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한겨레21의 출판 동향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잡지를 오늘 받아서 읽은 몇몇 흥미로운 기사 가운데 하나이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가 '중간필자' 결핍 현상에 대한 진단과 분석을 해주고 있는데, 학계와 언론을 포함한 전문가 집단이 질적·양적으로 흘러넘쳐야 이뤄지는 게 '중간필자군'이라는 입장에서 다소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하긴 학계도 매체도 내다버린 형편이라면 무얼 기대하기도 힘든 경우이긴 하다... 

한겨레21(09. 09. 18) 학계도 매체도 버린 중간필자 

한국 인문사회 출판에는 ‘중간필자’, 즉 저술을 주업으로 삼는 자유로운 문필가 집단이 형성돼 있지 않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대학의 인문학이 고사 상태이기 때문이다. 인문학은 상상력과 자의식을 먹고 사는 학문인데, 지금 대학에서 이뤄지는 인문학 연구의 80%는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고증학·통계학·교육학·족보학 넷 중 하나다. 이들의 공통점은 일정한 ‘공식’에 따라 이뤄지는 연구이기 때문에 품만 들이면 결과가 나온다는 사실이다. 나머지 18%는 인문학을 표방하지만 싱겁거나 외곬이라서, 그 연구 결과물을 읽고 나면 “에라~ 그래, 혼자 놀아라” 하는 마음이 든다. 그리고 남는 2%가 그나마 읽을 만한 논문을 생산해내는데, 그들은 대학 내에서 열심히 ‘왕따’당하다 결국 입지 구축을 포기하고 대충 한 발만 걸쳐둔 채 밖으로 나온다. 그 경계성 혼란을 인문학으로 승화시켜 대중적 성공을 거두는 이들이 현재 한국의 중간필자다.

‘미국식’과 ‘기지촌 지식인 기질’이 결합한 학계
둘째는, 매체가 제 역할을 못하기 때문이다. 탐사보도를 하는 언론이 너무나도 부족하기 때문에 매체에서 뽑아져나오는 인문학이 거의 없다. 고만고만한 연재물이 대부분이다. 인문학을 기반으로 사회적 이슈를 제기하고 대중의 지적 관심을 강하게 집약시키는 해외 저술들은 절반 이상이 저널리스트가 쓴 것들이다. 베트남전의 실상을 밝혀 퓰리처상을 받은 미국 저널리스트의 유작 <콜디스트 윈터>란 책이 최근 나와서 이목을 끌었는데, 이는 다른 것은 차치하고라도 한국전쟁을 가장 가까이서 가장 생생하게 묘사한 책으로 남을 것이다. 전쟁의 원인, 구조, 경과 등을 따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걸 읽는 사람이 진짜 폭탄 터지는 소리를 듣고, 다리가 잘리는 아픔을 느끼게 하는 능력도 중요하다. 현장에서 10년 이상 지독하게 훈련받고 직업상 방대하게 독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저널리스트들이야말로 학자는 전혀 상상할 수도 없는 기발한 방식으로 ‘글감’을 구상하고 실천할 수 있다.

그동안 간혹 중간필자에 대한 논의들이 있었는데, 아쉬운 것은 ‘전문가-중간필자-대중’으로 너무 구획지어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이런 논의 구조에서는 학계가 지리멸렬하니 중간필자라도 잘해주면 좋겠다는 기대를 품게 한다. 학계는 무시하고 대중을 선도하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문제의 근본을 잘못 보는 것이다. 나는 중간필자를 ‘흘러넘침’ 현상으로 본다. 학계와 언론을 포함한 전문가 집단이 질적·양적으로 흘러넘쳐서 이뤄지는 중간필자야말로 ‘상업성’과 ‘개인적인 이유’ 등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정확한 지식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흐르기는커녕 바싹 말랐다.

학계는 <기획회의>에서 조우석 문화평론가가 지적한 대로 ‘미국식 시스템’과 ‘기지촌 지식인 기질’이 결합해서 아주 가관이다. ‘군단’급 학회를 제외한 중소 규모의 학회는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비를 놓치지 않기 위해 학술지 논문의 구색을 맞추느라 아는 사람들에게 논문 한 편만 보내달라는 ‘강제성’ ‘구걸성’ 전화를 돌리느라 바쁘고, 젊은 학자들은 2~3년 기본 연봉을 보장해준다는 이유로 자기 연구 분야도 아닌 프로젝트에 무미건조하게 투입돼 시간과 능력을 허비하고 있다. 출판사와 ‘의욕적으로’ 계약한 원고는 ‘공수표’로 방치한 채 말이다. 이런 현상이 갈수록 심해진다.  

