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신간 러시아 판타지 소설 <나이트 워치>를 소개하면서 러시아 입문서 두 권에 대해서도 덧붙인바 있는데, 그걸 조금 보완하고자 한다. 오늘자 한국일보의 '강정의 나쁜취향'에서 러시아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다루어지기도 해서 대략 '분위기'도 좋은 걸로 간주하고 말이다. 물론 우호적인 분위기만 형성돼 있는 건 아니다. 며칠전 뉴스에서는 극동러시아에서 가짜 술을 마시고 주민 19명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타전됐으니까.

 

인테르팍스통신에 따르면, 지난달 30일부터 이달 3일까지 마가단 시에서 가짜 술을 마신 주민 23명이 복통증세로 입원해 이가운데 19명이 사망했다. 말 그대로 독주(毒酒)를 제조하고 또 그걸 마신 것인데, 지역 내무국(우리의 경찰)은 '사마곤'이라는 가내 술을 제조해 판매한 지역 주민 4명을 검거했다고(대낮에 아직도 이런 일이 벌어지는 나라가 러시아 말고 또 있을지 궁금하다). 해서,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 웬만해야 말이지.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1866)는 사실 19세기 러시아의 표도르 이바노비치 츄체프(1803-1873)의 시구이다(다른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시도 제목이 없는 경우 대개 1행을 제목처럼 사용한다). 츄체프란 이름을 영어로 음역하면 'Tjutchev'가 되는데, 이에 대한 우리말 표기는 '튜체프', '츄체프', '쮸체프' 등 다양하다('쮸쳅'이라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귀족출신에다 외교관이었는데 시인으로 인정받은 것은 좀 나이가 들어서이다. 해서 '철지난 낭만주의' 경향의 철학적인 시들을 주로 썼다. 

 

하지만 문학사에서의 평가는 후한 편이어서 푸슈킨(1799-1837) 이후의 19세기 최대 시인으로 꼽힌다. 그리고 그러한 평가에 한몫한 이가 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이다. <츄체프와 도스토예프스키>란 연구서가 있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이다. 사실, 둘의 친연성은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선언적인 시에서도 유추해볼 수 있다(도스토예프스키 왈, "유럽은 러시아를 이해할 수 없지만 러시아는 유럽을 이해할 수 있다." 왜 아니겠어?). 

 

 

츄체프의 시들은 더러 우리말로 번역/소개돼 있지만 시집으론 <말로 표현한 사상을 거짓말이다>(새미, 2001)가 유일하다. 어차피 시란 (잘) 번역되지 않으므로 아쉽지만 유감스러울 정도는 아니다. 그 번역시집은 내가 안 갖고 있는데, 지금 인용하고자 하는 번역은 예일 리치먼드의 <러시아, 러시아인>(일조각, 2004), 107쪽에도 실려 있는 것이다.   

 

지성만으로는 러시아를 이해할 수 없네,

별난 기준이 그 광대함을 채우고 있기에;

러시아는 홀로 유일무이하게 서 있도다 -

러시아에서는 오로지 믿음뿐.

 

매우 유익한 러시아 입문서로서 내가 추천까지 했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시만큼은 부정확하게 번역되었다. 음역한 원문과 영역, 그리고 나의 번역을 차례로 나열하면 이렇다: 

 

Umom Rossiju ne ponjat',

Arshinom obshchim ne izmerit';

U nej osobennaja stat' -

V Rossiju mozhno tol'ko verit'.

 

One cannot understand Russia with the mind;

She cannot be measured with a common yardstick.

She has a special image.

One can only believe in Russia.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

러시아는 보편적인 척도로 잴 수 없다.

러시아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으니

러시아를 우리는 단지 믿을 수 있을 뿐이다.

시 흉내를 내느라고 '러시아'란 두운을 맞추었는데, 내용은 간단하다. 러시아는 뭔가 특별하기 때문에 이성으론 이해할 수 없고 다만 믿을 수 있을 뿐이라는 것. 그러니 "지성만으로는 러시아를 이해할 수 없네,/ 별난 기준이 그 광대함을 채우고 있기에;/ 러시아는 홀로 유일무이하게 서 있도다-/ 러시아에서는 오로지 믿음뿐."이란 번역(특히 2행)이 부분적으로 엉뚱하다는 건 알 수 있다. 요컨대, 우리는 "러시아는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시조차도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   

 

 

 

 

어제 날짜 한겨레의 칼럼 '유레카'는 '영혼의 모독'이란 제목을 달고 있었는데, 이렇게 시작된다: "'사형은 영혼의 모독이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이다. 작가는 <백치>에서 토로한다. '선고문이 낭독되면 이젠 죽음이 기정사실화합니다. 바로 여기에 무서운 고통이 있습니다. 이보다 더 가혹한 고통은 세상에 없습니다.'" 그리고 덧붙여진다: "상상이 아니었다. 절절한 체험이다. 38살 때다. 사회주의 혁명사상을 논의하던 모임에 참여했다는 이유였다. 체포됐다.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대에 올랐다. 집행하던 순간이었다. 니콜라이 1세의 특사가 내렸다. 시베리아 유형에 처했다." 짧은 문장들로 아주 긴박했던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는데, 문제는 '38살 때' 아니라 '28살 때'라는 것('38살'은 필자의 착오 혹은 상상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생이고 그가 페트라셰프스키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지는 것은 1849년의 일이다. 팩트에 좀더 주의를 기울였으면 좋았겠다.

흥미로운 일이지만, 이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 혹은 '러시아 백치'는 들뢰즈 읽기에서도 종종 마주치게 된다. 들뢰즈의 철학극장, 혹은 철학의 경연장에서는 두 종류의 백치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데카르트적 백치'('방법론적 백치'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와 '러시아 백치'이다. 라이크만이 <들뢰즈 커넥션>(현실문화연구, 2005)에서 정리하고 있는 대목을 따라가본다: 

"데카르트의 경연에서는 '백치'라는 새로운 개념적 인물이 등장한다. 이 백치는 프랑스어 같은 이성적 언어를 선호하는 인물로, 프랑스어는 학술어인 라틴어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다. 들뢰즈는 이 인물이 독창적인 형상임을(비록 니콜라우스 쿠자누스에 의해 예견된 것이라 할지라도) 알게 된다... 그러나 이 새로운 인물과 그 빛은 동시에 코기토, 즉 '나는 생각한다'를 철학의 최초의 출발점, 즉 전제조건 없는 출발점으로 만들려는 데카르트의 시도 안에 있는 암묵적인 가정을 드러낸다. 이 가정은 데카르트가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분배되어 있는 것이라고 선언하는 '통념'이라는 가정을 말한다."(77쪽)

비문인가 싶어 다시 읽어보니 굵은 글씨로 내가 표시한 대목은 오역이다(아무래도 역자의 '영어'에 좀 문제가 있는 듯하다). 원문은 "an Idiot who prefers a rational language like French, which anyone can understand to learned Latin."(37쪽) 표시한 대로 'prefer A to B' 구문이고, 여기서는 A에 해당하는 것이 '프랑스어' 그리고 B에 해당하는 것이 '학문어로서의 라틴어'이다. 데카르트적 백치는 현학적인 라틴어 대신에 프랑스어 같이 합리적인 언어를 선택한다는 것.

반면에 '새로운 인물(new persona)'로서의 '러시아 백치'란 데카르트적 백치의 '암묵적인 가정' 마저도 벗어던진 백치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어떤 새로운 인물이 통념이라는 사유학적인 기본전제 없이도 해나갈 수 있도록 나타나게 되며, 대신에 러시아문학에서 백치 또는 배우지 않은 사유자라 불리는 인물 형태의 조건에 근접하게 된다."(78쪽) '백치 또는 배우지 않은 사유자'는 'Idiot or unlearned thinker'의 번역이다.

그러니까 러시아 백치는 데카르트적 백치를 더 극단에까지 밀어붙인 형상이라 할 만하다. 그는 프랑스어 같은 자연어의 규칙마저 기꺼이/즐겁게 포기하는 것이다(참고로, 러시아문학에서 가장 철저한 '데카르트적 백치'의 형상이 등장하는 작품으로 톨스토이의 <참회록>(1882)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만큼 <참회록>은 러시아적이기보다는 프랑스적이다. 톨스토이에게서 <참회록>은 새로운 삶을 위한 '방법서설'격의 작품이다).

 

 

 

 

그렇다면, "철학에서 우리는 데카르트의 백치보다는 러시아의 백치를 보는 데서 출발한다."(In philosophy, we start to see a Russian rather than a Cartesian Idiot.) 그 백치는 "프랑스어와 같은 '자연어'에서조차도 개념적으로 낯선 어떤 것을 찾기 시작한다." 이때 들뢰즈가 예시하는 사례는 "폴란드어로 글을 쓰거나 철학적인 독일어를 '춤'으로 만들려는 니체의 꿈"이다. 그리고 (들뢰즈가 언급한 것은 아니지만) 라이크만이 들고 있는 사례는 "늘 공적인 교수직과 새로운 분석철학의 '스콜라주의'의 도래에 대해 안절부절" 못했던 비트겐슈타인이다. 거기에 내가 들고 싶은 사례는 실제로 춤을 추었던 러시아의 무용수 니진스키이다(그의 일기 <영혼의 절규>를 보라. 러시아어 원제는 <감정>). 그리고 영화의 용도를 전혀 다른 것으로 만든 타르코프스키. 하면, 니체도 비트겐슈타인도 니진스키도 타르코프스키도 모두가 백치였던 것. 러시아 백치.

다시 들뢰즈: "들뢰즈는 <차이와 반복>에서 실제로 철학에서 '전제들 없이 시작하는' 유일한 길은 일종의 러시아 백치가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통념이라는 가설을 포기하고, 자신의 '해석 나침반'을 던져 버리고, 그 대신 자신의 '백치짓'을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는 '특이한' 스타일로 바꾸고자 노력하는 그런 백치가."(79쪽) 그런 러시아 백치는 보여주는 것은 무엇인가?

"러시아 백치가 보여주는 것은, 철학적 사유는 학습되는 것이 아니며, 뿐만 아니라 철학이 자유롭게 창조된다는 말은 모든 사람이 동의할 때나 규칙에 따라 놀이할 때가 아니라, 반대로 규칙이 무엇이며 놀이자가 누구인지가 미리 주어지지 않는 대신 (그것들이) 새롭게 창조되는 개념과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들과 함께 등장할 때다."(79-80쪽) 그러니까 데카르트적 백치가 최소한의 규칙을 갖고서 출발한다면, 러시아 백치는 그마저도 빼먹고서 춤을 춘다. 이어지는 문장은 좀 길다.

"다시 말해 이런 백치들은, 처음에는 직관에 의해 주어지고 그 다음에는 많은 복합된 방식으로, 들뢰즈가 인용하기를 좋아한 라이프니츠의 격언, 즉 '우리는 항구에 닿았다고 생각할 때 사실은 여전히 바다 한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뿐'이라는 격언이 암시하는 방식으로 다른 개념들과 얽히게 되는 개념들을 창조함으로써, 더이상 고정된 방법들이나 선행하는 형식들에서 나왔다고 말할 수조차 없으며 그 대신 자신의 특이한 문제들로 작업하는 데 만족하는 철학을 통해 '실천학적으로 가정'된 것을 극화하도록 돕는다."(80쪽)

이해를 돕기 위해서 줄거리는 굵은 글씨로 표시했는데, 다소 부정확한 대목이 있다. 굵은 글씨로 표기한 대목의 원문은 이렇다: "Such Idiots help dramatize, in other words, what is 'pragmatically supposed' by a philosophy that no longer even purports to be derived from fixed methods or prior forms, that is instead content to work out its pecular problems..."(38쪽) 

역자는 'content to'를 '-에 만족하는'으로 옮겼는데, 'content to-inf'는 ('willing to-inf'처럼) '기꺼이 -하다'란 뜻이 아닌가 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백치들은 사전의 어떤 공식이나 방법 등의 도움을 받지 않고 그 고유한(그리고 아주 복잡한) 문제들을 풀기 위해 기꺼이 달려드는 것. 해서 이 백치들은 난생 처음 수박을 먹어보고(물론 '수박'이란 개념도 갖기 이전에), 난생 처음 헤엄을 쳐본 이들이다(물론 '수영'의 방법도 배우기 이전에). 아무도 가르쳐주기 전에.

