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이 저물어가려니까 머리가 무거워진다. 다음 학기부터는 가급적 월요일 강의를 맡지 않든지 해야겠다(그게 뜻대로 될 리 없지만). 더구나 내주엔 입시 한파도 몰아친다고 하지 않는가? 새로운 한주의 시작이 갑자기 끔찍해진다. 게다가 해야 할일들을 생각하니 나도 벤야민처럼 잠에서 깨어나지 말았으면 싶다. 그런 생각으로 잠시 뉴스나 훑어보다가 <닐스의 신기한 여행> 완간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번역분량이 전3권이니까 어린시절에 내가 읽은 건 반쪽짜리 정도였겠다(지금 딸아이가 읽는 그림책은 줄거리 정도일 테고). 반가운 마음에(이런 날은 어딘가로 날아가버리고 싶기도 하므로!) 읽어본다.  

오마이뉴스(06. 11. 11) 노벨문학상 수상 여성작가가 쓴 동화

'스웨덴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 혹은, '여성작가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알려져 있는 셀마 라게를뢰프(1858-1940)의 빼어난 동화 <닐스의 신기한 여행>(배인섭 역·오즈북스 전3권)이 출간 100년을 맞아 한국에서 완역됐다.

기자 역시 어린 시절 그림 가득한 축약본으로 번역된 같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장난꾸러기 한 소년(닐스 홀게르손)이 손가락만큼 작아져 거위의 등을 타고 온갖 곳을 떠돌다가 결국은 착한 소년이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이야기. 하지만, 그땐 소년이 모험을 겪으며 머물고 떠나는 도시가 어느 나라에 붙어 있는 것인지 알지 못했고, 또한 그 작품을 쓴 사람이 교육자와 작가로서 전국민적 존경을 받았던 여성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사실 본격문학을 즐겨 읽는 사람들은 '동화작가'라면 한수 아래로 치부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러나, 좋은 동화 속에선 소설이나 시 이상의 감동과 만날 수 있고, 세계와 인간에 대한 비밀을 풀어가는 열쇠가 숨겨져 있다. 바로 이 <닐스의 신기한 여행>이 그렇다.

1858년 스웨덴 모르바카에서 태어난 셀마 라게를뢰프는 사범학교를 졸업한 교사였다. 하지만, 그녀에겐 또다른 꿈이 있었다. 바로 작가가 되는 것. 그녀가 서른 세 살 되던 해 아이들을 가르치는 짬짬이 써낸 첫 소설 <예스타 베를링의 이야기>는 드라마틱한 비장미와 서정적인 문체로 스웨덴은 물론, 북유럽 문단을 놀라게 했다. 이후 1885년부터는 교직을 떠나 창작에만 전념했는데, 이탈리아를 여행한 후 쓴 <반그리스도의 기적>이 평론가와 독자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그녀에게 '스웨덴이 자랑할만한 작가'라는 호칭을 안겨준 작품은 이집트와 팔레스타인에 머물며 쓴 1902년작 <예루살렘>.

이처럼 탄탄한 문장과 빼어난 감수성으로 사랑받던 라겔를뢰프에게 스웨덴 교육계가 한 가지 제의를 건넨다. "우리 아이들에게 조국의 아름다움과 자연, 풍속을 쉽게 알려줄 수 있도록 동화를 써보는 게 어떻겠는가?" <닐스의 신기한 여행>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 속에서 태어났다. 그 부탁에 기꺼이 응한 그녀는 1906년 집필을 시작해 이듬해 흥미진진하면서도 교훈 가득한 이야기를 완성시켰고, 그 공로로 1909년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앞서도 말했지만, 여성작가 최초의 수상이었다.

스웨덴의 남부 스코네에서 시작해 북쪽 끝자락 라플란드까지 날아갔다 돌아오는 닐스와 기러기들의 여행에 동행하며 스산하지만 아름다운 북유럽의 풍광과 만난다는 것, 호수와 숲 속에서 숨쉬고 있는 동·식물과 함께 호흡한다는 것, 또한 신비로운 신화와 전설을 만난다는 건 근사한 경험이다. 비단 아이들만이 아니라 어른에게도 그렇다. 거위 모르텐, 우두머리 기러기 아카, 여우 스미레, 거위치기 소녀 오사와 그녀의 아우 마츠, 까마귀 비타키, 독수리 고르고 등 유년시절 기억 속 아득한 이름들을 불러내는 이 동화와 만나는 겨울이라면 춥지만은 않을 듯하다.(홍성식 기자)

 

 

 

 

기사를 접하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좀 엉뚱하게도 <삐삐 롱스타킹>이다. <말광량이 삐삐>(1969)란 영화로 우리에겐 더 잘 알려진 작품인데, 나도 작품을 읽은 게 아니라 어릴 때 TV시리즈로 본 게 전부이다. 이 <삐삐 롱스타킹>을 다시 기억하게 된 건 요하힘 숄이 쓴 '클라시커 50' 시리즈의 <현대소설>(해냄, 2002)에서 <삐삐 롱스타킹>이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나 토마스 만의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과 함께 나란히 '베스트 50'에 선정되었기 때문이었다(이런 리스트를 만들 때 누가 <삐삐>까지 고려할 수 있었을까?).

