주인공은 해리 포터이고, 우리의 연대기는 나니아 연대기이며, 우리의 성공담은 언제나 모든 난관들을 극복해 나가는 모험 서사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우리는 이야기를 지어내면서 누군가가 만들어내는 이야기 속에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세상 자체가 이야기의 중층 구조다. <서사철학>은 이러한 이야기들의 세계, 이야기들의 우주에서 무엇을 읽을 수 있고, 무엇을 해석할 수 있는지 시범적으로 보여준다. 한마디로 장관이다.   

비록 아직 불안정하며 불완전한 ‘시론(試論)’일 뿐이라고 저자는 말하지만 지나친 겸손이자 과소평가다. 자신의 텍스트 읽기를 여러 스토리텔링이 품고 있는 철학 콘텐츠를 발굴하는 작업 정도로 정의하고 있는 것도 그렇다. 허구를 필요로 하는 존재로서의 인간, 곧 ‘서사적 인간’에 대한 본격적인 탐구의 길을 개척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사철학>은 서사철학을 넘어선다. 그것은 ‘서사적 인간학’을 창출한다. 그런 의미에서, 일곱 가지 특색을 지닌 장르에 대한 연구로 구성된 <서사철학>이 ‘이야기 탐구의 아이리스’가 되기를 바란다는 저자의 기대는 이미 이루어졌다. 단, 내가 염두에 둔 ‘아이리스’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무지개의 여신 아이리스가 아니라 요즘 뜨고 있는 블록버스터급 드라마 <아이리스>다. <서사철학>은 오랜만에 등장한 인문서의 블록버스터다.  



09. 11. 02.   

P.S. <서사철학>에서 이채로운 것 중의 하나는 저자가 '서사'를 'tale'의 번역어로 쓰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서사철학'의 영어표현은 'Philosophy of Tale'이다. 나는 '서사'가 서사학의 대상인 '내러티브'를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story'도 'narrative'도 아닌 'tale'이었던 것. 이게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개인적으로 더 따져보려고 한다. 마침 서사학의 원조라 할 블라디미르 프로프의 <민담의 형태론>(박문사, 2009)이 새로 번역돼 나왔다. 이번이 세번째이지 싶다. 그러고 보니 <서사철학>에서 다루고 있는 아이리스(무지개), 곧 신화, 대화, 진화, 동화, 혼화, 만화, 영화라는 일곱 장르에 하나가 더 들어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신화만큼이나 오래된 이야기인 민담, 곧 민화(民話)가 그것이다. 물론 대개의 민화는 동화적 요소를 갖고 있기에 그렇게 포괄될 수도 있을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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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krad 2009-11-02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사=내러티브라고 고민없이 생각해왔는데 tale이라니 좀 놀랍네요.
tale이라는 말에서는 이야기의 창조성이랄까 왠지 원초적인 느낌이 듭니다.^^

로쟈 2009-11-03 00:31   좋아요 0 | URL
제 느낌에는 narrative가 tale보다 더 포괄적인 듯싶어요...

놀이네트 2009-11-03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문사의 새 번역본은 두께가 두 배 값은 세 배가 되었네요. 다른 논문들을 좀 넣었을까요?
쁘로쁘 광팬이라...

로쟈 2009-11-03 20:26   좋아요 0 | URL
그런신가요? 먼저 보시고 제게도 알려주시길.^^

펠릭스 2009-11-03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차안에서 '서사철학' 서평을 읽으며 생각했죠.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시민에게서 이성주의(계몽)
에 대한 희망을 갖지 못한게 아닌가 싶어요.

로쟈 2009-11-03 20:27   좋아요 0 | URL
한겨레의 서평을 읽으셨나 보네요.^^

당근주스 2009-12-21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례사 서평처럼 보입니다. 웬지 신뢰가 가지 않습니다. 청탁받고 쓰신 서평이라서 그런지 광고하시는 것 같습니다.

로쟈 2009-12-22 00:10   좋아요 0 | URL
전면광고로 나가는 서평이라고 미리 적었습니다. 그래도 KBS의 책읽는밤에서 '올해의 책'의 하나로 선정했구요, 책은 드물게 볼 수 있는 노작입니다.