 

 

 

 

그렇다면 이 백치와 유사한 형상, 혹은 인물은 <안티 오이디푸스>(와 레비스트로스의 <야생의 사고>)에 나오는 손재주꾼(handyman)이겠다. 국역본 번역으론 "우리는 이것저것 긁어보아 잘 꾸려내는 자들이다." 불어로는 'bricoleurs'. '개념 없는 자들', 하지만, 개념 대신에 재주를 갖고 있는 자들. 그래서 아무런 개념도 없이 기꺼이 자르고 오려붙이고 해서 무얼 만들거나 아니면 결국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어놓는 자들. 아이들. 백치들. 이쯤이면 들뢰즈가 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그토록 경탄해마지 않는지 이해할 만하다. 그에게, 혹은 진정한 경험론자에게 세계는 말 그대로 '원더랜드'인 것!  

 

 

 

 

'앨리스'의 러시아식 이름은 '아냐'이다. 그리고, '아니시야', '안토니나' '안나'가 다 같은 이름들이다. '안나 카레니나'. 이 대목에서 얼마전 장정일 선집의 한권으로 다시 나온 소설 <보트 하우스>(김영사, 2005)를 잠시 떠올려보는 것도 괜찮겠다(이전에 '모스크바통신'에서 한번 소개한 바 있다). IMF가 배경인 소설에서 주인공 애라가 다니는 노문과에는 그녀가 다니는 노문과에는 네 남자 친구가 있었는데, “음악을 좋아하는 차이코프스키. 영화를 좋아하는 타르코프스키. 문학을 좋아하는 도스토예프스키. 미술을 좋아하는 칸딘스키.”가 그들이었다. 이 “네 명의 ‘스키’는 단돈 5만원을 주고 산 폐차 직전의 차를 타고 4년 동안 함께 단짝이 되어” 어울려 다녔는데, “강북에서 프롤레타리아의 피를 빨아, 강남에 부르주아의 천국을 만든 거”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한 건을 계획한다.

“‘스키’들이 정한 곳은 압구정동에 있는 외제품 전문 백화점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거기에 당도했을 때는 거리에는 차량과 인파가 붐볐고 백화점은 아직까지 영업중이었다. 유럽식 외관을 하고 있는 외제품 전문 백화점의 대리석 벽에 넷이 나란히 오줌을 누기 위해서는 유치장행을 감수해야 했다. 하지만 에코와 푸코 그리고 바흐친을 이리 저리 섞고 아전인수식으로 변조하여 장래의 문화평론가로 행세하게 될 노어노문학과의 네 ‘스키’들은 전혀 그런 대가를 치를 생각이 없었다. 길거리에 방뇨를 하는 것은 꺼림칙하지 않지만 파출소에 붙들려 들어가 경을 치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맥주와 보드카까지 섞어 마신 ‘스키’들은 보무도 당당하게 백화점 현관으로 걸어 들어가서 도우미의 안내를 받아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화장실을 찾아 들어가 시원하게 오줌을 눈다. 그러면서 “너무나 자연스레, 생리적으로, 체제 친화적이 되었다.” 이들과 같이 차를 타고 동행하던 애라는 히스테리를 부리며 차에서 내려 인도로 뛰어가는데, 그런 “까닭을 이 멍청한 ‘스키’들은 조금도 알지 못했지만, 어떤 현상도 자신들이 분석하지 못할 게 없다고 믿는 이 시건방진 ‘스키’들은 그 가운데 한 명의 ‘스키’가 중얼거리는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흠, 알 수가 없는 여자군. 안나 까레니나야.” 

05. 11. 08.

P.S. 들뢰즈의 '백치'는 영어로 Idiot(백치)로 옮겨지고 어떨 땐 fool(바보)로도 옮겨진다. (라이크만도 혼용하고 있는) 이 '백치'와 '바보'가 같은 것인지 구별되는 것인지 나는 아직 분간이 되지 않는다. 이전에 '바보를 포함하고 있는 세계'에서 헷갈렸던 이유이다. 어쨌거나 들뢰즈에 관한 페이퍼들이 몇 주째 밀려 있다. 머리속에서 웅성대는 말들을 얼른 쫓아내고 싶은데, 그간에 그럴 만한 시간을 내지 못했다. 오늘은 또 '백치들' 때문에 공치고. 하긴 이런 글에 공연히 시간을 축내며 '목숨 거는' 이유는 나 자신도 모를 일이다. 하긴 '로쟈'는 러시아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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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파벨 2005-11-08 14: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너무나 잼있게 읽다가 (러시아 문학이라고는 근처에도 안가보고 들뢰즈와도 당근 안친하고-일때문에 들뢰즈 책을 억지로 몇구절 찾아본 적이 있기는 하지만-아무튼 무식이 깊은 제가 보기에도 재미있게 쓰셨네요...)

쿤데라의 소설에서도 바로 이런 이야기....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러시아인"에 대해 나오죠. 불멸에서...쿤데라가 호모 센티멘털리스(감정? 감성? 감상? 지상주의자들) 라는 개념을 설명하면서...
러시아를 유럽의 합리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위대한 감성의 나라로 소개하지요.
러시아에서 누군가가 거절받은 사랑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면 감성이 메말라 비틀어진 이성의 나라 프랑스의 변호사들이 (잃어버린 감성에 대한 향수로!) 떼거지로 모스크바행 기차 한칸을 전세내 러시아로 달려가 치정범을 변호하고...치정범이 감사의 뜻으로 변호사에게 키스를 퍼부으면 변호사가 질겁을 하고 뒤로 물러나고.....상처받은 치정범이 또 살인을 저지르고...그래서 그 모든 것이 강아지와 순대의 셈노래(이게 무엇일까요? 뭔지 전혀 모르겠지만 또 알 것도 같은 알쏭달쏭한 번역문의 수수께끼처럼 신비스러운 매력^^)처럼 반복되었다......뭐 그런 내용의...

그나저나 데카르트적 백치와 러시아적 백치가 어떤건지 정말 궁금하네요. 특히 데카르트적 백치라는게 과연 무엇일지....궁금...궁금....

이네파벨 2005-11-08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글을 올리는 동안 나머지 부분을 올려주셨군요...
데카르트적 백치와 러시아 백치....흑흑 제겐 너무 어렵군요....
백치라는 말의 정의 조차 헷갈리고 있어욤...ㅠ.ㅠ

내가 바로 백치가 아닐까...나는 무슨 백치일까? (한국산 백치~)

로쟈 2005-11-08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읽어보시면 아마 이해되실 겁니다.^^

이네파벨 2005-11-08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어려워요.....

어딘가...좌뇌형 인간과 우뇌형 인간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자연과학쪽이 저의 일차적 관심사이니만큼...)

아무튼 오후를 축내가며 써주신 글....한 사람의 독자로서 감사드려요.

오후의 졸음을 쫓는 커피와 함께...정말 맛있게..향기롭게 음미했습니다.

yoonta 2005-11-08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테의 신곡에서부터 시..그리고 산문집까지 문학이라는 '원더랜드'에서 좌충우돌하시는 로쟈님의 모습도 '백치'라고 한다면 로쟈님에 대한 칭찬인까요?...
하루빨리 데카르트적 백치성을 회복하시어...흄의 경험론이후 진척이 없는 들뢰즈관련 페이퍼좀 올려주세염..눈 빠집니당.^^

그런데..들뢰즈커넥션번역은..쫌 심하네요..원서를 사볼라도 비싸서 못사고 있는뎅..어디 남아도는 복사본이라도 없으신지...ㅜ.ㅜ

이리스 2005-11-08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그냥 읽고만 지나가던 독자 --; 인데 오늘은 그래도 댓글 한줄 올리고 갑니다. 좋은글 항상 감사하게 읽고 있습니다. 꾸벅~

로쟈 2005-11-09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onta님/ 눈 빠지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주중에 강의 두 개 하고 논문 쓰고 애보면서, 게다가 집에서는 인터넷이 안되는 상황에서 몇 마디 올리기가 쉽지 않네요. <들뢰즈 커넥션>은 저처럼 복사하시면 됩니다. 국립도서관이나 대학도서관 등에서 (대출은 안되더라도) 복사는 가능하니까요. 저도 한때 국립도서관에서 하루 3-4시간씩 복사하곤 했습니다. 돈이 안되면 몸을 팔아야죠.^^ 낡은구두님/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 새구두 한 켤레 장만하시길!..
 

 

 

 

 

제목은 문학비평가 유종호 선생(1935- )의 최근 산문집에서 가져왔다. <내 마음의 망명지>(문학동네, 2004). 얼마전 구내서점에서 우연히 눈에 띈 책을 도서관에서 대출해 읽고 있다. 몇몇 비평가들의 산문집을 한때 즐겨 읽었던 듯하다. 책을 읽으며 문득 그런 감각이 되살아옴을 느낀다. 일간지 지면에 실린 칼럼 등을 모은 이런 책들은 자투리 시간에 읽기에 가장 적합한데(1부에 실린 글 여러 편을 나는 한 일간지에서 이미 읽었었다), 길지 않은 글들에 박혀 있는 적절한 사유들을 해바라기씨 파내먹듯이 따라가보는 재미가 있다. 이른바 맛은 좋지만 칼로리는 낮은 책, 그래서 군것질로는 아주 유익한. 

해서 현재로선 책을 2/3쯤 읽었는데, 이미 연이어 읽을 책들의 목록도 정해두었다. 역시나 '문체의 옹호'란 글에서 저자가 은근히 추천하고 있는 책들이다. 정명환 선생의 <이성의 언어를 위하여>(현대문학, 2003)와 곽광수 선생의 <가난과 사랑의 상실을 찾아서>(작가, 2002)가 그것들이다. 나는 거기에 이 참에 읽어볼 요량으로 이미 갖고 있는 책 두 권,  유종호, <서정적 진실을 찾아서>(민음사, 2001)와 정명환, <문학을 생각하다>(문학과지성사, 2003)를 더 얹었다. 이 가을이 뒤늦게 풍족해진다.

책을 읽으며 새삼 깨달은 거지만 나는 유종호 선생의 책들을 꽤나 많이 읽었다. 더러 꼼꼼하게 공들여 읽지는 않았어도 대부분의 책들이 낯설지 않은 것. 가령, 저자가 '책머리에'에서 "이번 산문집은 십오 년만에 내는 것이다."라고 했을 때, 나는 이 책이 에세이집 <함부로 쏜 화살>(문이당, 1989)에 이어지는 것이란 걸 대번에 눈치챌 수 있다. 그 책을 (이제는 십육 년전) 내가 자주 드나들던 지방도시의 한 서점에서 구해 읽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서문에 정지용의 시에서 따온 제목에 대해 자세히 언급했다는 기억도. 문학평론가로서 내가 가장 즐겨읽은 이들은 김현, 김윤식 선생이었지만 알게 모르게 읽은 평론가도 따로 있었던 것. 이번 산문집을 읽으며 그 이유도 대충 챙겨볼 수 있었다.