<삐삐 롱스타킹>의 작가가 또한 스웨덴의 여성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1907-2002)이다. "북유럽 현대작가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여성 작가"라고 하니까 여성작가로서 라게를뢰프의 적통을 이은 게 아닌가 싶다(알라딘의 소개는 한술 더 뜬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어린이 독자를 가진 작가"!). 흔히 안데르센의 동화를 이야기하지만, 20세기에 오면 이 '닐스'와 '삐삐'의 산파 두 사람이 다 해먹는 게 아닌가 싶다.

<삐삐 롱스타킹>에 대한 요아힘 숄의 평가는 이렇다: "<삐삐 롱스타킹>은 20세기 후반에 어린이 교육을 개혁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다 큰 아이들도 삐삐처럼 매력적이고 자유분방하며 강해지고 싶어한다." 매력적이고 자유분방하며 강해진다? 어른이라고 해서 거부할 수 있는 사항들은 아닌 듯하다!

 

 

 

 

린드그렌 여사의 책들은 <삐삐> 시리즈 외에도 다수가 번역/소개돼 있다. 한데, 그 중에서도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가장 좋아했던 건 '라스무스' 시리즈이다. 원래는 <라스무스와 방랑자>, <라스무스와 폰투스> 두 권인 듯한데, 내가 읽었던 건 한 소년소녀세계명작전집에 들어있던 <방랑의 고아 라스무스>였다(<라스무스>의 저자가 린드그렌이라는 건 이번에 알게 됐다).

<라스무스>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이 자유로운 방랑자가 맨발로 진흙탕을 지날 때 발가락 사이에 느껴지는 쾌감을 묘사한 대목이었다. 그 '발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진흙'이 이후로 내겐 자유의 한 가지 표상이다. 한데 이젠 닐스처럼 거위의 등을 타고 날아가지도 라스무스처럼 맨발로 세상을 방랑하지도 못하는 처지로구나. 동화의 바깥 세상은 쌀쌀하다. 곧 겨울이 되리라. 다시 <성냥팔이소녀>나 읽어야겠다...

06.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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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마이페이퍼의 뒷정리를 하는데(이미지들이 다운돼 있는 경우가 많다), '정리중'이라고 해놓고 방치해놓은 페이퍼들이 눈에 띄곤 한다. 널려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적은 숫자도 아니다. 그 중에서 작년 12월말에 진행하다가 만 '토성의 영향 아래(3)'을 마저 끝내기로 한다. 12월 23일에 시작했으니까 이러다간 1년을 다 채우겠다 싶다. 얼마전 도서관에서 원서를 대출했는데 반납기한도 있으므로 '쇠뿔도 단 김에' 빼야겠다. 처음 두 문단이 작년에 적은 것인데, 따로 구분하지 않고 보태 쓰겠다.    

또 해가 넘어가기 전에 미뤄두었던 일들을 해치우기로 한다. 힘 닿는 한에서. 수잔 손택의 <우울과 열정>(시울, 2005) 중 표제가 된 벤야민 장에 관한 세번 째 정리이다. 67쪽, 아니 68쪽부터이다. "벤야민이 베를린에서 보낸 유년시절과 학창시절을 추억하는 두 권의 짧은 책, 1930년대에 씌어져 생전에는 출간되지 않은 이 책에는 벤야민의 자화상이 가장 뚜렷하게 담겨 있다."(국역본은 '이 책'이라고 단수로 돼 있다.)  그 두 권의 책이란 <베를린의 유년시절>(솔, 1992)과 <베를린 연대기>를 말한다. 참고로, 네권짜리 영역본 선집과는 별도로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하버드대학출판부, 2006)은 단행본으로도 새로 출간됐다.

초기 우울증 질환자였던 벤야민은 "고독이 인간의 유일한 적합한 상태"라고 보았다. 이때의 고독은 방안에서만의 고독을 뜻하는 건 아니었다: "거대 도시 내에서의 고독, 자유롭게 몽상하고, 관찰하고, 숙고하고, 떠도는, 한가히 산책하는 사람의 분주함 속의 고독을 말하는 것이다."(68쪽) 굵은 글씨는 국역본에서 누락된 내용이다.

