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오늘‘의 흔적이 하나도 없어서 다시금 상기한 게 오늘 날짜다. 2월 29일. 그렇지만 오늘은 흔적을 남기게 되니 다음 윤년에는 오늘을 떠올릴 수 있으리라. 일단 이번주 한겨레에 실은 ‘언어의 경계에서‘ 칼럼을 옮겨놓는다. 로먼 크르즈나릭의 <원더박스>, 바뀐 제목으로는 <역사가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원더박스)의 한 대목을 간추렸다. 책 열두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그 가운데 ‘가족‘ 장의 내용이다. 남녀간의 분업 문제 외에 가족간의 대화라는 주제까지 염두에 두고 글을 시작했지만 역시나 분량이 짧았다. 좀더 많이 읽힐 만한 교양서다...
















한겨레(20. 02. 28) 지금 당신에게 ‘원더박스‘가 필요하다면

제목을 보고 짐작할 수 있지만 ‘역사가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원제가 아니다. 번역을 언어의 경계 넘기로 정의하자면 이 책은 두 차례 그 경계를 넘어왔는데 처음에는 ‘원더박스’라는 제목이었고 원제 역시 그러하다. 알랭 드 보통과 함께 ‘라이프스타일 철학자’로 불리는 저자 로먼 크르즈나릭은 역사를 ‘원더박스’에 비유한다. 르네상스 시대 ‘호기심의 방’을 뜻하는데 수집가들이 여러 진기한 물건들을 보관하고 전시하는 공간을 가리킨다. 일종의 보물창고다.

역사라는 보물창고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는가. 크르즈나릭은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지혜를 역사에서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분명 특이한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여전히 잘 몰랐던 역사, 새삼 다시 음미해볼 만한 사실들과 만나게 된다. 저자는 사랑에서 죽음까지 열두 가지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각각의 주제가 모두 흥미롭지만 일례로 가족의 역사를 잠시 살펴본다. 가령 집안에서 남녀의 역할분담은 어떻게 하면 좋은지 질문한다면 역사는 어떤 답변을 들려줄까.

문화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서양의 경우 남자가 일을 하러 집을 떠나는 관행은 19세기에야 등장한다. 즉 남녀의 영역 분리는 산업화의 산물이다. 산업화 이전에는 경제생활과 가정생활이 모두 집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집안일은 공동의 소관이었다. 옷감 만들기, 소젖짜기, 물 긷기 등의 집안일에 남녀 구분이 따로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출산 도중 여자가 사망하는 일이 많아서 남자가 양육을 전담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남자 주부가 이상하지 않았고 편부 가정도 지금보다 훨씬 많았다. 그랬던 상황이 산업혁명이 가져온 사회, 경제적 변화로 인하여 완전히 바뀌었다. “석탄이 표준 연료가 되어 나무를 대신하자 남자들은 밖에 나가서 석탄을 구매할 충분한 돈을 벌어 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남녀의 역할이 다르다는 ‘분리된 영역’ 이데올로기는 이러한 변화가 공고화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 이에 따라 산업화 이후에 남자들은 특별한 계기가 있을 때만 가사에 관여했다. 특히 노동자계급에서는 남자가 가사노동에 참여하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 남자다움과 여자다움의 구분은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산물로 20세기 중반이 그 극성기였다. 저자는 제임스 딘 주연의 영화 <이유 없는 반항>(1955)의 한 장면을 예로 드는데, 반항의 아이콘이었던 딘이 불쑥 집에 찾아왔다가 정장 차림에 앞치마를 두른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역겨워하는 장면이다. 육아와 가사는 남자에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보는 편견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그렇지만 남녀의 노동 구분이라는 고정관념은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도전받기 시작한다. 결정적인 계기는 피임약과 페미니즘의 등장이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여성이 증가하면서 더 이상 ‘바깥일’이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영화로도 만들어진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한국사회에 불러일으킨 반향에서 알 수 있듯이 서양에 한정되지 않는다. 물론 미래에 인공자궁이라도 등장하지 않는 한 앞으로도 출산은 여성의 몫으로 남겠지만 “젖병을 소독하고, 아기 옷을 사고, 셔츠를 다리고, 으깬 완두콩 요리를 하는 데는 특별히 여성 유전자가 필요하지 않다.”