지금은 과거지사가 됐지만 70-80년대 한국문학 평단을 주름잡던 이들로 주로 '문지'와 '창비' 계열의 평론가들을 꼽는다. 전자의 4인방이 김현, 김주연, 김병익, 김치수이고 그리고 후자의 양 거두가 백낙청, 염무웅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제3의 길을 내던 이들이 '세계의 문학' 편집위원을 오래 역임한 김우창, 유종호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각각 몸담고 있던 잡지/출판사(=물적 토대)를 근거로 하여 한국문학의 지형도를 주도적으로 그려냈었다. 물론 각 진영의 문학적 입장/태도에는 얼마간의 차이가 있었는데, 그것을 (가장 확실하게!) 암시해주는 것은 각각 간판으로 내세운 책들이다.

 

 

 


 

가령 '창작과 비평'의 얼굴은 아놀드 하우저의 <예술과 문학의 사회사>였으며, 내가 얼른 떠올리게 되는 '문학과지성'의 책은 김현의 <한국문학의 위상>, 혹은 김현/김주연 편의 <문학이란 무엇인가> 등이다(80년대에 나온 이론서 <소설과 사회>나 <구조시학>은 생각만큼의 반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지나치게 서구문학(론) 지향적이란 비판도 들었던 문지의 경우, 확실한 외국 이론가를 거명할 수 없는 건 일견 아이러니컬하다. 거기에 대하여 '세계의 문학'  곧 민음사 진영에서 내세운 건 아우얼바하의 <미메시스>였다. 이번 산문집에 실린 '내 글이 걸어온 길'에서 그 내막을 잠시 엿볼 수 있는데, 삼십대 후반에, 그러니까 1970년대 초반에 2년간 미국유학("내 평생의 유일한 학생 생활")을 가게 된 저자가 이때 주로 접하고 읽은 이들이 벤야민, 곰브리치, 아우어르바흐, 피터 버거 등등이었다. 김우창 교수와의 공역으로 <미메시스>가 처음 나온 것이 1979년쯤인바 이 유학경험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음미해볼 만한 것은 아우얼바하(아우어르바흐)의 저작이 2차 대전의 포화를 피해 떠난 '망명지' 터키에서 씌어진 책이라는 점. 저자의 베스트셀러였던 <문학이란 무엇인가>나 <시란 무엇인가>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만, 사회역사적 상상력을 강조하면서도 문학만의 독자적인 질서와 규범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유종호의 태도는 '망명문학적 태도'로 가장 잘 특징지어질 수 있다. 산문집의 제목을 정하는 데 일조한 글이 '내 정신의 망명처'인바, 거기서 저자가 '망명처'로 지목하고 있는 것은 클래식 음악(아트음악)이다. 특히 저자는 베토벤과 모차르트를 경배하는데, 한 대목을 인용하면 이렇다: "피아니스트 알프레트 브렌델은 최근에 간행된 대화집에서 조금 별나게 피아노 협주곡 9번을 가리켜 '세계의 경이의 하나'라고 부르고 있다. 21세에 작곡한 이 작품이 모차르트 최초의 걸작이라며 덧붙인 것이다. 그러나 모차르트  자신과 그의 음악 모두가 '세계의 경이'라고 해야 마땅하리라."(116쪽) 

그러한 예찬을 배경으로 하여 정의하자면, 망명문학적 태도란 문학의 표준을 예컨대 음악에 두는 태도, 예술로서의 문학은 '음악의 상태를 지향하여야 한다'고 믿는 태도이다(예술로서 음악이 갖는 특장은 아무런 적극적 지시성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음악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바, 김종삼의 시구를 빌면 '내용 없는 아름다움'이다). 비평가로서 유종호가 가장 음악적인 장르로서의 서정시에 유난히 애정을 보이는 이유는 대략 그러한 태도와 상관적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그는 우리시의 가장 '눈 밝은', 아니 가장 '귀 밝은' 독자에 속한다). 사실, 그러한 태도는 한편으로 작가/비평가의 사회적 책무가 유난히 강조되어온 우리 현대사와는 궁합이 잘 맞지 않는데, 중학교 시절부터 "소설은 김동리를 좋아하고 평론을 김동석을 좋아했던" 자신의 취향을 '자기 분열증적인 버릇'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그 솔직한 고백이다. 하지만, 저자가 보기에 (좌파 비평가였던 에드먼드 윌슨의 경우를 예로 들어) "그것이 정직한 것(태도)"이다. 해서, <비순수의 선언>(1962)으로 평론가로서 첫발을 떼었지만, <문학의 즐거움>(1995)에 탐닉하기를 한순간도 그치지 않았던 것. 

그런 그에게 애로는 없었을까? 우리말에 대한 그의 예민한 감식안과 짝을 이루는 것은 주제넘는 거대담론에 대한 거부감인데, 그러한 거부감은 이론이나 학문(과학)에 대한 회의로도 이어진다(특히 그가 미심쩍어하는 것은 문학/예술에 대한 심리학이나 정신분석학이다): "고전연구는 별개지만 문학연구가 과연 학문인가 하는 점에 대해 여전히 회의적이다. 문체 없는 소설이나 무슨 소리인지 분명치 않은 산문을 읽지 않는다." 그의 현재: "내 삶을 정당화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때로 속이 쓰리기도 하지만 열받게 마련인 난세에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젊은 학생들과 살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고 있다. 늙어가는 징조이다. 모차르트도 상전에게 발길질을 당했다는 고사를 상기하면서 삶이 안겨주는 강제를 견디며 살아왔고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179쪽, 강조는 나의 것)  

때로 상전(=권력)에게 발길질을 당하기도 했던 게 천재 모차르트의 운명이었으며, 이 운명은 곧바로 예술로서의 문학이 처한 운명이자 비평가 유종호의 운명이기도 했다. 1980년대를 보내면서 낸 <사회역사적 상상력>(1987)의 머리말에 그가 쓴 대목: "그 어느 때보다도 글쓰기에 곤혹스러운 시기였다.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은 처지에서 민족의 좌절과 인간에 대한 믿음의 흔들림은 계속적인 충격이었다. '캄캄한 밤에도 노래는 있는가? 아무렴, 캄캄한 밤에는 어둠의 노래가 있지 않은가'라고 스스로 번안한 시구로 겨우 노여운 무력감을 달래었다."(177쪽) 그가 간혹 굴욕 속에서도, '노여운 무력감' 속에서도 삶의 강제를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문학이란 '망명정부'를 현실의 정치권력과는 다른 자리에 놓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어둠의 노래'의 소속은 '어둠'이 아니라 '노래'이다). 내가 평론가 유종호를 즐겨 읽었던 것은 아무래도 이러한 과정이 그에게서 '투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인 듯하다. 나는 잘난 선인(善人)들보다는 못나고 소심했기에 살아남은 자들을 더 신뢰하는 버릇이 있다...  

05. 11. 07.

P.S. 유종호 선생과는 30년이 넘는 연배의 차이를 갖고 있지만 나는 요즘 작가/비평가들보다 오히려 더 친숙함을 느끼는데, 그건 시대적 환경의 산물이 아니라 비슷한 독서체험의 결과인 듯싶다. 그건 내가 선생만큼 책을 많이 읽어서가 아니라 그가 읽은 책들의 상당수가 러시아 문학작품이어서이다. 유명한 번역가 콘스탄스 가넷 여사의 번역으로 영역된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대학 초년생 때 읽은 걸 계기로 해서, 그는 <안나 카레니나>를 읽었고, 연이어 체호프와 투르게네프의 거의 모든 작품을 영역으로 읽었다(요즘에 누가 그렇게 읽는가?). 황동규 선생도 유사한 고백을 한 걸로 보아 아마도 당시의 '풍습'이었을 법한데(영국작가 그레이엄 그린이나 서머셋 모옴에 대한 독서도 그렇다), 이 산문집은 애당초 투르게네프의 <첫사랑>과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고, '낭만적 망명자' 게르첸에 대한 이야기도 한 꼭지 포함하고 있다(영어명 'Herzen'을 '게르첸'이라고 러시아식으로 정확하게 읽는 이는 많지 않다).  

게르첸과 관련한 대목은 사실 전공자들을 부끄럽게 하는데, 그의 자서전이 아직 국내에는 번역/소개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직접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나도 작년에 즐겨 찾았었던) '참새고지'(흔하게 부르기론 '참새언덕')에서 저자가 떠올리는 이름이 E. H. 카아의 <낭만적 망명자>를 통해서 알게 된 게르첸. 벨린스키 등과 함께 '아버지 세대'(1840년대 인텔리겐챠)의 거두인 게르첸은 <누구의 죄인가>(열린책들, 1991) 외에도 <과거와 사상>(영역본은 'My past and thought')이라는 걸작 자서전을 남기고 있다:"사상사가인 아이자이어 벌린은 정치적 교리에 매이지 않은 그의 <나의 과거와 사색>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나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 등과 나란히 설 수 있는 자서전의 걸작이라고 칭송하고 있다. 참으로 좋은 책이 읽히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이 책은 물론 번역되지 않았다."(54쪽) 작년에서야 비로소 방대한 분량의 원서를 모스크바에서 구했지만(나는 영역본만 갖고 있었다), 그리고 나로선 번역의 적임자도 아니지만 좀 찔리는 건 어찌할 수 없다.

한편, 게르첸은 73쪽에도 등장하는데, 그때 '지상 최고의 회고록'이라고 지칭되면서 홑따옴표가 아닌 (도서명을 나타내는) 겹낫쇠가 쓰이고 있다. 교정상의 실수일 것이다. 또다른 실수는 144쪽에서 '돈후안'의 원어를 'Don Huan'으로 잘못 병기한 것('Don Juan'이 맞다). 또 "외관과 실상이 다르다는 것을 간단없이 설파하는 폭로의 모티브에 향도되는 교양 체험에 감염된 현대인들은 모든 것을 일단 의심과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본다."(142쪽) 같이 수식어구가 너무 장황한 문장은 다른 저자들의 글에서라면 흔히 볼 수 있을지 몰라도 간명하면서도 유려한 문장을 구사하는 유종호답지 않은 문장이어서 눈길을 끈다.

그의 문장들은 튀거나 화려하지 않기에 독자를 전혀 놀라게 하지 않지만(물론 꽤 오래전에 도서관에서 초판을 빌려다 읽은 <비순수의 선언>은 20대 신참 비평가의 문장으로선 너무 정연하여 나를 기죽인 바 있다) 제 몫의 쓰임을 충실히 수행한다. 주제넘는(오버하는!) 것들에 대한 혐오는 그에게서 특징적이지만, 저자는 문장에 있어서도 '오버'를 경계한다. 그것이 그의 온건한 균형감각을 이룬다. 그 균형감각은 따로 현실감각이기도 하다. 앞에 인용한 대목에서 "내 삶을 정당화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을 저자는 토로하기도 했는데, 작년에 그가 낸 책 <나의 해방 전후>(민음사, 2004)는 그러한 '정당화'의 시도로 여겨진다.  

      

 

      

 

'내 삶의 소롯길에서'란 글에서 임화의 시집 <현해탄>을 건네주었던 소년시절의 한 친구를 회상하며 그가 내리는 결론: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일의 하나는 살아보지 않은 시대를 참으로 진실 육박적으로 상상하는 일이 아닌가 하고 나는 요즘 생각하고 있다... 그 점 상상의 나래를 펴서 살아보지 않은 과거를 적는 것은 문자 그대로 창작이요 왜곡이지 재현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 점 우리는 모두 살아온 과거를 될수록 정직하게 기록해둘 의무가 있다고 생각된다. 해방전후를 다룬 대부분의 소설이나 실록이 내게는 모두 황당한 '창작'으로 여겨진다."(166쪽) <나의 해방전후>가 나오게 된 소이연이겠다. 더불어, (육박적)'진실'은 유종호 비평의 또다른 축이다. 그의 비평은 시(=즐거움)와 진실 사이에 있다.    

책에는 난생 처음으로 저자가 경험한 '한가하고 자유로운 방학'(막내딸이 머물고 있던 미국의 엠즈라는 대학촌 체류기)의 부산물로 얻은 시 한편이 소개돼 있는데(127-8쪽), 제목이 '서산이 되고 청노새 되어'이다. 알고 보니, 작년에 나온 시집의 표제시이다. 6연으로 된 시의 5연은 이렇다.

