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역사서‘로 고를 만한 책은 M.T. 앤더슨의 <죽은 자들의 도시를 위한 교항곡>(돌베개)이다. 시적인 제목만으로는 내용을 가늠하기 어려운데, 부제가 ‘쇼스타코비치와 레닌그라드 전투‘다.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의 탄생에 얽힌 일화를 중심으로, 쇼스타코비치의 파란만장했던 삶과, 그와 동시대인들이 헤쳐 나가야 했던 격랑의 역사를 박진감 넘치게 서술한다. 쇼스타코비치가 어떻게 레닌그라드에서 끔찍한 폭격과 싸우며 ‘교향곡 7번‘을 작곡하기 시작했고 어떻게 피난지 쿠이비셰프에서 작곡을 끝냈는지, 악전고투 끝에 탄생한 이 곡이 한창 전투 중인 레닌그라드에서 어떻게 연주될 수 있었는지 매혹적으로 서술한다.˝

역사서라고는 했지만 저자는 역사학자가 아니라 소설가이자 고전음악 칼럼니스트이다. 번역도 음악을 전공한 장호연 씨가 맡았다. 음악에 관한 내용이 얼마나 들어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전쟁사 범주의 책으로 분류하겠다. 쇼스타코비치를 다룬 소설로는 줄리언 반스의 <시대의 소음>(다산책방)과 나란히 읽어봐도 좋겠다. 러시아는 전승기념일(5월9일)까지 바야흐로 장기 연휴에 들어가겠군(벌써 들어간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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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로 하여금
소설 제목보고, 죽게 하여라
중얼거린다 다른 무엇이 있을까
하지만 언제 죽는단 말인가
이미 죽었사옵니다, 그러게
그러니 죽게 하여라
죽음을 허락하노니
모든 필연은 각자의 자리에서 본분을 다하라
아침은 오거라 매일같이 오거라
해는 바삐 중천으로 가거라
각자의 포지션을 지켜라
필연이 필연다울 때
물이 역류하지 않고 콧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을 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거나
두 번 죽지 않을 때
인연이 두 번 꼬이지 않을 때
그리하여 모든 것이 차례에 맞을 때
아침먹고 점심먹을 때
(먹고 체하지 않을 때)
다른 무엇이 있겠는가
태평성대에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태평성대에
일없이 중얼거리노니
죽은 자로 하여금
죽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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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먹으면서 펼쳐본 책은 다양한 커리어의 저자들이 공저한 <광기와 소외의 음악>(생각의힘)이다. 부제처럼 붙어 있는 나머지 제목이 ‘혹은 핑크 플로이드로 철학하기‘. 원제가 ‘핑크 플로이드와 철학‘이다. 핑크 플로이드의 노래는 앨범 제목이기도 한 <더 월>(1979)밖에 모르지만(고등학교 때인가 갓 졸업했을 때인가 처음 다녀본 카페에서 늘 틀어주던 뮤직비디오가 ‘더 월‘이었다. ˝우리는 교육이 필요 없어요.˝) ‘광기와 소외의 음악‘이란 건 알겠다.

˝지난 반세기 동안 수억 장의 음반을 팔아치우며 전설의 반열에 오른 핑크 플로이드는 보통 사람들의 삶을 소외시키는 현대사회의 광포성을 날카로운 풍자와 알레고리로 고발하고, 대중음악의 산업 논리를 거부하며 끊임없이 음악적 인식의 지평을 넓혀왔다.

핑크 플로이드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서구 대중문화의 근간이 뿌리내리고 있는 현대적 삶의 어두운 면을 정치사회적, 철학적 맥락에서 광범위하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이들은 오랫동안 철학자들이 분석하고 숙고해왔던 경험, 개념, 이론의 상당수를 깊이 다룬 작품 세계를 완성해냈다. 그 안에는 소외의 본질과 이유, 존재의 형이상학, 부조리, 인지, 정체성 그리고 예술적, 상업적인 진정성의 본질이 담겨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광기도 있다.˝

그래서 철학적 성찰거리가 된다는 것. 요즘이야 모든 음악(과 뮤직비디오)을 인터넷상에서 곧바로 감상해볼 수 있으니 책을 읽기에도 좋은 조건이다(음악을 보고 듣지 않는다면 읽어나갈 수 없는 책이기도 하다).