가외의 심각한 노력이 요구되는 매체 구조
언론도 마찬가지다. 최근 우연히 한 블로그를 알게 됐는데, 어떤 역사적 사건을 다양한 문헌을 근거로 파고들어 역사상식의 뒤통수를 치는 글을 연재하는 개인 블로그였다. 글마다 참고 문헌이 붙어 있는데 많을 경우 10편이 넘어갔고, 그중에는 해외 석학의 최신 저작이나 논문도 포함돼 있었다. 글을 잘 쓴다기보다 질문을 잘했고, 역사적 맥락을 따져보는 품새가 아마추어적인 듯하면서도 꼼꼼하고 알찼다. 그런 글이 100편 넘게 올라와 있었다. 원고지 매수로는 3천 매 정도였다. 당장 연락을 취해 책을 내자는 제안을 했고 현재 계약을 맺은 상태다. 그런데 그 사람은 대학에서 동양사를 전공한 한 경제신문 국제부 기자였다. 그는 직장의 일과는 전혀 상관없이 자신이 짬을 내어 성실하게 그런 글들을 써나갔던 것이다. 나는 지금 허랑한 글들의 바다에서 괜찮은 글 하나를 발견한 기쁨을 얘기하려는 게 아니다. 글이 나오는 구조가 글쓰는 이에게 가외의 심각한 노력을 요구한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다.

다수의 대중을 훌륭하게 설득하고 감동시킬 수 있는 한 사람의 저자가 탄생하기까지는 적어도 5권 이상의 전작이 필요하다. 적어도 책을 5권은 내야 5천 부 팔리는 저자에 도달한다는 출판계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지속적인 저술 작업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블로그에 글을 쓰고 포털이 중계하는 환경이 구축된 최근 5년 사이에 매체는 ‘빅뱅’이라고 할 만한 양적 팽창을 이루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표현 욕구를 블로그 등에 쏟아내고 있다. 그런데 이 중에서 ‘인문학’이란 간판을 달고 책으로 펴낼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에세이·잡기류거나 재테크·다이어트 같은 실용류다. 역사·예술·문화비평 등도 간혹 있지만 체계성이 부족하거나 콘셉트가 부여되지 않은 리뷰, 세상 읽기 종류가 압도적으로 많다.

지금 우리 인문저술계에 필요한 것은 ‘아이템’이 아니라 ‘콘셉트’다. 조선시대 역사교양서만 예를 들어보자. 기생, 하층민, 양반, 무기류, 살인사건, 연애사건, 왕, 후궁, 2인자 등 아이템이 널려 있다. 이들을 매개로 역사의 빈곳을 채워나가는 건데, 나도 이런 책들을 내긴 하지만 과연 이걸 인문학적 역사물이라 할 수 있는가? 나는 순수한 인문학 독자로서 왜 18~19세기 조선 지식인들이 하나같이 갑자기 백과전서 짓기에 몰두했는지 그 역사적 배경을 밝히는 다큐멘터리를 내고 싶다. 또한 조선 지식인들이 ‘중국’이라는 원전을 어떻게 이 땅에 ‘번역’하고 어떤 경우는 ‘베껴먹었는지’ 그 체계적인 커넥션과 계보학이 궁금하다. 게다가 동인·서인도 모자라 남인·북인·소론·노론·벽파·시파·노론청류까지 뻗어나가 나라가 망한 판국에, 그들의 다양한 역학관계라는 주제 하나만 가지고 온전하게 알아듣기 쉽게 정리해놓은 책 한 권 없는 현실이다. 과연 이런 것들이 변화된 매체의 양적 팽창이라는 환경을 등에 업고 이뤄질 수 있을까?

