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시집들' 홍보를 쉼없이 하게 됐다. 황병승의 신작은 그보다 먼저 소개한 적이 있으므로 이제 남은 시인은 김행숙, 송승환 두 시인 정도이다. <이별의 능력>(문학과지성사, 2007)은 <사춘기>(문학과지성사, 2003)에 이은 김행숙의 두번째 시집인데, 얼핏 타이틀만으로는 역시나 여성시인인 조은의 오래전 시집인 <사랑의 위력으로>(민음사, 1991)를 떠올리게 했다. 무의식의 범주이긴 하나 모종의 '힘'에 대한 욕망이 두 여성시인의 밑자리에 놓여 있는 게 아닌가란 생각을 잠시 했다. 다음주 주말에 발표된다는 올해 미당 문학상 후보로도 올라가 있어서 관련기사를 참고자료 삼아 옮겨놓는다. 그 아래 이어지는 건 드물게 눈에 띈 <이별의 능력>의 소개기사이다.

중앙일보(07. 08. 11) 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⑤김행숙

시인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지만 어쩔 수 없다. 김행숙은 어렵다. 올해 미당문학상 최종 후보 열 명 중에서 가장 어렵고, 당대 한국 시단을 통틀어서도 가장 난해한 시인 중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시인은 정작 “억울하다”고 항변한다. 시인이 들려준 일화 한 토막이다.

“등단하자마자 시 몇 편을 발표했어요. 어느 평론가가 비평을 했는데 전체 맥락은 호의적이었어요. 그런데 ‘김행숙은 어렵지만 어쩌고…’ 하는 대목이 있었어요. 그걸 보고 꼬박 사흘을 울었어요.”
 
“왜요?”
 
“벽이…, 너무 강고한 벽이 내 앞을 가로막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김행숙의 시는 어렵지만, 시어 자체는 어렵지 않다. 사전에서나 봤음직한 희귀 어휘를 찾아내지도 않고 신조어 따위는 만들어낼 생각도 없다. 매니어만이 해독 가능한 은어도 구사하지 않으며 비어나 욕설 따위를 동원하지도 않는다.

앞서 적은 ‘눈사람’ 역시 그러하다. 시인은 초등학생 수준의 단어만으로 한 편의 시를 완성했다. 그러나 해석은 결코 간단치 않다. 예컨대 ‘눈사람이 작아졌다! 엄마가 죽었다.’란 시구를 보자. ‘눈사람이 작아졌다’란 사건과 ‘엄마가 죽었다’란 사건이 병렬 배치됐다. 그러면 두 사건 사이에 인과 관계가 동반해야 아구가 맞는다. 설명이 없으면 암시라도 있어야 한다. 그러나 두 사건은 그저 나란히 놓여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마지막 두 행! 도대체 어떻게 시장을 가야 ‘사소하게 시장을 가는’ 것인가.
 
김행숙이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어와 시어가 만나는 자리, 시어와 시어가 이루는 문장의 의미가 뭇 정서와 거리가 있다. 그렇다고 난해한 시를 생산하는 여느 젊은 시인처럼 나름의 계산에 따라 모종의 실험을 도모하는 건 또 아니다. 차라리 그렇다면, 예측 가능한 구석이 있다. 그러나 김행숙은 어떠한 예측도 차단한다. 자신의 느낌을 느낀 대로 말하고 있어서이다. 이쯤에서 시인의 작품설명을 듣는다.

“점점 작아지는 눈사람, 녹는 것, 사라지는 것에 대한 느낌을 적고 싶었어요. 거의 안 보이는 나, 우리의 희미한 존재감 같은 것에 대한 느낌과도 통하지요.”
 
이제야 김행숙을 이해하기 위한 단서가 정체를 드러냈다. 느낌이다. 점점 녹아서 결국엔 사라지는 눈사람에 대한 느낌을 시인은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에 빗대어 표현했다. 녹기 전의 눈사람은 그래서 부러움의 대상이 되고, 눈사람이 작아지자 엄마가 죽는 것이다. 그걸 깨닫는 건 이미 사소한 존재가 돼버린 어른으로서의 우리이고.
 
이광호 예심위원은 “김행숙은 비유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주어를 대체하는 화법의 시인”이라고 설명한다. 맞는 말이다. 김행숙은 예쁘게 화장하거나 정성껏 포장하지 않는다. 심드렁하게, 느낌을 툭툭 던질 따름이다. 하여 김행숙의 시는 비쩍 말라 있다. 평이한 단어만 즐비한 것도 이 때문이다.

김행숙은 오늘 우리 시단에서 가장 첨예한 감각(또는 느낌)을 지닌 시인이다. 다시 말해 당대 한국 시의 한 첨단이다. 하니 “모르겠다”고 낙담할 일은 아니다. 그러고 보면 김행숙도 억울할 법하다. 어찌 타인의 느낌을 온전히 공감할 수 있느냔 말이다.(글=손민호 기자)

 

 

 

 

 

 

 

 

 중앙일보(07. 07. 24) [손민호기자의문학터치] 동갑 여성 시인 … 극과 극 시의 세계

여기 두 명의 동갑내기 시인이 있다. 김선우와 김행숙. 둘 다 1970년 소생이고, 여성이다. 무엇보다 이 둘은, 남들이 좀체 따라하기 힘든 자기만의 목소리를 가졌다는 점에서 닮은 구석이 있다. 하나 시 세계는 전혀 딴 판이다. 김선우는 한국 여성시의 전통 위에 오도카니 앉아 있고, 김행숙은 난해한 요즘 젊은 시의 물길을 맨 앞에서 연 주인공이다. 김선우에게선 뜨거운 심장이, 그리니까 생명의 퍼덕댐 같은 게 만져지고 김행숙을 떠올리면 예민한 손가락과 매운 눈매가 연상된다. 공교롭게도 둘의 시집이 비슷한 때 출간됐다. 김선우가 세 번째 시집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문학과지성사)를, 김행숙은 두 번째 시집 『이별의 능력』(문학과지성사)을 내놨다(*김선우 시인의 경우엔 고정 독자층이 있어서 이번에 목록에 넣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시가 너무 노숙하다고 생각한다).