역사의 교훈은 무엇인가. 현재의 문화와 관행이 결코 고정불변의 것일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가 책의 길잡이로 삼은 괴테의 경구는 여전히 곱씹어볼 만하다. “지난 3000년의 역사를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루살이 같은 인생을 살 뿐이다.”

20. 02. 29.







P.S. 크르즈나릭은 알랭 드 보통의 인생학교 멤버이기도 한데, 번역된 책으로는 <일>이 그의 책이다. 더불어 <공감하는 능력>과 <인생은 짧다 카르페 디엠>(더퀘스트)까지 소개돼 있지만, 국내에서는 아직 독자층을 얻고 있지 못한 듯하다. <역사가 당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만 하더라도 '알랭 드 보통이 닐 퍼거슨을 만날 때' 같은 내게는 정확해 보이는데, 정작 하버드대학의 역사학자 닐 퍼거슨이 한국에서는 보통만큼의 인지도를 갖고 있지 못한 게 함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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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사태로 상당수 강의 일정이 취소되거나 연기돼 갑작스레 무급휴가를 갖게 되었다. 강의와는 별도로 써야 할 원고와 교정거리가 쌓여 있으니 일이 없는 건 아니지만 원래는 거기에 더해서 매주 10개 안팎의 강의가 있었다. 갑작스레 주어진 시간에 할 만한 생산적인 활동을 궁리해보다가(한시적 실직이기도 하므로) 조반니 보카치오의 <데카메론>(1353)을 이 참에 읽기로 했다. 정색하고 읽은 적은 없어서다.

오래전에 단테의 <신곡>(1321)은 강의에서 읽었지만 <데카메론>은 다룰 기회가 없었다. 근대소설의 전조로서 <데카메론>과 <캔터베리 이야기> 등을 언젠가 강의에서 다루려고 했지만 무산됐었다. 이래저래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 문학강의가 숙제처럼 남았었는데 코로나 사태를 핑계로 <데카메론>을 읽으려는 것. 1348년 페스트의 참상을 목도하고 구상한 작품으로 알려지기에 ‘코로나 시절‘과 조응하는 면도 있다. 안 그래도 카뮈의 <페스트>(1947)가 이즈음 독자들이 많이 찾는 소설이 되었는데, 그런 관심의 연장선상에서 <데카메론>도 독서목록에 올릴 만하다.

<데카메론>은 열흘간 10명의 화자가 들려주는 100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에 맞추기 위해 나도 열흘간 읽으며 소감을 남기려 한다(작품에서는 평일만 계산하기에 날짜로는 두주간이다). ‘코로나 시절의 독서‘라고나 할까. 강의경력으로 치면 24년차에 이런 일도 겪는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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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20-02-29 0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와 강의 24년차라니 대단하십니다. 강의 8년차인 저도 요즘 강의가 다 없어져서 아내가 대리운전이라도 하라고 타박합니다 ㅠㅠ 데카메론은 제가 고3 때 너무 공부하기 싫어서 이것저것 뒤지다 읽은 책이어요. 의외로 재미있어서, 고전도 재밌구나를 느끼게 해줬습니다. 암튼 빨리 코로나가 종식돼서 로쟈님과 제가 강의를 할 수 있게 되길 빕니다.

로쟈 2020-02-29 14:11   좋아요 0 | URL
아 개강이 연기된거죠? 유급휴가도 눈치보이시나요?^^

마태우스 2020-03-01 22:25   좋아요 0 | URL
그, 그게 아니고요 저도 외부강의로 먹고 살잖습니까. 근데 그게 다 취소됐습니다. ㅜㅜ

로쟈 2020-03-01 23:36   좋아요 1 | URL
부업 말씀인 걸로.^^

오지 2020-02-29 1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천일야화가 떠오르네요. 천일야화는
열린책들판으로? 건강 보살피시길.