번역하는 것이 국가에 충성하는 길?
앞으로는 출판도 해외로 수출해야 영세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까운 중국만 해도 얼마나 시장이 큰가. 10년 전만 해도 중국 책들은 공무원이 쓰는 도덕 교과서처럼 재미가 없었다지만, 요즘은 대륙도 상업출판이 불붙어서 얕잡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글발’에 물이 올랐다. 거기에 ‘대표선수’로 내보내려면 최소한 소재의 특수성(특수한 보편성), 콘셉트(관점)의 확실성, 자료조사의 성실성, 논술 구조의 정합성은 담보돼야 한다.

그런데 문학이나 다른 실용·경제 분야라면 몰라도 인문학 분야에서 그러기는 정말 쉽지 않을 것 같다. 해외로 판권을 수출하려면 실용서나 경제경영서를 잘 세팅해보는 게 오히려 빠르겠다는 판단이 자꾸 앞선다. 어차피 그쪽은 내용보다는 콘셉트 싸움이니 말이다.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랬다”고 가벼운 책으로 돈을 벌어 정말 중요하고 절실하게 필요한 책을 ‘번역’하는 것이 국가에 충성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 책 읽고 ‘외국어는 안 돼도 콘셉트는 되는’ 진짜 엘리트 중간필자가 많이 생기게 말이다.(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09. 0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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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하민혁의 생각
    from haawoo's me2DAY 2009-09-18 10:27 
    커패서티! RT aleph_k님: 한국에 야구, 게임 해설자는 몇 명이나, 전업작가는 몇 명이나 먹여살릴 수 있는 커패서티일까? heterosis님 rabbiyang님 julymon님 학계도 매체도 버린 중간필자 http://ow.ly/pTPj
 
 
노이에자이트 2009-09-17 23:33   좋아요 0 | URL
출판사에서 책저술을 맡길 만한 필자 구하기가 쉽지 않은 모양이군요.조금 고급독자를 위한 넌픽션물이나 역사물이 많아져야 하는데...미국의 퓰리처상 넌픽션 부문같은 상이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로쟈 2009-09-19 09:02   좋아요 0 | URL
민음사에서 논픽션도 공모하지만, 아직은 응모작이 많지 않나 봅니다. 작가 지망생들은 모두 '소설'에만 매달려 있어서요. 공부하는 사람들은 넌픽션에 쏟아부을 수 있는 여력이 없지요. 입에 풀칠하고 바쁜 형국이어서...

목동 2009-09-18 10:29   좋아요 0 | URL
'중간필자','중간지대적 담론','양극단을 융합할 힘의 중간' 등에서
'중간'의 중요함을 느낍니다.

로쟈 2009-09-19 09:03   좋아요 0 | URL
학문과 삶의 소통이라고 하면 많이들 공감할 듯싶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습니다. '학문은 학문이야'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아직도 많고요...

나의길 2009-09-18 14:44   좋아요 0 | URL
중간입장이 일방통행이 아니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여러 사회현상에 의해 중간필자의 그 수가 적을 수도 있지만, 출판, 독자, 저자의 세가지 형태의 직업군을 볼 때는 출판사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들을 대우하고 서로가 도울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야 각각의 산업군도 알차게 성장하리라 봅니다. 현재 출판계는 베스트셀러 글, 베스트 셀러 저자, 베스트 셀러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것도 그런 중간필자의 수를 줄이는데 한 몫 한다고 봅니다. 양질의 저자를 출판사가 발굴하고 그들과 신뢰할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 인문학의 확대가 필요한 시점이라 봅니다.
중요하다는 것에는 누구나 공감하는 내용이나 불특정 공간에 문제만을 제기하는 것도 문제라 봅니다. 과연 출판계는 잘하고 있나도 한번 들춰봐야 하지 않을까 봅니다.

로쟈 2009-09-19 09:05   좋아요 0 | URL
사실 출판, 독자, 저자에 다 불만을 토로할 수 있지요. 어느 편이 먼저 총대를 매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주초에 읽은 시사IN의 칼럼을 스크랩해놓는다. 고종석 한국일보 객원논설위원(직함이 좀 길다)이 '마르크스라는 유혹'에 대한 불편함을 적고 있다. 사회적 담론이 대개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의미론적 마르크스가 아니라 화용론적 마르크스다. '진정한 마르크스'라는 수사가 어떻게 사용되느냐는 것(나는 '마르크스의 연인들'에 대한 고종석의 비판에 공감한다). 마르크스를 지식인의 아편으로 본다는 점에서(레이몽 아롱의 말이던가) 고종석의 자유주의를 다시금 확인하게도 해주는 칼럼이다(이념적 포지션으로 보자면, 그는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중도 보수이다).      