시끌시끌 막가는 아침의 나라에서/ 시새워 죽을 쑤는 동강난 산하(山河)에서 
터벅터벅 육십 년/ 무슨 반딧불을 보자고/
서산이 되고 청노새 되어 숨가뻐온 것인가

서산이는 서산나귀로서 청노새처럼 사람들의 짐이나 나르는 짐승이라 한다. 그렇다면 '시인'에게 시란 다른 무엇보다도 그런 '서산이'와 '청노새'의 삶을 위로하고 ('알게 뭐냐며')초극하는 '반딧불이'에 다름 아니겠다. 그리고 그것의 다른 이름이 '내 마음의 망명지'일 것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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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5-11-08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열 권 정도 쌓아두면 그걸로 풍족한 가을이지요. 그런데, 행복나침반님은 행복을 찾으시는 건가요, 찾아다주시는 건가요?..
 

오늘은(11.03) 유치원이 쉬는 날이라 오랜만에 아이를 보며 하루를 보낸다(보내야 한다). 점심으로 피자를 시켜먹고 아이를 피아노학원에 바래다준 후, 학원 윗층의 PC방에서 메일함과 서재 등을 확인한다. 별거 없는데, 아이가 피아노를 치는 시간 동안 집에 다시 들어갔다 나오기도 뭐하고 PC방 요금도 최저시간제인지라 좀더 죽치고 있어야 한다. 그 시간만큼만 최근에 나온 책들 몇 권을 구경해보기로 한다.

 

 

 

 

첫번째 책은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문명의 붕괴>(김영사). 788쪽의 방대한 분량이다. 지난주 중앙일보에 최재천 교수와 다이아몬드의 대담이 실려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다. 다이아몬드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바 있기 때문에 군소리를 달지 않겠다. 대신에 소개글을 좀 옮겨오면, "<총, 균, 쇠>로 퓰리처상을 받은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이번에는 '과거의 위대한 문명사회가 붕괴해서 몰락한 이유가 무엇이고, 우리는 그들의 운명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문제를 다룬다. 즉 이 책은 파괴된 문명의 역사에서 배우는 인류의 미래에 관한 보고서이다."

그는 붕괴(Collapse)의 개념을(어감상으론, 최재천 교수의 지적대로 우리말의 '몰락' 정도가 더 적절한 듯싶다. 물론 붕괴는 너무 '갑작스런 몰락'을 지시하기도 한다. 우리에겐 '성수대교 붕괴'가 있었다)  "상당히 넓은 지역에서 오랜 시간 동안 일어난 인구 규모, 정치.사회.경제 현상의 급격한 감소"로 정의한다. 그리고 "그가 택한 문명의 붕괴 지역은 단순히 지배계급이 전복되고 교체된 지역이 아니라 지금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는 곳, 또는 서서히 붕괴의 조짐을 보이는 곳이다." 해서, "로마 제국이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몰락보다는 마야 문명, 남태평양의 이스터 섬, 아시아의 앙코르와트 등처럼 단순한 쇠락이 아니라 완전히 몰락해버린 사회들을 주로 비교,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와서 붕괴의 조짐이 보이는 곳, 즉 르완다, 아이티, 중국, 오스트레일리아의 상황도 점검하고 있다."

그가  지적하고 있는 붕괴의 이유들: (1)환경 파괴 (2)기후 변화 (3)이웃 나라와의 적대적 관계 (4)우방의 협력 감소 (5)사회 문제에 대한 그 구성원의 위기 대처 능력 저하. "이런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결국에는 한 사회나 문명이 붕괴하거나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는데, 그 기준에서 자유로운 문명, 국가, 사회가 현재 몇이나 될는지는 좀 의심스럽다. 요는, 망할 땐 망하더라도 이유나 알고 망하자는 것이 될까? 

참고로, 그의 다음 책은 '국가'의 성립에 관한 것이라고 하며 5-6년 정도 걸릴 예정이라고. 다이아몬드의 책을 읽어본 독자라면 다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그의 장점은 무엇보다도 방대한 시야와 스케일이다(그는 역사를 대륙 단위로 훑어내린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이론적 무기는 생물지리학. 역사학 방법론으로서 인구학과 함께 더 주목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 비하면 국내 역사학자들의 관심사는 다소 협소해 보인다. 거의 유일한 예외인 듯싶은 이는 동서문명 교류사의 권위자인 정수일 선생이다. 그의 <한국 속의 세계>(창비사)가 2권 짜리로 이번에 출간됐다. 한겨레에 연재됐던 걸 몇 번 읽은 적이 있는데, 언제 그의 주저들까지 다 모아놓고 읽어보는 호사를 누렸으면 싶다. 아이에게 (피아노 대신) 골프를 가르쳐야 할까?

 

 

 

 

두번째 책은 남미의 언론인 에드아르도 갈레아노의 3부작 <불의 기억>(따님). 중남미사로 분류되는 역사책인데, 저자가 "스페인에서 두번째 망명생활을 하던 80년대 전반에 라틴아메리카의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역사를 아우른 3부작이다. <불의 기억>에 담긴 역사는 박물관에 갇히고, 헌화와 놓여진 동상이나 대리석 기념물 아래 매장된 역사가 아니다. 연표 속의 공식 역사에서 지워진 하위주체들의 목소리를 되살려낸 살이 있는 역사이다."라고 소개돼 있다. 여기서 '하위주체(subaltern)'란 말은 탈식민주의자들의 용어이다. 김택현 교수의 <서발턴과 역사학 비판>(박종철출판사, 2003)이 관련서. 우리로 치면 구술 민중사가 하위주체를 역사 속으로 적극 수용하는 방식이 될까? '민중의 함성'?

내가 갖고 있는 라틴아메리가 관련 서적은 <라틴 아메리카의 문학과 사회>(까치글방, 2001), <영화 속의 문학 읽기>(책이있는마을, 2001) 등이고 작가 카를로스 푸엔떼스의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까치글방, 1997) 정도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는데, 이번에 '풍족한' 두께의 책이 나와서 반갑다. 이 또한 언제 읽을 수 있을는지는 전혀 기약할 수 없지만.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갈레아노의 책은 그간에 많이 번역돼 있다. 말하자면, 그는 우리가 중남미를 이해하는 한 '통로'이다. 갈레아노의 통역으로 우리는 중남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 것. 그 중 상대적으로 가장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책은 교육서인 <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르네상스, 2004)인 듯하다. 소개에 따르면, "라틴아메리카를 대표하는 비판적 지성 에두아르도 갈레아노의 열 번째 작품. 재치있고 예리한 언어로 시장경제와 신자유주의를 재해석하며 우리사 사는 세상의 모순들을 고발한다." 물론 그런 모순으로 치자면 우리도 남못지 않다. 한데, 왜 우리 책들은 수출되지 않는 걸까? 

 

 

 

 

세번째 책은 지역을 러시아로 옮겨보자. 작년에 영화화되어 초대형 히트를 기록한 러시아 영화 <나이트 워치>(영역본 제목이며 '야간 경비대' 정도의 뜻)의 원작 소설 <나이트 워치>(황금가지)가 영화 개봉에 즈음하여 출간됐다. 영화는 올 부천판타스틱 영화제의 개막작이기도 했는데, 기대만큼(!) 국내에서 별반응을 얻어내지 못했다. 카자흐스탄 출신의 작가 루키야넨코는 이 작품이 300만부 이상 팔리면서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했다고. 하긴 나도 작년 모스크바 체류시 이 작품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다빈치 코드>만큼은 아니었지만). 하지만 꿋꿋하게 사지 않았고 대신에 영화를 비디오CD로 사두었다(아직도 보지 않았다!).

물론 원작소설 자체가 대중성을 갖고 있기도 하겠지만, 작품이 유명해진 건 영화가 큰몫을 했다. 자료에 따르면, 러시아 국영방송 (제1채널)에서 300만 달러를 들여 제작한 이 작품은 러시아에서만 1700만 달러의 수입을 올렸고(<반지의 제왕> 3편을 앞질렀다), 각국에 수출되었다. 헐리우드의 '20세기 폭스사'는 이후에 제작될 2, 3편의 세계배급권까지 선매한 상태이니 가히 폭발적인 반응이다. 하지만, 영화를 본 이들의 반응을 그닥 신통찮은데, 딱 우리의 <쉬리>를 생각하면 되겠다. 즉, 영화적 의미보다는 영화시장의 크기를 바꾸어놓은 '초대형' 블록버스터로서 사회학적 의미를 더 많이 갖는 작품. 이후에 러시아영화는 90년대 이후의 부진을 씻고 적어도 상업적으로는 중흥기를 맞고 있다(올가을에 개봉된 또다른 블록버스터 <9중대>는 <나이트 워치> 2배 가량의 수익을 예상하고 있다고).

소설의 무대는 "현대 러시아의 대도시 모스크바"로서, "크고 오래 된 도시의 일각에는 현대적인 고층 건물과 위락 시설들이 늘 새롭게 생겨나고 있지만 우중충한 옛 건축물들과 근대화의 흔적들 또한 곳곳에 남아 있"는 모습. "음습한 골목길, 지저분한 술집, 1층이 주차장으로 되어 있는 초라한 서민 아파트, 사람들에 부대끼는 지하철 등이 소설 속 장면들의 주 배경"이며, 여기에 빛의 마법사와 어둠의 마법사들의 또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어림짐작할 수 있는 판타지 소설의 구도. 판타지 독자라면 '러시아 판타지'란 별미를 감상해보셔도 좋을 듯하다.

물론 내가 조만간 이 책을 집어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 경우에라도 동기는 '판타지'가 아니라 '러시아'이다. 왜 이런 작품이 읽히는가에 대한 관심에서. 비슷한 동기에서 같이 읽어볼 만한 책을 두어 권 더 소개한다. 하나는 KBS의 모스크바 특파원을 지낸 조재익 기자의 <굿모닝 러시아>(지호, 2004). 우리말로 씌어진 러시아 입문서로서 가장 추천할 만하다. 무엇보다도 강점은 '지금의 러시아 현실'에 대해서 많은 유익한 정보들을 제공해주고 있다는 것. '러시아 여성'에만 관심있는 독자들도 일독해 볼 만하다.(나는 이 책을 모스크바에서 연초에 떡국을 먹으러 간 선배기자의 집에서 처음 보았다. 감동적인 떡국이었다!) 

다른 하나는 미국의 외교관 출신 예일 리치먼드가 쓴 <우리가 몰랐던 러시아, 러시아인>(일조각, 2004). 원제는 'From Nyet to Da : Understanding the Russians'(2003 개정판)인데, 제목에서 'Nyet'는 'No', 'Da'는 'Yes'란 뜻이다. 이건 이중적인 의미가 있는데, 러시아에 대해서 몰랐던 독자들이 이 책을 통해서 러시아에 대해 알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대개가 불친절한 러시아인들 자체가 서로간의 교제를 통해서 부정적 태도(Nyet)에서 긍정적 태도(Da)로 변모해간다는 뜻이기도 하다(초면에 'Yes'라고 말하는 친절한 러시아인은 짐작에 창녀들 빼고는 없다. 이 '서비스 문화'의 부재에 대해서는 모스크바통신에서 다룬 바 있다). 여하튼 비교적 얇은 분량의 책이지만 러시아 입문서로선 (기대에 안 맞게) 최적이다. 값이 좀 비싼 게 흠.  