당근주스 2009-12-22 12:53   좋아요 0 | URL
광고로 나가는 서평이니 주례사 서평일 가능성이 많아 보였습니다.또
'올해의 책' 선정기준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선정한 사람도 신뢰가
가지 않고요. 제 생각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독서대학 르네21의 이번달 금요대중강좌는 '책을 말하는 책'을 주제로 다룬다. 네 차례 강좌 중 한 꼭지를 나도 맡게 되었는데(http://www.renai21.net/bbs/settlement_view.php?s_id=61&schedule_type=4)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금요일 저녁(19시 00분 ~ 21시 30분) 광화문 대한성공회 대강당을 찾으시면 된다. 유료강좌이며 선착순 마감이다. 강좌 소개와 함께 일정을 안내한다.  


  

1. 11월 6일: 김이정, <순례자의 책> 

 

2. 11월 13일: 이현우, <로쟈의 인문학 서재> 

 

3. 11월 20일: 정혜윤, <그들은 한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4. 11월 27일: 조병철, <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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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2 2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1-02 2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펠릭스 2009-11-03 10:29   좋아요 0 | URL
듣고 싶군요

로쟈 2009-11-03 20:28   좋아요 0 | URL
저녁시간인데, 강좌가 운영되더라고요...
 

이번주 교수신문에 실은 칼럼을 옮겨놓는다(일부 오탈자를 수정했다). 내주에 수능시험도 있는지라 최근에 읽은 사이토 다카시의 <독서력>(웅진지식하우스, 2009)을 잣대로 삼아 학생들의 '독서력'에 대한 단상을 적어보았다(사이토 다카시는 일본의 베스트셀러 저자이자 저명한 학습법 멘토로서 국내에도 수십 권의 책이 소개돼 있다). 공부와 독서를 양자택일 관계로 만드는 현행 입시제도에 대해서 재고해보자는 제안도 담고 있다. 대학에서는 독서를 장려하고 독서력을 길러주는 강좌와 교육방식을 적극적으로 도입해볼 수 있을 것이다. 책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으로서 독서력이 '공부'의 핵심이라면 말이다.  

교수신문(09. 11. 02) 필독 리스트와 독서력! 

해마다 비슷한 통계가 나오지만, 작년 한국 성인의 연평균 독서량은 11.9권이었다. 한 달 평균 한 권 정도의 책을 읽는 셈인데, 주로 읽는 책이 소설(21.4%)과 수필/명상집(7.4%), 경제/경영서(5.9%) 순이었다. 대학생이라면 사정은 좀 나을지 모르겠지만, 평균적으로 한국인의 독서량은 ‘경제수준에 걸맞은 문화국가’와는 거리가 멀다. 이명박 대통령의 말대로, “우리민족의 유전자엔 강한 문화적 기질과 욕구가 있다”고 한다면 독서에 대한 욕구 또한 부족하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혹 그러한 기질과 욕구를 억압하는 잘못된 사회적 제도와 여건에 있는 건 아닐까.

올해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예년의 경우 시험을 치른 수험생들은 하고 싶은 일들 가운데 하나로 ‘읽고 싶었던 책을 읽는 것’을 꼽았다. 학교시험과 수능시험 등에 매달리다보니 정작 책을 읽을 시간을 내지 못하는 게 학생들이 현실이라는 얘기다. 사정은 일본도 비슷한 모양이어서 교육심리학자 사이토 다카시의 『독서력』(웅진지식하우스)에 보면, 저자 또한 독서가 부정되는 입시에 대한 강한 불만을 토로하고 있다. 그는 아예 독서력을 묻고 평가하는 것이 입사시험이나 대학입시의 중요한 전형방식이 돼야 한다고까지 주장한다. 시험방식이 공부 방식을 결정하는 현실에서라면 그의 제안을 우리의 처지에 맞게 적극적으로 고려해 봄직하다. “대학, 특히 문과 계열의 공부는 책을 읽는 것이 핵심이다. 설사 이과 계열이라도 논리적인 사고를 단련하는 데 독서는 필수다.” “대학에서 가르치는 입장에서 보면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 높은 수준의 독서력을 갖추고 있으면 그만이다.” 같은  그의 주장을 우리도 반박하기 어렵다면 말이다.