그러한 벤야민의 모델은 보들레르의 산책자(flaneur)였으며,  그는 도시의 미로를 헤매는 걸 좋아했다. "<베를린 연대기>의 다른 부분에서벤야민은 여러 해 동안 자기 삶을 지도로 그린다는 생각에 골몰하기도 했었다"고 고백하는데, 이 도시의 미로는 그에게서 삶의 은유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가 도시의 진정한 본질에 대한 깨달음을 얻은 것은 베를린이 아니라 파리에서였다. 그는 지도와 도식, 기억과 꿈, 미로와 아케이드, 원경과 전경 등의 은유을 이용해 "방향찾기의 일반적인 문제를 말하며 어려움과 복잡성의 기준을 세운다." 이때 벤야민이 참조한 것은 브르통의 <나자>나 아라공의 <파리의 농부> 같은 초현실주의 소설들이었다(아직 번역되지 않아서 유감이다. 벤야민의 '체험'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초현실주의'는 압도적인 의의를 갖는다는 점에서).

토성의 영향을 받은 우울질의 사람들은 또한 '둔함'을 특징으로 갖는다. 그리고 실수를 잘 하는 것도 특징이다. 어머니와의 산책에서의 그의 이러한 고집불통의 구제불능성은 강화되는데(그는 커피 한 잔 끓일 줄 모른다고), 그의 회고에 따르면 "실제보다 더 느리고, 서투르고, 멍청해 보이는 버릇은 이때의 산책에 그 근원이 있다. 이 버릇에는 또 내가 나 스스로를 실제보다 더 빠르고, 더 능수능란하고 영리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부수적인 위험이 있다."(71쪽) 그리고 이러한 '완고함(stubbornness)'에서 "무엇보다도 눈에 들어오는 것의 1/3밖에 보지 못하는 시선"이 나온다. 나는 '완고함'에 '구제불능'이란 뜻을 포개서 읽고 싶다. 문맥상 이 산책에서 문제된 것은 항상 그가 엄마보다 뒤쳐져서 따라가곤 했다는 것. "얘, 발터야, 너는 어째 그 모양이니!"

이어지는 문단에서는 벤야민이 <일방통행로>를 헌정하기도 한 아샤 라시스 얘기가 나오는데('잠자는 숲속의 벤야민'이란 페이퍼를 참조) '아샤 라키스'라고 잘못 표기돼 있다. 그리고 음미해볼 만한 기술. "벤야민은 현재의 경험이 아니라 기억에서 출발했을 때, 즉 어린아이일 때에 대해 쓸 때 자기 자신에 대해 더 직접적으로 쓸 수 있었다. 거리를 두고 어린시절을 보았을 때 벤야민은 자기 삶을 지도화할 수 있는 공간으로 관찰할 수 있었다. <베를린의 유년시절>과 <베를린 연대기>에 드러난 솔직함과 고통스러운 감정의 물결은 벤야민이 과거를 완전히 소화하여 분석적으로 기술하는 방법을 택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부모가 친구들을 접대하고 있는 동안 거대한 아파트 안에 괴물이 떠돌아다닌다는 환상에 빠진 이야기는 벤야민이 후에 자기 학급을 증오한 일을 예시(豫示)한다."(72쪽)는 문장에서 '자기 학급(his class)'은 아무래도 '자기 계급'의 오역이 아닌가 한다. 비록 이어서 학교가기 싫어했던 이야기가 나온다 하더라도. '잠자는 숲속의 벤야민'이라고 내가 부르기도 했지만, 그의 꿈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학교에 갈 필요 없이 원하는 만큼 실컷 자도록 내버려뒀으면"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꿈은 그의 교수자격취득청구논문 <독일 비극의 기원>이 통과되지 않게 되자 "어떤 지위와 안정된 직업에 대한 희망은 언제나 헛된 것임었음"을 깨닫게 되면서 충족될 것이었다("벤야민은 과거에서 떠올린 것 전부를 미래에 대한 전조로 간주한다.").

해서 "어머니와 산책을 하는 방식, '학자티를 내며' 언제나 어머니보다 한발 뒤에서 걷는 모습은 '진짜 사회적 생존에 대한 사보타주'를 예시하는 것이다."라는 게 손택의 통찰력 있는 예리한 지적이다.  '진짜 사회적 생존에 대한 사보타주(sabotage of real social existence)'는 '실제적인 사회적 존재에 대한 거부' 정도의 뜻으로 풀 수 있겠다. 그는 제몫의 '사회적 존재'가 되기를 거절당했지만 그것은 그의 암묵적인 소망이 성취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건 '공간'에 대한 그의 열정. "자서전이라는 이름을 거부한 벤야민의 회상에는 시간적 순서가 없다. 시간은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베를린 연대기>에서 아예 이렇게 적었다: "자서전은 시간, 순서, 삶의 지속적인 흐름을 구성하는 것과 관계가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나는 공간, 순간, 불연속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하여 "프루스트를 번역하기도 했던 벤야민은 <잃어버린 공간을 찾아서>라고 불려도 좋을 파편적인 작품을 썼다... 벤야민은 과거를 되살리려 한 것이 아니라 이해하려고 한 것이다. 과거를 공간적 형태로, 예언적 구조로 압축한다." 요컨대, "벤야민에게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주제는 세상을 공간화하는 방식이라는 특징을 지닌다."(73쪽)