 


 

  

 

네번째 책은, 이제 이웃나라 일본으로 넘어와서 '인문학으로 읽는 제패니메이션'이란 부제의 책 <아니메>(루비박스). 원제는 'Anime from Akira to Princess Mononoke'(2001), 그러니까 '아키라에서 모노노케 히메까지의 일본 아니메'를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있는 책. 저자인 수잔 네피어는 일본 애니메이션의 세계적 권위자라고 하는데, 한 일본인의 추천사는 이렇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관해 이처럼 예리한 해석이 담긴 책이 태평양 저편에서 씌여졌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지은이에게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책에 대해선 오늘자(11.04) 한겨레의 리뷰가 자세므로 참조하시길. 더불어 문득 갖게 되는 의문. 우리는 한국문화에 관한 그런 책을 갖고 있는가? 

개인적으로 일본 아니메를 즐겨보진 않지만 가끔은 보며, 러시아에 소개된 아니메를 두어 편 사서 보기도 했다. 때문에 <아니메> 같은 책도 나중에 도서관에서 대출해볼 생각은 있다. 비교적 최근에 국내에서 나온 일본만화 관련서로는 정현숙의 <일본만화의 사회학>(문학과지성사, 2004), 그리고 작가론인 <미야자키 하야오>(살림, 2005)가 있다. 그 이상의 참고문헌들은 그 책들을 참고하면 되겠지.

 

 

 

 

아는 체할 형편은 아니지만, 일본 아니메에서 자주 다뤄지는 테마는 '나는 누구인가?'이다. 정체성에 관한 물음을 일본인들은 유난히 자주 던지는 모양인데, 그런 주제와 관련하여 읽어볼 만한 책으로 <시냅스와 자아>(소소)가 눈길을 끈다. 부제는 '신경세포의 연결 방식이 어떻게 자아를 결정하는가'이고 당연히 (만화가 아니라) '과학책'이다. "뉴런들 사이의 공간인 시냅스는 우리가 생각하고, 행동하고, 상상하고, 느끼고, 기억하는 통로다. 즉, 시냅스는 우리 각자가 독립적이고 복합적인 개체로 기능하도록 매순간 도와준다. 이 책에서 저명한 뇌과학자인 조지프 르두는 뇌가, 특히 시냅스가 어떻게 퍼스낼러티를 만들고 유지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소개는 간단하지만 분량은 630쪽이다. 이 신간이 막바로 떠올려주는 책은 호프스태터와 다니얼 데넷이 편집한 <이런, 이게 바로 나야!>(사이언스북스, 2001). 원제는 'The mind's I : fantasies and reflections on self and soul'(1982)이고 보르헤스의 '보르헤스와 나'부터 시작해서 유익한 읽을 거리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다소 '경망스런' 책 제목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많이 읽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시냅스와 자아>는 소소출판사에서 내는 'new humanist classic' 시리즈의 제5권으로 돼 있는데, 같은 시리즈에서 가장 읽어보고 싶은 책은 제프리 밀러의 <메이팅 마인드>(소소, 2004)이다. 부제는 '섹스는 어떻게 인간 본성을 만들었는가?' 이고, 원제는 'Mating Mind: How Sexsual Choice Shaped the Evolution of Human Nature'(2000). 이 흥미로운 주제의 책이 그닥 주목받지 못했다면 그건 '메이팅 마인드'라는 어정쩡한 제목 때문이 아닐까 싶다. 부제를 내세우는 것이 선정적이었다면, '성과 인간의 진화' 같은 제목을 어땠을까? 아니면, '짝짓기 본능'은? 저자는 "아무리 생존능력이 뛰어난 호미니드라 할지라도 섹스 파트너를 유혹하여 자식을 낳지 못한다면 결코 우리의 조상이 될 수 없었다"라는 말로 진화에서 성선택이 가지는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건 진화론의 ABC이다. 더불어 진화적으로 성공한 개체의 기준은 자녀의 수가 아니라 손자의 수이어야 한다(손자의 수가 자녀의 성공 여부를 가름하므로). 이런 기본적인 감각/본능이 부실하거나 고장난 이들은 필독해야 할 책.

한데, 성선택설의 원조라고 해야 할 다윈의 <인간의 유래(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 )>는 왜 아직 소개되지 않는 것일까? 그 책의 테마를 뒤집은 브로노프스키의 <인간 등정의 발자취(The Ascent of Man)>(바다출판사, 2004)까지 작년에 개정판이 나왔는데 말이다. 게으름의 소치이되, 다윈에게 불공정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섯번째는 프랑스로 건너가 보자. 20세기초 프랑스의 대표적인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아카넷)이 재번역돼 나왔다. 연초에 <창조적 진화>가 재번역된 데 이어서 이번에 또 한권의 주저가 번역됨으로써 베르그송의 새단장이 얼추 마무리되었다. 지난 봄에는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서광사, 1998)을 번역했던 송영진 교수의 연구서 <직관과 사유>(서광사)가 출간되기도 했었다. 해서, 베르그송에 관해서라면 면피의 여지가 없다. 꼬박 읽는 수밖에. 개인적으론 들뢰즈의 영화론 때문에, 그리고 세기초 러시아 모더니즘 문학과의 연관성 때문에 읽어야 하고 읽고 있다.   

내게 베르그송이란 이름을 의미있는 이름으로 처음 알게 해준 이는 작년 가을에 세상을 뜬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이다(고인의 명복을 빌어줍시다). 그녀가 18세인 1954년에 발표한 데뷔작 <슬픔이여 안녕>에서 여주인공을 대입시험인 바칼로레아를 준비하기 위해 플로베르의 <감정교육>과 베르그송 같은 '고리타분한' 책들을 읽느라 고생한다. 그 책을 나는 고등학교때 삼중당문고(1984)로 읽었었는데, 책에 실린 대담에서 작가가 카뮈보다 사르트르를 좋아한다고 하여 내가 읽게 된 책이(꼭 그런 이유에서는 아니었겠지만) 사르트르의 단편집 <벽> 등이다(역시 삼중당문고). 그 <벽>(문학과지성사, 2005)이 이번에 김희영 교수의 번역으로 다시 출간됐다. 알다시피 올해는 사르트르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인데, 별다른 소식이 없다 싶었더니 좀 뒤늦게 구색을 맞추는 듯하다. 나는 해가 가기 전에 <문학이란 무엇인가>(민음사, 1998)이나 예의상 다시 읽어둘 참이다. 예전에 내가 읽은 건 김붕구 선생 번역(문예출판사)이었는데, 정명환 선생의 번역은 '1947년의 작가적 상황'이란 장문의 글까지 마저 완역한 책이다. 이럴 땐 러시아어본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사들고 오지 않은 게 후회되는군...

04. 11. 03-04.

P.S.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개진하고 있는 사르트르의 문학론은 시와 산문을 구별하고 시를 '앙가주망'(참여)에서 제외시키고 있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그에 대한 반론으로 유력한 사례가 시인 김수영이다. 김수영의 시를 꼼꼼하게 읽고 있는 책도 출간된바 오봉옥 시인의 <김수영을 읽는다>(랜덤하우스중앙)이다. 저자는 재작년에 <서정주 다시 읽기>(박이정, 2003)을 낸 적이 있는데, 그와 마찬가지로 시강의를 묶은 이 책은 그 연장선이기도 하다. 특징은 시 한편 한편에 대한 꼼꼼한 읽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이며, 나는 무엇보다도 그런 식의 '읽기'를 '비평'보다 선호한다(요즘 '숲'을 보는 비평가들은 많으나 '나무'를 찬찬히 뜯어보는 독자들은 많지 않은 듯하다. 둘의 균형이 필요하다). 

 

 

 

 

 

김수영에 관한 책들은 언제부턴가 해마다 여러 권씩 쏟아지고 있는데, 올해도 예외는 아니어서 최동호 교수 등이 쓴 <다시 읽는 김수영 시>(작가, 2005), 김명인/임홍배 교수가 엮은 <살아있는 김수영>(창비사, 2005) 등이 출간됐었다. 이 정도면 김수영은 '풀'이나 '나무'라기보다는 '마르지 않는 샘'이라고 해야 할 듯싶다. '자세히 읽기' 시리즈로는 2003년에 열림원에서 <서정주의 화사집을 읽는다>를 비롯해 댓 권의 책이 나온바 있는데, '실패한' 기획인지 후속작이 없다. 독자로서 유감스럽다.

P.S.2. 또다른 유감은 독일 철학자 가다머에 관한 것이다. 며칠 전 서점에서 그의 강연 <고통>(철학과현실사)이 출간된 걸 봤는데, 103세 타계한 금세기 '최장수' 철학자가 평생 척추질환으로 고생했다는 사실은 새롭게 알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철학자 가다머의 크기를 가늠하기에는 역부족인 소품. 이상하게도 이 해석학의 거두는 주저인 <진리와 방법>이 완간되는 대신에 좀 한가한 소품들만이 번역/출간되고 있다. <교육은 자기 교육이다>(동문선, 2004)나 <현대의학을 말하다>(몸과마음, 2002) 같은 책들이 그렇다. 국내엔 한국해석학회도 있고, 그 학회지에 실리는 논문의 상당수는 가마머의 해석(철)학에 관한 것인데도 사정이 이렇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제라도 단합해서 <진리와 방법> 정도는 번역해주는 것이 온당하며 가다머에게도 공정한 일이지 않을까?

 

 

 

 

<진리와 방법>은 저자가 나이 60세에 출간한 책이지만 그의 최초의 주저이다(뛰어난 철학교수였지만 그는 글쓰는 걸 힘들어 했다고). 하지만 이후에 40여년 이상을 더 장수했으니 '청년 가다머'의 저작이라고 해도 억지는 아니겠다. 이미 영어로는 두 차례 번역된바 있으며 독일 철학이 강의되고 있는 나라에는 대부분 번역돼 있을 법하다. 물론 이런 책이 번역돼 있지 않다고 해서 한 문명이 붕괴될 리는 없겠지만 '문명의 수치' 정도는 된다. 참고로, 부분역인 <진리와 방법1>(문학동네, 2000)은 5년전에 출간됐다. 물론 10년째 소식이 없는 하버마스의 <소통행위이론>(의암, 1995)에 비하면 사정이 나쁜 건 아니지만, 이런 책들이 나오길 기다리려면 과연 가다머만큼의 장수가 필요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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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11-03 22:56   좋아요 0 | URL
"PC방 요금도 최저시간제인지라 좀더 죽치고 있어야 한다"
-.- =b 진정한 폐인이십니다. ㅋㅋㅋ

parioli 2005-11-03 23:48   좋아요 0 | URL
종종 들러서 글 읽고 갑니다. 좀 전엔 스크랩도 하나 했습니다. 격려(?)의 글을 남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네요.

로쟈 2005-11-04 19:56   좋아요 0 | URL
제가 '자주' 글을 올리는 건 아니므로 '가끔' 들르시면 됩니다. '격려금'도 환영합니다.^^
 

오늘자 한국일보 문화란에 '요즘 시'의 경향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오늘이 '시의 날'인 걸 기념해서인 듯한데, 며느리도 모를 법한 이 날의 유래는 이렇다고: "11월1일은 제19회 '시의 날'이다. '시의 날'은 우리나라 현대시의 효시로 알려진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1908년 11월 잡지 '소년' 창간호에 실린 것을 기념해 1986년 제정됐다." 1986년이면 전두환 정권하이다. 5공 때 이어령 선생이 문화부 장관을 한 적도 있으니 그 분 아이디어인지도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딱 이어령표 마인드의 산물 같다. 어쨌거나, 그런 날이 벌써 19번째이건만, 무슨 행사를 벌인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시시한 날인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저런 기념일을 챙기는 건 문화부 기자의 본분에 충실해 보이며, 덕분에 나는 아침부터 '요즘 시'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 그리고 연예인들만한 사이즈로 지면에 오른 요즘 시인들의 면면들을 구경해볼 수 있었다. 혹 기사를 지나쳐버린 분들을 위해서 내용을 정리하고, 생각할 거리를 챙겨두도록 한다.

