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초 출간한 소설집 <제비를 기르다>(창비, 2007)로 호평을 받고 있는 작가 윤대녕의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 작가의 근황과 함께 새로 구상중인 작품 얘기도 살짝 엿들을 수 있다. 인터뷰 내용 중 "작가는 독자에게 동정을 받아서는 안 되는 존재에요.”라는 말에 전폭적으로 동감한다(간혹 껌파는 작가들이 없지 않아서이다). 적어도 작가라면 독자보다는 반걸음쯤 앞서 가야 하지 않을까. 그만한 줏대와 고집과 여유, 그런 걸 동시대 작가들에게서 더 많이 보고 싶다. 요컨대, 작가들이여 자부심을 기르라...  

북데일리(07. 02. 15) [인터뷰] 소설집 ‘제비를 기르다’ 펴낸 작가 윤대녕

“작가가 독자에게 끌려 다녀서는 안 돼요. 독자들이 요구하는 대로 쓴 작품을 문학에 포함시키기는 힘들죠. 문학은 항상 뭔가를 견인해야 해요. 좋은 소설은 독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합니다.”

3년 만에 신작 소설집 <제비를 기르다>(창비. 2007)를 발표한 작가 윤대녕(45). 그가 문학을 하는 작가의 태도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드러냈다. 최근 일산에 위치한 작업실 근처에서 만난 그는 “문체나 구성 면에서 기본적으로 품격을 유지하는 작품을 써야한다”고 강조했다.

타인보다는 스스로를 향한 조언이자 격려다. 윤대녕은 데뷔작 <은어낚시통신>(문학동네. 1994)으로 우리 문단에 ‘시원으로의 회귀’라는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독자의 뇌리에 박힌 강렬한 첫 인상은 이내 그를 옭아매는 족쇄가 되었다. “나에 대한 강박관념이나 오해가 너무 오래가는 것 같아요. 데뷔작이 나오고 지금까지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 처음의 이미지가 아직도 새 소설에 적용되고 있어요. 실제로 중간에 발표한 책들은 이전과 비슷할 거라고 짐작하곤 안 읽은 사람들이 많아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포기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 독자가 많지 않은 건지도 모르죠. (웃음)”

독자의 소리를 무조건 ‘나 몰라라’ 하는 건 아니다. 요즘은 문학계에 불어 닥친 일류열풍과 관련, 일본소설을 정독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현재 독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이해하고 파악하기 위해서다. 작가로서의 신념도 독자와의 공감과 소통이 유지되는 선에서 지켜나가야 한단다. <제비를 기르다>는 독자에 대한 배려가 눈에 띄는 작품. 현실감 있는 캐릭터, 구체적인 상황 묘사, 수식어를 배제한 문체로 전작들이 지녀온 모호함을 덜어냈다.

“제가 2003년에 제주도에 가서 2005년에 돌아왔는데, 내려가기 1년 전부터 딜레마 스트레스가 굉장히 심했어요. 문학에 대한 요구가 치환되지 않았던 거죠. 기관지 때문에 몸도 안 좋았고요. 삶의 터전이 옮겨지니까 조금씩 변화가 생기더라고요. 세밀하게 인생을 들여다보는 시선이 생기고, 그 동안 만나왔던 사람들에 대해 사색을 하게 됐어요.”

서울로 돌아온 후 변화는 더욱 구체화됐다. 소설에 있어 서사적 구조, 타인의 내면에 대한 묘사에 욕심이 생겼다. 그리고 이는 곧 작품으로 형상화됐다. 문학평론가 정홍수는 “윤대녕의 이번 소설집에는 시간의 경과를 알려주는 표현이 도처에 보인다”며 “세월의 나이테를 천천히 펼쳐 보이는 이러한 서사적 조망 속에서 짧은 시간의 단면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인간 운명의 유장함과 곡진함이 드러난다. 동시에 그것은 인간사의 진실을 좀더 긴 호흡으로 살피게 만든다”고 평했다.

이에 대해 윤대녕은 “그동안 써왔던 것들에 대한 회의나 부정은 아니”라며 “다만 삶을 살아가고 세계를 이해하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는 방법론이 변하고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사실 윤대녕은 자부심이 대단한 작가다.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꼿꼿함과 자존심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명심해 왔다. 문인은 가난하고 술을 많이 마시고 사생활이 불안정하다는 선입견은 그야말로 개탄할 노릇. 그는 얼마 전 보도된 신춘문예 당선자의 생활이 어렵다는 기사에 대해서도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어려움을 토로하는 일은 도리어 부작용을 가져오기 쉽습니다. 힘든 상황에서 쓴 글을 독자가 좋아하지 않는 시대가 왔어요. 그리고 어떤 분야든 데뷔만 했다고 해서 미래가 보장되지는 않습니다. 매년 신춘문예로 2.30명이 등단하는데 그 중에 살아남는다고 할까, 계속 작품을 쓰는 작가는 1.2명에 불과해요. 늘 그래왔죠.” 가난과 고통에 대한 각오 없이 무작정 뛰어든 작가에게 가하는 따끔한 충고인 셈이다. 1988년 단편 ‘원’으로 대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지만, 당장의 밥벌이를 위해 7년간 각종 직장을 전전한 그이기에 주장에 힘이 실린다. “저는 글을 잃지 않으려고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글을 쓰는 생활을 이어왔다. 그 때의 습관이 여전히 남아 지금도 하루에 8시간은 자료조사, 독서 등 집필과 관련된 일을 하거나 글을 쓰며 보낸다고. 2.3일 정도 일을 못하면 우울증이 온다는 이야기에서 그의 열정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저에 대한 오해가 굉장히 많아요. 문단이나 언론까지 제가 독자가 많고 책이 잘 팔리는 걸로 생각하죠. 현실은 그렇지 않거든요. 전업 작가로 생계를 꾸려가기가 힘들지만 누추한 이야기는 절대로 안 해요. 혼자 견뎌낼 몫이잖아요. 작가는 독자에게 동정을 받아서는 안 되는 존재에요.”