공간에 대한 이러한 선호를 손택은 토성적 기질과 연관시킨다. "토성의 영향 아래 태어난 인물에게 시간은 제한, 부적절한 것, 반복, 단순한 완료의 수단이다. 시간 속에서 어떤 사람은 단순히 그 사람일 뿐이다. 항상 그대로의 사람. 공간 속에서,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될 수 있다. 벤야민은 형편없는 방향감각과 (거리의) 지도를 볼 줄 모르는 능력 덕에 여행을 사랑하게 되고 헤매는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다.. 토성적 기질은 느리고, 우유부단한 경향이 있기 때문에 때로는 칼을 들고 자신의 길을 내며 나아가야 한다. 때로는 칼날을 스스로에게로 돌려 끝을 내기도 한다."(74쪽)

그렇다면 토성적 기질은 어떻게 판별할 수 있나? "토성적 기질의 특징은 자의식과 스스로에 대한 가차없는 태도를 들 수 있는데, 이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이건'이 뜻하는 건 자아(self)이다. 곧 자기 자신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가 토성적 기질이다. "따라서 이 기질은 지성인에게 적합한 기질이다." 김현승 시인의 시구를 빌자면 "나는 내가 무겁다"라고 말하는 것이 토성적 기질이겠다.

이런 이들에게 "자아는 어떤 과제이며 만들어내야 할 대상이다(따라서, 이 기질은 예술가나 순교자에게 적합하다. 벤야민이 카프카에게 말하듯, '실패의 순수성과 아름다움'을 구하는 사람의 기질이다)." 그리고 자아와 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늘 너무나 느리다. 이들은 항상 스로에 대해 뒤쳐져 있다(And the process of building a self and its works is always too slow. One is always in arrears to oneself)."  김현승의 시구를 비틀자면, "나는 내게 느리다"가 토성적 기질이다. 그들은 K처럼 마을에는 도착하지만 끝내 성(자아라는 성채)에는 이르지 못한다. 이 페이퍼 또한 아직 종결에 이르지 못한다...

06.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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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6-11-13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거 이따가 집에서 퍼갈랍니다. 사진도 그리 많지 않으니..안된다고 하면 안가지고 가고. 흠흠.

로쟈 2006-11-13 2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될 리가 있나요? 기술적인 거라면 몰라도...

수유 2006-11-13 2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이번엔 아주 수월하게 옮겼네요.. 사진이 많지 않아서.
그나저나 서재는 리플을 달기위해 꼭 로긴해야 한다는게 넘 불편하군요.. 일부러 서재까지 만들어야 하고..

로쟈 2006-11-13 2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덕분에 '악플'로부터 좀 자유로운 장점도 있습니다(^^;)...
 

결혼식에 갔다가 문학평론을 하는 지인으로부터 책을 한권 선물받았다. 리차드 세네트의 <현대의 침몰: 현대 자본주의의 해부>(일월서각, 1982)가 그것인데, 거의 25년전에 나온 책이니 절판된 건 당연하고 헌책방에서나 가끔 눈에 띄는 책이겠다(그런데 내 기억에도 거의 남아있지 않은 걸로 보아 80년대 후반에도 드물었던 책이지 않나 싶다). '헌책다운' 이 책에는 초판을 찍은 날짜만이 박혀 있다.

원서는 1976년에 초판이 나온 듯하고 지난 1992년에 장정을 달리 해서 재출간되었다. 국역본은 그 사이에 나온 것인데, 다소 두툼한 책이지만 재번역돼 나왔으면 싶다. '현대의 침몰'이라고 옮겨졌지만 원제는 '공정 인간의 몰락' 정도가 될 듯하고 원래의 부제는 '현대자본주의의 해부'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사회심리학에 대하여'이다. 1장인 '공적 영역'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데이비드 리즈먼의 <고독한 군중>과 유사한 성격의 책이지 않나 싶다(1950년대에 나온 리즈먼의 책이 훨씬 먼저 출간됐지만).  

