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한정희의 소설 <웃으면서 죽는 법>을 <현대문학>(2006년 7월호)에서 읽었다. 시작부터 가관이다. "그날 아침, 나는 드디어 목을 맬 도구를 결정했다. 남편이 출근하자마자, 그의 감색 버버리코트에서 벨트를 빼냈다... 그리곤 벨트를 매달 곳을 찾아다녔다... 매듭을 지은 벨트를 목에 매달고 이리저리 다니면서 목을 맬 곳을 찾아다가 우연히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늘어지고 낡은 연하늘색 잠옷을 입고 목에 감색 벨트를 걸고 있는 모습이 아주 기괴하게 보였다. 목 주변은 벌써 벨트에 쓸려 벌게져 있었다."

 

 

 

 

이 정도면 약간의 궁금증은 유발할 만하다. 이 '기괴한' 아줌마의 행동거지와 의식의 흐름을 조금은 더 따라가볼 맘이 생기는 것이다. "거울을 통해서 내 모습을 보고 있지나 실제로 목을 매달면 어떤 기분일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나는 침에에 올라앉아서 숨을 한번 깊이 들이쉬고는 벨트를 꽉 당겨보았다. 벨트를 바싹 당기자 얼굴에 피가 솟구치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 더 양손에 힘을 가하자, 손에서 힘이 저절로 빠지면 벨트가 풀어져버렸다... 나는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가슴이 벌렁거리고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굳이 이런 대목을 인용하는 것은 문득 아주 오래전에 한 의대생 친구가 '무용담'처럼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재수 끝에 의대에 들어간지라 대학생활의 '후배'였음에도 불구하고 몰려다니던 친구들이 모이면 좌중을 압도한 건 이 의대생 친구였다. 특히나 해부학 실습을 하던 이야기를 늘어놓으면 우리는 숨도 크게 못 쉬었다(구역질을 하는 여학생 얘기는 꼭 들어갔다). 사체를 한 구씩 사서 해부학 연습을 하기도 하고 여자 사체는 지방이 많아서 애로가 많다는 이야기 등등으로 아직 여자 친구도 없던 주변 친구들의 야코를 한껏 죽여놓더니, "너네 그거 알아?"하면서 보탠 이야기는 넥타이로 목을 맨 다음에 한쪽 발은 침대를 딛고 나머지 한쪽 발로는 바닥을 디디면서 자빠지듯 목을 뒤로 쭉 빼는 사이 두 팔로는 넥타이를 전방으로 힘껏 잡아당기는 포즈의 자살연습법에 관한 것이었다(아니면 침대 기둥에 걸친 벨트를 목에 걸고 반대방향으로 기어가는 것이었나?).

'자살연습법'이란 표현은 다소 부정확한데, 그러한 기괴한 짓이 실제로 의도하는 건 죽음의 경험이 아니라 오르가즘의 경험이기 때문이다. 친구의 말로는 "가슴이 벌렁거리고 심장이 빠르게 뛰"면서 거의 유사-오르가즘을 경험한다고 했다. 이게 자위 정도와는 비교도 안된다나 어쩐다나. 짐짓 믿거나 말거나였지만, 나는 실제로 한번 해보고 싶은 생각이 들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자가 단속에 분주했다. 아직 오르가즘에 목숨 걸 나이는 아니었기에.

소설에서 아줌마 화자는 그런 순간에 걸려온 전화 때문에 잠시 자살 기도를 방해받는다. 그러고 켜놓은 TV에서 권총 살인 장면이 나오는 드라마를 보고는 다시 자살 생각에 전념한다. "드라마를 보면서 내게도 권총이 있다면, 페트병을 사용해서 머리를 관통시켜 시신도 온전한 상태로 확실하게 죽을 수 있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떠올린 것은 언젠가 가보았다는 쿠바 교외의 헤밍웨이의 집과 그의자살. "그는 쿠바를 떠나 고국의 아이다호로 돌아가서 카빈총으로 자살했다. 아마도 그는 영화에서처럼 긴 카빈총을 거꾸로 세우고 총신을 입 안에 넣고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을까? 내 상상으로는 그렇게 했을 것 같다. 그가 사용한 총은 9밀리가 아닌 카빈이었으므로 그의 뒤통수는 절반쯤 산산이 부서져서 사방으로 튀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아줌마 총을 구할 가망성이 희박하다는 현실 때문에 권총자살은 포기한다. 그때 다시 걸려온 전화는 미국에 이민 간 대학동창의 전화였고 두 사람은 루게릭병에 걸려 10년전부터 투병중인 한 친구의 안부를 떠올린다. '나'는 그 친구가 병에 걸렸다고 고백한 초기에 그냥 죽으라고 말함으로써 분위기 아주 썰렁하게 만든 기억이 있다. '나'의 심사로는 "청춘도 지나왔고, 사랑도 했으며, 결혼도 해봤고, 아이를 낳아 키우며 인생의 행복을 맛보았다는 자조적인 감정에 내몰려서 한 생각이었다."

몹쓸 병에 걸린 친구 '현임'은 대학 시절 '나'의 우상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약간 얽었고, 붉은빛이 도는 검은 뿔테 안경을 끼고 있었는데 검정 터틀넥 스웨터와 하늘거리는 검정색 저지 롱스커트를 입고 반들반들한 생기넘치는 얼굴에 자신감으로 꽉 찬 미소를 짓고 큰 키를 휘청거리며 카페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모습은 너무 당당했다. 희디흰 손가락 사이로 가늘고 긴 담배를 물고 노동운동과 실존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빛나는 미래를 포기하고 금속공장 여공으로 취헙한 시몬느 베이유 이야기를 할 때의 그녀에게서는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나는 금방 그녀의 추종자가 되었다." 하니, 그 친구 또한 노동운동과 실존 사이에서 방황하다가 삶을 무엇인가에 투척하는 멋드러진 모습을 보여주었을 법하다.