#막무가내의 사랑 노래

김선우의 눈동자는 사연 많은 우물 같다. 물기 머금은 눈동자는 짙고 또 깊다. 그 눈길이 살짝 스치던 찰나 언뜻 귀기(鬼氣) 같은 걸 느꼈던 것도 같다. 그 기운을 뭐라 부르던 상관없다. 세상을 향한 경계의 표시일수도 있고 시인이 건네는 사랑의 눈짓일지도 모른다.

김선우가 예의 상냥한 목소리로 ‘그러니 우리, 사랑할래요?’(‘Everybody Shall we love?’부분)라고 물을 때 그건 애교 어린 구애가 아니다. ‘보도블록 콘크리트를 걷어내고/꽃잎을 놓은 댓잎 자리 위에 누워’서 하는 사랑이고 ‘포성 분분한 차디찬/여기는 망가진 빗장뼈 위 백척간두의 칼끝’에서 ‘그대와 나의 해골을 안고 뒹’구는 사랑이다. 말하자면, 목숨과 맞바꾸는 사랑이다.

하여 김선우의 사랑은 막무가내다. ‘내 살을 발라 그대를 공양’하는 사랑이고 ‘대천바다 물 밀리듯 솨아’ 몰려드는 사랑이다.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낙화, 첫사랑’부분)라며 온몸을 내던지는 건, 그 사랑이 어느 지극한 곳을 향하기 때문이다. 그건 당신이고, 시푸른 육즙 뚝뚝 듣는 아욱이며, 소꿉 단지에 총탄을 모으는 팔레스타인의 소녀이고, 이태 전 세상을 뜬 위안부 할머니다.



#툭툭 내뱉기 또는 낯설게 말 걸기

김행숙은 김선우처럼 여성성을 드러내놓지 않는다. 아낙네의 질펀한 수다 속에 여성의 성기나 생리 얘기를 거리낌없이 집어넣는 건 김행숙에게 없는 일이다. 그러고 보니 김행숙에겐 없는 게 많다. 노골적인 사랑타령도 없고, 현란한 수사나 황당무계한 상상도 없다. 김빠진 일상을 멀거니 기술한, 뻣뻣한 문장만 즐비하다. 이를 테면 ‘나는 2시간 이상씩 노래를 부르고/3시간 이상씩 빨래를 하고/2시간 이상씩 낮잠을 자고/…/2시간 이상씩 당신을 사랑해.’(‘이별의 능력’부분)라고 밋밋하게 적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시가 된다. 이별 뒤에도 나의 하루는 노래를 부르고 빨래를 하고 낮잠을 자는데 대부분 소비된다. 그래, 이따금, 하루에 2시간쯤? 당신 기억이 떠오를 것이고, 하여 아플 것이다. 김행숙의 매력은 이렇듯이 툭툭 내뱉는, 비쩍 마른 고유의 화법에 있다.

‘마차에서 말들이 분리되는 순간/마차는 스톱! 하지 않았다’(‘손’부분)라고 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여기까진 마냥 무미하다. 그런데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나는 쓴다, 나로부터 멀어지는 말발굽들처럼’이라고 이어붙이자 앞 문장에 돌연 화색이 돈다. 그러니까 마차는 시인의 손이다. 말과 떨어졌어도, 다시 말해 생각이 끊겨도 손은 스스로, 그것도 집요하게 움직인다.

07. 09. 17.

P.S. 개인적으로 김행숙 시인과는 예전에 한번 전화통화를 한 적이 있었다. 가장 난해하지도 첨예하지도 않은 온화하고 여성스러운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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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17 0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17 08: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올 가을의 '시집들 읽기' 목록에 올려놓은 박상우의 <이미 망한 생>(열림원, 2007)에 대한 소개기사도 옮겨놓는다. 몇 마디 덧붙이기 위해 며칠 전에 산 시집을 찾느라 책상주변을 잠시,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눈에 띄지 않는다. 이 '처치 못할' 책들에 파묻혀 사는 인생도 '이미 망한 生'으로 족한게 아닌가 싶다.

세계일보(07. 09. 15) "더 이상 망가질 게 없어 나는 행복하다”

“이젠/ 파투가 된 삶도/ 삶이라고/ 믿고,/ 파투의 마음으로/ 살아가는 수밖에”(‘破鬪의 삶’에서)

시집 제목이 ‘이미 망한 生’(열림원)이다. 시인 박상우(44)가 17년 만에 발표한 시집엔 망신(亡身)의 미학이 펼쳐져 있다. 생의 밑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시인의 자조와 허무에는 가식이 없다. 스스로 구정물을 끼얹은 시인은 가랑비에도 몸 사리는 현대인과 달리 무엇이든 자유롭게 노래한다.