  

시사IN(09. 09. 15) 마르크스라는 유혹

‘마르크스의 거대한 귀환.’ 프랑스 시사 주간지 <누벨 옵세르바퇴르> 최근 호의 커버스토리 제목이다. 표제가 하도 거창해서 본문에 눈길을 주었는데, 별것 아니었다. 근년의 경제 위기가 다시 마르크스 붐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 자본주의 심장부인 뉴욕 월스트리트에서까지 ‘마르크스가 옳았다’는 외침이 터져나온다는 것, 이 19세기 경제학자가 예언한 ‘자본주의 체제의 필멸’을 많은 사람이 다시 떠올리고 있다는 것. 상투적 마르크스 예찬도 고명처럼 얹혀 있다. “오늘날의 세계화 시장경제를 분석할 수 있는 최량의 지적 도구들은 마르크스의 책에 있다” “돌아와요 마르크스! 사람들이 미쳤어요!”  

마르크스를 향한 이런 초혼가(招魂歌)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때때로 울려 퍼질 것이다. 세계 경제가 어려울 때마다 그럴 것이고, 어렵지 않을 때라도 지식인 사회 일각에서는 무시로 그럴 것이다. 종교가 민중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말을 어느 프랑스인이 야유의 맥락에서 비틀었듯, “마르크스주의는 지식인의 아편”이므로. 유럽만이 아니라, 한국에도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는 지식분자가 적잖다. 

그러나 가까운 앞날에 자본주의가 사멸할 것 같지는 않다. 지금의 야만스러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크게 교정된다 하더라도, 우리가 숨쉬는 공기는 여전히 자본주의의 공기일 것이다. 시장경제라는 의미의 자본주의 말이다. 무엇보다도, 마르크스 예찬은 그의 이름으로 20세기의 70년간 저질러진 ‘역사의 범죄’에 눈을 감는 짓이다. 지금부터 스무 해 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사회주의 체제에 금이 쩍 갔을 때, 그것을 역사의 반동이라고 말할 수는 결코 없었다. 그것은 자유와 존엄을 향한 인류의 욕망이 내딛은 거대한 발걸음이었다. 일각에서 고르바초프는 제 권력 기반인 공산당을 스스로 무너뜨린 ‘바보’로 기억되지만, 그는 더 많은 사회주의가 더 많은 억압을 뜻한다는 걸 깨닫고 용기 있게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꾼 위대한 단독자다.

물론 마르크스의 연인들은 그 이름을 때 묻은 현실사회주의와 연루시키지 않는다. 그들은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이, 더 근본적으로는 레닌이 구부러뜨리기 이전의 ‘진정한’ 마르크스주의를 꿈꾼다. 그러나 마르크스라는 이름을 역사적 사회주의에서 떼어놓으려는 시도는 덧없고 비겁하다. 우리에게 알려진 마르크스주의 체제는 유혈 낭자했던 역사적 사회주의 체제뿐이므로. 스탈린의 사회주의, 마오쩌둥과 엔베르 호자의 사회주의, 차우셰스쿠와 폴 포트와 김일성의 사회주의 같은 것들 말이다. 지상에 건설된 마르크스주의 체제는 이 독재자들의 체제였다. 이 학살자들이 입에 달고 살았던 마르크스가 바로 역사적 마르크스, 우리가 아는 실존인물 마르크스다. 이들에게 불려나온 마르크스 말고 다른 ‘진정한’ 마르크스 같은 것은 없다. 아니 ‘진정한’ 마르크스, ‘진정한’ 마르크스주의가 있다 하더라도, 지금의 자본주의를 지양해 이룩할 더 나은 사회에 그 이름을 갖다 쓰는 것은 부적절하다. 20세기 ‘마르크스주의 체제’가 이 이름의 함의를 거의 남김없이 빨아들였기 때문이다.