하지만 "재능 있는 사람들의 경우 많은 부분이 그렇듯 현임도 자신의 내면에서 도전할 만한 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철학을 전공하고 영화판에 쫒아다니다가 배추장사를 했고 무슨 종교에 빠진 남자와 결혼했다. 두 사람의 만남이나, 생활은 기승전결이 무시된 컬트영화 같았다. 원래 현임의 기질 속에 타고났던 열정과 외면적 열등감 때문에 더욱 적극적으로 남자에게 구애를 표현하는 그녀의 강렬함이 합쳐져서 빠르게 두 사람이 맺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그녀의 삶은 힘겨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학창시절의 그 빛나던 지성은 누추한 일상 속에 엉겨서 흘렀다." 그러니, 루게릭병에 걸렸다고 울었을 때, "죽으라고, 그냥 죽으라고, 그것이 너답게 죽는 거라고, 너를 지켜보는 나의 바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물로 그렇다고 해서 그냥 죽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기 자신을 죽이는 일도 남을 죽이는 일만큼의 노고를 필요로 하기에. "80년대만 하더라도 수많은 시위대 앞에서 분신자살 같은 극렬한 항의가 잦았다. 그런 죽음에 비해 목을 매달 자리를 찾으려고 온 집안을 헤맸던 내 모습이 오래전에 본 영화의 한 장면처럼 아득하게 생각되었다. 한낮의 햇볕이 강렬하게 쪼이는 다리 위에서 물속으로 뛰어내리는 죽음은 어떨까. 물이 떨어지는 육신을 상냥하게 맞아줄 것 같기도 했다. 그에 비해 불에 타 죽는 것은 육신에게 못할 짓을 저지르는 것 같았다. 약을 구할 수 있으면 그것도 손쉬운 방법일 텐데... 아, 지금 언니가 말한 것처럼 비닐봉지를 이용한 질식사도 신체를 훼손시키지 않는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누가 뒤에서 손을 묶어줄 것인가?"

오래전 일이지만 나 또한 물에 빠져 죽을 결심을 하고 잠수교를 건넌 적이 있었다. 요즘처럼 장마철이어서 흙탕물인데다가 유속이 너무 빠라서 엄두가 나질 않았다. 주변에 건져줄 만한 사람도 없었고. 이런 시를 잠깐 쓰는 걸로 참아두는 도리밖에 없었다: "거리에 어둠이 내린다. 어둠은 너무도 두꺼운 책,/ 한장씩 찢어 달빛으로 태운다. 어둠의 재가 날린다./ 방안 구석구석에 어둠이 포진한다./ 장회를 신은 유령들! 언젠가,/ 나는 맨발로 물에 빠질 생각을 했었구나/ 발목엔 아직도 그때 물린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나는 자꾸 누군가를 깨물어주고 싶다." 미친 개처럼?

소설의 화자는 루게릭병에 걸린 친구를 만나보기 위해 "개집하고 가죽공장 사이에" 있는 교외의 외딴집을 찾아간다. 그러는 중에 생가죽을 말려서("말이 가죽이지 '살'이라고 불러야 더 적당했다") 가죽을 만드는 인부로부터 그 공정에 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는 "70도 훨씬 넘긴 노인"처럼 보이는 친구를 만난다. 하지만 "언젠가 너에게 그냥 죽으라고 했던 그 말을 철회하러 왔다는 말을, 널 보고 난 후에 자살하려고 했다는 말을 나는 꺼내지 못했다." 며칠 뒤에는 나는 10여년 동안 아내를 간호하던 현임의 남편이 중풍으로 쓰러졌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는다.

"나는 삶의 밑바닥의 정체란 도대체 어떤 것이냐고 소리치는 대신에 깜짝 놀라 숨을 삼켰다. 비명 같은 이상한 소리로 미친 듯이 악을 쓰면서 남편을 불러대었을 현임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침내 더 이상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신과 밀고 당기기를 할 수 없을 선에 이르렀을 때, 인간의 긍지를 잃지 않고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갑자기 어둠 속으로 들어선 것 같이 느껴졌다.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 속에는 더 무시무시한 경우들이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어느 순간이 되면 죽음보다도 삶을 택할 수도 있다는 것이 그것이었다."

며칠 후, '나'는 백화점 슈퍼에 들렀다가 상처난 가죽으로 만든 두꺼운 가죽 숄더백을 보고 사든다. "집으로 돌아오자 마자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한 다음 거울 앞에 앉아 그 백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나는 깊이 숨을 쉬고 심장 박동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그 백의 상처 위에 손을 얹었다... 나는 그 백의 상처에서 받은 느낌이 그처럼 뚜렷하는 게 너무도 이상했다. 이해할 수 없는 눈물이 내 볼을 적셨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백 위에 떨어진 내 눈물이 가죽을 적셔서 백의 상처를 점점 더 진하고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러한 에피파니의 순간이 소설의 마지막 대목이다. 모처럼 읽은 '진한' 소설이지만, 몇 가지 불만이 없지는 않다. '웃으면서 죽는 법'이란 제목이 일단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가죽' 정도가 가장 적합해 보인다. 상징성도 풍부하고. 그랬다면, 이 소설을 이야기하면서 내가 자살에 관한 무용담들을 떠올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흠들을 굳이 들추어 무엇하겠는가?

'세상은 동물원'이란 비유가 있다. 이젠 그다지 새롭게 들리지 않는다. '세상은 가죽공장', 이건 어떤가? 한동안은 버틸 만하지 않을까?

06. 0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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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예정작인 영화 <괴물>에 대해서는 이미 너무 많은 예고편 기사와 리뷰들이 나와 있다. 따로 모아두고 아직 읽지는 않고 있는데, 이번주 ('씨네21'이 아니라) '한겨레21'에서도 관련기사를 싣고 있기에 못 이기는 척 하나만 읽어보기로 한다. 제목은 '한강의 괴물, 한국의 자본주의!'인데, 말하자면, '괴물'을 한국자본주의의 메타포로 읽고 싶다는 것. 필자인 신윤동욱 기자가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치열한 고투를 벌이며 생존해온 우리네 가족에게 바치는 영화 <괴물>, 그 다리의 기형성과 흉측하게 벌어진 입은 천민자본주의를 은유하는가?"(기사는 일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다.)