전업 작가로 들어선 후에는 형편이 나아지지 않았냐는 기자의 물음에 이 같은 답이 돌아왔다. 윤대녕의 고정 독자 수는 1만 명 안팎. 작가는 그의 독자가 곧 문학 독자라고 여기고 있었다. “문학동네 강태형 대표가 문예지 팔리는 숫자가 문학 독자 수가 아니겠냐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게 1만 부가 안 되거든요. 제 독자가 대략 1만 여명인데 주로 문학 공부하는 학생들, 문창과 학생들에 집중돼 있어요. 문학 독자가 바로 제 독자인 것 같아요.”

작가가 지녀야할 품위를 중시하는 그이지만 그렇다고 권위만 내세우는 건 아니다. 윤대녕은 발로 뛰는 작가로 유명하다. 소설에 등장하는 장소는 일일이 답사한다. 표제작 ‘제비를 기르다’는 바람을 쐬러 간 강화에서 우연히 작부집을 발견하고 떠올린 이야기. 구체적인 내용 구상을 위해 작품엔 잠깐 등장하는 태국 취재까지 감행했다. ‘마루 밑 이야기’에 나오는 대관령 휴게소 역시 직접 방문해서 현장을 살폈다. “여행 정보를 보고 쓰는 건 표시가 나요. 저 같은 경우엔 직접 가보지 않으면 문장 자체가 안 나오더라고요. 소설의 구조나 생생한 표현을 위해서는 취재를 다녀오는 게 좋죠. 작가한테는 의무라고 생각해요.”

직접 체험이 중요하다는 말. 그래서 작가는 인터넷 자료도 신뢰하지 않는다. 표피적인 정보만 얻기에 글을 쓰는데도 별 도움이 안 된단다. 작업실에 인터넷을 설치하지 않은 이유다. “인터넷만 사용 안하지 집필은 노트북으로 해요. 원고가 완성되면 프린트해서 퇴고를 하죠. 요즘도 등단 초기에 그랬던 것처럼 3.4번은 고쳐 써요. 그래서 단편 하나만 쓰더라도 굉장히 지쳐요. 편집자는 좋아하더라고요. 손 볼 데가 별로 없다고.”

사정이 이렇다보니 사람을 만날 시간이 없다. 기껏해야 한 달에 1.2번 정도 아주 가까운 사람들하고만 어울린단다. “사소한 흐트러짐 때문에 생활 패턴이 바뀌거나 시스템에 에러가 나는 걸 경계합니다. 재미없게 사는 거죠. 매일 매일 운동, 독서, 집필만 반복하고 있어요.” 작가의 삶이 재미없을수록 독자는 신이 난다. ‘자발적 유배’ 속에 깊어진 상념을 선사받기 때문이다.

윤대녕은 차기작으로 “근력이 있을 때 한 번 타 넘어가고 싶은 역사적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고려 중”이라고 한다. 자신의 공력으로 가능한 작품인가를 엄밀히 계산하고 있다. “아마 독자에게 굉장히 신선한 시도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작가의 말에 신작을 내놓을 때 까지 만이라도 단조로운 삶이 계속됐으면, 그래서 작품이 빛을 볼 수 있으면, 이란 ‘불순한’ 바람을 품은 이가 기자 하나만은 아니지 싶다.(고아라 기자) 

07. 0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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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7-02-16 0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

나비80 2007-02-16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거의 모든 작가들이 자신의 공력을 역사물로 입증하려는 지 모르겠습니다.

로쟈 2007-02-16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자의 소리를 무조건 ‘나 몰라라’ 하는 건 아니다"에 힌트가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역사물' 자체가 문제는 아니고 문제는 '공력'이겠죠...

나비80 2007-02-16 1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길로 들어서든 윤대녕에게 결론은 문체와 문장이겠지요. ^^

짱꿀라 2007-02-16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윤대녕 작가의 맛은 그의 문장과 문체가 아닐런지요. 잘 읽고 갑니다. 로쟈님, 설도 잘지내시고요. 감기도 조심하세요. 감기가 극성이라고 하네요.

kleinsusun 2007-02-17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이번 연휴는 넘 짧네요. 달랑 월요일 하루. 그럼에도 불구하고.... happy한 명절 보내세요!^^

로쟈 2007-02-18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anta님/ 올해는 감기에 잘 안 걸리네요. santa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시길!
klein님/ 전 뭐 방학이라 '연휴' 개념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필름2.0'에서 지난주에 읽었던 칼럼, 보다 정확하게는 편집장 직무대행이 쓴 '편집장의 말'을 옮겨놓는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달에 '사회적 독서' 목록에 올려놓았던 케빈 스미스의 <순결한 할리우드>(Media2.0, 2006)에 대한 코멘트가 포함돼 있어서이다. 나로선 연휴나 지나서야 들춰볼 수 있을 듯한 책이지만 책의 성격을 미루어짐작해볼 수 있도록 해준다. 더불어, 칼럼 자체도 읽어봄 직하다.