 

 

 

 

 

국내에는 리차드 세네트의 책이 더 출간돼 있는데, '세넷'이라고 검색해야 한다. <현대의 침몰> 외에 나와 있는 것으로는 <불평등사회의 인간존중>(문예출판사, 2004),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문예출판사, 2002), 그리고 <살과 돌: 서구문명에서 육체와 도시>(문화과학사, 1999)가 있는데, 모두 눈에 익은 책들이고 <살과 돌>은 특히 (제목 때문에) 벼르다가 끝내 구입하지는 못했던 책이다(품절됐군!). 겸사겸사 다시 나왔으면 좋겠다.

공적 영역/공간과 관련하여 물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책은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이다. 거기에서 암시받을 수 있지만, '공적 인간'이란 '정치적 인간'이며 '호모 폴리티쿠스'를 뜻한다. 최인훈의 통찰을 빌면, (남한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는 '밀실'만 있고 '광장'은 상실했다는 것. 그것이 세네트의 문제의식이 아닐까 넘겨짚어본다. 대의제 민주주의하에서 투표권을 행사했다는 것 정도로 '공적 인간'의 소임을 다했다고는 할 수 없다. 그건 그저 알리바이일 뿐이다. 영어표현을 빌면, 우리의 관심은 '정치(politics)'에서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로 확장돼 나가야 하며 우리의 '행위'능력을 회복해야 한다. 바야흐로 대선과 맞물린 '정치의 계절'을 불과 1년 남겨놓고 있다. 우리가 마저 '침몰'하기 전에 생각해봐야 할 것들을 빨리 챙겨두어야겠다...

06.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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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생각하는 손과 장인 예찬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08-04 14:04 
    리처드 세넷의 <장인>(21세기북스, 2010) 출간 소식의 반가움은 이미 지난주에 포스팅한 바 있는데, 언론리뷰는 이번주에 실리게 되는 듯하다. 가장 빨리 올라온 소개기사를 옮겨놓는다. 나는 번역본보다 원서를 미리 구했는데, 내주쯤에는 조금이라도 읽을 수 있을 듯하다. 기사를 보니 저자의 3부작 중 하나라고 하는데, 나머지 책들도 기대된다.   연합뉴스(10. 08. 04) '생각하는 손' 장인정신을 찾아서 
 
 
 

오늘은 도스토예프스키 탄생 185주년이 되는 날이다. 작가는 1821년 11월 11일 빈민구제병원의 의사였던 미하일 도스토예프스키와 마리야 도스토예프스카야의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그는 1881년 2월 9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까 해마다 '빼빼로 데이'가 그의 생일이니만큼 기억하기도 편하다. 기념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작가의 초상화로는 가장 유명한 바실리 페로프의 초상화(1872)를 아래에 옮겨놓는다. 모스크바의 트레챠코프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별달리 준비한 것도 없어서 도스토예프스키 '입문'으로 읽을 만한 책들을 몇 권 나열해본다. <30분에 읽는 도스토예프스키>는 물론 가장 쉽고 짧은 입문서가 되겠다(하지만 얄팍한 정보나 나열하고 있는 책은 아니다). 문제거리를 발견하는 데 초점을 맞추면 되겠다. 그리고 얀코 라브린과 콘스탄틴 모출스키의 <도스토예프스키>는  평전이다(앙드레 지드와 슈테판 츠바이크의 평전도 시중에는 나와 있다. E. H 카의 전기는 절판됐다). 후자는 세밀한 작품해설까지 포함하고 있어서 교양서를 겸한다. 그리고 두번째 아내였던 안나 그리고리예브나의 회고록 <도스또예프스끼와 함께한 나날들>은 가장 가까이에서 그와 삶을 같이했던 이의 생생한 육성을 담고 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위대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위대한 건 작가로서이다.

 

 

 

 

어쨌거나 잠시 도스토에프스키 문학에 대해서 명상해보는 시간을 가져도 좋을 11월의 하루이다.

06. 11. 11.

P.S. 보다 자세한 도스토예프스키 이야기는 '푸슈킨과 도스토예프스키'란 페이퍼를 참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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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손 2006-11-11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출스키 책에 10월 30일이라고 되어있는 걸 저는 종이에 적어놓아서 로쟈님이 잘못 쓰셨나 잠깐 어리둥절했습니다만 하하 러시아라는 걸 깜빡했습니다.