대중문화와 철학을 다룬 책들이 간간이 나오고 있다. 캐스 선스타인의 <스타워즈로 본 세상>(열린책들)도 그렇고(영화쪽은 따로 묶어도 될 정도다), 사이먼 크리칠리의 <데이비드 보위>(클레마지크)도 그렇다. 국내서로는 평전 형식이지만 강헌의 <신해철>(돌베개)이 크리칠리의 표현을 빌면 ‘그의 영향‘을 다룬 책이다.

˝강헌은 신해철의 쉼 없는 새로운 시도와 과감한 행보, 탁월한 예술적 문제 설정 능력이 1990년대 한국 대중문화의 폭을 넓혔으며, 음악이 지성적으로 사유되는 동시에 대중에게 깊은 감동을 줄 수 있음을 증명했다고 말한다.˝

대중음악의 팬들이 책을 통해서도 음악과 만나면 좋겠다. 출판계에서 하는 얘기로, 서태지의 열광적인 팬이라도 서태지에 관한 책은 읽지 않는다. 핑크 플로이드의 팬들은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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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오월이지만 봄은 다 가고
이삿짐차 떠난 뒤에 남은
살림 같은 버릴 것만 남은
살림 같은 봄만 남은 것 같다
가장 잔인한 달 지나가면
덜 잔인한 달
(차라리 잔인하기를!)
오월은 그렇지 않았는데
등나무 꽃그늘 같은 시절이 있었는데
(대체 언제적인가?)
지금은 사월만 지나면 봄도 다 가는가
늦게 온다고 더 오래 머물지 않고
일찍 떠난다고 미안해 하지 않는다
사월에 만났던 사람 그렇게 떠났고
오월에 헤어진 사람도 그렇게 떠났다
내게 남은 사월 언제부턴가
먼지 뿌옇고
오월은 봄도 아니고 봄인 척
사월과 오월 사이에
나는 시를 쓰고 빈집에서
걸레질하고
(할 필요가 없다고요?)
굳이 걸레질하고
사월의 방문을 닫는다

오월의 문을 열면 이미 다른 집
이제 오월이지만 봄은 다 가고
봄은 다 가고야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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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wo0sun 2018-04-30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월을 누가 덜잔인한 달이라고 하는가?
한국에서 딸도 며느리도 엄마도 아니라야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로쟈 2018-04-30 08:06   좋아요 0 | URL
어린이날, 어버이날 때문인가요? 저는 날씨만으로.~

로제트50 2018-04-30 0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일하는 가게는 서향이고 전면이
유리로 되어 사월부터 에어컨을 틀어
놓곤 합니다. 그러다 해가 숨어면
춥네, 하며 끄는 일이 하루 여러차례 반복되죠. 저의 사월은
여름 미리맛보기, 더운 계절 앞둔
심호흡 같은 것.

로쟈 2018-04-30 08:07   좋아요 0 | URL
계절의 여왕이란 말도 예전엔 썼는데 옛말이 된 듯.
 

비텐베르크로 돌아가지 말고 내 곁에
있어 다오 햄릿, 이라고 어머니가 말한다
어머니 거트루드가 말한다 햄릿은
덴마크의 왕자 햄릿은 부왕의 부고를
듣고 부랴부랴 귀국한 왕자
(연락처는 두고 갔는가, 햄릿?)
그 사이에 숙부 클로디어스는 왕이 되고
거트루드를 왕비로 맞는다
젠장, 이라고 햄릿은 말한다
나 다시 돌아갈래, 라고 말한다
하지만 햄릿, 내 곁에 있어다오
오, 약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여자
곁에 햄릿은 남는다 비텐베르크의 대학생
햄릿은 마르틴 루터의 동문이지
루터의 도시 비텐베르크는 햄릿의
도시도 될 뻔했다네 그가
되돌아갔다면 어찌 알겠는가 신학자 햄릿
위아래는 모르겠지만 종교개혁가 햄릿
하지만 햄릿은 덴마크에 남는다
비텐베르크에 부재하는 햄릿
부재로 존재하는 햄릿
대학도 졸업하지 못하고
중세로 돌아간 햄릿
끝내 어머니 곁을 떠나지 못한 햄릿
욕정의 구렁텅이에 빠진 햄릿
약한 자의 곁에
남은 곁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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