필름2.0(07. 02. 13) 가볍고 싶은 무거운 마음

지난 주말 TV를 보는데 쇼 프로그램에 ‘컨츄리 꼬꼬’가 나왔다. 온갖 버라이어티 쇼를 잠식하고 있는 엔터테이너 탁재훈과 신정환이 아니라 둘이 짝을 이룬 그룹 컨츄리 꼬꼬다. 검은 선글라스로 한껏 멋을 낸 그들이 “헬로우~ 콩가~ 달나라 꿈꾸는 나의 허니~” 하며 그들의 마지막 히트곡 ‘콩가’를 신나게 부르는 순간, 내 몸이 일종의 무중력 상태에 들어간 듯 함께 들썩인다.

나는 그들의 그 가벼움을 사랑한다. 마치 세상의 모든 엄숙한 것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컨츄리 꼬꼬는 새벽잠 깨우는 수탉 마냥 사람들을 부산하게 깨워놓고는 한바탕 놀아보자고 유혹한다. 그런데 그들의 유혹에는, 이른바 ‘그루브’라는 게 있다. 노래를 썩 잘하는 것도 아니고, ‘동방신기’처럼 아크로바틱한 몸놀림을 선보이는 것도 아닌데, 대신 그들은 놀고 싶어 안달이 나 옆 사람까지도 꼬드기고 마는 날라리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그들의 퍼포먼스에서 그 어떤 음악적 성취나 대중문화적 맥락을 따지는 것만큼 무용한 짓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피로감을 가벼움의 미학으로 돌파한다는 측면에서만큼 컨츄리 꼬꼬는, 싸이나 DJ DOC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뮤지션임에 틀림없다는 생각이다.



가끔 이렇게 가벼움을 체현하거나 몸소 실천하는 이들을 보고 있으면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삶의 고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최근 읽은 <순결한 할리우드>라는 책의 저자 케빈 스미스는, 가벼움이라는 측면에서는 장인적 경지를 보여준다. <점원들>이나 <제이 앤 사일런트 밥> 같은 엉뚱하고도 생기 있는 영화를 찍어온 미국 독립영화계의 스타 감독이자 만화작가인 케빈 스미스는, 근엄한 척하는 주류사회에 ‘퍽큐’를 날리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기서 즐거움을 찾는 인물인 것 같다.

책 속에서 그는 리즈 위더스푼을 거침없이 '왕재수'라 부르며 독설을 퍼붓는가 하면, 인터넷 칼럼에 대한 독자들의 빈정거림을 더 강도 높은 빈정거림으로 응수한다. 과장과 거짓이 난무한 칼럼을 통해 만화광은 프리섹스를 즐기는 변태들이라는 근엄 세계의 편견에 한방 먹인다. 물론 절친한 친구 벤 애플렉을 묘사할 때는 지나치리만큼 개인적 애정에 경도돼 있긴 하지만, 육중한 몸무게의 이 괴짜는 층위를 가리지 않는 온갖 텍스트들의 숲에서 스카이 콩콩을 탄 것처럼 풀썩풀썩 뛰어 다닌다.

19세기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인간이 모두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렸다고 안타까워했지만, 그래서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은 숙명에 대한 경건한 수용만은 아닐 것이다. 버트란트 러셀이 시니컬하게 충고한 대로 삶을 견디는 무기로 ‘지성과 의지’를 발동하고 싶지만 그것도 말만 쉬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 가벼움에 몰입하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불가해한 삶과 모순투성이의 세계를 견디는 가장 유효하고도 현실성 있는 대안이라는 직관 때문일 것이다.



설 연휴에 맞춰 개봉하는 두 편의 영화 <1번가의 기적>과 <복면달호>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휴먼코미디를 표방한 두 영화는 누추한 삶의 조건에 내몰린 사람들, 혹은 꿈과는 거리가 먼 현실의 질퍽함을 보여주고는 관객들로 하여금 눈물을 쏟게 만든 뒤 그 현실에 낙관의 베일을 덮어씌우며 막을 내린다. <1번가의 기적>에서 필제는 철거 현장에서 울부짖는 아이들에게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를 부르게 하고는 깡패들한테 맞아 퉁퉁 부어오른 얼굴로 “괜찮아 괜찮아”를 연발한다. <복면달호>의 달호는 트로트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됐으므로 복면을 벗어 던지고도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에 선택을 맡긴다. 우리는 그것이 거짓 낙관이며 거짓 희망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어쨌든 두 대중 영화는 현실의 무게를 이 앙다물고 가슴에 새기는 다짐이 아닌, 그냥 가볍게 툭툭 털고 일어나는 가벼움의 힘으로 돌파하고 싶어 하는 관객들의 욕망에 흔쾌히 부응한다.