닉네임을뭐라하지 2006-11-11 14: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H.카의 전기를 몇 달 전 우연히 헌책방에서 구했다죠.
아, 오늘은 또 키에르케고르가 고인이 된 날이기도 하더군요.
(우연히 YTN 뉴스에서 본 사실)

로쟈 2006-11-11 16: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융아님/ 어디선가 본 사진인데요.^^ 구력 10월 30일인지라 지금의 달력으론 11월 11일입니다. 10월혁명 기념일이 11월 7일인 것도 그 때문이구요...
연랑님/ 카의 전기는 제 기억에 홍성사판도 있고 기린원판도 있지요? 키에르케고르는 요즘 <불안의 개념>을 읽을 만만의 준비를 해놓고 있는데, 시간은 잘 안 나네요(--;)...
 

오마이뉴스의 해외리포트란에 흥미로운 기사가 떠서 옮겨온다. 최근에 발표된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 곧 공쿠르상의 시상식에 작가가 불참했다는 것. 그것이 '수상거부'를 뜻하는 건 아닌 듯하지만, 주최측에 낭패감을 떠안긴 것만은 분명하다. 전세계에서 아마도 가장 많은 문학상을 주고받는 나라가 아닌가 생각될 만큼 '문학상'이 넘쳐나는 우리의 처지에서 한번쯤 음미해볼 만한 소식이다(믈론 프랑스에서도 이런 일은 예외적이며 아주 드문 일이지만). 작성자는 박영신 기자이다.

오마이뉴스(06. 11. 10) "최고 문학상?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시상식에 나타나지 않은 수상자

공쿠르는 프랑스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문학상이다. 그 해 출판된 산문 중 최고의 작품을 선정하는 것이 원칙이나 오로지 소설 부문에만 수여해 왔다. 수상과 함께 작가에게 명성과 대중적 성공을 보장하는 공쿠르 문학상의 상금은 달랑 10유로. 명예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수상작이 발표되면 프랑스인들은 자연스럽게 서점으로 달려간다. 그 해의 작품을 보기 위해. 때문에 공쿠르 문학상 수상작은 통상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반면 공쿠르 문학상은 한 작가가 평생 단 한 번 수상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예외는 있었다. 1956년 <하늘의 뿌리>(les Racines du ciel)로 공쿠르를 거머쥔 작가 로맹 가리는 1975년 <자기 앞의 생>(La Vie devant soi)으로 두 번째 공쿠르 수상의 영예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때 이름은 에밀 아자르였다. 결국 '에밀 아자르와 로맹 가리는 동일인물'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로맹 가리가 권총 자살하기 직전까지 세상은 철저히 속았던 것.

지난 6일 올해의 공쿠르 문학상 수상작이 발표됐다. 미국인 작가 조너선 리텔(39)의 소설 <호의적인 사람들>(Les bienveillantes)이 그 주인공. 나치 친위대(SS)의 회고 형식으로 유대인 학살을 다룬 <호의적인 사람들>은 지난 8월 불어로 출간된 이후 25만 부 이상이 팔려나간 베스트셀러다. 지난달 리텔은 이미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을 수상한 바 있다. 뉴욕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리텔은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현재 가족과 함께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살고있다. 그러나 올해의 공쿠르가 발표된 지난 6일 주인공 리텔은 시상식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바르셀로나에서 가족과 함께 단란한 일상을 즐기고 있는 리텔은 방해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리텔의 대리인은 <프랑스 2 텔레비전> 저녁뉴스를 통해 '대수롭지 않게' 설명했으나 이것은 분명 '대수로운' 일이었다. 심사위원단은 애써 태연하려 했어도 시상식 현장은 '당혹' 그 자체였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지난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 때도 불참한 경력이 있는 리텔은.



"문학상이 도대체 문학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두 달 전으로 돌아간다. TV를 병적으로 혐오하는 리텔은 이때 라디오 <유럽 1>과 인터뷰를 가진 일이 있다.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의 수상자 후보 명단이 발표된 시점이었다. 여기서 리텔은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내 작품만큼 뛰어난 작품은 얼마든지 있다. 무엇보다 문학상이라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이다. 문학상이 도대체 문학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한편 이와 때를 같이 해 프랑스의 여성정보 웹사이트인 <마드모아젤 닷 컴>은 문학상을 주제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8일 현재 총 332명의 누리꾼이 참가한 가운데 절반이 넘는 52.1%가 이렇게 대답했다.

"(문학상은) 작가들이 자기 친구에게 표를 던지는 바보들의 잔치."


'문학의 질을 평가하는 바른 지침'이라거나 '떠도는 작가들을 위한 귀중한 원조'라는 대답은 각각 30.1%, 17.8%에 불과했다. 시인 조르주 페로스의 냉소와 만나는 지점이다.

"문학상은 심사위원에 우월감을, 수상자에 열등감을 준다."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는 말. 리텔의 '반항'은 지금으로부터 42년 전의 '사건'을 환기시킨다. 리텔과 페로스의 '불평'을 넘어 혁명에 가까운 '사건'을 만들어낸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 문학의 기념비적인 인물 장-폴 사르트르. 사후 26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살아숨쉬는 사르트르는 전세계에서 노벨상을 거부한 유일한 작가다. '살아있는 동안 누구도 평가받을 자격이 없다'는 게 이유였다.