한겨레21(06. 07. 13) 한국에서 가족은 혈연 공동체일 뿐 아니라 사회적 안전망이다. 한국에서 개인에게 닥치는 위기는 공권력의 보호, 사회적 안전망을 통하기보다는 사적인 안전망을 통해 관리되거나 극복돼왔다. 예컨대 ‘한국은 어떻게 IMF 경제위기를 극복했는가’라는 분석에서 ‘가족의 부조가 부실한 사회적 안전망을 메웠다’는 지적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 


△ 강두는 현서의 손을 잡고 뛰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다른 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괴물>은 그렇게 ‘한심한’ 강두가 괴물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다.

-그래서 한국에서 위기를 극복하는 영웅이 한 명의 슈퍼 히어로나 지역의 시민들이 아니라 소시민 가족으로 형상화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봉준호 감독의 <괴물>은 한강변에 출현한 괴물에게 아이를 빼앗긴 일가족의 분투를 담고 있다. 한강변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박강두(송강호)에게 딸 현서(고아성)는 보물 같은 존재다. 어느 날 한강변에 출현한 괴물에게 현서가 잡혀가자 아빠 강두, 할아버지 희봉(변희봉), 삼촌 남일(박해일), 고모 남주(배두나)는 현서를 찾아나선다. 봉준호 감독은 <괴물>에 대해 “영화의 진정한 주인공은 괴물과 맞서 싸운 박강두네 가족이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한 채, 처절하고 외로운 사투를 벌여야만 했던 우리의 가족들…. 사실 이 영화는 고스란히 그들에게 바치는 영화다”라고 썼다. 감독의 헌사는 영화에 대한 직접적인 해설로 들린다.

괴수영화의 공식을 거스르다

-한국 자본주의에 대한 첫 번째 은유를 꼽자면 한강이 아닐까. 한국의 경제 성장은 ‘한강의 기적’으로 은유된다. 집단적인 성공을 뜻하는 한강의 기적을 뒤집어 개인의 역사에 대입하면 ‘한강의 괴물’이 될지도 모른다. 한국인은 어느 날 느닷없이 등장한 자본주의라는 괴물에 맞서 치열한 고투를 벌이며 생존해왔다. 가족은 유일하게 기댈 언덕이었고 ‘한 배를 탄 운명’이었지만, 가족은 또한 한강에 뜬 조각배 같은 불안한 운명 공동체였다. 급변하는 사회의 파고가 소시민 가정을 덮치듯, 한강의 괴물은 매점집의 아이를 빼앗아간다.

-한국 현대사가 그러했듯, 위기에 처한 가족은 공권력에 구조를 요청하지만 공권력은 가족을 외면하고 오히려 사지로 몰아넣는다. <괴물>에서는 죽은 줄 알았던 현서에게 전화가 오지만 경찰은 현서의 생존을 믿지 않는다. 바이러스 감염자이자 정신질환자로 감금된 강두는 “내 말 좀 끊지 마. 내 말도 말인데”라고 항변하지만, 공허한 반향조차 들리지 않는다. 이제 강두 가족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은 한국 현대사에서 그러해왔듯이, 가족만의 자구책을 강구하는 것이다.

-어쩌면 한강의 괴물은 한국 자본주의를 은유한다. 한국 자본주의의 배후에 미국이 있었듯, 괴물의 탄생 배후에도 미국 아니 미군이 있다. <괴물>은 2000년 미군이 한강에 독극물 포름알데히드를 무단 방류한 맥팔렌드 사건을 유머러스하게 ‘재현’하면서 시작한다. 2002년 미군이 뿌린 불행의 씨앗은 2006년 한강변에 등장한 괴물이 인명을 살상하는 참사로 이어진다. 미군이 만든 괴물은 미국이 배후인 한국의 자본주의와 공통점을 지녔다.

-괴물은 한국의 자본처럼 너무 크지도 완벽하게 유능하지도 않다. 한강의 경사 면에서 미끄러져 구르는 괴물을 보고 있지만, 마치 좌충우돌하는 한국 자본주의를 보는 듯하다. 또 제대로 자라지 못한 다리의 기형성과 다섯 갈래로 흉측하게 벌어진 입의 탐욕은 천민 자본주의의 기형성이나 폭력성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괴물>은 괴수영화의 공식을 따르지 않는다. 봉준호 감독은 영화 초반부에 괴물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할리우드 괴수영화의 공식을 거스른다. 괴물의 때이른 등장은 괴물의 정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괴물과 맞서 싸우는 가족의 고투가 영화의 중심이라는 선언이다. 한국적 괴수영화인 <괴물>에는 보통의 괴수영화처럼 도시 전체를 짓밟는 거대한 괴물도 없다. 거대한 괴물과 맞서 싸우는 위대한 영웅도 없다.


△ 봉준호 감독(맨 왼쪽)은 한강에 사는 괴물에 대한 영화를 19년 전에 떠올리고 3년 동안 만들어왔다. 언론 시사회에서 인사하는 <괴물>의 배우와 제작진들. 

-영웅 대신 가족이 있다. 가족 중에 유일하게 4년제 대학을 나왔지만 백수인 삼촌 남일은 현서를 찾아낼 단서를 찾아낸다. 집중력이 좋지만 결단력이 부족한 양궁 선수인 고모 남주도 결정적 순간에 자신의 능력을 발휘한다. 틈만 나면 조는 답답한 인간인 강두도 순박한 부성애로 딸을 찾는 일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강두네 가족은 개개인으로는 무능력하거나 결점투성이 인간이지만, 그들이 힘을 합치면 가까스로 영웅의 능력에 다가간다. 한국의 가족들은 그렇게 가까스로 위기를 돌파해왔다.