아직 영화를 못 봤지만 지난 호에 실린 장문일 감독의 인터뷰 기사를 읽으니 <바람피기 좋은날> 역시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는 영화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도 장 감독은 가볍고 자유롭고 싶은 우리의 욕망이 제도의 굴레에서 일시적으로나마 벗어나는 풍경을 담아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불륜’이라는 수사로 가둘 수 없는 그 아수라장의 미학이 사뭇 기대되지만, 혹시라도 이데올로기의 폐허 위에서 깊이 팬 자신의 상처를 들여다 본 뒤 아무것도 남지 않은 들판을 바라보는 듯한, 그런 허허로운 가벼움이 아닐까, 하는 걱정도 살포시 고개를 든다. 왜냐하면 내가 지금 그렇기 때문이다.

고백컨대, 나도 한때 ‘촐랑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가벼운 녀석이었다. 어떻게 하면 한 사람이라도 더 웃길 수 있을까, 유행하는 온갖 유머를 수첩에 적어놓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지금? 매일 ‘에헴’ 하느라 후배들과의 소통장애에 시달리며 살고 있는 ‘꼰대’가 됐다. 아, 가볍고 싶은 무거운 마음이여.(최광희 편집장 직무대행) 

07. 02. 15.

P.S. 고백컨대, 나는 한번도 '촐랑이'라 불려본 적이 없다. 하지만 알라딘의 이 서재 덕분에 간혹 상당히 수다스러운 '아줌마'란 평도 뒤에서 듣는다. 내게는 아마도 이 서재가 '가볍고 싶은 무거운 마음'을 풀어놓는 공간인가 보다(순결한 로쟈?). 내 수준에서 그렇다는 말이다. 한편, 편집장 대행 체제가 오래 가는 걸 보면 이지훈 편집장의 건강이 아직 호전되지 않은 모양이다. 직무대행 또한 만만찮은 '말발'을 자랑하지만 그럼에도 빈자리는 느껴진다. '필름2.0'을 손에 들면 언제나 가장 먼저 읽었던 게 맨마지막 페이지에 실린 '편집장의 말'이곤 했다는 걸 빌미로 그의 쾌유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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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2-15 22:57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수다'는 수다치고는 너무 어렵죠. 로쟈님의 레이더망은 한계가 어디입니까. 필름 2.0은 한번도 안봤는데. 전 아주 가끄음씩 씨네21만 봐요. 유토피아 디스토피아가 좋아서 봤더랬는데 막상 본문은 별로 안보게 되더라구요.

로쟈 2007-02-16 00:14   좋아요 0 | URL
'수다'도 여러 종류가 있을 뿐이겠지요. 글고, 필름2.0은 저렴해서 자주 사봅니다(신문 2부 값이니). 씨네21을 가끔 보고요. 물론 한주만 기다리면 다 온라인으로 서비스가 되지만...

2007-02-16 0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비80 2007-02-16 10:45   좋아요 0 | URL
'순결한 로쟈?'에서 마시던 녹차가 사레걸렸어요. ^^

로쟈 2007-02-16 12:52   좋아요 0 | URL
**님/ 그 '수다'는 다른 곳에서도 듣는 얘깁니다.^^
소이부답님/ 저는 책임 안 지겠습니다.^^

노부후사 2007-02-16 15:39   좋아요 0 | URL
'로쟈의 순결한 19' 진행해 보시는 건 어떠세요? ㅎㅎ

로쟈 2007-02-16 15:57   좋아요 0 | URL
나름대로 19+에 해당하는 내용들을 곧잘 올리고 있습니다...
 

어제 받은 책들 중의 하나는 들뢰즈의 <시네마1>(시각과언어, 2002)이다. <시네마2>는 갖고 있지만 <시네마1>은 이전 번역본인 <영화1>(새길, 1996)을 갖고 있어서 따로 구입해두지 않았었다. 한데, <시네마>를 자세히 읽어두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참고삼아 <시네마1>도 마저 구입한 것. 이 국역본들 외에 내가 갖고 있는 건 영역본과 러시아어본이다.

 

 

 

 

책은 출간 당시에 구내서점에서 한번 들춰보고 따로 확인해보지 않았었는데, 집으로 오는 전철칸에서 서문 등을 읽어보고 좀 짜증이 났다. 역자가 만 스물아홉에 '현역 번역병'으로 복무하면서 틈틈이 번역한 것이라고 '옮긴이의 글'에 적어놓고 있는데, 딱히 그런 것과 연관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번역이나 책의 만듦새가 일견 엉성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 글은 주로 그 서문 읽기에 할애될 것이다.

일단 서문의 첫문단부터가 눈에 거슬렸다: "이 연구서는 영화사가 아니다. 이것은 분류학이며 이미지와 기호의 분류에 대한 수기이다. 그러나 이 첫번째 권은 요소들, 심지어 분류의 오직 일부분의 요소들을 규정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이 책의 장르가 '수기'란 말인가? 가관인 건 책의 뒷표지는 같은 대목을 또 다르게 옮겨놓았다는 것: "이 연구는 영화사가 아니다. 이것은 영화에 나타난 이미지와 기호들의 분류에 대한 시론이다." 편집자의 불찰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자신이 시도하고 있는 게 영화사가 아니라 이미지와 기호의 분류학임을 천명하고 있는 대목인데, 물론 맞는 쪽은 '수기' 아니라 '시론'이다(영역본은 'an attempt'라고 옮겼다). 짐작에는 베르그송의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Essai sur les donnees immediates de la conscience)>이라고 할 때의 그 '시론'(Essai)을 갖다쓴 게 아닌가 싶다. '한번 해본다'는 뜻의 '에세(이)' 말이다. 그건 '수기'와는 종류가 다르다고 해야겠다. 