“그래, 망가질 수 있는 것들은 다 망가져라/ 망가져도 나처럼 완전히 망가져라// 망가질 수 있는 生이 망가질 때/ 나처럼 더 이상 망가질 게 없어 행복하려면”(‘망가진 生’에서)

“현실 속의 나는/ 숨을 쉬는 알맹이지만/ 이미 망한 生 속에 있어,/ 데드마스크를 쓰고 있는/ 허물인 것 같다”(‘이미 망한 生’에서)

그는 망가짐을 찬양하지만, 광대의 슬랩스틱을 즐기진 않는다. 남을 웃기려고 자신을 망가뜨리는 코미디는 단수 낮은 쇼다. 시인은 망신(亡身)을 자초해도 자기를 연민하거나 인정을 구하지 않는다. 시인이 공개하는 벌거벗은 자아는 희화화가 아니라 철저한 객관화다. 시인은 세상을 편견 없이 보기 위해 초인의 고행길을 묵묵히 걸을 뿐이다.

“그들은 내가 어떤 생존훈련을 견뎠는지 모르고/ 내가 얼마나 강하고 독한지도 모른다/ 난 나에게 충성을 혈맹한 편지가 있다/ 난 나를 위해서만 투쟁한다”(‘무덤 속, 비트를 탈출하다’에서)

망신(亡身)의 미학만 늘어놓은 건 아니다. 자신을 ‘아메바’에 비유한 시인은 단순하면서 따뜻한 서정시를 읊는다.

“눈사람이 대지 위에 서 있다// 눈사람의 敵은 따뜻한 세계/ 햇볕에 눈사람이 녹기 시작한다// 귀가 녹고/ 코가 녹고/눈이 녹고/ 몸이 녹았다// 한 사람이 敵의 사랑을 흠뻑 받고/ 사라졌다”(‘눈사람’에서)

시인은 “시는 삶과 세계에 대한, 내 의식의 알까기”라고 말한다. “시의 세계는 현실 속에 없지만 마음을 조금 위로합니다. 내 스스로 의사가 돼, 시라는 환자카드와 진료카드를 만드는 셈이지요.”(심재천 기자)

07. 09. 15.

P.S. 유일한 소개기사여서 옮겨오긴 했지만 별 내용은 없군. 알라딘에는 시인의 다른 시집이 뜨지 않아 얼핏 첫시집인가 했는데, 이미 <사람구경>, <물증이 있는 삶은 행복하다>, 두 권의 시집을 상자했고, <이미 망한 생>은 세번째 시집이다. '망신의 미학'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시인은 '반성'과 '극빈'의 시인 김영승이지만(박상우의 시들이 훨씬 절제돼 있긴 하다), 시구상으로는 "다들 망가질 때 안 망가지는 놈은 망가진 놈뿐야"라고 갈파한 황동규 시인을 '원조'로 삼을 수도 있겠다.

표제시 자체는 젊은 나이에 자살했지만 영화속에서 아직 '生生하게' 살아있는 한 여배우(직접 거명되지는 않지만 <주홍글씨>의 이은주를 가리키겠다)와 아직 살아있지만 마치 '데드마스크를 쓰고 있는' 듯한 자신의 '이미 망한 生'을 대조하고 있다. 영화속에서 그녀가 부르던 재즈노래가 문득 생각나는 밤이다. Only when I Sleep(http://www.youtube.com/watch?v=UGT0cutGM3k&mode=related&search=, 노래의 원조는 http://www.youtube.com/watch?v=zqhu6r5x2R8&mode=related&sea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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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9-17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은 올리신 시집들 중에 눈길이 제일 먼저 갔더랬습니다..근사했습니다--;;
요런 시집은 마음 푹 놓고 읽어야지요..

로쟈 2007-09-17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가 '인생파' 취향이라서...
 

'시집들 읽기'를 위한 또다른 '펌푸질'이다. 도우미로 나선 이는 문학평론가 신형철씨이고 그가 추천하는 시집(이라기보다는 결구라고 해야겠지만)은 이영광의 <그늘과 사귀다>(랜덤하우스, 2007)이다(http://h21.hani.co.kr/section-021158000/2007/09/021158000200709130677037.html). 시인의 두번째 시집이라지만 나는 아래의 소개를 읽고서야 시인의 이름을 기억해두게 됐다(앞으로도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잊어버릴 수 있는 이름이 아니잖은가!). 주로 거론되고 있는 시는 '동쪽바다'인데, 동쪽바다는 나로선 아주 친근한 곳이어서(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내가 자란 곳은 된다) 김연수의 소설에서 '7번 국도' 이야기를 들을 때만큼의 반가움을 갖게 된다(비록 시는 암울함으로 마무리되고 있지만). 전체 시가 궁금하신 분들은 나처럼 간단히 퇴근길에 서점에 들러 한권 챙기시면 된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제목은 나의 것이 아니다.

한겨레21(07. 09. 13) "당신은 좆도 몰라요"

수많은 문학상이 있다. 대개는 받을 만한 사람이 받는다. 바로 그게 문제다. 늘 받을 만한 사람이 받다니, 이럴 수가, 이렇게 지루할 수가. 불만은 또 있다. 왜 심사의 대상은 늘 ‘한 편의 작품’일까. 예컨대 이런 식은 어떤가. 올해의 제목상, 올해의 도입부상, 올해의 여성 캐릭터상, 올해의 묘사상, 올해의 아포리즘상 등등. 물론 작품이라는 것이 분리 불가능한 유기체인 줄은 잘 알고 있지만, 1등만 뽑는 시상식의 상상력이 하도 따분해서 하는 소리다.