노벨상을 거절한 유일한 작가, 장-폴 사르트르

기실 사르트르는 '기관'이 주는 영예를 꾸준히 거절해왔다. 이를테면 전후인 1945년 레지옹도뇌르 훈장 수훈자로 선정된 사르트르는 '정부에 내 친구들이 있다'는 이유로 훈장을 거부한 바 있다. 프랑스 최고 권위의 교육기관인 꼴레주 드 프랑스에서 수차례 강의할 것을 요청 했으나 역시 거절했다. 같은 이유였다, '인맥'을 등에 업지 않겠다는. 그러나 굳이 '인맥'이 아니었어도 사르트르의 자격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노벨상 수상자 명단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1964년이거나 그 후거나 나는 (노벨상 수상의) 영광에 응할 수 없고 응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사르트르는 자신이 노벨문학상 수상자 후보 명단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노벨상을 심사하는 왕립 스웨덴 아카데미 사무국장에게 위의 내용이 담긴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편지를 열어볼 틈도 없이 1964년 10월 22일 투표는 진행됐으며 아카데미 심사위원단은 공식적으로 사르트르의 수상을 발표하고 만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재차 수상 거부를 알리는 편지를 쓰게 된다.

"상은 투쟁이 끝났을 때만 수여되는 것"

"(…) 내가 '장-폴 사르트르'라 서명하는 것과 '노벨상 장-폴 사르트르'라 서명하는 데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작가는 설령 그것이 가장 명예로운 방식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기관화 되는 것을 거부해야 합니다(…) 오늘날 문화전선에서 할 수 있는 유일한 투쟁은 동서양의 문화가 평화적으로 공존토록 하는 것입니다(...) 인간과 문화는 '기관'의 간섭 없이 존재해야 합니다.

(...)비록 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으나 내 호감은 두 말할 필요없이 사회주의와 동구권을 향해 열려있습니다(…) 나는 '최고'가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사회주의 입니다. 최고 기관에서 수여하는 어떤 영예에도 내가 응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나는 사회주의자이나 누군가 내게 레닌상을 제안했어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히 레닌상을 제안받은 일은 없습니다.

(…) 알제리 전쟁 중 ‘121인의 선언’에 우리가 서명했을 당시 상이 주어졌다면 나는 기꺼이 수락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우리가 쟁취하기 위해 싸운 '자유'도 함께 평가되는 의미가 있기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은 없었습니다. 상은 투쟁이 끝났을 때만 수여되는 것입니다."


자유를 향한 인류의 투쟁은 여전히 진행형인 것이다. 그러나 투사가 아닌 작가로서 사르트르의 소망은 이뤄졌다. 세상과의 '투쟁'을 끝내고 사르트르가 땅에 묻힌 1980년 4월 19일 5만여 파리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와 그의 마지막 길을 함께했던 것이다.

사르트르의 일생을 통틀어 프랑스 국민이 선사한 감사의 인사인 동시에 그가 허락했을 유일한 상이었다. 프랑스인의 가슴에 새겨진 이날의 기억은 '귀여운' 일화로 남아 상징이 됐다. 어린 소년 하나가 후다닥 집으로 들어서며 외쳤던 것이다.

"아빠, 사르트르의 죽음에 반대하는 시위에 갔다 왔어요!"


06. 11. 10.

P.S. 마지막 소녀의 멘트가 귀엽고 천진하다. 사르트르의 노벨문학상 거부에 대해서는 이전에 모스크바통신에서 한번 다룬 바 있지만, 내가 알기에 사르트르는 상금마저 거부하지는 않았다(그 점을 나는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이번 수상작인 <호의적인 사람들>의 경우 이미 독자들로부터 충분한 인정을 받고 있는 작품이기에 작가로선 거들먹거리는(?) 심사위원들의 권위에 기댈 필요가 없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실, 문학상은 새로운 재능을 발견한다는 의미에서 '신인문학상' 정도로 족한 게 아닌가 싶다. 대신에 상금은 '10유로' 정도. 그게 가능하기 위해서는 문학상의 권위와 함께 대중과의 교감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전제들이 빠질 경우에 모든 걸 '상금'으로 카바할 수밖에 없다. 노벨문학상에 거액이 상금이 걸려있는 게 예외이긴 하지만...  

