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처음인가?) 가을에 읽을 시집들의 리스트를 만들어보았다(http://blog.aladin.co.kr/mramor/1574630). 최근에 시집을 낸 다섯 명의 젊은 시인들을 먼저 꼽아봤는데, 선정에 도움을 준 리뷰들 가운데 하나를 일단 옮겨놓는다(기회가 닿으면 다른 리뷰도 옮겨놓을 것이다). 아예 '로쟈의 시읽기'란 카테고리를 새로 만들려고 하다가 일을 더 벌이기 전에 이 정도에서 타협을 보기로 했다. 아래 리뷰는 작년에 '장자의 그림, 처남들의 연주:문태준, 황병승론'이란 평문으로 창비의 신인평론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등단한 젊은 문학평론가 김종훈씨의 글이다(http://www.culturenews.net/read.asp?title_up_code=001&title_down_code=002&article_num=8339). 성윤석의 시집 <공중묘지>(민음사, 2007)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컬처뉴스(07. 09. 05) 구름이 가까이 오면 어떻게 하세요?

칸딘스키의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는 여전히, 갖가지 색의 고유한 속성을 말하는 대목이 가장 흥미롭다. 그에 따르면 노랑은 예민하면서 밖으로 정열을 발산하고 빨강은 내부를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정열을 분출하고 파랑은 결코 인간적이지 않는 슬픔의 배음을 띤다. 그리고 흰색과 검정색은 침묵을 거느린다. 시작하기 전의 무(無)이며 가능성으로 차 있는 침묵이 흰색이고 해가 진 후의 무(無)이며 가능성이 없는 침묵이 검은색이라고 한다. 그러니 침묵은 탄생 이전과 소멸 이후의, 역사 이전과 이후의, 말하기 전과 말한 다음의 세계이다. 하얀 침묵의 세계를 탐사하는 과학자와 검은 침묵의 세계를 추측하는 신비주의자의 딜레마는 말을 가지고 침묵의 세계를 더듬는다는 것이다.  

죽음을 말하는 행위는, 침묵을 말한다는 것과 같아서 우스꽝스럽다. 우리는 기껏해야 신비주의자의 옷을 입고, 죽음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그 옆에서, 겨우, 죽음을 말한다. 두려움에 가득 찬 흉내내기는 진실에 닿지 못한다. 그러나 그 흉내내는 말의 고통이 거짓일 수는 없다. 고통을 겪는 것은 증상이 아니라 증상을 가진 환자이며, 환자의 고통 또한 다시 가족에게로 전환되기도 한다. 환자가 고통스럽다고 가족의 고통이 거짓일 수 없으며, 신경증 환자가 고통을 겪는다고 해서 분석자가 고통을 겪지 않는 것은 아니다. 말을 가진 자, 생각을 가진 자는 흉내를 내는 것으로 고통의 진실에 닿는다.

성윤석의 시집 『공중묘지』의 이곳저곳은 그가 지금 벽제 용미리 화장터의 공원 관리를 직업으로 삼고 있으며, “어린 아우”가 몇 해 전에 세상을 떴고, 어머니는 그 충격에 정신병원에 자진해서 들어갔다는 정보를 일러준다. 관념으로 죽음 옆에 있는 자가 아니라 실질적인 죽음 옆에서 살고 있는 자가 성윤석이다. 그러나, 성윤석의 시집을 펼쳐 보고 있는 이유가 이 실질적인 그의 이력 때문만은 아니다.

귓속 돌이 떨어져 나가고 만 이석증을
앓고 난 이후부터 앉아서 자는 날이 많아졌다.
미쳐버리고 싶은데, 미쳐지지 않는 늦은 밤 사무실의
사십 대처럼 빙빙 돌지는 않는데
가끔 뒤로, 뒤로,
정신의 불빛이 나가 버리곤 한다.
세상의 도움이란 이제 없는 것이다.
나에겐 정리되고 끝나는 일이란 없었다.
구름이 가까이 오면
발을 대보려 했을 뿐.
그곳에는 어떤 사람의 내력이
고여 있을까.
앉아서 자는 날엔 늘 귓속 돌이 떨어져 나간
자리가 궁금해졌다.
― 「1과 8 사이엔 무엇이 있나」 부분