이영광의 두 번째 시집 <그늘에서 쉬다>(랜덤하우스코리아·2007)를 읽었다. 독자들에게 많이 읽히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체적으로 아름답고 견고한 시집이다. 이 시집에는 이를테면 유배된 선비의 순결성 같은 것이 감돌고 있었다. 그래서 아름답고 견고하지만, 좀체 틈을 주지 않는 그 염결성이 다소 답답하기도 했다. 그러다 읽은 한 편의 시에는 드물게도 쓸쓸한 투정 같은 것이 배어 있어서 외려 그게 마음을 끌었다.

“동쪽 바다로 가는 쇳덩이들,/ 짜증으로 벌겋게 달아올라/ 붕붕거린다, 꽁무니에 불을 달고// 이 지옥을 건너야 極樂 해변이 있다”는 구절로 시작된다. 동해로 가는 차들의 행렬. 교통체증이 심했던지 ‘짜증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차들이 악다구니 중이다.

이어지는 대목에서 시인은 ‘지구는 공사 중’이라고 투덜거리며 찻집으로 길을 낸다. 찻집 벽에는 고구려 벽화가 그려져 있고 시인은 ‘당신’에게 편지를 쓰듯 읊조린다. “뉴 밀레니엄은 어쩌면 벽화의 시대로 남지 않을까요.” 이어지는 내용이다.



폭탄 세일과 재탕 우주 전쟁과 기본 삼만 원을/ 숙식 제공과 月下의 도우미들과/ 흡반 같은 골목을 거느린 벽의 이면,/ 벽화는 모든 벽을 은폐해요/ 모든 벽화는 春畵예요// 세상은 궁극적으로 형장이고/ 인간은 인간의 밥이고/ 에로가 어쩔 수 없이 애로이듯/ 이건 苦行이야, 마시고 싶어 마시는 게/ 아니야, 하고 내가 주정했을 때/ 당신은 암말 없었죠 블라인드 너머/ 오색의 길을 오색의 길을 오색의 길을/ 보고 있었죠 이 지구는 어쩌면/ 버려진 별이 아닐까, 신음하듯.”(‘동쪽 바다’에서)

시인은 “벽화는 모든 벽을 은폐해요”라고 적었다. 우리는 이렇게 읽었다. 이제 주위의 모든 벽들은 죄다 광고판이다. 그것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 시대의 벽화쯤 될 것이다. 그 벽화들은 초자아를 잃어버린 우리 시대의 욕망들을 음란하게 드러낸다. “모든 벽화는 춘화(春畵)예요.” 게다가, 벽화가 벽을 감추듯, 우리 시대의 춘화들은 인간다운 삶을 가로막는 곳곳의 ‘벽’들을 용케 감춘다. 그걸 알기 때문에, 고행하듯 술을 마시고, 버려진 별을 보듯 지구를 본다.

“돈 내고 받아드는 영수증처럼 허망한 당신의/ 오랜 병력과 어둠과 온몸이 부서질 듯한 체념을/ 가슴으로 한번 받아볼까요 나는 잘못/ 살았어요 살았으니까 살아 있지만/ 당신과 못 만나고 터덜터덜 가는 길에/ 동쪽 바다 물소리 푸르게 들리고,/ 내가 밤하늘 올려다보며 당신 생각을 할까요/ 느티나무 그늘에 앉아 두루미처럼 울까요/ 당신은 좆도 몰라요”

같은 시의 끝부분이다. 당신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서는 길에 잃어버린 유토피아처럼 동쪽 바다 푸른 물소리가 들린다. 같은 시의 다른 대목에서 시인은 “요컨대 인간은 전쟁 중이죠“라고 적었다. 말하자면 그에게 2000년대는 ‘지구는 공사 중, 인간은 전쟁 중’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이 구절에 공감하는 사람이라면 ‘나는 잘못 살았다, 잘못 살았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라는 시인의 자조에도, 그의 저 쓸쓸한 귀가에도 공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의 진짜 매력은 이런 근엄한 메시지에 있는 것이 아니라 투정 부리듯 늘어놓는 말들의 쓸쓸한 율동에 있다. 자학인 듯 가학인 듯 이어지던 말들이 제 쓸쓸함을 견디지 못하고 이렇게 무너진다. “당신은 좆도 몰라요.” 세상과의 불화가 그리움을 키우고, 너무 큰 그리움은 때로 화를 키운다. 욕설이 이렇게 물기를 머금을 수도 있구나. 이 시를 ‘올해의 결구(結句)상’ 후보로 추천한다.(신형철_문학평론가)

07. 09. 16.

P.S. '손민호기자의 문학터치'에서도 <그늘과 사귀다>가 언급되고 있어서 옮겨놓는다. 

중앙일보(07. 06. 12) 밑바닥에서 꿈을, 죽음에서 삶을

한 달쯤 전 나란히 나온 시집 두 권을 말한다. 부족한 지면 탓에, 아니 게으름 때문에 신간(新刊)이 되지 못하고 구간(舊刊)이 되어버린 시집이다. 시인 제위에 마냥 죄스럽다. 한편으론 뿌듯한 마음도 있다. 남들이 무심코 지나친 시집을 홀로 펼칠 때의 기분은, 횡재를 맞은 듯이 짜릿하다.