남성의 화염병, 여성의 활…

-<괴물>의 인물도 한국적이다. 세상에 대한 불평은 많지만, 가족에 대한 책임은 부족한 ‘고급 백수’인 남일은 한국 사회운동이 낳은 어떤 인간형을 떠올리게 한다. 여자 양궁 선수인 고모 남주는 야무진 한국 여성상을 대표한다. 남성은 화염병을 던지고, 여성은 활을 쏜다. 공간적 연관성이 전혀 없지만, 이어놓고 보면 한국의 현대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엮이기도 한다. 또 이동전화 선진국답게 이동전화가 사건 해결에 결정적 구실을 한다. 하지만 이런 비유는 때때로 너무 ‘노골적’으로 읽힌다. 비유가 직접적인 만큼 인물의 행동이 예측 가능해 미스터리의 매력이 부족하다. 그리고 이야기의 구조도 진폭이 적어서 대중영화로서 흡입력이 떨어진다는 아쉬움도 남는다.

-봉준호 감독은 콘크리트의 감독으로 불릴 만하다. <괴물>의 카메라에 잡힌 한강 다리와 하수구의 콘크리트는 도시의 삭막한 내면을 드러낸다. <살인의 추억>에서 결정적 구실을 했던 터널의 이미지는 <괴물>에서 한강의 하수구로 이어진다. <괴물>에서 하수구는 어둠으로 빨려들어 가는 미로의 이미지를 통해 저마다의 미궁을 헤쳐온 한국인의 내면을 드러낸다.

-물론 <괴물>에는 봉준호식 유머도 심심찮게 심어져 있고, 한두 마디 금언도 들어 있다. 강두의 아버지 희봉의 한마디, “새끼 잃은 부모 속냄새를 맡아본 적 있어? 부모 속이 한 번 썩어 문드러지면 그 냄새가 십 리 밖까지 진동하는 거여”는 기억될 만한 명대사다. 장례식장에서 가족들이 슬픔을 못 이겨 몸부림치는 장면을 부감으로 잡아서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보이게 하는 카메라의 유머도 빛난다. 변희봉, 송강호, 배두나의 연기가 기대대로 빼어나다면, 박해일의 연기는 기대보다 훌륭하다. 박해일은 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철없는 남자의 역할을 능청스럽게 소화해냈다. 현서 역을 맡은 10대 배우 고아성의 연기도 기대 이상이다. 하반기 한국 영화 최대의 기대작으로 꼽히는 <괴물>은 7월27일 개봉한다.

06. 07. 18.

P.S. '필름2.0'의 기사 하나도 스크랩 해놓는다. 타이틀은 "봉준호의 압도적 세계: <괴물>이 권력을 보는 시선"이며 필자는 이형석 기자(해럴드경제)이다. 영화를 보고 읽어봐야겠다...

필름2.0(06. 07. 18) <괴물>의 핵심은 (국가) 권력에 대한 태도와 시선이다. <괴물>이 국가주의에 대한 절망과 민중의 자구 혹은 자위에 대한 어떤 믿음을 드러낸다고 볼 때 이 영화의 권력에 대한 비판적 언술은 민족주의적 반미의 차원을 넘어 보편적 의미로 확장된다.

-그의 첫 단편 제목을 빌자면, 봉준호의 영화는 '지리멸렬'한 것들의 성스러움과 성스러운 것들의 지리멸렬함을 증명하는 데 바쳐진다. 영화적 흥분 또한 그 역설에서 발생한다. 성의(聖衣) 혹은 법복으로 위장했던 존재들이 실상은 하잘 것 없고 비루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음이 폭로되는 순간 관객은 웃거나 분노하거나 속시원해한다. 반대로 열등하고 우스꽝스러웠던 것들이 숭고한 의도와 행위를 보여줄 때 관객은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며 감동받는다. 이것은 봉준호의 영화가 매우 사려 깊고 지적인 성찰을 담은 빼어난 정치, 사회적 텍스트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왜 놀라운 정서적 파괴력을 갖는 상업 영화인가에 대한 해답이기도 하다.

-<괴물>의 초반부에 제시되는 박강두의 모습은 모자라기 때문에 우스꽝스럽다. 하지만 그가 괴물에 잡혀간 딸이 살아 있다고 하소연하고 국가가 이를 외면할 때 관객은 더 이상 웃지 않는다. 모자란 인간의 가슴 속에 있는 것이 실상은 진실과 진심이고, 과잉된 권력체계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이 거짓과 왜곡이라는 사실을 두 눈으로 낱낱이 확인한 관객의 가슴엔 웃음 대신 안타까움과 답답증, 분노가 들어선다. 딸을 구하기 위한 강두와 그의 일가족들은 괴물과 악전고투를 벌여갈수록 단련되고 유능해지며 숭고해진다. 박강두의 아버지와 동생 남일, 누이동생 남주, 딸 현서 등은 대체로 희극적으로 등장했다 비장하게 퇴장한다. 반면 군병력 출동으로 거창하게 등장한 국가권력은 갈수록 시시해지고 무력해지며 우스워진다. 첫 단편 때부터 보여준 봉준호 영화의 역설은 규모가 거대해진 세 번째 장편영화에 와서 한층 명징하고 풍부하다.