영역본을 옮긴 새길판은 이 대목을 이렇게 옮겼다: "이 연구는 영화의 역사학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분류학, 이미지와 기호들을 분류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이 제1권은 분류의 요소들을, 그나마도 단지 한 부분의 요소들을 결정하는 데 만족해야 한다." '영화의 역사학'이 아니라 그냥 '영화사(a history of the cinema)'로 충분하다.

이어지는 문단: "우리는 자주 미국의 논리학자인 퍼스(1839-1914)를 참조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이미지와 기호의일반적 분류를 수립했기 때문이고, 그것은 분명 가장 완전하고도 다양성을 지난 것이다. 그것은 자연과학에서의 린네의 분류와도 같은 것이며, 또는 화학에서의 만델례예프의 도표와 같은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문제에 새로운 관점들을 강요하고 있다."

그리고 새길판: "우리는 미국의 논리학자 퍼스(1839-1914)를 자주 참조하게 될 것인데, 이것은 그가 이미지와 기호들에 대한 일반적인 분류법을 확립하였으며, 이 분류법이 의심할 바 없이 가장 완전하고 가장 다채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사에서의 린네의 분류법이나 화학에서의 멘델레프의 표와 비교될 수 있다."

들뢰즈가 영화에서의 이미지와 기호의 분류학을 시도하면서 최적의 참조대상으로 삼는 것은 미국의 논리학자/철학자 퍼스인데, 퍼스의 기호 분류학이야말로 린네의 종 분류법이나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에 비견할 만하다는 게 인용문의 내용이다. 내가 불만스러워한 것은 러시아 화학자의 멀쩡한 이름 'Mendeleev'가 '만델레예프'라고 엉뚱하게 표기돼 있는 것('멘델레프'라고 옮긴 새길판도 정확한 건 아니다). 불어로는'Mandeleiev'라고 병기해놓으면서(실제로 그런가?). 너무도 상식적인 이름이어서 오히려 읽는 독자가 당혹스럽다.

참고로, 마지막 문장 "영화는 이러한 문제에 새로운 관점들을 강요하고 있다"는 영역본과 새길판에 빠져 있는데, 러시아어본에는 "하지만 영화는 이 경우에(=이 분류학에 있어서) 얼마간 새로운 접근법을 요구한다."라고 돼 있다.

 

 

 

 

이어지는 문단: "여기에는 그 못지 않게 필연적인 또 다른 난제가 있다. 베르그송은 1896년 <물질과 기억>을 저술했다: 그것은 심리학의 위기에 대한 치료였다. 사람들은 더이상 외부세계의 물리적 현실로서의 운동과, 의속 속의 심리적 현실로서의 미지를 대립시킬 수 없었다. 운동-이미지, 더 심오하게는 시간-미이지에 대한 베르그송의 발견은 오늘날까지도 그것의 의의를 모두 이끌어낼 수 없을 만큼의 풍부함을 지니고 있다."

새길판: "또다른 비교가 이에 못지 않게 필요하다. 베르그송은 1896년에 <물질과 기억>을 쓰고 있었다. 그 책은 심리학에서으 위기에 대한 진단이었다. 외적인 세계의 물리적 실재인 운동과 의식 속의 심적인 실재인 이미지는 더 이상 대립될 수 없었다. 운동-이미지와, 더 심오한 것으로 시간-이미지의 베르그송적인 발견은, 과연 이 발견으 결과들이 모두 도출되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을 정도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풍부함을 갖추고 있다."

시각과언어판에서 '또 다른 난제'가 무엇의 번역인지는 모르겠지만 문맥상 어울려 보이진 않는다. 그리고 '치료'도 다른 번역서들에서는 모두 'diagnosis'에 해당하는 번역어들이 쓰이고 있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에 대한 베르그송의 발견이 들뢰즈의 영화론에서 핵심적이라는 것. 그러니까 들뢰즈의 <시네마>를 읽기 위해서는 퍼스와 베르그송에 대한 참조가 필수적이다.

비록 베르그송 자신은 영화이론의 구성에 있어서 자신의 기여/지분에 대해서 의식하지 못했었지만: "나중에 베르그송이 영화에 대해 행한 지나치게 간략했 비평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루었던 방식대로의 운동-이미지와 영화적 이미지를 연관짓는 일을 가로막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시각과언어판) "베르그송이 얼마 있지 않아 가했던 영화에 대한 다소 성급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것도 그가 숙고했던 것과 같은 운동-이미지와 영화적 이미지의 만남을 방해할 수 없다."(새길판)

베르그송의 '지나치게 간략했던 비평'은 영역본에서 '다소 성급한 비판(rather overhasty critique)', 그리고 러시아어판에서는 '지나치게 피상적인 비판'으로 옮겨지고 있다. 문맥상 '간략했던 비평'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들뢰즈가 <시네마>에서 하고자 하는 일은 운동-이미지, 시간-이미지 같은 베르그송 자신의 개념들을 그가 간과/무시했던 영화적 이미지들과 접속시키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그는 제1권에서 운동-이미지를, 제2권에서는 시간-이미지를 다룬다.