로쟈 2020-02-29 14:12   좋아요 0 | URL
천일야화까지는 다시 손댈 계획이 없지만 중세문학까지 올라가다보면 그리될수도.~
 
 전출처 : 로쟈 > '지구화 시대의 영문학'에 대한 단상

무려 16년 전에 쓴 글이다. <지구화시대의 영문학>(창비)이란 책의 출간에 즈음하여 백낙청 문학론에 대한 개인적인 불만을 적었다.
코로나 사태로 시절이 하수상하다. 총선 같은 정치적 일정은 나중 문제이고 당장 일상의 루틴 자체가 타격을 받고 있다. 앞으로 고비가 될 한달간 무슨 일을 해야 할지 궁리를 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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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글이 2020-02-28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부분 강의가 취소되셨을 듯..
다들 힘내고 잘 버팁시다~~~

로쟈 2020-02-29 14:09   좋아요 0 | URL
네 다들 어려운 시기입니다.^^;
 
 전출처 : 로쟈 > 20세기와 잃어버린 마르크스주의

14년 전의 독서메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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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저자 나호선의 <젊은 생각, 오래된 지혜를 만나다>(여문책)를 아침에 가방에 넣었다. 목차만 보면 세 가지 주제(평등, 권력, 혐오)에 관한 열두권의 책을 읽고 적은 독후감으로 분류할 수 있는 책이다. 제목의 ‘오래된 지혜‘는 얼핏 고전을 떠올리게 하는데 고전이라고 부르기엔 어색한 책들도 포함돼 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와 한병철의 <피로사회>, 신현준의 <레논 평전> 등은 고전이 되기까지 좀더 숙성기간을 거쳐야 할 것으로 보이고, 히틀러의 <나의 투쟁>은 고전이라기보다는 고약한 책이다.

나의 관심은 일단 <공산당선언>에 대한 독후감에 한정되는데, 나대로 해제를 써야 하는 게 있어서 ‘젊은 생각‘을 참고하고 싶었다. 하지만 저자가 서문에서 기대한 것과 달리 ‘새로운 해석‘이라고 할 만한 건 눈에 띄지 않았다. 짐작에는 이런 견해를 새로운 해석이라고 생각했을까?

˝분명 마르크스는 사람에 관한 무엇인가를 놓친 게 틀림없다. 나는 그의 큰 붓이 역사의 큰 그림을 디자인하는 데는 능했어도 가난한 대중의 복잡다단한 심리구조를 소묘하는 데는 너무 서툴렀다고 생각한다. 빈민과 서민, 노동자와 실업자, 이들은 뭉쳐야 할 때 제대로 뭉치지 못했고, ‘바닥을 향한 경쟁‘을 벌이며 서로를 질투했다.˝

그래서 꺼내든 게 빈민과 서민의 ‘복잡다단한 심리구조‘다. 그런데 실제로는 복잡다단하지 않다. 아주 단순하게도 빈자는 부자를 감히 넘보지 못하고 그냥 현실적으로 서민이 되고자 할 뿐이다(저자는 ‘서민‘을 ‘상대적 빈곤층‘, ‘빈민‘을 ‘절대적 빈곤층‘으로 구별한다). 그래서 벌어지는 게 서민과 빈민의 자리 뺐기 경쟁이다. 이 자리싸움이 계급투쟁을 대신한다는 것. 따라서 마르크스가 예견한 공산주의의 도래는 무망한 것이 된다. 프롤레타리아계급은 자본가계급에게 결코 위협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략 저자의 견해는 그렇게 정리될 성싶다. 이러한 사정을 마르크스는 간과했다는 것.