-그러므로 <살인의 추억>에 이어 이 작품에서 여전히 핵심적인 것은 (국가) 권력에 대한 태도와 시선이다. 용산 주한미군기지에서 무단 배출한 포름알데히드에 의해 한강에 돌연변이 괴생물체가 생겼다는 것이나 괴생물체로 인한 바이러스 퇴치를 위해 미국이 개입한다는 등의 설정은 노골적으로 미국을 겨냥한 듯 보인다. 자칫 이 영화를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반미적인 텍스트로 오독할 여지다. 특히 먼저 개봉하는 강우석 감독의 매우 국수주의적이며 반일선동적인 <한반도>와 나란히 놓고 ‘반일’과 ‘반미’라는 먹기 편한 사냥감을 포획하려는 일부 언론과 평단의 의지를 비껴가기 어려운 듯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가 국가주의에 대한 절망과 민중의 자구(自求) 혹은 자위(自衛)에 대한 어떤 믿음을 드러낸다고 볼 때 이 영화에 내포된 권력에 대한 비판적 언술은 ‘민족주의적 반미’의 차원을 넘어 보편적인 의미로 확장된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권력의 속성 중 하나는 ‘과시’다. 괴생물체가 출현해 한바탕 난리법석을 겪은 뒤 거대한 군병력이 한강변에 배치될 때 권력은 힘과 규모를 과시한다. 주한미군이 ‘(괴바이러스의 정체에 대해) 본국의 승인 없이는 알릴 수 없다’고 발언할 때나 ‘휴대전화 번호추적은 아무에게나 허용되는 것이 아니’라고 공무집행자가 말할 때 권력이 노리는 것은 ‘당신들의 배후엔 당신들이 알 수도 없고 접근할 수도 없는 모종의 복잡한 시스템이 작동하고 있다’를 암시하는, 즉 ‘과시의 진술’이다. 행정절차 혹은 경영기술, 과학기술의 복잡성과 전문성을 물신화하는 것은 자본주의와 관료제의 고유한 특성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권력은 늘 앎의 대상을 규정하면서부터 비로소 권력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미군은 괴생물체에 침묵하는 대신 ‘괴바이러스’를 언급함으로써 앎의 대상을 정의한다. 다시 인용하자면 ‘본국의 승인 없이는 알릴 수 없다’는 말은 앎의 대상과 함께 주체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권력은 대상을 창조 혹은 정의하고 분류하고 체계화하지만 문제는 앎의 대상은 괄호 쳐지고 출현은 끊임없이 지연되며 분류된 항들은 모두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이다. 실상을 말하자면 그곳은 비어 있기 때문에 권력은 권력일 수 있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화학공장’을 향한 폭격과 같고, ‘없는 괴바이러스’의 치료 같은 것이다(물론 ‘없는 괴바이러스’라는 설정은 미국의 이라크전을 연상시킨다).

-끊임없이 유발되는 공포는 마이클 무어의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도 잘 지적됐듯 권력이 스스로를 작동시키고 유지시키는 일상적 테크닉이다. 박강두가 알아들을 수 없도록 영어로 이야기하는(이는 마치 의사가 환자 앞에서 처방전을 마구 흘려 쓴 필기체 영어로 쓴다든가 굳이 영어로 된 의학전문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얻는 권위를 연상시킨다) 주한미군 스탭에게서 ‘노 바이러스’라는 말을 캐치해내고 서슴없이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이 통쾌한 것은 그 때문이다. 물신화된 지식과 전문성이라는 관료제의 은밀한 권위는 순식간에 조롱당하고, 권력이 정의하고 분류시킨 항목들이 실상은 텅 비어 있다는 사실이 폭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한미군이 한강에 독극물을 방류한 2000년 맥팔랜드 사건과 베트남전에서 미군이 살포한 고엽제의 일종인 에이전트 오렌지(영화에서는 괴바이러스 치료제인 ‘에이전트 옐로우’로 등장한다), 그리고 이라크전에 대한 명백한 참고와 인용에도 불구하고 <괴물>은 민족자주의 시각에서 반미적 텍스트로 읽을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오히려 미국을 빌어 권력에 대한 보편적 비판을 수행하고 풍자하는 텍스트에 가깝다.

-결국 권력은 가공의 적을 만들어 내거나 잘못된 타깃을 향함으로써 늘 오작동 하지만 오작동 그 자체가 개인과 대중을 통제하는 가장 효율적이며 일상적이고 정상적인 방식일 텐데, 그렇게 본다면 극 초반부에 등장하는 한 한강 투신자살자의 유언(“끝까지 둔해빠진 새끼들”)은 (국가) 권력을 향한 조소처럼 들린다. 반면 좀 과장하자면 얼빠지게 보였던 박강두 일가족은 오히려 직관적인 영리함을 가진 듯 보인다. 이는 마치 슬라보예 지젝의 논의에서 상징계의 빈 구멍 속으로 실재계가 침입함으로써 이데올로기를 가로질러 새로운 주체가 형성되는 순간을 떠올리게 한다.

-봉준호의 세계에서의 역설과 대비가, <괴물>에서 한편으로는 ‘싸는 것’과 ‘먹(이)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도 흥미롭다. <살인의 추억>에서 박두만(송강호)이 무심결에 내뱉었던 "밥은 먹고 다니냐"가 화두라도 된 것처럼 이 영화에는 ‘먹(이)는 행위’가 유난히 많이 등장한다. 봉준호 감독의 설명에 따르면 권력 혹은 시스템이 포름알데히드를 방류하는 것으로부터 후반에 에이전트 옐로우를 살포하는 것까지 싸는 것, 곧 배설의 악순환 고리로 이뤄져 있다면, 박강두와 딸이 그 어디쯤 놓인 개인들의 고리는 먹(이)는 것, 곧 보호(양육, care)자가 되는 동시에 피보호자가 되는 선순환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다른 말로 반복하자면 이 영화는 국가주의에 대한 절망과 민중의 자구 혹은 자위에 대한 낙관적 믿음에 바탕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관객들의 시선은 초반부에 서슴없이 모습을 드러낸 괴물에 일단 꽂히지만 오히려 딸의 입장에서 볼 때 아버지-아버지의 아버지-삼촌-고모를 거쳐 아버지로 끝맺는 개인들의 개별적 전쟁들과 먹(이)는 고리로 형성된 가족 모두의 분투야말로 이 영화의 드라마가 가진 압도적 감동과 힘의 근원일 것이다. 끝으로 수평적인 움직임이 주는 활력과 수직의 비극성을 교차시켜 한강에 숨을 불어넣은 카메라 워크의 탁월함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봉준호는 스필버그적 세계 안에서 비스필버그적인, 굉장한 세계를 발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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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인지라 월요일이란 느낌을 가질 수가 없는데, 밀린 일들이야 어찌됐던 그런 휴일을 좀 느끼게 해주는 칼럼이 있어서 옮겨온다. 이미 한국문학사 속에 편입된 소설가 김연수가 오늘자 한겨레에 기고한 것이다. 몇 가지 이미지를 보충해놓는다.    