그렇다면 (고상한) '철학자' 들뢰즈가 왜 굳이 (하찮은) '영화'에 대해서 이렇게 거창한 프로젝트를 작동시키는가? "우리가 보기에 영화의 위대한 작가들은 화가나 건축가, 음악가들뿐 아니라 사상가들에 비견될 만하였다. 그들은 개념 대신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를 가지고 사유한다."(시간과언어판) "우리가 보기에, 위대한 영화감독들은 화가나 건축가 및 음악가들분만 아니라 사상가들과도 비교될 수 있다. 그들은 개념 대신에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들을 가지고 사유한다."(새길판) 그러니까 위대한 영화감독들 자신이 바로 '위대한 사상가들'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들뢰즈의 자부심: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글을 위해 삽화가 될 어떠한 복제물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우리 각자가 많든 적든 기억과 감동, 또는 지각을 공유하고 있는 위대한 영화들의 삽화가 되고 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글이기 때문이다."(시각과언어판) "우리는 이 책에 어떤 복제사진도 도판으로 제공하지 않고 있다. 우리들 각자가 많든 적든 그것에 대한 기억과 감동 또는 지각을 보유하고 있는 그 위대한 영화들의 도판이 되기를 열망하는 것은 사실 이 책 자신이기 때문이다."(새길판) 

이 '글'과 '책'은 영역본과 러시아어본에서 모두 '텍스트(text)'이다. 따로 영화의 스틸사진 등을 제공하지 않은 것은 들뢰즈의 텍스트 자체가 그가 다루는 위대한 영화들의 '도판'이길 바라기 때문이라는 것. 그게 말하자면 들뢰즈와 이 책 <시네마>의 자부심이겠다. 덕분에 우리는 400쪽 안팍의 책을 아무런 이미지의 도움없이 읽어내려가야 한다. 마치 이미지들인 양!..

07. 02. 15 - 18.

P.S. 널리 알려진 건 아니지만 철학자 들뢰즈의 딸 에밀 들뢰즈(1964- )가 영화감독이란 사실은 더이상 비밀도 아니다(아버지를 많이 닮은 얼굴이다). 그녀의 첫 장편 데뷔작 <새로운 시작>이 국내 TV를 통해서 방영된 바도 있기 때문이다(단편영화는 1986년작이 데뷔작인 듯하다). 바로 재작년 2월 19일의 일이었다(나는 잠깐 보았었다). 당시 한 신문의 소개기사는 이랬다.

"철학자 질 들뢰즈의 딸인 에밀 들뢰즈(41)의 1999년 장편 데뷔작으로 칸영화제 비평가상을 받았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일과 인간관계에서 아무런 느낌과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게 된 한 남자가 새로운 출발을 시도한다. 그는 또 한 인간과 새로운 소통을 희망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다. 인간들 사이의 소통의 벽, 인간 존재의 독자성 등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영화는 전문배우와 비전문배우를 한데 섞어 사실적인 연출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에릭 로샹 감독의 <토틀 웨스턴>에 출연했던 사무엘 르 비앙이 주연을 맡았다.

서른 살의 알랭(사무엘 르 비앙)은 세상이 지리멸렬하다. 아내와 딸은 그를 사랑하지만 그는 이렇다 할 감흥이 없다. 어느 날 갑자기 견디지 못할 것같은 무게감에 짓눌린 알랭은 지금까지의 모든 인간 관계를 버리기로 결심한다. 비디오 게임 테스터였던 이전 직업을 버리고 포클레인 기사가 되기 위해 직업훈련 센터를 다니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누’라는 남자를 만나면서 또 다른 변화를 겪게 된다."

그녀의 최신작은 <미스터 V.>(2003)이다. 그녀가 언젠가 자살로 생을 마친 '아버지 들뢰즈'에 대한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짓궂은 기대이지만 그런 기대를 갖는 건 또한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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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와보니 지난달 러시아에 주문했던 책들과 지난주 알라딘에 주문했던 책들이 한꺼번에 도착해 있다. 모두 16권이다. 복사를 맡긴 책들도 오늘 받게 되면 스무 네댓 권은 되겠다. 책으로만 치자면 흥부네가 따로 없다(해서 안팎으로 구박이다). 산악인들이 흔하게 말하는 것처럼 그저 '책이 있을 뿐'인 것을. 세월은 가도 책은 '옛날'처럼 남으리라.

 

 

  

 

오늘 받은 책들 가운데 제일 먼저 펼쳐본 것은 정현종 시인이 이번에 완역 출간한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민음사, 2007). 그리고 서가에서 찾아와 나란히 펼쳐놓은 게 이전에, 사랑의 시와 절망의 노래를 포함해 모두 21편의 시 가운데 4편만을 번역해 실었던 네루다 시선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민음사, 1989/1994)이다. 언젠가 첫번째 시 '한 여자의 육체'에 대해서는 다른 번역 2편까지 포함해서 자세한 읽기를 시도한 바 있지만, 이번에 비교해보니 정현종 시인의 번역에도 많은 수정이 가해져 있다. 거의 '두 편의 시'라고 말해도 좋을 듯하다. 그걸 비교해서 옮겨놓는다(색깔을 넣어 처리한 게 2007년판이다. 수정된 부분은 강조처리했다).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네가 나를 내맡길 때, 너는 세계처럼 벌렁 눕는다.