"일군의 젊은 시인들에 의해 시도되고 있는 우리 시의 새로운 경향을 짚"고자 하는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요즘 시(詩)가 어려워졌다는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시인 평론가들조차 불편함을 토로할 정도다. 한 두 사람 한 두 편의 돌출적인 현상이 아니라, 최근 등단했거나 한 두 권의 시집을 낸 젊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뚜렷한 경향을 형성하고 있다." 그런 경향을 다른 말로는 '엽기시'라고 한다.

 

 

 

 

얼마전 미당문학상 수상작이 발표되었는데, 수상자는 작년에도 시인들이 뽑은 최고작을 쓴 바 있는 문태준 시인이며 수상작은 <누가 울고 간다>이다. 짧은 시이므로 옮겨본다.  

밤새 잘그랑거리다/ 눈이 그쳤다

나는 외따롭고/ 생각은 머츰하다

넝쿨에/ 작은 새/ 가슴이 붉은 새
와서 운다/ 와서 울고 간다

이름도 못 불러본 사이
울고/ 갈 것은 무엇인가

울음은/ 빛처럼

문풍지로 들어온/ 겨울빛처럼
여리고 여려

누가/ 내 귀에서
그 소릴 꺼내 펴나

저렇게/ 울고
떠난 사람이 있었다

가슴속으로/ 붉게/ 번지고 스며
이제는/ 누구도 끄집어낼 수 없는

특별히 덧붙일 것도 뺄 것도 없는 소품인데, 사실 이런 정서와 리듬감, 시상 전개 등이 한국 서정시의 주류를 형성해왔다(문태준 이전에는 장석남이 있었다). 기형도 이후에, 혹은 장정일, 유하 이후에 여전히 이러한 시가 씌어지는 것은 어찌보면 '퇴행'이면서도 '관례'이다. 유구한. 그리고 그런 시인과 시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는 건 당연해 보인다. 2000년도 이후에 나는 시도 쓰지 않고 읽는 것도 게을리 하고 있지만(나는 시에 대한 '기대'를 거의 접었다) 요즘 동태를 보아하니 그 사이에 꽤 특이한 젊은 시인들이 여럿 등장한 모양이다. 세태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문학적 성감을 찾아나선 이들의 이름은 김행숙 황병승 김민정 김근 김언 이민하 김이듬 등이다. 기사에는 8명의 시인들이 8인방처럼 거명돼 있는데, 요약하면 1:8이요, '문태준과 아이들' 혹은 '문태준과 엽기들'이다. 이들을 차례로 호명해보자.

 

 

 

 

 

 

 

 

 

 모두가 올해 데뷔시집이나 새시집을 낸 젊은 시인들이다. 김이듬, <별모양의 얼룩>(천년의시작, 2005); 진수미, <달의 코르크마개가 열릴 때까지>(문학동네, 2005); 김근, <뱀소년의 외출>(문학동네, 2005); 김언, <거인>(랜덤하우스중앙, 2005); 이민하, <환상수족>(열림원, 2005); 김민정,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열림원, 2005); 황병승, <여장남자 시코쿠>(랜덤하우스중앙, 2005); 김행숙, <사춘기>(문학과지성사, 2005)

(평론가 이장욱에 의하면) '외계어'로 시를 쓰는 이들은 (평론가 권혁웅에 의하면) 우리 시단의 '미래파'이다. 물론 이들이 떼로 몰려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외계인들끼리는 소통가능한가?) 하여간에 앞에서 인용한 문태준류의 시와는 달리 알아먹을 수 없다는 것이 이들 시의 특징이고 특장이다. 기자도 이 점을 표나게 지적하고 있다: "그 변화의 선두에 김행숙(35) 시인의 비교적 짧은 시 ‘달무리’를 보자. “그의 진동이 그에게 후광을 만든다. 그가 문둥이같이 뭉개질 때/ 배는 출렁이고 있었다. 내가 깔고 누운 파랑은 나를 통과한 그의 뒤편일까? (중략) 그의 뭉개진 코가 킁킁대며 누구니? 누구니? 묻고, 다시 물을 때// 아으, 부풀어 오르는 한 그루 버드나무.” 그의 시는 이성적 사고체계로 스며들지 않는다. 오히려 무의식과 느낌, 환상ㆍ분열적 내면 풍경에 철저히 기대고 있는 듯하다. 전통 서정시의 독법에 따라 어떤 의미나 이미지를 포착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고 무모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사실 알아먹을 수 없는 시가 문학사에 새로운 건 아니다. 이미 1930년대의 이상이 '욕먹는' 시 <오감도>를 썼다. 1950년대에는 '초현실주의 시'를 쓴 조향 시인 같은 분도 있었고(<조향 전집>(열음사, 1994)), 김춘수 시인의 무의미시나 이승훈 시인의 비대상 시들도 다 낯선 시들이었다. 그렇다고 이성복과 황지우의 시는 주류적인 시였나?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요즘의 '엽기시' 경향에 대해 특별히 호들갑을 떨 이유는 없어 보인다. 다만, 최근의 나온 시집들이 주된 경향을 이루면서 하나의 '트렌드'를 형성하고 있다는 게 눈에 띌 뿐. 더불어, 현란한 이미지들이나 수사의 국적, 계보, 혹은 전통을 종잡을 수 없다는 게 이채로울 뿐. 해서 새로운 시 독법이 필요하다? 

"이들 시의 메커니즘은 다양하다. 빛이나 공기 입자의 산란처럼 어지럽게 좌충우돌하는 사유의 혼종성, 세계와 자아의 대립과 반영을 넘어 자아분열적이기까지 한 현란한 이미지, 성적ㆍ관능적 환상과 잔혹하고 그로테스크한 상징 등…. 이성과 관념 이전의 원초적 시어들이 은닉하고 있는 ‘무엇’을 감지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시 독법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 김행숙 시인은 문학적 감성의 변화를 말한다. “어떤 시는 시인/평론가보다 시를 잘 알지 못하는 일반 독자들이 오히려 뜨겁게 반응합니다. 폭 넓게 소통한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좁은 대신 깊이 소통하는 층이 분명히 있어요.” 그는 그것을 생물학적 세대차이라기 보다는 차별화한 문화체험에서 비롯된 문화적 세대차이일 것이라고 말했다."(강조는 나의 것) 참고로 기자가 나열하고 있는 찬반론은 이렇다. 

이들 시에 대한 비판도 있다.

-문학의 본령이 문자언어를 통한 소통이다. 암호에 가까운 자의적 기호와 자폐적 무의식의 흔적들이 어떻게 문학인지 모르겠다.

-환상이 없는 문학은 없다. 두보의 시에도, 카프카의 글에도 환상은 있다. 하지만 이들의 시는 삶의 리얼리티를 상실한 채 머리(환상) 속에서 떠오른 느낌들을 시적 긴장 없이 풀어놓은 것 같다.

-하나 하나의 작품을 놓고 보면 참신하지만 모아놓고 보면 시를 형성하는 문법이나 문장을 엮는 방법 등이 흡사하다. 일종의 유행 같다는 생각이다.

그에 대한 반론이다.

-나는 말쑥하고 균형 잡힌 시를 혐오한다. 안정감 있고 깨달은 자는 침묵하면 좋겠다. … 나는 내가 쓴 시에 관해서 말하기가 뭐하다. 낯설고 잘 모르겠고, 몰라서 쓴다.… ‘노력’해야 한다면 그때는 안녕.(김이듬, ‘시와 반시’여름호-현대시와 퇴폐)

-시단에서 유일하게 죄악인 것이 있다면 바로 다양한 꼴을 못 보아주는 태도이다. 시적으로 봐도 그렇고 생물학적 측면에서도 굉장히 위험한 태도다.… 자신 안에 스스로 잡종의 비율을 높여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김언, ‘웹진 문장’ 10월호-우리 시의 다양성과 새로움)

-아름다움은 움직이는 거다. …최근 시들을 비판하는 이들이 논거로 삼은 자리는 절대로,항구적인 진리의 자리가 아니다. 차라리 최근 시들이 진리로 간주되어온 그 자리를 비판의 대상으로 겨누고 있다고 말해야 옳다. (권혁웅 비평집 ‘미래파’-2005년 젊은 시인들)

긍정적인/전향적인 관점에서 이러한 경향을 바라보는 세 평자의 의견:

-황현산(고려대 불문) 교수는 “한국 현대시단의 양대 흐름을 형성했던 농경사회적 정서와 도시적 정서의 굳은 틈을 비집고 서울의 하위정서 혹은 지방도시적 정서들이 새로운 경향을 형성하는 듯하다”며 “하기에 따라서는 향후 2~3년 내에 우리 시단의 지형도가 바뀔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통의 문제와 관련, 그는 “승리한 자의 말은 상식에 근거하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소통되지만, 억압 받는 자는 말 한 마디 하기도 힘들고 하더라도 타박 당하기 일쑤”라며 “하지만 그 말은 우리가 반드시 소통해야 할 말“이라고 말했다.

-2003년 김행숙씨의 첫 시집 ‘사춘기’(문학과지성사)의 해설에 이장욱(시인ㆍ소설가ㆍ평론가)씨는 “우리가 도달해가는 현대시의 어떤 징후”라는 조심스러운 표현을 쓴 바 있다. 이제 그 징후는 좋든 싫든 하나의 도도한 경향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최근 젊은 시인들의 경향이 우리 현대시의 다양성을 확장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지배적 경향을 형성할 지는 미지수”라고 말했다.

-최근 낸 비평집에서 이들 젊은 시인들의 경향을 ‘미래파’라 명명한 권혁웅(시인ㆍ평론가)씨는 “60년대의 김수영, 80년대의 이성복이 당대 시단에 충격을 준 것처럼, 이들 시가 낯설고 불편한 것은 새로운 미학과 세계관을 한 발 앞서 반영한 것이기 때문”이라 했다. “먼 훗날, 이들의 작품이 낡았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날이 분명히 올 것이다. 다르게 말해서 이들의 작품이 가까운 미래에 우리 시의 분명한 대안이라는 것을 인정할 날이 올 것이다.”(‘미래파’ 171쪽)

이어서 기자는 두 편의 시를 예시하고 있다. 나의 독후감으론 황병승과 진수미의 예시된 시는 종류가 좀 다르다. 그것은 시가 그 독법에 있어서 어느 만큼의 논리를 허용하는가, 혹은 어떤 종류의 논리를 요구하는가에 달려 있다. 더불어, 시의 난해성이 시적 주체의 개성과 연관되는 것인지, 아니면 개별성 이전의 전주체성(presubjectivity)과 연관된 것인지 구별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요즘 시'를 한번 읽어보시라. 그리고 해독/해석해 보시라. 나의 생각은 조만간 다른 자리에서 정리해두도록 하겠다.

▲ 커밍아웃 / 황병승

나의 진짜는 뒤통순가 봐요
당신은 나의 뒤에서 보다 진실해지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얼굴을 맨바닥에 갈아버리고
뒤로 걸을까 봐요

나의 또 다른 진짜는 항문이에요
그러나 당신은 나의 항문이 도무지 혐오스럽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입술을 뜯어버리고
아껴줘요, 하며 뻐끔뻐끔 항문으로 말할까 봐요

부끄러워요 저처럼 부끄러운 동물을
호주머니 속에 서랍 깊숙이
당신도 잔뜩 가지고 있지요

부끄러운 게 싫어서 부끄러울 때마다
당신은 엽서를 썼다 지웠다
손목을 끊었다 붙였다

백년 전에 죽은 할아버지도 됐다가 고모할머니도 됐다가…

부끄러워요? 악수해요

당신의 손은 당신이 찢어버린 첫 페이지 속에 있어요

▲ 그러다가 어느 날 / 진수미

유방은 부풀어오른다 터질 듯이 고요한 프로펠러
갈증을 느낀 비행선이 그림자를 몰고 나타난다.
보라색 태양일랑 내가 오려냈다오.