박영희(44)의 시집 '즐거운 세탁'(애지)과 이영광(41)의 시집 '그늘과 사귀다'(랜덤하우스). 두 시집은 묘하게 닮은 구석이 있다. 하나는 비루한 삶에서 희망을 길어올리고, 다른 하나는 죽음의 그늘에서 삶의 기운이 돋아난다.

두 시인 모두 문단에서 밀어주거나 끌어주는 이 없다는 것도, 그런데도 시와 함께 산다고 주저 없이 밝히는 것도 닮아있다. 박영희는 "시인의 누명을 쓰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부끄럽다"고 적었고 이영광은 "다름 아닌 시와 더불어 고행(苦行)하게 된 것이 행복하다"고 적었다. '누명'과 '고행'에서 시를 업(業)으로 삼는 자의 '자발적 버거움'이 읽힌다.



# 삶을 노래하다

여기 한 편의 시. 읽는 요령이 있다. 시가 묘사하는 풍경을 눈앞에 그려보는 것이다.

'저울눈금을 확인한 고물상 주인이 ㎏당 50원 하는 폐지를 부리다 리어카 밑바닥에서 젖은 라면상자 두 개를 발견하고는 이런 일이 벌써 한두 차례 아니라며 남은 이보다 빠지고 없는 이가 더 많은 노인을 다그치자 재생이 가능한 폐지를 주워온 노인네는 요 며칠 궂은 날씨를 탓하여 본다.//아무리 슬픈 일이 있어도 고물상에서는 눈물이 젖어도 폐지가 젖어서는 안 된다.'

'즐거운 세탁'의 맨 앞에 실린 시 '고물상을 지나다'의 전문이다. 고단하고 퍽퍽한 고물상 노인의 삶이, 읽는 이의 눈을 할퀸다. 이 시는 전에 본 적이 있다. 박영희가 쓴 르포집 '아파서 우는 게 아닙니다'(삶이 보이는 창)에서다. 시인은 거기에서 우리 사회의 밑바닥 인생을 부지런히 찾아다녔다. 고물을 줍는 노인들의 삶을 묵묵히 전한 다음, 시인은 앞의 시를 적어두었다. 그리고선 "아프면 눈물이 나오지만 고통스러우니까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때 시의 제목은 지금과 달랐다. '삶'이었다. 하여 삶은, 고물상의 젖은 라면상자다.



# 죽음을 기억하다

'그늘과 사귀다' 초입에서 이영광은 '아버지 세상 뜨시고/몇 달 뒤에 형이 죽었다'('떵떵거리는'부분)고 부고(訃告)를 쓴다. 이어 한사코 죽음만을 기록한다. 아래는 그 세목(細目)이다.

①염습(殮襲):관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몸이 씻겨지는 동안,/다른 몸들이 기역 니은 리을로/엎드려 우는 동안('황금 벌레' 부분)

②출상(出喪): 수양버들 춤추는 길에/상여 하나 떠가네/제 발로는 더 이상 걷지 못하는 자의 집,/여러 몸이 메고 가네('수양버드나무 채찍'부분)

③하관(下棺):취한 몸을 리어카에 실어와 아랫목에 눕히듯/관을 내린다/…/맞지 않는 옷을 입고도 오늘은 신경질이 없어라/난생처음 오라를 지고도/몸부림이 없어라('나무 금강로켓'부분)

④기일(忌日):제상은 그의 돌상,/뼈에 붙은 젖을 물려주고/숟가락 쥐여주고/늙은 집은 이제 처음부터 다시 그를 키우리라('음복'부분)

⑤ …그 이후:나는 그들이 검은 기억 속으로 파고 들어와/끝내 무너지지 않는 집을 짓고/떵떵거리며 살기 위해/아주 멀리 떠나버린 것이라 생각한다('떵떵거리는' 부분). 하여 죽음은, 산 자의, 아니 죽음에 채 이르지 못한 자의 영역이다.(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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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16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에 놀라 클릭했다는 --;

로쟈 2007-09-16 19:32   좋아요 0 | URL
제 탓은 아닙니다.^^;

LAYLA 2007-09-16 2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 좋아요. ^^ 로쟈님 덕택에 알았네요

로쟈 2007-09-17 00:27   좋아요 0 | URL
별말씀을...

수유 2007-09-16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도 시지만, 신형철의 '말들의 쓸쓸한 율동'이란 표현에 무릎을 치네요. 제가 너무 옛시인속에 살았나 봅니다...좋은 시인들이 있었네요..겨울방학때쯤 한번씩은 읽어야겠습니다..신형철의 평론들도..

로쟈 2007-09-17 00:28   좋아요 0 | URL
신형철 평론집은 여름에 나온다고 했었는데 조금 늦어지는 모양입니다...
 