야만인이며 시골사람인 내 몸은 너를 파들어가고

땅 밑에서 아들 하나 뛰어오르게 한다.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네가 나를 맡길 때, 너는 세계와 같다.

내 거칠고 농부 같은 몸은 너를 파 들어가고

땅 밑에서 아들 하나 뛰어오르게 한다.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새들은 나한테서 날아갔다.

그리고 밤은 그 막강한 군단으로 나를 엄습했다.

살아남으려고 나는 너를 무기처럼 벼리고

내 활의 화살처럼, 내 投石器의 돌처럼 벼렸다.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새들은 나한테서 날아갔고,

밤은 그 강력한 침입으로 나를 엄습했다.

살아남으려고 나는 너를 무기처럼 벼리고

화살의 활처럼, 내 투석기의 돌처럼 벼렸다.


허나 인제 복수의 시간이 왔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피부의 육체, 이끼의 단호한 육체와 갈증나는 밀크!

그리고 네 젖가슴 잔들! 또 放心으로 가득 찬 네 눈!

그리고 네 둔덕의 장미들! 또 느리고 슬픈 네 목소리!

그러나 이제 복수의 시간이 왔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

벗은 몸, 이끼의, 갈망하는 단단한 밀크의 육체!

그리고 네 젖가슴 잔들! 또 방심(放心)으로 가득 찬 네 눈!

그리고 네 치골의 장미들! 또 느리고 슬픈 네 목소리!

 

내 여자의 육체, 나는 네 경이로움을 통해 살아가리.

내 갈증, 끝없는 내 욕망, 내 동요하는 길!

영원한 갈증이 흐르는 검은 河床이 흘러내리고,

피로가 흐르며, 그리고 가없는 슬픔이 흐른다.

내 여자의 육체, 나는 네 우아함을 통해 살아가리.

내 갈증, 내 끝없는 욕망, 내 동요하는 길!

영원한 갈증이 흐르는 검은 하상(河床)

그리고 피로가 따르며 가없는 아픔이 흐른다. 

 

 

당장 여기서 실행하지는 않겠지만 이러한 번역상의 수정/차이를 음미해보는 일은 '시 번역' 일반론뿐만 아니라 정현종 시인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흥미로운 단서들을 제공해줄 것이라 믿는다. 잘 알려져 있다시지 네루다의 이 처녀시집은 그가 열아홉살에 낸 것이다. '해설'에서 역자가 평해놓은 바에 따르면, "이 시집은 우리가 다 겪게 마련인 젊은 시절의 욕망의 혼돈, 특히 성욕이 충동에 따른 즐거움과 괴로움, 사귐과 고독, 만남과 헤어짐 따위가 만드는 감정의 소용돌이로 넘친다. 물론 그 소용돌이는 시라고 하는 형식을 통해서 질서를 얻은 것으로서, 품격을 잃지 않은 표현의 적나라함과 솔직함이 커다란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52-3쪽)

 

 

 

 

 

흔히 정현종 시인은 '교감의 시인', '에로티시즘의 시인'으로도 평가받지만 대개 그가 다루는 교감과 에로티즘은 식물적인 성향이 강하다. '헐벗은 가지의 에로티시즘' 같은 표현이 대표적이다. 나는 그 '에로티시즘'에서 '네 젖가슴 잔들'이나 '네 치골의 장미들' 같은 구절을, 혹은 그에 상응하는 구절을 읽어보지 못했다. 네루다의 "품격을 잃지 않은 표현의 적나라함과 솔직함"을 그가 매력으로 꼽고 있는 것은 그것이 그의 시의 '결여항'이어서 아닐까 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그것이 네루다가 정현종에게서 갖는 의의라고 보는 것이다). 

간략한 연보를 읽은 기억에 따르면 정현종 시인은 청소년 시절 카톨릭 교회에도 다닌 바 있고, 아마도 종교나 구원 같은 문제에 얽매였을 법하다. 한데 네루다의 "한 여자의 육체, 흰 언덕들, 흰 넓적다리,/ 네가 나를 내맡길 때, 너는 세계처럼 벌렁 눕는다" 같은 세계는 그야말로 정반대편의 세계 아닐까? 시인은 '내 여자의 육체'를 말하는 대신에 '나는 별아저씨, 바람 남편이지'를 상습적으로 읊조리곤 했을 따름이다. 그의 '품격'은 '적나라함과 솔직함'의 결여태였다...

07. 0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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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2-14 15: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로쟈 2007-02-14 1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그걸 내뱉지는 않는 게 시인의 '점잖음'이죠(네루다와는 다른)...
 