 

 

 

 

 

 

 

 

 

 

 

 

'공쿠르상 수상작'으로 얼른 검색되는 몇 권의 책들이다(물론 더 많은 수상작들이 번역/소개돼 있다. 알라딘에는 21권이 등록돼 있다). 이 중 파스칼 로즈의 <제로전투기>(열린책들, 1999)는 바로 책상맡에 있는 책이고 150여쪽밖에 안되지만 아직도 읽지 못했다(나도 어지간하다). 시간을 좀 내야겠다. 그나저나 <호의적인 사람들>도 아마 국내에 발빠르게 소개되지 않을까 싶은데 900쪽이 넘는 분량이라고 하니 역자(들)의 진을 뺄 만하다. 내년 하반기쯤에나 구경해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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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인 2006-11-10 20:46   좋아요 0 | URL
오웃. 퍼갑니다. ㅋ 문학상이라.. 가까이서 지켜보면 이것만큼 어리둥절한 것도 없지요 쩝;;

마노아 2006-11-10 22:49   좋아요 0 | URL
와, 기사도 좋았지만 코멘트도 역시 좋습니다^^

마태우스 2006-11-11 12:34   좋아요 0 | URL
잘 읽었습니다. 공쿠르상을 거부한 미국 작가라, 으음. 전 그게프랑스 작가만을 대상으로 하는 상인 줄 알았습니다. 글구 샤르트르의 거부 이유, 늘 궁금했는데 답이 여기 있군요!

마태우스 2006-11-11 12:35   좋아요 0 | URL
그래서 전 다음주 '이주의 리뷰'상을 거부하기로 했습니다. "리뷰랑 적립금이 도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게 거부 이유입니다. (다음주만 그렇다는 거구요, 그 다다음주는 괜찮습니다^^)

로쟈 2006-11-11 19:11   좋아요 0 | URL
'프랑스어'로 씌어진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상은 거부하시더라도 상금은 다 챙기시길 바랍니다!(제가 보관해 드릴 수도 있구요)...

마태우스 2006-11-12 01:48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군요 로쟈님 친절한 설명에 감사. 글구 바람구두님, 열심히 해서 다담주부턴 적립금 한번 타보겠습니다^^

테렌티우스 2007-07-30 23:26   좋아요 0 | URL
스트라스부르서 한국영화제할 때 오마이 뉴스 박영신 기자님이 너무도 좋게 글을 써주셔서 감동먹었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보네요.

제가 논문 제출하고 발표 기다리는 동안 바로 이 책을 불어 독해, 발표 준비한답시고 심심풀이 삼아(!) - 거의 900인가 1000페이지 되는 불어책을 겁도 없이! - 읽었는데, 나치 전쟁 범죄의 탁월한 소설판 백과사전이예요, 한 해의 공쿠르 상과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상을 둘 다 같이 탈 정도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하나는 분명 타야만 했던 그런 책이지요(하나도 못 탔다면 그것도 문제가 될만큼은).

문학적으로는 걸작은 아니더라도 수작임에 분명하고, 정치적으로 2차 대전 시기에 대하여는 올바르고, 오늘날엔 약간 애매할 수도 있는, 그런 글이지만, 알자스 출신의 주인공(아버지가 독일인, 어머니가 프랑스인) 법학 박사, 즉 지식인 장교를 주인공으로 출연시켜, 독자여 당신이 그때 태어났으면, 과연 어떤 '논리로'(감성이 아니라, '논리', 이게 이 소설의 미덕이자 핵심입니다, 중간에 환상 부분도 나름 탁월하고요) 세상을 살았겠는가 하는가... 라는 상투적 질문을 철저한 논리와 힙리성으로 무장시켜 - 가히 '프랑크푸르트 학파적으로' -, 역설적으로 논증하는 뉴욕에 사는 이 젊은 미국인 유태인 소설가가 불어로 쓴 (어릴때 살았답니다...^^) 소설 데뷔작은 우리나라 출판시에도 상당한 논쟁과 흥미꺼리를 가져다 줄 것이 분명합니다...

뱀발. 주인공이 일종의 행정, 정훈 장교로 각 파리, 베를린에서 러시아, 수용소, 장교 요양소(여기 나오는 언어학에 대한 묘사는 일품이예요, 조르주 뒤메질이 왔다가 울고갈(?) 박학을 보여줍니다)까지 각 전장을 돌아다니며, 아이히만, 괴벨스, 괴링(히틀러도 만나던가?)을 다 만나고, 전후 프랑스 국적을 위장 취득해 성공한 사업가로서 나름 행복한 오늘을 살며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이거 책 맨 첫 10쪽 안에 다 나오니 스포일러 아닙니다, 저도 그 정도 상식은...^^)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주인공에 대해 드는 생각은 딱 하나 밖에 없어요(여기 이런 표현을 써도 될라나?^^), "개자식!"

2007-07-30 23:3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