‘진정한 마르크스’라는 장신구로 치장하고 싶은 사람들
실상 마르크스의 새 연인들도 그의 부활을 실제로 바라는 것 같지는 않다. 그들 가운데 다수는, 그저 ‘진정한 마르크스’라는 때깔 좋은 장신구로 저를 치장하고 싶은 것일 게다. 그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그리고 가장 ‘자본주의적인’ 자본가들 처지에서도 받아들일 만한 일이다. 담론은, 그것의 ‘불온함’이 근본주의에 가까워질수록, 현실과의 접촉면을 잃어버리기 마련이니 말이다. 현실의 자본과 권력을 불안하게 하는 것은 ‘자본주의 타도’를 요구하는 근본주의적 구호가 아니다. 그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법인세율을 조금 높이라는 요구, 서민 복지를 조금 늘리라는 요구, 노동 현장에서든 거리에서든 법정에서든 양식(良識)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연대의 움직임 같은 것이다.

용산 참사가 일어난 것이 마르크스주의 부족 때문이 아니듯, 재벌이 죄짓고도 벌받지 않는 것이, 기무사가 민간인들을 사찰하는 것이, 평화 시위가 공적 폭력에 노출되는 것이 마르크스주의가 모자라서는 아니다. 심지어 실업자와 비정규 노동자가 늘어나고 사회 양극화가 심해지는 것조차 마르크스주의 부족 때문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자유와 평등과 연대를 향한 한 줌의 정치적 욕망, 한 줌의 정의감, 한 줌의 시민적 양식이다.(고종석_한국일보 객원 논설위원) 

09. 09. 17. 

P.S. 내가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마르크스라는 이름을 역사적 사회주의에서 떼어놓으려는 시도"에 대한 비판이다. 그리고 국가의 야만적인 폭력이란 관점에서 보자면, 용산 참사와 민간인 사찰과 공적 폭력의 남용은 그 '역사적 사회주의'와 그리 먼 거리에 있지 않다. 박정희식 계획경제가 스탈린식 계획경제와 먼 거리에 있지 않았던 것처럼. '마르크스'에 대한 호명이 필요한 것은 거꾸로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에겐 '진정한 마르크스'가 아니라 그냥 '마르크스'가 필요하다. 마르크스에 대항하는 마르크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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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 2009-09-17 20:45   좋아요 0 | URL
식물이나 동물이나 독은 필요합니다.
상대를 치유하는 약으로도 가능하니까요.

로쟈 2009-09-19 09:06   좋아요 0 | URL
상처를 입힌 화살만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고 하지요...

philocinema 2009-09-17 22:56   좋아요 0 | URL
'지식인의 아편'이라는 말에 동감합니다.
실천도 못하면서 늘 머릿속에서나 말로만 평등, 분배, 정의등을 반복하는
저의 모습을 돌아보게 합니다.


로쟈 2009-09-19 09:08   좋아요 0 | URL
지젝이 반복적으로 주장해온 것이기도 합니다. 진보 담론이 오히려 진보의 장애물로 기능한다는. 자유에 대한 담론이 오히려 자유의 신장에 장애가 되는 것처럼요...
 

러시아의 아나키스트 혁명가 크로포트킨의 자서전이 <한 혁명가의 회상>(우물이있는집, 2009)로 재출간됐다. <크로포트킨 자서전>(우물이있는집, 2003)으로 출간됐던 책이다. 마침 <상호부조론>과 함께 그의 주저인 <아나키즘>(개신, 2009)도 번역되었기에 리딩 리스트를 만들어둔다('아나키즘'에 관한 책들은 제법 많아서 그냥 '크로포트킨 읽기'만 다루기로 한다). 이 참에 또다른 걸출한 아나키스트 바쿠닌의 저작들도 나왔으면 좋겠다. 아래는 <크로포트킨 자서전> 초판에 대한 한겨레의 소개기사이다.    

19세기 후반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운동을 양분한 것은 ‘적과 흑’이었다. 붉은 깃발을 앞세운 진영은 카를 마르크스를 수장으로 한 ‘공산주의’ 세력이었고, 검은 깃발을 내건 진영은 미하일 바쿠닌을 위시한 아나키즘 세력이었다. 마르크스주의와 그 상속자인 레닌주의가 사회주의 운동의 주류를 차지하면서 아나키즘은 볼품없는 서자 취급을 받았지만, 1864년 제1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 결성 전후만 해도 두 혁명 이념은 대등한 경쟁자였다.