교육 현장에서 사고력과 상상력은 언제나 강조돼 왔다. 하지만 독서력의 경우는 어떨까.  독서가 자아 형성을 위한 양식이고 커뮤니케이션의 기초로서 우리의 세계관을 확장시켜준다고 보는 사이토 다카시는 ‘독서력 형성’이 학교교육의 최대 과제라고까지 말한다. 하지만 우리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까. 만약에 그렇지 못하다면, 교육의 목표와 과제에 대해 다시 설정해볼 필요가 있다. 공부와 독서를 따로 분리시키는 시험방식을 고수하면서 독서를 권장하는 것은 입바른 소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궁극적으론 학생들을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책을 안 읽는 인간과 책을 못 읽는 인간.”(김경욱, ‘위험한 독서’)이란 분류법에서 못 벗어나게 만들 것이다.   

물론 제도적인 차원의 개선이 이루어지는 것은 당장에 기대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지만 독서력의 기준을 제시하고 독서를 장려하는 일은 어렵지 않아 보인다. 사이토 다카시는 ‘문고본 100권과 신서본 50권’을 독서력의 기준으로 제시하는데, 우리의 상황에 맞게 바꿔보자면 ‘문학작품 100권과 교양서 50권’ 정도가 된다. 여기서 ‘문학작품’은 가벼운 읽은 거리가 아닌 ‘고전’ 수준의 작품을 말하고, ‘교양서’는 과학교양서를 포함한 인문·사회과학서적을 가리킨다. 이런 분량의 책을 4년 정도의 기간 안에 독파하는 것이 독서력 형성의 지름길이라고 사이토 다카시는 말한다. 우리의 경우에도 각 대학별로 필독 고전의 리스트는 많이 제시하고 있다. 다만 독서를 학생들의 자발적인 의지에만 내맡겨두는 것은 효과가 적지 않나 싶다. 관련강좌를 개설하거나 여러 유인책을 통해서 학생들의 독서의지를 적극적으로 북돋아줄 필요가 있다.

사이토 다카시의 강의 사례도 그런 경우다. 그는 자신의 강의실을 학생들이 ‘동아리’로 생각하도록 유도한다고 한다. ‘독서부’에서 제대로 된 지도자에게 지도를 받으면 꽤 높은 수준의 책도 읽게 되더라는 것이 그의 경험담이다. “내 강의실은 운동부 학생들로 붐빈다. 그들 중 상당수가 책을 거의 잡아본 적이 없다. 그래도 역시 대학생인 만큼 나와 함께 독서토론회를 하다 보면 석 달 안에 도스토옙스키나 니체 등 5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일주일 안에 너끈하게 읽게 된다.”

독서 경험이 축적되는 가운데 독서력이 붙고 독서에 자신감을 갖게 되면, 대학에서의 공부는 평탄해진다. 다양한 수준의 독서를 통해서 자신의 독서력을 지속적으로 단련시켜나가는 일이 남을 뿐이다.

이 독서력의 마지막 단계는 무엇인가. 음식에 패스트푸드와 풀코스 요리가 있는 것처럼 책에도 한번 훑어보기만 해도 충분한 책과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야 하는 책이 있다. 그리고 같은 책이라 하더라도 건너뛰면서 읽어도 좋은 부분과 천천히 정독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때문에 독서의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 이러한 단계까지 거친다면, 마지막으론 여러 권의 책을 동시에 읽는 수준이 된다. 여러 권의 책을 기어를 바꿔가면서 읽을 수 있다면 대학생의 독서력으론 더 바랄 게 없다. 그들은 사회인이 돼서도 꾸준히 자신의 독서력을 단련하고 세계관을 확장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때 비로소 한국인의 연평균 독서량도 조금 다른 수치를 보여주게 되지 않을까. 독서강국으로서의 문화국가를 잠시 꿈꾸어본다. 

09. 11.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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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11-02 22: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년 한국 성인의 연평균 독서량은 11.9권이었다면 상당히 양호한 편이네요.하지만 출판사 3만개중 91%가 일년에 책 한권 출간하지 못하는 현실을 볼때 대한민국이 독서 강국이 되기는 참 요원해 보입니다.

로쟈 2009-11-02 23:00   좋아요 0 | URL
독서강국의 지표라면 최소 일주일에 한권은 돼야 할 텐데요.^^; 그래봐야 하루 30분 정도의 독서시간입니다...

펠릭스 2009-11-03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것처럼 자신에게 맞는 독서법도 중요할듯 해요

로쟈 2009-11-03 20:29   좋아요 0 | URL
그걸 찾아야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