˝마르크스는 역사의 운동방식에 너무나 고무된 나머지 인간의 작동방식을 오판했다. 그가 허위의식으로 치부해버린 인간의 원초적 감정들이 못사는 사람들을 분열시키고 말았다. 그는 구조가 사람을 만들지만, 단결된 사람들이 구조를 깨뜨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인간은 때로는 위대한 선택을 일궈내면서도 종종 바보 같은 결정을 내리기도 하는 불완전한 존재다. 그는 그것을 간과했다.˝

고로 ˝이기심을 사회적으로 박멸하려고 했던˝ 마르크스의 시도는 ˝위대하면서도 바보 같았던 것˝이라는 결론. 나로선 이러한 ‘양다리 걸치기‘가 ‘젊은 생각‘인지 궁금하다. 인간이 저지르는 바보 같은 결정이 위대한 선택을 무력화한다면, 바보 같은 마르크스 역시 위대한 마르크스를 무색하게 만드는 것 아닌가.

그런데 말미에 가서 저자는 다시금 마르크스를 소환한다. ˝마르크스는 실패했어도 그가 추구했던 가치는 인류가 풀지 못한 오래된 소망이었다. 마르크스는 죽었어도 그의 영혼은 그가 사랑했던 가치와 함께 영원히 살아있다.˝ 흠, 그가 추구했던 가치(평등?)가 아무리 위대하고 고상하다 하더라도 저자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인간의 작동방식을 오판했고, 인간의 원초적 감정, 복잡다단한 심리구조를 이해하지 못해서 결국 실패한 사상가가 아니던가. 그렇지만 그는 계속 살아있다고?

나로선 저자가 마르크스를 비판하는 것인지 기리고자 하는 것인지 헷갈린다. ‘위대한 바보‘이기에 둘다인가? 너무 두루뭉술하게 여겨진다. 마지막 단락.

˝피는 붉다. 열정도 붉다. 심장이 뛴다. 오늘도 내일도, 역사는 알게 모르게 전진할 것이다. 미래는 희극으로 재현될 수 있기를 바란다. 흑백의 자본주의, 적색의 공산주의를 넘어 새로운 역사는 다채로운 빛깔의 수채화이기를 꿈꾼다. 미래는 우리 손에 달려 있다.˝

매우 시적이다. 그렇지만 심장이 뛰게 하지는 않는다. 미래가 희극으로 재현된다? ˝역사는 두번 반복된다. 한번은 비극으로, 또 한번 희극으로.˝ 같은 마르크스의 경구를 기억한다면 저자의 의도와 달리 희극(소극)이란 말이 얼마나 코믹하게 들리는지 가늠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마르크스가 너무 ‘큰 붓‘으로 역사의 그림을 그렸다고 할 때 눈치챘어야 하는데 저자는 비유에 너무 고무된 것 같다. ˝흑백의 자본주의, 적색의 공산주의를 넘어 새로운 역사는 다채로운 빛깔의 수채화이기를 꿈꾼다˝라니!

독후감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할 건 아니다. 다만, 나이가 그 자체로 ‘젊은 생각‘을 보장해주는 건 아니며, 특히나 ‘수채화‘ 같은 비유로는 역사에 대한 진지한 인식에 도달하기 어렵다는 조언 정도만을 덧붙이고 싶다. 아, 청년 마르크스도 서른살에 <공산당선언>(1848)을 발표하면서(엥겔스는 저자와 같은 스물여덟 살이었다) 공산주의를 유령에 비유하긴 했다. 하지만 그것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마지막 문장에 이르는 여정의 첫 문장이었다. 하나의 비유를 서툰 비유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많은 노고가 필요하다. 냉철한 이지와 열정과 분노와 희망이 총동원되어야 하는 것.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떠돌고 있다˝는 첫 문장이 여전히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적어도 내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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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andante 2020-06-05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로쟈님의 이 글을 꼭 읽어줬으면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