19세기 말 바쿠닌에 이어 아니키즘 운동의 지도자로 떠오른 사람이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1842~1921)이다. 아나키즘을 주창했지만 정교한 이론체계를 짜지 못한 바쿠닌과 달리, 크로포트킨은 광범한 지식과 풍부한 경험을 살려 아나키즘 사상의 건축물을 세운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젊었을 적부터 지리학과 동물학 분야에서 학자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한 그는 ‘아나키즘 운동의 일급 이론가’로 자신의 후반생을 살았다. 러시아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출세를 보장받았던 그는 29살 때 귀족세습권을 포기하고 만인의 자유와 평등을 위한 사회혁명의 길로 들어섰다.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헌신은 혁명가로서 그의 삶에 특별한 색조를 입혔다.

귀족세습권 포기 '일급 이론가'무정부·비혁명 '자유 코뮌' 역설 <크로포트킨 자서전>은 1899년 그가 망명지 런던에서 펴낸 57년 삶의 회고록이다. 1980년대 중반에 <한 혁명가의 회상>이란 이름으로 국내에 출간된 바 있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신성한 지위’가 무너진 지금 상황에선 그의 자서전은 그때와는 사뭇 다른 의미로 읽힐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크로포트킨 자서전>이 개인의 회고록인 것은 분명하지만,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 지은이의 성품은 이 책을 자서전의 일반적 성격과 다른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 책에서 지은이의 사생활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언제 연애를 했는지 따위는 일절 쓰지 않았으며, 결혼에 대해서조차 말하지 않는다. 대신에 자신이 살았던 시대와, 자신이 만났던 사람들의 행동과 심리에 관해 가능한 대로 유려한 문체로 기술한다. 그에 따라, 이 삶의 기록은 19세기 유럽 노동운동사는 물론이고 그가 살았던 시대의 러시아 역사까지를 모두 담은 일종의 체험적 역사서가 됐다.

이 회고록은 지은이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회주의 사상과의 비교를 통해 보여주는 마당이기도 하다. 그에게 국가는 ‘모든 악의 근원’이었고, 혁명은 민중을 억압할 수밖에 없는 국가나 정부를 철폐하는 것이어야 한다. 더구나 마르크스 진영이 주장한 ‘혁명적 독재’는 ‘민중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 말고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낡은 권력장치’일 뿐이다. “혁명은 단순히 지배자를 교체하는 것이 아니다. 인민에 의한 모든 사회적 재부의 수용이다. 인간성 발전을 오랫동안 저해한 모든 폭력의 폐지다.” 그는 인민의 자발적 연대와 협동에 기초한 ‘국가 없는 자유 코뮌’의 건설을 혁명의 목표로 제시했다. 그의 사상은 ‘아나코-코뮌주의’로 요약된다.

이 책의 본문 내용은 1899년에서 끝나고 있기 때문에, 그 뒤의 삶은 보여주지 않는다. 크로포트킨은 1917년 러시아 2월혁명 후 조국으로 돌아가 10월혁명에 동참했다. 하지만 백군이 패퇴한 뒤 볼셰비키는 아나키스트파를 공격해 궤멸시켰다. 크로포트킨은 볼셰비키의 폭력적 권력 구축을 보며 “이것은 혁명의 매장이다”고 말했다. 그는 1921년 모스크바 근처에서 쓸쓸히 죽었다. 크로포트킨의 절친한 벗이었던 덴마크 작가 게오르그 브란데스는 이 자서전에 붙인 서문에서 “이 사람보다 청렴하고 인류를 사랑한 사람은 없었다”고 썼다.(고명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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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혁명가의 회상- 크로포트킨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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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포트킨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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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즘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 지음, 백용식 옮김 / 개신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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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은 서로 돕는다-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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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 2009-09-17 21:40   좋아요 0 | URL
"법 없어도 살 사람'에게는 플라톤의 '국가론'은 무의미할까요?
무정부주의자는 자유주의와 자연주의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무정부주의자의 대안은 무엇일까요?

노이에자이트 2009-09-17 23:34   좋아요 0 | URL
크로포토킨은 1차대전 때 민족주의자들과 똑같이 참전을 주장해서 위신이 상당히 떨어진 것으로 아는데...10월 혁명에도 참여했나요?
 