오랜만에(처음인가?) 가을에 읽을 시집들의 리스트를 만들어보았다(http://blog.aladin.co.kr/mramor/1574630). 최근에 시집을 낸 다섯 명의 젊은 시인들을 먼저 꼽아봤는데, 선정에 도움을 준 리뷰들 가운데 하나를 일단 옮겨놓는다(기회가 닿으면 다른 리뷰도 옮겨놓을 것이다). 아예 '로쟈의 시읽기'란 카테고리를 새로 만들려고 하다가 일을 더 벌이기 전에 이 정도에서 타협을 보기로 했다. 아래 리뷰는 작년에 '장자의 그림, 처남들의 연주:문태준, 황병승론'이란 평문으로 창비의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단한 젊은 문학평론가 김종훈씨의 글이다(http://www.culturenews.net/read.asp?title_up_code=001&title_down_code=002&article_num=8339). 성윤석의 시집 <공중묘지>(민음사, 2007)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컬처뉴스(07. 09. 05) 구름이 가까이 오면 어떻게 하세요?

칸딘스키의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는 여전히, 갖가지 색의 고유한 속성을 말하는 대목이 가장 흥미롭다. 그에 따르면 노랑은 예민하면서 밖으로 정열을 발산하고 빨강은 내부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정열을 분출하고 파랑은 결코 인간적이지 않는 슬픔의 배음을 띤다. 그리고 흰색과 검정색은 침묵을 거느린다. 시작하기 전의 무(無)이며 가능성으로 차 있는 침묵이 흰색이고 해가 진 후의 무(無)이며 가능성이 없는 침묵이 검은색이라고 한다. 그러니 침묵은 탄생 이전과 소멸 이후의, 역사 이전과 이후의, 말하기 전과 말한 다음의 세계이다. 하얀 침묵의 세계를 탐사하는 과학자와 검은 침묵의 세계를 추측하는 신비주의자의 딜레마는 말을 가지고 침묵의 세계를 더듬는다는 것이다.  

죽음을 말하는 행위는, 침묵을 말한다는 것과 같아서 우스꽝스럽다. 우리는 기껏해야 신비주의자의 옷을 입고, 죽음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그 옆에서, 겨우, 죽음을 말한다. 두려움에 가득 찬 흉내내기는 진실에 닿지 못한다. 그러나 그 흉내내는 말의 고통이 거짓일 수는 없다. 고통을 겪는 것은 증상이 아니라 증상을 가진 환자이며, 환자의 고통 또한 다시 가족에게로 전환되기도 한다. 환자가 고통스럽다고 가족의 고통이 거짓일 수 없으며, 신경증 환자가 고통을 겪는다고 해서 분석자가 고통을 겪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말을 가진 자, 생각을 가진 자는 흉내를 내는 것으로 고통의 진실에 닿는다.

성윤석의 시집 『공중묘지』의 이곳저곳은 그가 지금 벽제 용미리 화장터의 공원 관리를 직업으로 삼고 있으며, “어린 아우”가 몇 해 전에 세상을 떴고, 어머니는 그 충격에 정신병원에 자진해서 들어갔다는 정보를 일러준다. 관념으로 죽음 옆에 있는 자가 아니라 실질적인 죽음 옆에서 살고 있는 자가 성윤석이다. 그러나, 성윤석의 시집을 펼쳐 보고 있는 이유가 이 실질적인 그의 이력 때문만은 아니다.

귓속 돌이 떨어져 나가고 만 이석증을
앓고 난 이후부터 앉아서 자는 날이 많아졌다.
미쳐버리고 싶은데, 미쳐지지 않는 늦은 밤 사무실의
사십 대처럼 빙빙 돌지는 않는데
가끔 뒤로, 뒤로,
정신의 불빛이 나가 버리곤 한다.
세상의 도움이란 이제 없는 것이다.
나에겐 정리되고 끝나는 일이란 없었다.
구름이 가까이 오면
발을 대보려 했을 뿐.
그곳에는 어떤 사람의 내력이
고여 있을까.
앉아서 자는 날엔 늘 귓속 돌이 떨어져 나간
자리가 궁금해졌다.
― 「1과 8 사이엔 무엇이 있나」 부분

 “구름이 가까이 오면 / 발을 대보려 했을 뿐”. 구름이 가까이 오는 사건과 발을 대보는 행위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그리고 왜 이 구절은 계속 여운을 남길까. 구름은 천상의 것, 발은 보잘 것 없는 지상의 것, 이 간극의 공명 때문일까. 이런 해석은 부질없다. 천상과 지상의 구도 설정은 구름이 가지고 있는 일상성과 발을 내미는 개별성을 모두 없애버린다. 중요한 것은 “발을 대보”는 행위의 생생함과 그 생생함 밑에 깔려 있는 논리적 맥락이다. 그렇다면, 죽음 옆에서 생활하는 자의 무력감이 “발을 대보”는 행위에 담겨 있다고 이해하는 것은 어떨까. 구름이 가까이 오는 사건은 자연스러운 일상의 풍경이며 “발을 대보”는 것은 구름과 소통하고자 하는 나의 행동이다. 평온한 삶을 그는 누리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행동은 구름과의 소통이면서 동시에 평온한 삶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인 것이다.

발을 대본다고 해서 평온한 삶을 누릴 수는 없기 때문에 무력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구름을 평온한 삶이나 가까이 있는 죽음과 동일시하는 것 역시 부질없다. 관습적인 알레고리를 벗어나는 지점에 『공중묘지』의 좋은 시들이 있다. 그가 “사내의 입술을 벌린 뒤 / 철 핀으로 양 입술의 속을 고정시킨다”(「일요일2」)라고 했을 때, 여느 시들은 시체의 입에 박힌 철 핀을 곧장 냉혹함과 잔인함의 뜻으로 환원시키지만, 그의 시는 그의 체험 덕에 독자의 시선을 말 그대로 한참동안 실제 시체 입술에 고정된 철 핀에 머물게 한다. 그러므로 저 구름은 삶이나 죽음이 아니라, 고개를 들면 보이는 하늘의 저 유유자적하는 구름 그 자체이다. 유사한 구절이 다른 시에도 있다.

