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받은 책들 중의 하나는 들뢰즈의 <시네마1>(시각과언어, 2002)이다. <시네마2>는 갖고 있지만 <시네마1>은 이전 번역본인 <영화1>(새길, 1996)을 갖고 있어서 따로 구입해두지 않았었다. 한데, <시네마>를 자세히 읽어두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참고삼아 <시네마1>도 마저 구입한 것. 이 국역본들 외에 내가 갖고 있는 건 영역본과 러시아어본이다.

 

 

 

 

책은 출간 당시에 구내서점에서 한번 들춰보고 따로 확인해보지 않았었는데, 집으로 오는 전철칸에서 서문 등을 읽어보고 좀 짜증이 났다. 역자가 만 스물아홉에 '현역 번역병'으로 복무하면서 틈틈이 번역한 것이라고 '옮긴이의 글'에 적어놓고 있는데, 딱히 그런 것과 연관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번역이나 책의 만듦새가 일견 엉성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 글은 주로 그 서문 읽기에 할애될 것이다.

일단 서문의 첫문단부터가 눈에 거슬렸다: "이 연구서는 영화사가 아니다. 이것은 분류학이며 이미지와 기호의 분류에 대한 수기이다. 그러나 이 첫번째 권은 요소들, 심지어 분류의 오직 일부분의 요소들을 규정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이 책의 장르가 '수기'란 말인가? 가관인 건 책의 뒷표지는 같은 대목을 또 다르게 옮겨놓았다는 것: "이 연구는 영화사가 아니다. 이것은 영화에 나타난 이미지와 기호들의 분류에 대한 시론이다." 편집자의 불찰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자신이 시도하고 있는 게 영화사가 아니라 이미지와 기호의 분류학임을 천명하고 있는 대목인데, 물론 맞는 쪽은 '수기' 아니라 '시론'이다(영역본은 'an attempt'라고 옮겼다). 짐작에는 베르그송의 <의식에 직접 주어진 것들에 관한 시론(Essai sur les donnees immediates de la conscience)>이라고 할 때의 그 '시론'(Essai)을 갖다쓴 게 아닌가 싶다. '한번 해본다'는 뜻의 '에세(이)' 말이다. 그건 '수기'와는 종류가 다르다고 해야겠다. 

영역본을 옮긴 새길판은 이 대목을 이렇게 옮겼다: "이 연구는 영화의 역사학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의 분류학, 이미지와 기호들을 분류하려는 시도이다. 그러나 이 제1권은 분류의 요소들을, 그나마도 단지 한 부분의 요소들을 결정하는 데 만족해야 한다." '영화의 역사학'이 아니라 그냥 '영화사(a history of the cinema)'로 충분하다.

이어지는 문단: "우리는 자주 미국의 논리학자인 퍼스(1839-1914)를 참조하고 있다. 그 이유는 그가 이미지와 기호의일반적 분류를 수립했기 때문이고, 그것은 분명 가장 완전하고도 다양성을 지난 것이다. 그것은 자연과학에서의 린네의 분류와도 같은 것이며, 또는 화학에서의 만델례예프의 도표와 같은 것이다. 영화는 이러한 문제에 새로운 관점들을 강요하고 있다."

그리고 새길판: "우리는 미국의 논리학자 퍼스(1839-1914)를 자주 참조하게 될 것인데, 이것은 그가 이미지와 기호들에 대한 일반적인 분류법을 확립하였으며, 이 분류법이 의심할 바 없이 가장 완전하고 가장 다채로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연사에서의 린네의 분류법이나 화학에서의 멘델레프의 표와 비교될 수 있다."

들뢰즈가 영화에서의 이미지와 기호의 분류학을 시도하면서 최적의 참조대상으로 삼는 것은 미국의 논리학자/철학자 퍼스인데, 퍼스의 기호 분류학이야말로 린네의 종 분류법이나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에 비견할 만하다는 게 인용문의 내용이다. 내가 불만스러워한 것은 러시아 화학자의 멀쩡한 이름 'Mendeleev'가 '만델레예프'라고 엉뚱하게 표기돼 있는 것('멘델레프'라고 옮긴 새길판도 정확한 건 아니다). 불어로는'Mandeleiev'라고 병기해놓으면서(실제로 그런가?). 너무도 상식적인 이름이어서 오히려 읽는 독자가 당혹스럽다.

참고로, 마지막 문장 "영화는 이러한 문제에 새로운 관점들을 강요하고 있다"는 영역본과 새길판에 빠져 있는데, 러시아어본에는 "하지만 영화는 이 경우에(=이 분류학에 있어서) 얼마간 새로운 접근법을 요구한다."라고 돼 있다.

 

 

 

 

이어지는 문단: "여기에는 그 못지 않게 필연적인 또 다른 난제가 있다. 베르그송은 1896년 <물질과 기억>을 저술했다: 그것은 심리학의 위기에 대한 치료였다. 사람들은 더이상 외부세계의 물리적 현실로서의 운동과, 의속 속의 심리적 현실로서의 미지를 대립시킬 수 없었다. 운동-이미지, 더 심오하게는 시간-미이지에 대한 베르그송의 발견은 오늘날까지도 그것의 의의를 모두 이끌어낼 수 없을 만큼의 풍부함을 지니고 있다."

새길판: "또다른 비교가 이에 못지 않게 필요하다. 베르그송은 1896년에 <물질과 기억>을 쓰고 있었다. 그 책은 심리학에서으 위기에 대한 진단이었다. 외적인 세계의 물리적 실재인 운동과 의식 속의 심적인 실재인 이미지는 더 이상 대립될 수 없었다. 운동-이미지와, 더 심오한 것으로 시간-이미지의 베르그송적인 발견은, 과연 이 발견으 결과들이 모두 도출되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을 정도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풍부함을 갖추고 있다."