한겨레(06. 07. 17) 칠순 소피아 로렌의 누드사진보다 세월 녹아든 오드리 헵번이 아름답다

-거리의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 24쪽 분량의 단편소설이 있다. 그게 무슨 내용인지 짐작하려면 ‘구르는 돌처럼’(Like a Rolling Stone)이란 노래를 들어봐야 한다. 그 노래를 지은 밥 딜런이 자기가 쓴 소설에서 가사를 따왔다니까. 살아오면서 여러 차례 이 노래를 들었지만, 가장 인상적으로 들은 것은 1993년 동숭아트홀에서 영화 <백 비트>를 볼 때였다. 비틀스의 초기 역사를 다룬 영화인데, 독일 함부르크를 향해 떠나는 배 안에서 고작 스무 살 안팎이었던 비틀스 멤버들이 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온다. 나도 한번 구르는 돌처럼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물씬 들게 만드는 장면이었다.

-‘구르는 돌처럼’이 입구에서 삶을 바라보는 젊은이의 노래라면 비틀스의 ‘나 살아가는 동안’(In My Life)은 뒤돌아보면서 부르는 노래다. 당시 <백 비트>의 영화 팸플릿에는 주인공인 스튜어트 셔트클리프를 추억하기 위해 존 레넌이 만든 노래라고 적혀 있었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비틀스의 초기 멤버였던 스튜어트는 함부르크에서 만난 사진작가 아스트리드와 격렬한 사랑을 나누다가 21살의 나이로 숨진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감안해서 “어떤 사람들은 죽었고, 어떤 사람들은 살아남았지만, 나 살아가는 동안 그들 모두를 사랑했네”라는 가사를 듣고 있노라면 마음이 아련해진다.

-그렇긴 해도 존 레넌은 이 노래를 너무 빨리 불렀다. 지금쯤 이 노래를 불렀다면 좋았을 텐데. 이런 나의 아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난해 오지 오스본이 이 노래를 불렀다. 오지 오즈번도 이제 환갑이 2년 앞이다. 한때 자타가 공인한 악마의 목소리로 느릿느릿 ‘나 살아가는 동안’을 부르고 있는 오지 오즈번을 보노라면, 인생이란 살아볼 만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거지에게 적선하겠지만, 내일은 그 거지가 될 수도 있다던 ‘구르는 돌처럼’의 가사처럼 어제는 악마의 목소리, 오늘은 늙은이의 푸념. 이런 인생이 어찌 멋지지 않을까.

-오드리 헵번(1929-1993)의 탄생 70돌을 기념해서 만든 책 <오드리 헵번>에 실린 사진들을 하나하나 보고 있으면 살아가는 동안 한 인간의 모습이 얼마나 다양하게 변해가는지 깜짝 놀라게 된다. 오드리 헵번은 정말 아름답다. 젊은 시절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지만, 나이가 들어서도 그 아름다움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니, 나이가 들면서 더욱 아름다워지는 것 같다. 그건 보톡스의 힘도, 성형수술의 힘도 아니다. 나이 든 오드리 헵번의 얼굴은 자신을 거쳐 간 세월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사람의 아름다움이 남아 있다. 그런 얼굴로 오드리 헵번은 기아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아프리카로 갔다.

 

 

 

 

-그에 비하면 72살의 나이로 누드사진을 찍겠다고 나서 전 세계의 할머니들을 깜짝 놀라게 만든 소피아 로렌(1934- )의 얼굴은 좀 징그럽다. 변하지 않는 미모라는 건 정말 끔찍하다. 변하지 않는 인생처럼. 세상을 어느 정도 살아봤다면 생각이 바뀌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그 생각이 어떻게 바뀌느냐는 점이다. ‘구르는 돌처럼’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하겠지만, 시간이 흐르면 ‘나 살아가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따져볼 수밖에 없다. 인생에서 소중한 것들이 무엇인지 깨닫게 되는 순간도 바로 그 때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바로 그 순간 발휘된다. 젊은이들 못잖은 탱탱한 피부와 날씬한 몸매를 유지할 때가 아니라.

-늘씬한 몸매가 보고 싶다면 젊음 여자 사진이 있는 달력을 사서 걸어놓으면 될 일이지, 굳이 소피아 로렌의 달력을 살 필요가 있을까. “내가 나이 들어 머리 다 빠지는 먼 훗날에도 밸런타인 카드와 와인 보내줄 거지?”(내가 64살이 되면)라고 폴 매카트니가 노래했다. 소피아 로렌에게도 와인이나 한 병 보내줘야겠다. 밸런타인 카드는 빼고.

06. 07. 17.

 

 

 

 

P.S. '나 살아가는 동안'의 가사를 옮겨놓는다.

 

 

 

 

 

Beatles - In My Life

There are places I'll remember
All my life, though some have changed
Some forever, not for better
Some have gone and some remain
All this places have their moments
With lovers and friends I still can recall
Some are dead and some are living
In my life, I've loved them all

But of all these friends and lovers
There is no one compares with you
And these memories lose their meaning
When I think of love as something new
Though I know I'll never lose affection
For people and things that went before
I know I'll often stop and think about them
In my life, I love you more

Though I know I'll never lose affection
For people and things that went before
I know I'll often stop and think about them
In my life, I love you more
In my life-- I love you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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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6-07-17 23:33   좋아요 0 | URL
가사를 보고 있으니 노래를 따라하게 되네요. ㅎㅎ

로쟈 2006-07-18 00:17   좋아요 0 | URL
다른 곡들에 비해 특별히 더 좋아했던 곡은 아니지만 저도 하도 듣던 곡이라 귓가에 맴돌긴 합니다.^^

푸른괭이 2006-07-18 03:29   좋아요 0 | URL
김연수는 소설도 잘 쓰지만 에세이도 참 잘 쓰는 듯해요. 여러 모로 공감.