삽을 들고 파고 또 파고 내려가도
이놈의 산마는 끝도 없이 내려가 버리고 말았네요.
나는 그만 포기했어요.
너무 뻔해서 같이 안 잔 여자처럼
그때까지 따라온 구름에 발이나 대보며,
산마의 뿌리를 딛고
다시 올라왔지요.
묘지들의 언덕엔 눈보라가
앞이 안 보이도록 날리고
언덕 위 나선의 끝 눈발 사이로
언뜻 산역 인부 하나가 삽을 들고
무덤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자신의 영화를 혼자서 돌리고
또 돌리는 실패한 영화감독처럼
― 자네 이제 묘지 관리인이 다 되었네.
칭찬해 두던 그 노인네는 은퇴해서도
이 묘지를 떠나려 하진 않아요.
죽은 자들의 아파트.
이런, 이제는 찾아오지도 않고
관리비가 연체된 분들이 너무 많아졌어요.
어디로 가 버린 걸까요?

모두들 구름 같은 분들이겠죠.
― 「죽은 자들의 아파트에 눈이 내릴 때」 부분

“그때까지 따라온 구름에 발이나 대보며”. 비슷한 구절이다. 그러나 그 울림은 서로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다. 앞 시 「1과 8 사이엔 무엇이 있나」에서 시적 주체는 이석증을 앓고 있다. 귓속에 돌이 떨어져 나가 어지러움증을 앓고 있는 병이다. 그는 결여된 인간이다. 완성의 의지를 보이기보다는 회복의 징후를 기다리는 이이기도 하다. 그에게 완성은 없다.(“끝나는 일이란 없다”) 체념 속에 빠져 있을 때 구름이 가까이 오고 그는 발을 대보려 한다. 이것은 소극적이며 슬프기도 한 의지의 표현이다. 전체의 체념의 정서를 배경으로 슬픈 의지는 단 한번 출현한다. 영웅적 과시가 아니라 병을 앓고 있는 이의 회복하고 싶은 욕망으로. 물론 발을 대본다고 해서 회복되지는 않겠지만.

반면 두 번째 시 「죽은 자들의 아파트에 눈이 내릴 때」에서는 자신의 이력을 파헤치려는 듯 삽을 들고 무덤을 파내려 간다. 그것은 의지의 표현이다. 그리고 산마의 뿌리를 딛고 다시 올라온다. 이것도 의지의 표현이다. 바탕에 깔려 있는 의지 사이에 “너무 뻔해서 같이 안 잔 여자처럼 / 그때까지 따라온 구름에 발이나 대보며”가 끼어 있다. 의지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체념의 정서가 짙다. 각각을 둘러싼 주된 정조를 벗어나는 지점에서 저 발을 대보는 행위는 이채롭다. 그가 빠져 있는 상념에서 그를 끄집어내는 동기는 자연스러운 구름의 흐름이다. 자연스러운 행위에 몸을 맡기는 행위는 쉬운 일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에 자진해서 균열을 내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욕망에 논리를 짜 맞추는 행위는 칩거 생활을 하는 것과 같다. 밖에서 타인의 말과 나의 말을 계속 섞으면 나의 말이 타인의 말과 닮아 간다. 반복이나 중첩이나 처세술이 이와 다르지 않으니, 칩거는 창조적 직관의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대개 칩거는 자폐와 망상을 불러온다. 칩거가 창조적 직관의 밑거름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가로막는 벽을 넘어 바깥과의 소통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시인에게 소통의 대상은 독자가 아니라 자연스러움이며, 시인을 가로막는 벽은 난해함이 아니라 시인의 이성과 논리가 잇대놓은 욕망의 사고체계일 것이다. 침묵으로 향해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에 몸을 맡겼을 때 언어가 고통의 진실에 가 닿을 수 있듯, 창조적 직관이 밑거름이 될 때 시인의 언어는 이성과 논리의 그물을 빠져나올 수 있다. 그것으로 시의 언어는 임무를 완성한다.(김종훈_문학평론가)

07. 09. 16.

P.S. 참고로 서울신문의 소개기사도 옮겨놓는다. 그의 시적 여정은 '극장이 너무 많은 우리 동네'에서 '무덤이 너무 많은 나의 일터'까지로 요약되는 듯하다.

서울신문(07. 08. 06) 이승의 끝에서 삶을 긍정하다

쇠뜨기, 바랭이, 쑥부쟁이가 무연묘(無緣墓)를 뒤덮었다. 비석도 상석(床石)도 없다. 활개도 축대(築臺)도 없다.10년이 지나도 찾는 이 없고, 묘적부에서도 지워졌다. 바람 불어 초록 풀씨 날리면 묘지는 수풀 속에서 형태마저 잃는다.‘더욱 버려져’ 마음 아린 무연묘에 시선을 주며 쓸쓸해하는 이, 성윤석(42) 뿐이다. 성윤석은 경기도 용미리 서울시립묘지 관리인 생활을 시작하고도 2년이 지나서야 놓았던 펜을 다시 들 수 있었다.25살 대학 4학년(1990년) 때 등단했고,31살(1996년) 때 첫 시집(‘극장이 너무 많은 우리 동네’, 문학과지성)을 냈던 시인. 두 번째 시집 ‘공중묘지’(민음사)가 나오기까지 11년이 걸렸다.