인터넷은 인문학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

이번주 대학신문에서 '제도권 밖 인문학' 동향에 관해 짚어주고 있는 기사를 옮겨놓는다. <창작과 비평>(여름호)에 내가 실었던 글도 참조하고 있어서 먼댓글로 링크해놓는다.   

대학신문(09. 09. 12) 제도권 밖 인문학, 지금 만나러 갑니다

독재정권 시절. 청년들은 소위 말하는 ‘불온서적’을 들고 자발적으로 한데 모여들었다. 제도권 밖 인문학 단체의 시작이었다. 지식에 대한 사회적 규제가 완화된 지금, 이들 단체는 더욱 성장하고 있다. 제도권 인문학이 문학·사학·철학 등 인문학과의 위상이 축소되고 인문학 교육이 감소하는 등의 문제점을 드러내자 제도권 밖 인문학이 ‘인문학 위기 담론’의 한 대안으로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제도권 인문학의 위기에는 신자유주의적 기조가 큰 영향을 미쳤다. 백종현 교수(철학과)는 저서 『한국 인문학 진흥의 길』을 통해 “우후죽순으로 대학이 생겨났고 인문학 전공자들이 대량으로 양산됐다”며 “수요보다 공급이 많아져 인문학의 위기가 시작됐다”고 밝힌 바 있다. 또 제도권 인문학이 소수 학자끼리만 소통되는 것도 하나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창작과 비평』의 전 주간 최원식 교수(인하대 한국어문학과)는 “대학의 폐쇄성이 인문학 위기 형성에 일조했다”며 “제도권 밖의 인문학 단체들이 인문학 대중화의 토양을 마련하는 데 일조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문학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적 가치가 대중화돼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 허브로 성장한 ‘인디 인문학’들의 향연
제도권 밖 인문학 단체들은 꾸준히 성장해 지식 허브의 한 축으로 기능 하고 있다. 분과 학문에 갇히지 않는다는 강점으로 각종 학문을 망라하며 연구하는 이들은 그 성과를 단행본으로 내놓기도 한다. 제도권 밖 인문학 단체의 대표격인 ‘연구 공간 수유+너머’(수유+너머)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와 한국사회』, 『목소리 없는 자들의 목소리』 등의 저서를 발간했다. ‘수유+너머’는 공부와 생활을 함께 하는 단체의 성격을 특별히 ‘지식 코뮌’으로 규정하고 그에 대한 자체적 실험결과를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호모 쿵푸스』 등의 단행본으로 내기도 했다.

제도권 밖 인문학 단체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오프라인에서는 ‘수유+너머’를 비롯해 일반인 대상의 강연 ‘콜로키움’과 재소자 대상의 강연 ‘찾아가는 인문학 강좌’를 주최하는 ‘지행네트워크’, 인문학 연구 공동체 ‘다중네트워크 센터’, 문학과 미디어아트를 접목한 대안 문화공간인 ‘문지문화원 사이’를 주목해볼 만하다. 1980년대 ‘불온서적의 성지’에서 세미나와 토론회를 유치하며 학술문화공간으로 변신한 전남대 앞 서점 ‘청년 글방’과 ‘좋은 책방’ 그리고 서울대 근처 녹두거리의 ‘그날이 오면’ 또한 제도권 밖 인문학 단체라고 할 수 있다.

대학생과 일반인의 자발적 참여로 유지되는 이들 단체는 올가을에도 풍성한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자본주의와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고픈 독자는 ‘수유+너머’에서 오는 18일(금)부터 매주 금요일 개최하는 ‘대학생 케포이필리아’를 통해 마르크스와 루쉰의 삶을 배울 수 있다. ‘문지문화원 사이’는 황지우 시인이 21일부터 시민들의 문학적 감수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시학과 비극의 향연’을 주제로 아이스퀼로스와 소포클레스 등의 명작읽기 강의를 진행한다. 