로쟈 2006-07-18 07:42   좋아요 0 | URL
그게 같은 거라고 봅니다. 소설이나 에세이나 결국엔 사유와 성찰의 깊이 + 문장력이니까요...

stella.K 2006-07-18 10:43   좋아요 0 | URL
김연수가 대세로군요. 오드리 헵번 좋아해요. 소피아 로렌 좀 심하군요. 팔뚝보니 나이는 속일 수 없는가 봅니다. 늙는 것이 추한 것마는 아닐텐데 외모지상주의가 걱정이군요. 물론 걱정해서 될 일은 아니지만 이놈의 사회분위기 좀 바뀌었으면 합니다.

퍼그 2006-07-19 00:43   좋아요 0 | URL
이 노래 가사가 이런 내용이었네요! (수십 번도 더 들었던 노래인데;;) 지나간 것들을 더 사랑한다니, 왠지 존을 더 사랑하고 싶어지는군요.
 

최근에 출간된 <원본 백석 시집>(깊은샘, 2006) 관련 인터뷰 기사가 눈에 띄기에 옮겨온다. 이숭원 교수의 노고가 담겨 있는 책인데, 백석의 연구자들뿐만 아니라 애독자들에게도 반가운 소식임에 틀림없다. 1912년생인 백석은 지난 1963년쯤은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얼마전에 1995년까지 생존했던 것으로 확인돼 '충격'과 안타까움을 던져준 바 있다(그는 '동시대' 시인이었던 것이다!). 아무려나 그의 시를 읽는 건 그의 생애만큼이나 아련하다.

교수신문(06. 07. 17) 변형 없이 복원한 원형…“체험의 진실이 주는 감동”

-이숭원 서울여대 교수(51세, 국문학·사진)가 3년 전 <원본 정지용 시집>에 이어 지난 6월 <원본 백석 시집>을 펴냈다. 이 교수가 원본 시집을 연이어 두 차례 낸 것은 “석·박사 재학생들이 자료를 찾아다니는 번거로움을 덜고, 이후 뜻풀이를 하는 데 들이는 수고로움을 덜어주기 위한 기본 텍스트를 제공함으로써 보다 쉽게 심층 연구로 갈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현대어로 표기할 수 없는 글자들, 행갈이가 애매모호한 부분들을 임의로 바꾸지 않고 백석이 쓴 그대로 전달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독자들이 ‘연구자 맘대로’ 재해석되었거나 변형되지 않은 시의 ‘원형’을 즐길 수 있는 것.

 

 

 

 

-그러나 <원본 백석 시집>을 내는 일은 ‘정지용’ 때보다 힘들었다. 시의 대부분이 2권 시집에 수록돼 있는 정지용과는 달리 백석의 경우 그의 시집 <사슴>에 수록된 시는 33편이지만 그 외 신문과 잡지 등에 실린 시들이 70편을 넘는다. 따라서 여러 신문과 잡지에 흩어져 있는 원문들을 일일이 찾아다녀야 한 것. 이 작업은 제자인 이지나 박사가 했는데, 이렇게 자료를 모으는 데만 6개월이 넘게 소요됐다.

-원본 인쇄의 경우 편집도 힘들다. 시가 그림과 같이 게재된 경우, 그림이 글자를 잡아 먹어버려 그림을 지우고, 다른 시에 나오는 같은 글자들을 오려서 붙여 넣는 등의 작업을 했다. 매체가 다양해 너무 작거나 크게 인쇄되어 있는 활자의 경우 확대 및 축소를 통해 평균치로 만들어 비슷한 느낌으로 읽을 수 있도록 했다. 출판사의 편집자가 겪는 고생이긴 하지만 그만큼 ‘원본 시집 작업’이 어려움을 보여준다.

-이 교수는 백석 시의 백미로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을 꼽는다. 이 시에는 “체험의 진실이 주는 감동”이 있다고 한다(*'흰 바람벽이 있어'와 함께 많은 독자들이 백석의 절창으로 꼽는 시이다). 몰락한 외톨이가 된 처지에서 과거를 되돌아보고 현재의 쓸쓸함과 절망적 상황을 반추하면서 힘겨운 세상살이의 아픔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이 담겨있는데 “백석 개인의 경험인 것 같다”며 진실해서 감동을 준다는 것. 이런 시들을 1940년대, 50년년에 찍힌 인쇄자를 통해 옛 냄새를 맡으며 감상할 수 있다.

-원전 백석 시집에는 이 교수만의 해석도 있다. 시 ‘쓸쓸한 길’의 ‘거적장사’는 ‘거적을 팔러 다니는 장사’가 아니라 ‘죽은 사람을 거적으로 둘러메고 지내는 장사’로 해석된다. 이렇게 해석하면 시에 나오는 산가마귀의 울음과 서러운 땅버들의 소복 차림이 쉽게 이해가 간다. 이런 식의 다년간의 연구가 바탕이 된 주석들로 인해 백석 시의 원형을 느낌과 동시에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기초 자료가 마련된 것.

-이 교수는 이번에 <백석 시의 심층적 탐구>라는 연구서와 원본 시집을 한꺼번에 냈다. 두 권을 한 번에 냄에 따라 주변에서 “와”하는 탄성을 보내는 반면, 내심 아쉬움도 있다. <정지용 원본 시집>은 그 이전에 <정지용 시의 심층적 탐구>를 먼저 내고 이후 학계의 다양한 의견을 반영해 보다 세밀하게 주석을 달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 과정이 생략된 것. 그래도 이 교수는 “1차적인 텍스트의 세밀한 분석과 이해보다는, 라깡이나 데리다 같은 외국 이론부터 끌어와 적용하는 요즘 연구자들이 텍스트의 정치한 해석이 중요함을 깨닫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표했다. 