‘공중묘지’는 죽음으로 꽉 차 있다. 썩은 시체 눈알이 굴러 떨어지고, 시즙(屍汁)이 뚝뚝 흐른다. 몸에서 막 빠져나간 영혼은 ‘사랑해서 생긴 약점’(아내와 어린 자식들)이 맘에 걸려 세상을 떠돈다. 시집에 내리 깔린 죽음의 이미지엔 시인이 보낸 가혹한 시간이 더해졌다. 11년 동안 그는 신문기자와 공무원을 거쳤고, 사업에 실패했다.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동생이 죽었고, 충격받은 어머니는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몸의 평형기능을 상실하는 ‘양성발작성변환이석증’에 걸려 시인의 눈은 환상을 봤다. 지하철을 타면 두 다리가 공중에 붕붕 떴고, 눈 옆으로 꽃이 폈다. 밤마다 하얀 원피스 입은 소녀가 미간을 스쳐갔다. 묘지 앞에서 만난 시인은 “공포스러운 나날이었다.”고 회고했다.

묘지에 와서야 공포를 떼어내다
시인은 그 공포를 무심한 언어로 옮겼다.“어머니는 기절했으며 / 조문객들은 낄낄대며 술추렴을 했다”(‘아우가 죽었다’)고 썼고,“미쳐 버리고 싶은데, 미쳐지지 않는 늦은 밤”에 “가끔 뒤로, 뒤로 / 정신의 불빛이 나가 버리곤 한다”(‘1과 8사이엔 무엇이 있나’)며 전정기관 망가진 자신을 관조했다. 공포로부터 자신을 떼어내 객관화할 수 있었던 건 살아 움직이는 것 없는 공중묘지, 온갖 버려진 것들의 집결지에 와서야 가능했다.

“목매러 왔다 줄만 매달아 놓고 간 사람, 미혼모가 쓰레기통에 버리고 간 아이 시체, 묘지를 떠도는 애꾸눈 애완견…. 묘지의 살아있음이 눈에 보이면서 이야기들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의 골짜기인 묘지에서 도리어 이야기는 살아나더군요.”

모든 사람이 무서워하며, 묘지 인부들마저 침 뱉으며 멀리하고, 까마귀떼만 날아오르는 공중묘지가 이제 시인에겐 일상이자, 밥을 벌고, 삶을 구하는 터전이 됐다. 늙은 산역 작업부가 “자네 이제 묘지 관리인이 다 되었네”(‘죽은 자들의 아파트에 눈이 내릴 때’)라고 할 만큼 ‘내공’ 쌓인 그는 죽음 가득한 행간에 생의 의지를 꼭꼭 숨겼다. 공중묘지는 죽어 떠도는 영혼이 마지막으로 의탁하는 안식처(‘공중묘지 6’)이자, 시체의 자양분을 찾아 산마가 무덤 밑으로 끝없이 뿌리 뻗는 곳(‘죽은 자들의 아파트에 눈이 내릴 때’)이다. 생명이 부글거리는 공간(‘알박기’)이다.

“아버지가 묻혀 있는 동그란 무덤 속 / 아버지의 살점을 자양분으로 / 살모사는 새끼를 낳자마자 죽고 낳자 죽고 / 두더쥐와 굼벵이와 들쥐와 구더기는 아버지의 / 평생 속고 속아 썩어 문드러진 가슴께에서 / 햇빛처럼 떨어지는 생을 향해 / 부글부글거리겠지.”(‘알박기’) 시인은 “이승의 끝인 공중묘지에서 삶을 긍정함으로써 신산한 인생들이 겪어온 아픔을 치유하고 싶었다.”고 했다.

묘지 관리인으로 활동하며 창작
‘공중묘지’에 실린 58편의 시적 밀도가 모두 균일한 건 아니다. 묘지 관리인으로 일하며 쓴 최근 시들(1부)의 압도적 정서에 비해, 과거 젊은 날에 쓴 시들(2∼3부)은 다소 성긴 게 사실이다. 그 간극의 차이를 시인은 “영화처럼 꿈꿀 수 있다고 믿었던 젊은 시절과 달리 지금은 인생의 속살이 찬란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성윤석은 용미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했다. 죽음도 공포가 아닌 평생 붙들고 씨름하고픈 화두가 됐다. 온갖 ‘아름다운 이유’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저 바깥 세상, 그곳이야말로 거대한 공중묘지임을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이문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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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9-16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라 할말이 없네요..꼭 사서 읽어야겠습니다..

로쟈 2007-09-16 18:01   좋아요 0 | URL
막바로 삶의 '실재'로 초대하는 시들 같습니다...

2007-09-16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16 17: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유 2007-09-16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저기 건드리는, 쿡쿡 쑤시거나 심장을 컥컥 막히게 하는 시들이라 읽으면서 너무 아프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로쟈 2007-09-17 00:29   좋아요 0 | URL
성긴 시들도 들어있다고 하니까 얼추 중화가 되지 않을까요?..
 

이번 가을에 읽을, 주로 최근에 나온 시집들 모음. 김행숙, 박상우, 성윤석, 송승환, 이영광, 황병승의 시집들(가나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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