 “구름이 가까이 오면 / 발을 대보려 했을 뿐”. 구름이 가까이 오는 사건과 발을 대보는 행위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그리고 왜 이 구절은 계속 여운을 남길까. 구름은 천상의 것, 발은 보잘 것 없는 지상의 것, 이 간극의 공명 때문일까. 이런 해석은 부질없다. 천상과 지상의 구도 설정은 구름이 가지고 있는 일상성과 발을 내미는 개별성을 모두 없애버린다. 중요한 것은 “발을 대보”는 행위의 생생함과 그 생생함 밑에 깔려 있는 논리적 맥락이다. 그렇다면, 죽음 옆에서 생활하는 자의 무력감이 “발을 대보”는 행위에 담겨 있다고 이해하는 것은 어떨까. 구름이 가까이 오는 사건은 자연스러운 일상의 풍경이며 “발을 대보”는 것은 구름과 소통하고자 하는 나의 행동이다. 평온한 삶을 그는 누리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의 행동은 구름과의 소통이면서 동시에 평온한 삶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의 표현인 것이다.

발을 대본다고 해서 평온한 삶을 누릴 수는 없기 때문에 무력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구름을 평온한 삶이나 가까이 있는 죽음과 동일시하는 것 역시 부질없다. 관습적인 알레고리를 벗어나는 지점에 『공중묘지』의 좋은 시들이 있다. 그가 “사내의 입술을 벌린 뒤 / 철 핀으로 양 입술의 속을 고정시킨다”(「일요일2」)라고 했을 때, 여느 시들은 시체의 입에 박힌 철 핀을 곧장 냉혹함과 잔인함의 뜻으로 환원시키지만, 그의 시는 그의 체험 덕에 독자의 시선을 말 그대로 한참동안 실제 시체 입술에 고정된 철 핀에 머물게 한다. 그러므로 저 구름은 삶이나 죽음이 아니라, 고개를 들면 보이는 하늘의 저 유유자적하는 구름 그 자체이다. 유사한 구절이 다른 시에도 있다.

삽을 들고 파고 또 파고 내려가도
이놈의 산마는 끝도 없이 내려가 버리고 말았네요.
나는 그만 포기했어요.
너무 뻔해서 같이 안 잔 여자처럼
그때까지 따라온 구름에 발이나 대보며,
산마의 뿌리를 딛고
다시 올라왔지요.
묘지들의 언덕엔 눈보라가
앞이 안 보이도록 날리고
언덕 위 나선의 끝 눈발 사이로
언뜻 산역 인부 하나가 삽을 들고
무덤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자신의 영화를 혼자서 돌리고
또 돌리는 실패한 영화감독처럼
― 자네 이제 묘지 관리인이 다 되었네.
칭찬해 두던 그 노인네는 은퇴해서도
이 묘지를 떠나려 하진 않아요.
죽은 자들의 아파트.
이런, 이제는 찾아오지도 않고
관리비가 연체된 분들이 너무 많아졌어요.
어디로 가 버린 걸까요?

모두들 구름 같은 분들이겠죠.
― 「죽은 자들의 아파트에 눈이 내릴 때」 부분

“그때까지 따라온 구름에 발이나 대보며”. 비슷한 구절이다. 그러나 그 울림은 서로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다. 앞 시 「1과 8 사이엔 무엇이 있나」에서 시적 주체는 이석증을 앓고 있다. 귓속에 돌이 떨어져 나가 어지러움증을 앓고 있는 병이다. 그는 결여된 인간이다. 완성의 의지를 보이기보다는 회복의 징후를 기다리는 이이기도 하다. 그에게 완성은 없다.(“끝나는 일이란 없다”) 체념 속에 빠져 있을 때 구름이 가까이 오고 그는 발을 대보려 한다. 이것은 소극적이며 슬프기도 한 의지의 표현이다. 전체의 체념의 정서를 배경으로 슬픈 의지는 단 한번 출현한다. 영웅적 과시가 아니라 병을 앓고 있는 이의 회복하고 싶은 욕망으로. 물론 발을 대본다고 해서 회복되지는 않겠지만.