승냥이들이 거품 무는 파도가 쫓아오고
내장 없는 배의 항로를 걱정하는
어머니, 이 배에 앓는 항구가 누워 있어요.

사랑스런 임차인들아,
나는 그들에게 돌려줄 것이 있다오.

당신의 장기를 물어뜯는 거리의 개들
적선은 더 큰 바람을 부를 거예요.

소유를 짤랑이는 열쇠와 함께
집달리들이 득달같이 들이닥친다.
그들은 신부의 의상을 하고 있어요.

냉장고는 머리가 깨져 시큼한 국물을 지리는데
벌레들이 바람의 커튼을 흔들며 날아올라요.

뒤엉킨 서랍의
껍질 벗고 교미하는 실뱀 한 꾸러미,
그들은 신부의 의상을 하고 있어요.

05. 11. 01.

P.S. 다시 생각해보니까, '시의 날'은 5공때 문공부 장관을 지낸 정한모 시인의 '작품' 같다. 이어령 선생은 노태우 정권때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냈다. 확실하진 않지만, 내 기억이 말해주는 건 거기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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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5-11-01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빈께서 다녀가셨네요.^^ 저도 가끔 검은비님의 그림 구경을 하는데, 제가 참견할 형편이 못되더군요. 그림을 보는 만큼 보듯이 시도 읽는 만큼 읽으면 되는 거 아닐까요...

파란여우 2005-11-01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계어로 씌여지는 시에 외계어로 반응하는 정서가 요즘 시가 아닌가해요
퍼 갑니다^^

로쟈 2005-11-01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중에 밝히겠지만, 유사-외계시들도 더러 눈에 띕니다. '더듬거리며 말하기' 혹은 의미를 다리 절게 만드는 것은 (들뢰즈식의) 소수문학적 전략으로 유효하지만, '트렌드'는 언제나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현재의 문학장, 문학제도와 무관한 문제도 아니구요. 시집들이 모두 얌전하게, 시인 누구누구의 시집 뭐뭐로 출판되는 것 자체는 전혀 '소수적'이지 않은 현상이며, 지극히 이해 '잘되는' 현상입니다.

urblue 2005-11-01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퍼 갑니다.
시는 잘 모르나 아는 시인의 이름이 언급되었군요.

kimji 2005-11-01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보,라 하기에는 울림까지 포함되어 있어 그저 '고맙게 잘 읽었습니다'라는 인사로 대신하겠습니다. 가을, 시 읽기 좋은 계절이라는,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를 주억거리면서-
(첫인사,이지요? 두루두루 종종 뵙겠습니다,라는 인사도 동봉하면서- )


로쟈 2005-11-01 1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쓴 것도 별로 없는데, 많이들 내왕하시는군요. 제가 쓰는 분량을 점점 줄여야겠습니다.^^

도서관여행자 2005-11-01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어요. 퍼갈게요 ^^

검둥개 2005-11-01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퍼가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 (꾸벅)

페일레스 2005-11-01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지금껏 쓰시는 분량도 모자르십니다. 흐흐. ^ㅡ^

깜소 2005-11-02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저두 퍼갈께요..

로즈마리 2005-11-02 0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너무 착한 시들에 짜증이 잔뜩 났었드랬어요. 말그대로 순 깨달음의 시들. 그렇다고 젊은 시들의 외계성이 과연 좋은가..역시 의문입니다. 젊은 피들의 치열함이 의미있게 형상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로쟈 2005-11-02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들 이렇게 시에 관심이 많으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시 얘기도 가끔 올려야겠네요...

젠틸레냐 2005-11-10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퍼갑니다.^^
 

창밖은 단풍이 절정이고 오늘은 10월의 마지막날이다. 이런 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세월은 제 갈길을 가고 남아있는 자들만 뒤늦게 정신 (못)차린다(그런 세월 죽이는 일로 세월을 다 보내다니!). 그나마 가을이어서 다행이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좀 붉어져도 단풍에 묻혀갈 수 있으니. 점심 먹고 잠시 걸었지만, 천성이 다소간 게으른 탓에 산책은 눈으로만 즐기기로 한다. 그럴 때 도서 산책은 꽤나 요긴한 핑계가 된다. 교양있는 척하며, 게으름을 즐길 수 있으니 말이다. 덤으로 천재들과도 아는 척하고...

 

 

 

 

이번에 맨처음 꼽을 책은 단연 도날드 스포토(D. Spoto; 1941- )의 <히치콕>이다. 나대로 히치콕의 대해서는 작년에 지젝 편,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 2001)에 실린 평문들을 자세히 읽으면서도 언급한 적이 있고, 그때 스포토의 저명한 전기 <천재의 이면: 알프레드 히치콕의 생애>가 번역되기를 희망한다고 적었더랬다. 이번에 <히치콕>이란 제하에 신간이 나왔길래 나는 그 전기인가 했는데, 책은 <알프레드 히치콕의 예술세계: 그의 영화인생 50년>이란 원제의 또다른 책이다. 국역본의 제목은 <히치콕: 히치콕의 영화 50년>(도서출판 동인).

이번주 영화주간지 <필름 2.0>에도 소개가 됐는데, 잠시 옮겨보면 이렇다. "드디어 나왔다. <히치콕>의 저자 도날드 스포토는 슬라보예 지젝과 로빈 우드, 그리고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와 클로드 샤브롤에 뒤지지 않는 히치콕 마니아다. '앨프리드 히치콕의 예술'이라는 원제를 달고 있는 이 책은 처음 1976년에 나왔고(*아마존에서 현재 판매중인 건 1991년판이다), 이를 받아본 히치콕은 도날드 스포토를 LA로 초청해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는 히치콕의 초기 무성영화로부터 <로프> <이창> <토파즈>까지 45편의 영화들을 연대기적 접근방식으로 세밀히 분석하고 있다."

두말하면 잔소리지만 스포토의 신간은 그의 전기와 함께 히치콕 기본서에 속한다. <필름 2.0>의 기자도 언급하고 있지만 트뤼포의 <히치콕과의 대화>(한나래, 1994)가 그런 기본서이며, 역시나 '까이예' 비평가 출신의 샤브롤과 에릭 로메르가 편집한 책으로 작년에 국역본이 나온 <알프레드 히치콕>(현대미학사, 2004)도 히치콕의 초기작들을 다루고 있는 기본서이다. 거기에 새로운 기본서로 추가된 것이 지젝의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이고. 해서, 반갑고 고무적이다(기본서들은 우리 교양의 기초를 튼실하게 해준다). 게다가 다행스럽게도 히치콕의 영화 대부분은 국내에 비디오나 DVD 타이틀로 출시돼 있다(주로 '유니버설'이나 '씨네코리아'에서 나왔고, 나오고 있다). 하니 여유만만한 분들은 45편의 영화 리스트와 스포토의 해설을 옆에 놓고 히치콕의 영화들을 연대기순으로 죽 관람하시면 되겠다. 

로로로 시리즈로 나온 또다른 전기 <앨프레드 히치콕>(한길사, 1997)은 너무 간략한 느낌이 있지만 일독할 만하다(이 책에 대해서는 '리뷰'를 쓴 적이 있다). 저작 목록을 보건대 스포토는 일급의 전기작가이며,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즈와 배우 마릴린 먼로, 제임스 딘, 로렌스 올리비에, 잉그리드 버그만 등에 관한 전기도 갖고 있다. 그 중에서 국내엔 <제임스 딘>(한길아트, 1999)이 번역돼 있다. 예수와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전기도 쓴 걸로 봐서 거의 종횡무진이라고 해야 할 듯. 국내에 잘 알려진 전기작가로서는 20세기 전반기의 슈테판 츠바이크와 자웅을 겨룰 만하다. 물론 그의 책들이 더 많이 소개된다면...  

 

 

 

 

두번째 책은 히치콕(1899-1980)과 같은 생년을 가진 미국 작가 헤밍웨이(1899-1961)가 "모든 현대 미국문학은 마크 트웨인의 <헉핀>으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예찬한 가장 '미국적인' 작가 마크 트웨인(1835-1910)의 '철학이야기' <정말 인간은 개미보다 못할까>(북인)이다. 원제는 '인간이란 무엇인가(What is man?)'. 지난 여름에 <지구로부터의 편지>(베가북스)라는 풍자적인 이야기가 번역/소개된바 있지만, 근년/최근에 와서 트웨인의 책들이 신간으로 자주 눈에 띈다. 사실 이번 신간 때문에 새삼 더 주목하게 된 책은 지난 2월에 나온 그의 자서전, <마크 트웨인 자서전>(고즈윈, 512쪽)이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와 내가 이 연재를 잠시 쉬던 때에 나온 책이서 거명하지 않고 지나갔던 책인데, 이 기회에 눈도장을 찍어둔다.

그의 자서전은 서강대 장영희 교수가 "대작가 마크 트웨인이기 전에 인간 마크 트웨인으로서 철저한 자기성찰을 담고 있는 이 책은 자상한 남편과 아버지, 이웃으로서의 모습과 쾌활하고 자유분방한 성격, 삶을 꿰뚫는 예리한 풍자 밑에 흐르는 슬픔과 페이소스가 담겨 있는 자서전 문학의 정수"라고 평하고 있는 책으로 트웨인의 독자나 예비독자라면 반드시 읽고 넘어가야 할 책이다.

 

 

 

 

미국 문학의 '간판' 작가답게 트웨인은 국내에도 헤밍웨이만큼 잘 알려져 있지만 주로 '아동물'을 통해서이다. <톰 소여의 모험>이 웬만한 아동/청소년 문고에는 다 들어가 있기 때문이고, 나도 초등학교 때 소년소년 세계명작 시리즈로 트웨인을 처음 만났다. 유감스러운 건 대부분의 경우 그런 게 트웨인과의 인연의 전부라는 점. 나 또한 사실 대학에 와서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미국문학사에서 그토록 '중요한' 작품이란 걸 알게 되고서 다소 놀랐을 정도였다(특히, 현대 미국문학 평론가 레슬리 피들러의 견해 참조). 그간에 머리가 큰 만큼 <허클베리 핀의 모험>(민음사, 1998/2005)도 이젠 '고전'으로 다시 읽어볼 만하다.

 

 

 

 

레슬리 피들러의 제자이기도 한 김성곤 교수의 <미국문학과 작가들의 초상>(서울대출판부, 1993)은 내가 '미국문학 사전'으로 자주 애용하는 책인데, 거기엔 영국시인 오든(W. H. Auden)의 흥미로운 평문 '허크와 올리버'가 실려있다(전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든은 두 작품, 즉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과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를 현대 영미문학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거명하면서 두 주인공 허크와 올리버를 비교한다. 그는 자연에 대한 태도, 현실에 대한 태도, 그리고 시간과 돈에 대한 태도를 기준으로 하여 이들을 대조하는데, 가령 유럽(영국)인에게서 자연이 어머니의 품 같다면, 미국에서의 자연은 야성적이라는 식이다.

그러면서 그는 유럽인들이 읽기에 <헉핀>은 매우 슬픈 소설이라고 말한다. <올리버 트위스트>의 끝장면에서 올리버가 사랑이 있는 가정에 입양되면서 그의 꿈을 실현하는데 반해서 유사한 모험들을 겪게 되지만 허크는 그의 친구 짐과 결국엔 헤어질 것이며 다시는 못나게 되리라는 걸 독자가 알게 되기 때문이다. 또, 사건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유럽인들은 새로운 요소를 보지 못하는 반면에(사건들은 '반복'으로 의미화된다) 미국인들은 반복의 요소를 보지 못한다(사건들은 언제나 새로운 것으로 지각된다. 이런 경우 프로와 아마추어의 구분은 의미가 없다).