 

 

 

 

-“이번 작업을 통해 정지용과 백석을 졸업한 느낌이다”라고 말한 이 교수는 이제 김소월부터 정지용 백석까지, 정말 좋은 시, 계속해서 읽힐 만한 문학적 감동을 주는 시들을 모아 왜 좋은 지 뭐가 좋은 지를 해설하는 해설서를 내기 위한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백석도 정지용도 모든 시가 다 좋지는 않다”며 “건질 것은 7~8편 아니냐”라고 말한 황동규 시인의 말이 발판이 됐다. 이 교수의 작업을 통해 숨겨진 좋은 시를 맛보는 한편, 너무 익숙해 그 맛과 멋을 잊었던 시들의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길 기대한다.(박수진 기자)

06. 0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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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림 2006-07-17 12:04   좋아요 0 | URL
글 잘 읽고 갑니다. ^^

2008-03-21 1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최근에 문학평론가 김수이 교수의 세번째 평론집이 출간됐다. 두께에 비해 비싼 책이어서 서점에서 들었다가 놓은 적이 있는데(구입은 좀더 짬을 봐야겠다), 중앙일보의 '손민호 기자의 문학터치'란에서 다루고 있기에 겸사겸사 옮겨온다. 김교수는 시 전문 비평가로서 가장 부지런하다는 평을 듣고 있고, 지난 계절부터는 <문예중앙>의 편집위원으로 가세했다(중앙일보에서 거들 만하군). 아무튼 같은 세대 비평가가 활발한 활동으로 주목받는다는 게 기분이 나쁘진 않다. 같이 늙어갈 터이지만 대가급 비평가들이 되어주길 기대한다.

중앙일보(06. 07. 15) 시를 향한 가없는 애정

-글을 보면 사람을 알 수 있다. 글을 읽으면 글쓴이의 면모가 보인다. 가령 누구를 좋아하고 누구하곤 사이가 안 좋고, 무엇을 지향하고 무엇에 대해선 경기를 일으키는 것쯤 이내 알아챌 수 있다. 비평가일수록 더 하다. 비평이란 게 참견하고 가타부타 따지는 일이라서 그렇다. 가치가 배제된 비평은 세상에 없다. 해설에도 가치는 개입한다.

 

 

 



-그러나 꼭 그런 건 아닌가 보다. 예외가 있다. 비평가 김수이(37)다. 말하자면 그는, 좀체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평론가다. 최근 출간된 세 번째 비평집 <서정은 진화한다>(창비)를 보자. 젊은 비평가이니만큼 김근.황병승.김언 등 젊은 시인에 대한 관심은 쉬이 짐작했던 터다. 한데 정현종.최하림.정호승 등 시단의 중진을 정성껏 호명하고선 김혜순.김언희.김선우 등 여성시 계보를 죽 훑는다. 그러더니 불쑥 '지게꾼 시인' 김신용을 칭찬한다. 그렇다고 민중시 계열을 옹호하는 것도 아니다. 과거 민중시 계열이 대거 몰린 요즘의 생태시를 그는 혹독하게 비판한다.

-그를 좀더 알아보기로 했다. 석사논문 주제가 김수영과 김춘수였다. 흥미로운 조합이다. 시대와 문학의 거리를 묻는 듯 보였다. 1997년 등단할 땐 기형도와 남진우를 파헤쳤다. 독한 죽음의 냄새가 풍기는 시인들이다. 80년대라는 시대적 고민도 읽혔다. 그러나 박사학위 주제는 서정주였다. 미당의 미학, 욕망의 변화 양상을 분석했다. '도대체 정체가 뭐냐'고 물을 만한 시적 편력이다(*머 그래봐야 다 시인들(!)이지만, 다방면으로 두루 훑었다는 얘기는 되겠다. 즉, 기본기가 튼튼하다는 것).

-오히려 김수이의 정체는 바로 여기에 있다. 한국 현대시를 다 끌어안으려는 것이다. 그래서 계파와 경향, 진영과 계보 따위는 상관없는 것이다. 진실한 문학이라면, 온몸으로 앓은 시라면 모두 보듬으려는 것이다. 하여 사방에 대고 잔소리만 해댄다는 소리도 듣는 것이다. 만인의 편이라는 건, 만인이 적이라는 얘기도 된다.

-평론집 제목에서 '진화'는 두 가지 의미다. 진화(進化)와 진화(鎭火)를 동시에 뜻한다. 내일의 서정으로 나아가고 어제의 서정은 꺼트려야 진정한 서정이란 의미다. 부단히 움직이라는 다그침으로도 읽힌다. 그러나 이 단호한 몸가짐에서 시를 향한 가없는 애정을 읽는다.



-김수이에 따르면, 시인들은 '그리고'나 '그러므로'가 아닌, '그러나'와 '그럼에도'에서 시작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와 '그럼에도'에 존재해야 시다. 설명되거나 부연되어선 시가 아니다. 그래서 다시 김수이에 따르면, 시는 요약되지 않는다. 우리의 삶이 요약될 수 없는 것처럼. 아니 요약되어선 아니 되는 것처럼.

06. 07. 16.

P.S. 저자를 평론가로 '호명'해준 문학비평가 황종연 교수는 추천사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현재 평단에는 김수이만큼 부지런하게 시를 읽고 정확하게 시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는 평론가도 드물다. 그에게는 국내의 어떤 유수한 시인의 언어도 낯설지 않으며 어떤 새로운 유행도 당혹스럽지 않은 듯하다. 김수이의 평론을 읽어보면 작품의 유형이 아무리 달라도 비슷한 높이에서 검토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대상 작품이나 시인에게 잠복된 의식의 행로가 정연하게 검출되는 한편, 동시대 시의 역동적인 구도 속에 수려하게 배치되는 광경을 접하게 된다." 하니, 동시대 시의 지리부도 같은 걸 그에게서 기대할 수 있을 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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