아침에 집에서 나오다 보니 우편함에 책 한권이 꽂혀 있다. <시인세계> 봄호였다. 짐작에 우체부 아저씨가 아침일찍 다녀간 모양이다. 그리고 드는 생각은, '시인의 마을'엔 봄도 일찍 오나 보다. 하지만 오늘 날씨는 아직은 겨울이라는 듯이 좀 쌀쌀하다. 올겨울 눈이 왔던 기억도 한번밖에 없어서 이 정도 '쌀쌀함'은 애교스러워보이지만. 오늘자 한국일보에 이 <시인세계> 봄호의 특집과 관련한 기사가 실렸기에 겸사겸사 옮겨놓는다. 기사에서는 다루어지고 있지 않지만 잡지에는 '강화도 시인' 함민복의 인터뷰 기사도 들어 있다. 흥미롭게 읽었다.

한국일보(07. 02. 14) 우리 시대 詩人들의 방 '서울 땅에 있어도 불우한 유목민'

1990년대 초반 시인 유하가 시집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에서 끌어 안은 것은 세속의 즐거움이었다. 이후 후기 자본주의적 질서와 쾌락의 얼개는 시 세계까지 삼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시대 시인들의 거개는 순응하지 않고 자신에게 허여된 공간과 삶의 불일치를 기꺼이 받아 들이며, 창작의 원동력으로 삼고 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시인세계> 봄호는 ‘시인의 집, 시 속의 집’이라는 기획 특집을 마련, 한국시인협회와 민족문학작가회의 주소록을 토대로 전국에 거주하는 1,434명의 시인들이 어디서 창작의 처소를 틀고 있는지 밝혔다. 그 간 간헐적으로 이뤄져 온 조사였지만, 이번에 최초로 현직 시인의 발품을 빌어 재구성한 것이다.

전체 시인의 35%인 547명이 살고 있는 서울은 숫자상으로 시인 공화국이다. 그러나 “그들이 서울 땅에서 부르는 노래는 불우의 연주이며, 서울서 충혈된 눈을 가진 그들은 현대적 유목민”이라고 조사를 진행한 우대식(42) 시인은 규정했다. “죽은 사람들만 불러 모아 사망자 주식회사를 만들고 영원히 죽고 싶은 나”로 스스로를 노래 부른 안현미 시인의 “활짝 핀 착란”만이 살아 있는 곳이다(<시구문 밖>ㆍ2006년).

한편 274명의 시인이 거주하는 것으로 집계된 경기도에는 일산이 최대의 시인 군락(40여명)으로 나타났다. 대전(39명)도 그와 비슷한 수준. 이 밖에 인천(37명ㆍ함민복 등)을 비롯, 안성(고은 등) 용인(박이도 등) 양평(박용하 등)의 순으로 드러났다.

충남(38명)의 경우에 서산의 생활 서정을 즐겨 다뤄 온 김순일, 충북(32명)에는 속리산 산방에 은거하며 아픈 몸을 치유한 도종환, <가장 추운 곳, 외로운 곳>이라며 노래한 이성선 등의 시인을 가진 강원(35명), 안동소주를 노래한 인상학 시인을 품은 경북(32명), 섬진강 시편의 김용택이 거하는 전북(51명), 남도의 한을 깊이 아로새긴 송수권 등의 전남(26명) 순으로 시인들에게 땅뙈기를 내주고 있다.

광역시들의 존재가 이채롭다. 이성복의 상처가 시적 텍스트로 엄존하는 대구(69명)는 ‘아나키스트적’ 정서가, 헌걸찬 기개와 전위적 글쓰기가 공존하는 부산(85명)에는 특유의 시의식이, 광주(50명)에는 곽재구의 <사평역에서>에서 저류를 흐르는 반항의 혼이 각각 자신만의 서정을 구축해 오고 있다고 조사는 밝혔다.

잡지는 이와 함께 김태형 시인의 글을 통해 ‘집’의 외연을 확장,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시뮬라시옹(조작된 이미지)의 세계까지 논한다. 카페나 포털 사이트는 물론 블로그와 미니 홈피 등 가상 공간상의 집까지를 포섭한다. 고은에서 황학주까지 36명의 웹사이트는 이 시대 시인들의 성소라는 것.

2년 전 산문집 <죽은 시인들의 사회>를 내는 등 이번 연구를 위한 기초 작업을 해 온 우 시인은 “광주에서 문학전문지 <문학들>이 창간되는 등 지역의 독특한 서정과 풍토를 담아내는 움직임이 되살아 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며 “무직의 전업 작가들에게 매달 생계비 지원 등 경제 논리 이상의 지원이 모색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래부 한국일보 수석논설위원은 “아무리 훌륭한 공간이라도 시가 생산되지 않는다면 한낱 고통스런 불모의 땅일 뿐”이라며 “정부나 사회는 지극한 섬세함을 전제한 가운데 그들의 집과 방에 대해 배려해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주거와 창작 공간으로서의 시인의 방’) (장병욱 기자)

07. 02. 14.

P.S. 마지막 박래부 위원의 '충고'는 경청할 만하지만 막상 방도를 마련하는 건 어줍잖아 보인다(가령 월세 10만원짜리 함민복 시인의 집을 찾아가 쾌적하게 리모델링을 해줘야 하나?).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처럼 시인/작가들을 위한 아파트나 집단거주촌을 만들어줘야 할까? 시인들의 게토로? 뭔가 다른 방도가 있을까? 이런 건 시인들에게 물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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