반면 두 번째 시 「죽은 자들의 아파트에 눈이 내릴 때」에서는 자신의 이력을 파헤치려는 듯 삽을 들고 무덤을 파내려 간다. 그것은 의지의 표현이다. 그리고 산마의 뿌리를 딛고 다시 올라온다. 이것도 의지의 표현이다. 바탕에 깔려 있는 의지 사이에 “너무 뻔해서 같이 안 잔 여자처럼 / 그때까지 따라온 구름에 발이나 대보며”가 끼어 있다. 의지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체념의 정서가 짙다. 각각을 둘러싼 주된 정조를 벗어나는 지점에서 저 발을 대보는 행위는 이채롭다. 그가 빠져 있는 상념에서 그를 끄집어내는 동기는 자연스러운 구름의 흐름이다. 자연스러운 행위에 몸을 맡기는 행위는 쉬운 일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에 자진해서 균열을 내는 고통스러운 일이다.  

욕망에 논리를 짜 맞추는 행위는 칩거 생활을 하는 것과 같다. 밖에서 타인의 말과 나의 말을 계속 섞으면 나의 말이 타인의 말과 닮아 간다. 반복이나 중첩이나 처세술이 이와 다르지 않으니, 칩거는 창조적 직관의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대개 칩거는 자폐와 망상을 불러온다. 칩거가 창조적 직관의 밑거름이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가로막는 벽을 넘어 바깥과의 소통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시인에게 소통의 대상은 독자가 아니라 자연스러움이며, 시인을 가로막는 벽은 난해함이 아니라 시인의 이성과 논리가 잇대놓은 욕망의 사고체계일 것이다. 침묵으로 향해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에 몸을 맡겼을 때 언어가 고통의 진실에 가 닿을 수 있듯, 창조적 직관이 밑거름이 될 때 시인의 언어는 이성과 논리의 그물을 빠져나올 수 있다. 그것으로 시의 언어는 임무를 완성한다.(김종훈_문학평론가)

07. 09. 16.

P.S. 참고로 서울신문의 소개기사도 옮겨놓는다. 그의 시적 여정은 '극장이 너무 많은 우리 동네'에서 '무덤이 너무 많은 나의 일터'까지로 요약되는 듯하다.

서울신문(07. 08. 06) 이승의 끝에서 삶을 긍정하다

쇠뜨기, 바랭이, 쑥부쟁이가 무연묘(無緣墓)를 뒤덮었다. 비석도 상석(床石)도 없다. 활개도 축대(築臺)도 없다.10년이 지나도 찾는 이 없고, 묘적부에서도 지워졌다. 바람 불어 초록 풀씨 날리면 묘지는 수풀 속에서 형태마저 잃는다.‘더욱 버려져’ 마음 아린 무연묘에 시선을 주며 쓸쓸해하는 이, 성윤석(42) 뿐이다. 성윤석은 경기도 용미리 서울시립묘지 관리인 생활을 시작하고도 2년이 지나서야 놓았던 펜을 다시 들 수 있었다.25살 대학 4학년(1990년) 때 등단했고,31살(1996년) 때 첫 시집(‘극장이 너무 많은 우리 동네’, 문학과지성)을 냈던 시인. 두 번째 시집 ‘공중묘지’(민음사)가 나오기까지 11년이 걸렸다.

‘공중묘지’는 죽음으로 꽉 차 있다. 썩은 시체 눈알이 굴러 떨어지고, 시즙(屍汁)이 뚝뚝 흐른다. 몸에서 막 빠져나간 영혼은 ‘사랑해서 생긴 약점’(아내와 어린 자식들)이 맘에 걸려 세상을 떠돈다. 시집에 내리 깔린 죽음의 이미지엔 시인이 보낸 가혹한 시간이 더해졌다. 11년 동안 그는 신문기자와 공무원을 거쳤고, 사업에 실패했다. 심장마비로 갑작스레 동생이 죽었고, 충격받은 어머니는 스스로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몸의 평형기능을 상실하는 ‘양성발작성변환이석증’에 걸려 시인의 눈은 환상을 봤다. 지하철을 타면 두 다리가 공중에 붕붕 떴고, 눈 옆으로 꽃이 폈다. 밤마다 하얀 원피스 입은 소녀가 미간을 스쳐갔다. 묘지 앞에서 만난 시인은 “공포스러운 나날이었다.”고 회고했다.