돈의 경우도 대비되는데, "올리버의 경우, 그것은 법적 상속권에 의해 그에게 주어진다. 허크의 경우에는 그것이 순전히 행운일 뿐이다." 오든은 거기서 조금 더 나간다: "미국에서 돈은, 자연이라는 용(龍)과의 전투를 통해 빼내는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곧 성인의 표증을 상징한다. 미국인에게 중요한 것은 돈을 갖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버는 것이다... 유럽의 단점은 탐욕과 인색이며, 미국의 단점은 이 양적인 돈이 성인의 표증으로 간주되기 때문에 어디에서 중단해야 될는지 알기 어려운 데서 기인하는 근심이다... 사실 미국인들은 물질에 대해서 별로 연연해하지 않는다. 충격적인 것은 미국의 소비일 뿐이다. 마치 유럽의 미국인들에게 충격적인 것이 유럽의 탐욕이듯이." 음미해볼 만한 견해이다.

 

 

 

 

세번째 책은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1860-1904)의 <초원>(범우사). 이번에 나온 5권짜리 체호프 선집 중 제3권인데, 특별히 이 책을 꼽은 건 중편 <초원>이 최초로 번역됐기 때문이다(책에는 '구세프' 등 4편의 단편이 더 실려 있다). 작년에 서거 10주년을 맞아 여러 행사들이 치러졌었다는 얘기는 '모스크바 통신'에서 전한 바 있다. 국내에서는 오종우 교수의 체호프 선집 2권,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과 <벚꽃동산>이 열린책들에서 나왔었는데, 탄생 145주년을 맞은 올해 좀더 그럴 듯한 5권짜리 선집이 나온 것. 그간에 많이 번역된 드라마의 경우에는 이채로울 것이 없지만(희곡 <바냐 아저씨>가 <바냐 외삼촌>으로 번역된 게 좀 튄달까), 초기 단편들이 대거 포함된 1-3권은 주목할 만하다.

1888년에 발표된 <초원>은 진지한 주제를 담은 분량 있는 작품을 써보라는 주위의 충고에 답하기 위해 씌어진 작품인데(방점은 '분량'에 있다) 주로 콩트나 단편들 위주로 써온 체호프에게 '중편' <초원>은 모험적인/실험적인 성격을 가진 작품이었다. 한 소년의 초원 여행을 기본 플롯으로 갖고 있는 서정적인 작품인데, 초기 체호프의 전매특허인 '코믹'은 극소화되어 있으며 내게는 작품 자체의 의미보다는 작가가 왜 '장편'으로는 나아가지 못했을까를 궁리해보게 만드는 작품. 역자는 이 작품으로 학위논문까지 쓴바 있기에 적역을 찾았다고 할 수 있다.  

이 <초원>이란 작품이 단연 상기시켜주는 이름은 러시아의 저명한 체호프 학자 알렉산드르 추다코프(추다꼬프)이다. 국내 대학에서도 강의를 한바 있고(나도 강연을 한번 들은 적이 있다) 한국인 제자들도 길러낸 분인데, 그의 출세작 <체호프의 시학>에 이 <초원>에 대한 자세한 비평적 분석이 실려 있기 때문(<체호프의 시학>은 체호프에 관한 단일 연구서 중에서 가장 유명하다). 그의 또다른 주저가 <체호프의 세계>이고, 이것은 <체호프와 그의 시대>(소명출판, 2004)로 번역돼 있다. 물론 전문서이기 때문에 일반 독자들과는 다소 무관한 책이지만. ('모스크바통신'에서도 거명한 바 있는) 추다코프 교수를 다시금 언급하는 것은 정정하던 그가 얼마전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작년에 푸슈킨과 체호프에 관한 그의 강의를 청강해두지 못한 게 아쉽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아울러 국내에선 체호프 전공자 오종우 교수의 연구서 <체호프의 코미디와 진실>(성균관대출판부, 2005)이 이번에 출간됐다는 것도 기록해둔다. 역시나 전문서이지만 애호가들도 읽어볼 만하겠다.  

  

 

 

 

네번째 책은 종교학자 엘리아데(1907-1986)의 <세계종교사상사>(이학사)이다. 전3권이 한꺼번에 출간됐는데, 우리 출판의 '역량'을 과시하는 듯해서 나름으로 부듯하다. '엘리아데'란 이름은 내게 좀 각별한데, 대학에 들어와서 제일 처음 들은 낯선 이름이 바로 '엘리아데'였기 때문이다(나는 첫학기에 조기수강신청했던 '철학개론'을 물리고 대신에 '종교학 개론'을 들었다). 해서 엘리아데는 내게 '대학'이라는 말이 상징하는 모든 것과 결부돼 있다. 지성, 학문, 자유, 학자, 열정, 강의 등과 말이다. 하여간에 이번에 나온 방대한 저작은 <종교형태론>(한길사, 1996)과 함께 서가에 꽂아두고 쉬어쉬엄 읽어보면 좋겠다. 사실 모스크바 체류시 막판에 가장 망설였던 게 고서점에서 본 엘리아데 러시아어본들을 사느냐, 마느냐였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대부분은 인터넷에 전문이 올라와 있었다. 덕분에 이 방대한 책의 러시아어본을 나는 손에 물 안 묻히고 소장하고 있다. 

   

 

 

 

그 자체가 종교학 입문의 성격도 갖는 엘리아데 입문은 엘리아데의 제자이기도 했던 정진홍 교수의 <엘리아데: 종교와 신화>(살림, 2003)이 단연 독보적이다. 아마도 국내에서는 다른 적임자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엘리아데 자신의 저작으론 <종교의 의미: 물음과 답변>(서광사, 1990)과 함께 <성과 속>(한길사, 1998)이 기본서. 독문학 연구자인 안진태 교수의 <엘리아데.신화.종교>(고려대출판부, 2005)도 다소 전문적이지만 지난 5월에 나온 관련서이다.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실재의 윤리>의 저자 알렌카 주판치치의 니체론 <정오의 그림자>(도서출판b)이다. 원제는 '가장 짧은 그림자(The Shortest Shadow : Nietzsche's Philosophy of the Two)'. 저자 주판치치는 슬로베니아 출신의 이 여성 '사무라이'로서 슬라보예 지젝이 가장 총애하는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 '칸트와 라캉'을 다룬 전작에 이어서 잔뜩 기대를 모으는 책인데(앞으로 '주판치치의 모든 책'이 될 것이다) 혹자는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에 비견하기도 한다. 개인적으론, 인연이 닿았다면 번역을 맡을 수도 있었던 책이라 이번 출간이 반갑고 기대된다(나 같이 게으른 역자를 안 만난 게 여러 모로 다행스럽다). 또 마침 책세상판 니체 전집도 완간된 김에 이번 겨울은 니체에 폭 빠져보는 것도 일리 있겠다. 초심자라면, 이번에 나온 로런스 게인의 '만화책' 입문서 <니체>(김영사) 정도는 떼주시길(나는 작년에 러시아어본으로 읽었다).

니체에 관한 전기로는 자프란스키의 <니체>(문예출판사, 2003)와 홀링데일의 <니체, 그의 삶과 철학>(이제이북스, 2004)가 기본서이다. 전자는 독어권을 대표하며(철학자 전기에 있어서 자프란스키는 최고의 실력자이다) 후자는 카우프만, 아서 단토 등의 책과 함께 영어권(미국)의 대표 저작. 참고로 홀링데일은 카우프만과 함께 니체 영역(英譯)을 양분했었다. 그리고 국내의 대표 저작은 '한국의 책 100권'에 선정된바 있는 <니체가 뒤흔든 철학 100년>(민음사, 2000). 이젠 외국어로도 읽을 수 있다!(독역되었나?)...

기타 여러 시인들의 시전집들과 토마스 쿤 평전, 몇 권의 정치학 책과 데이비드 흄에 관한 책 등이 보관함에 들어 있지만, 다음을 기약하기로 한다. 어느새 캄캄하다...

05. 10. 31.

P.S.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 제발 이젠, 그만 만나자구요?!

P.S.2. 이 페이퍼를 계기로 즐찾 400이 되었다. 평균 하루에 한 명꼴로 찾아주시는 분들이 늘었다. 찾아주시는 분들의 상당수는 출판관계자들인 것으로 안다(일부는 나를 불편하게 생각한다는!). 이 자리를 빌어 그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린다. 물론 엉터리나 찍어대는 분들은 나와는 아직도 계산할 게 많이 남아있다. 서로의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하겠으니, 모쪼록 독감들 주의하시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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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10-31 15:25   좋아요 0 | URL
한 발 빠르셨습니다. 흐흐...

로쟈 2005-10-31 15:32   좋아요 0 | URL
이런 거 먼저 찜하면 혹 상품이라도?..

이네파벨 2005-10-31 16:04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천재의 이면...>의 원제가 혹시 The Dark Side of Genius: The Life of Alfred Hitchcock 아닌가요? 이 원서 저에게 있어요! 10년쯤 전 미국에 있을때 벼룩시장에서 $1.5 주고 산 페이퍼북...
몇페이지 읽다 말고 처박아두었는데 시간나는대로 읽어보아야겠네요.

이 책을 쓴 스포토가 뛰어난 전기작가였군요...
전 개인적으로 평전이라는 장르를 무척 좋아하는데....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인기를 끌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어요, 아주 유명한 인물이 아니고서는...

전 히치콕은 개인적으로 잘 모르고...("새"와 "vertigo"를 보았을 뿐예요. 둘 다 인상적이었지만 개인적으로 파고들어온 느낌은 아니라서...)
오히려 "테네시 윌리엄스"의 전기를 읽어보고 싶어요.
테네시 윌리엄스의 작품들은....저에게 정말이지 intimate한 감동을 주기 때문에....
실제로 윌리엄스의 삶도 그의 작품들 못지않게 어둡고 불행했다고 들은 기억이 나는데....

고통의 진흙탕에 속에서 딍구는 돼지처럼 온 몸에 고통을 처덕처덕 발라가며....
고통의 실을 잣는 거미처럼 제 몸 가장 깊은 곳에서 누구나 외면하고 싶고 누구도 감히 드러내 보이지 못하는 가장 어둡고 아픈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예술가들....
삶과 작품을 떼어놓을 수 없는 예술가들...

그런 사람들의 전기를 읽어보고 싶어요.
(을유문화사에서 기획중이라는 빌리 할러데이의 전기도 기대 중...)

근데 우리나라에서 테네시 윌리엄스의 전기를 번역해 내놓으려는 용감한(or 돈벌생각 없는) 출판사는 아마 없겠죠?

바람구두 2005-10-31 16:19   좋아요 0 | URL
아니, 그 대신에 땡스 투 했답니다.

로쟈 2005-10-31 17:30   좋아요 0 | URL
이너파벨님/ 그 책 맞습니다(잘 사두신 겁니다). 부피가 좀 되죠. 저는 같은 1899년생인 작가 나보코프와 히치콕을 비교해보려는 생각에서 관련 대목을 좀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두 사람이 같이 작업을 할 뻔 했지만 성사되지는 않았습니다)... 바람구두님/ 땡큐...

니브리티 2005-11-01 09:14   좋아요 0 | URL
와~ 주판치치의 책이 나왔군요! 마침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을 읽고 있던 참인데...이중긍정 얘기는 도통 머리가 아파서...이해할 듯 하면서도 논점을 놓치거나...그동안의 내 글쓰기가 '원한의 글쓰기'는 아니었나 섬뜩했다는...ㅜ.ㅜ 정말 잘됐군요. 당장 주문해야지...ㅋㅋ

비로그인 2005-11-01 17:08   좋아요 0 | URL
김재인 씨가 이경신의 "니체의 철학" 번역을 "쓰레기"라고 평하셨던데 로쟈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로쟈 2005-11-01 17:13   좋아요 0 | URL
제가 <니체와 철학>을 아직 통독하지 않았는데, 진태원씨 같은 경우는 읽을 만한 번역이라고 했었죠. 제 생각엔 <니체와 철학>보다도 <들뢰즈 커넥션>에 더 오역이 많을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