시각과언어판에서 '또 다른 난제'가 무엇의 번역인지는 모르겠지만 문맥상 어울려 보이진 않는다. 그리고 '치료'도 다른 번역서들에서는 모두 'diagnosis'에 해당하는 번역어들이 쓰이고 있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에 대한 베르그송의 발견이 들뢰즈의 영화론에서 핵심적이라는 것. 그러니까 들뢰즈의 <시네마>를 읽기 위해서는 퍼스와 베르그송에 대한 참조가 필수적이다.

비록 베르그송 자신은 영화이론의 구성에 있어서 자신의 기여/지분에 대해서 의식하지 못했었지만: "나중에 베르그송이 영화에 대해 행한 지나치게 간략했 비평에도 불구하고 그가 다루었던 방식대로의 운동-이미지와 영화적 이미지를 연관짓는 일을 가로막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시각과언어판) "베르그송이 얼마 있지 않아 가했던 영화에 대한 다소 성급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것도 그가 숙고했던 것과 같은 운동-이미지와 영화적 이미지의 만남을 방해할 수 없다."(새길판)

베르그송의 '지나치게 간략했던 비평'은 영역본에서 '다소 성급한 비판(rather overhasty critique)', 그리고 러시아어판에서는 '지나치게 피상적인 비판'으로 옮겨지고 있다. 문맥상 '간략했던 비평'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들뢰즈가 <시네마>에서 하고자 하는 일은 운동-이미지, 시간-이미지 같은 베르그송 자신의 개념들을 그가 간과/무시했던 영화적 이미지들과 접속시키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그는 제1권에서 운동-이미지를, 제2권에서는 시간-이미지를 다룬다.

그렇다면 (고상한) '철학자' 들뢰즈가 왜 굳이 (하찮은) '영화'에 대해서 이렇게 거창한 프로젝트를 작동시키는가? "우리가 보기에 영화의 위대한 작가들은 화가나 건축가, 음악가들뿐 아니라 사상가들에 비견될 만하였다. 그들은 개념 대신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를 가지고 사유한다."(시간과언어판) "우리가 보기에, 위대한 영화감독들은 화가나 건축가 및 음악가들분만 아니라 사상가들과도 비교될 수 있다. 그들은 개념 대신에 운동-이미지와 시간-이미지들을 가지고 사유한다."(새길판) 그러니까 위대한 영화감독들 자신이 바로 '위대한 사상가들'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들뢰즈의 자부심: "우리는 여기서 우리의 글을 위해 삽화가 될 어떠한 복제물도 제시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우리 각자가 많든 적든 기억과 감동, 또는 지각을 공유하고 있는 위대한 영화들의 삽화가 되고 하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글이기 때문이다."(시각과언어판) "우리는 이 책에 어떤 복제사진도 도판으로 제공하지 않고 있다. 우리들 각자가 많든 적든 그것에 대한 기억과 감동 또는 지각을 보유하고 있는 그 위대한 영화들의 도판이 되기를 열망하는 것은 사실 이 책 자신이기 때문이다."(새길판) 

이 '글'과 '책'은 영역본과 러시아어본에서 모두 '텍스트(text)'이다. 따로 영화의 스틸사진 등을 제공하지 않은 것은 들뢰즈의 텍스트 자체가 그가 다루는 위대한 영화들의 '도판'이길 바라기 때문이라는 것. 그게 말하자면 들뢰즈와 이 책 <시네마>의 자부심이겠다. 덕분에 우리는 400쪽 안팍의 책을 아무런 이미지의 도움없이 읽어내려가야 한다. 마치 이미지들인 양!..

07. 02. 15 - 18.

P.S. 널리 알려진 건 아니지만 철학자 들뢰즈의 딸 에밀 들뢰즈(1964- )가 영화감독이란 사실은 더이상 비밀도 아니다(아버지를 많이 닮은 얼굴이다). 그녀의 첫 장편 데뷔작 <새로운 시작>이 국내 TV를 통해서 방영된 바도 있기 때문이다(단편영화는 1986년작이 데뷔작인 듯하다). 바로 재작년 2월 19일의 일이었다(나는 잠깐 보았었다). 당시 한 신문의 소개기사는 이랬다.

"철학자 질 들뢰즈의 딸인 에밀 들뢰즈(41)의 1999년 장편 데뷔작으로 칸영화제 비평가상을 받았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일과 인간관계에서 아무런 느낌과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게 된 한 남자가 새로운 출발을 시도한다. 그는 또 한 인간과 새로운 소통을 희망하지만 그게 쉽지가 않다. 인간들 사이의 소통의 벽, 인간 존재의 독자성 등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영화는 전문배우와 비전문배우를 한데 섞어 사실적인 연출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에릭 로샹 감독의 <토틀 웨스턴>에 출연했던 사무엘 르 비앙이 주연을 맡았다.

서른 살의 알랭(사무엘 르 비앙)은 세상이 지리멸렬하다. 아내와 딸은 그를 사랑하지만 그는 이렇다 할 감흥이 없다. 어느 날 갑자기 견디지 못할 것같은 무게감에 짓눌린 알랭은 지금까지의 모든 인간 관계를 버리기로 결심한다. 비디오 게임 테스터였던 이전 직업을 버리고 포클레인 기사가 되기 위해 직업훈련 센터를 다니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누’라는 남자를 만나면서 또 다른 변화를 겪게 된다."

그녀의 최신작은 <미스터 V.>(2003)이다. 그녀가 언젠가 자살로 생을 마친 '아버지 들뢰즈'에 대한 영화를 찍을 수 있을까? 짓궂은 기대이지만 그런 기대를 갖는 건 또한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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