묘지에 와서야 공포를 떼어내다
시인은 그 공포를 무심한 언어로 옮겼다.“어머니는 기절했으며 / 조문객들은 낄낄대며 술추렴을 했다”(‘아우가 죽었다’)고 썼고,“미쳐 버리고 싶은데, 미쳐지지 않는 늦은 밤”에 “가끔 뒤로, 뒤로 / 정신의 불빛이 나가 버리곤 한다”(‘1과 8사이엔 무엇이 있나’)며 전정기관 망가진 자신을 관조했다. 공포로부터 자신을 떼어내 객관화할 수 있었던 건 살아 움직이는 것 없는 공중묘지, 온갖 버려진 것들의 집결지에 와서야 가능했다.

“목매러 왔다 줄만 매달아 놓고 간 사람, 미혼모가 쓰레기통에 버리고 간 아이 시체, 묘지를 떠도는 애꾸눈 애완견…. 묘지의 살아있음이 눈에 보이면서 이야기들이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의 골짜기인 묘지에서 도리어 이야기는 살아나더군요.”

모든 사람이 무서워하며, 묘지 인부들마저 침 뱉으며 멀리하고, 까마귀떼만 날아오르는 공중묘지가 이제 시인에겐 일상이자, 밥을 벌고, 삶을 구하는 터전이 됐다. 늙은 산역 작업부가 “자네 이제 묘지 관리인이 다 되었네”(‘죽은 자들의 아파트에 눈이 내릴 때’)라고 할 만큼 ‘내공’ 쌓인 그는 죽음 가득한 행간에 생의 의지를 꼭꼭 숨겼다. 공중묘지는 죽어 떠도는 영혼이 마지막으로 의탁하는 안식처(‘공중묘지 6’)이자, 시체의 자양분을 찾아 산마가 무덤 밑으로 끝없이 뿌리 뻗는 곳(‘죽은 자들의 아파트에 눈이 내릴 때’)이다. 생명이 부글거리는 공간(‘알박기’)이다.

“아버지가 묻혀 있는 동그란 무덤 속 / 아버지의 살점을 자양분으로 / 살모사는 새끼를 낳자마자 죽고 낳자 죽고 / 두더쥐와 굼벵이와 들쥐와 구더기는 아버지의 / 평생 속고 속아 썩어 문드러진 가슴께에서 / 햇빛처럼 떨어지는 생을 향해 / 부글부글거리겠지.”(‘알박기’) 시인은 “이승의 끝인 공중묘지에서 삶을 긍정함으로써 신산한 인생들이 겪어온 아픔을 치유하고 싶었다.”고 했다.

묘지 관리인으로 활동하며 창작
‘공중묘지’에 실린 58편의 시적 밀도가 모두 균일한 건 아니다. 묘지 관리인으로 일하며 쓴 최근 시들(1부)의 압도적 정서에 비해, 과거 젊은 날에 쓴 시들(2∼3부)은 다소 성긴 게 사실이다. 그 간극의 차이를 시인은 “영화처럼 꿈꿀 수 있다고 믿었던 젊은 시절과 달리 지금은 인생의 속살이 찬란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성윤석은 용미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했다. 죽음도 공포가 아닌 평생 붙들고 씨름하고픈 화두가 됐다. 온갖 ‘아름다운 이유’로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저 바깥 세상, 그곳이야말로 거대한 공중묘지임을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이문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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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09-16 0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라 할말이 없네요..꼭 사서 읽어야겠습니다..

로쟈 2007-09-16 18:01   좋아요 0 | URL
막바로 삶의 '실재'로 초대하는 시들 같습니다...

2007-09-16 16: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16 17: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수유 2007-09-16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기저기 건드리는, 쿡쿡 쑤시거나 심장을 컥컥 막히게 하는 시들이라 읽으면서 너무 아프지 않을까 염려됩니다...

로쟈 2007-09-17 00:29   좋아요 0 | URL
성긴 시들도 들어있다고 하니까 얼추 중화가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