◇‘성역’ 없는 온라인 인문학 공동체
언론 매체에 자주 등장하는 오프라인 단체들보다는 인지도가 약하지만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단체들 또한 인문학 대중화에 큰 역할을 한다. 이들은 단순히 오프라인 단체들이 활동 영역을 인터넷상으로 옮긴 것과는 다르다. 대표적 단체로는 올해 창립 10년을 맞은 인터넷 비평카페 ‘비평고원’이 있다. 가라타니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의 역자 조영일 문학평론가가 카페장으로 활동하는 이 단체는 이미 인문학도라면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대중적 단체로 성장했다.

‘비평고원’에는 성역이 없다. 철학·문학·영화 등 이들이 비평하지 않는 성역은 없으며 체면과 나이로 보호막을 갖던 선배들이 ‘기 센’ 후배들의 혹독한 비평을 피할 수 있는 성역은 더욱 없다. 온라인 커뮤니티가 오프라인 지식 코뮌과 비교해 갖는 강점이다. 조영일씨는 “비평고원의 모토는 자유로운 비평뿐”이라며 “오프라인 인문한 단체들은 상주 회원끼리의 유대로 신입 회원들이 배제당할 가능성이 크다”고 비판했다. 그는 “비평고원은 그러한 점을 고려해 오프라인에서의 모임을 지양한다”고 밝혔다. 또 ‘비평고원’은 참여자들이 자주 바뀌어 진입 장벽이 낮다는 점에서 일반인과의 소통이 용이하다. 실제 ‘비평고원’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회원의 절반 이상이 직장인, 자영업자, 주부 등 인문학 비전공자다. ‘비평고원’은 올가을 그간의 성과를 집대성한 동인지 『비평고원 프로젝트』를 발간할 계획이다. 이 동인지는 ‘가라타니 고진’과 ‘근대 문학의 종언’을 주제로 무크지 형식으로 출간된다 하니 이를 통해 제도권 밖 온라인 인문학의 수준을 느껴봄도 좋을 듯하다.

◇인터넷 공간은 학술활동의 변방이 아니다…중요한 것은 ‘의지’
온라인 인문학 단체는 피상적이고 부정확한 지식공동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또 지식 담론을 형성할 역량이 부족하다는 우려도 있다. 그러나 인터넷 서평꾼 ‘로쟈’로 알려진 이현우씨는 『창작과 비평』에 기고한 글을 통해 ‘비평고원’을 비롯한 온라인 인문학 단체의 가능성을 인정한 바 있다. 인터넷 공간의 인문학 단체는 개방성과 공유성, 현장성과 순발력을 통해 기존의 학술단체들이 창출하지 못했던 ‘중간지대적 담론’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중화를 넘어선 새로운 학술담론의 창출에도 긍정적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의지’다. 인터넷 공간의 활용과 지식의 공유는 사용자의 의지에 달렸다.

“인문학의 위기라고는 하지만 오히려 대중들의 인문학 수요는 높아지는 실정”이라는 ‘수유+너머’의 대표격인 최진호씨의 말처럼 제도권 밖 인문학은 이미 새로운 지식 원천으로 각광받고 있으며 이들 단체는 해외에도 알려졌다. 최원식 교수는 “제도권 밖 인문학 단체들은 대중적인 인문학 가치 함양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며 “대중과의 친화력에 덧붙여 제도권 인문학과도 소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김은열기자)  

09. 09. 16.   

P.S. 기사에서 "백종현 교수(철학과)는 저서 『한국 인문학 진흥의 길』을 통해"라고 언급한 것은 기자가 잘못 옮겨적은 것이다. '한국 인문학 진흥의 길'은 저서명이 아니라 <인문정신과 인문학>(아카넷, 2007)에 실린 논문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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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9-09-16 23:08   좋아요 0 | URL
온라인에서만 치열하게 논쟁하고 실제로 만나선 안된다...아무리 진보적인 사람들도 우리나라 인간관계는 위계질서 따지는 짓을 안 할 수는 없나 봐요.같은 유교문화권인 일본이나 중국도 학교 선후배 위계는 없던데 왜 우리나라는 이럴까요...

로쟈 2009-09-17 19:31   좋아요 0 | URL
대부분은 진보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이죠...

목동 2009-09-17 21:43   좋아요 0 | URL
인터넷이 없었던 70,80년대는 제도권 밖에서 전.비전공자 함께 인포말구룹화하여 왕성했지요. 그때는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못들어 봤지요. 현재는 가상공간 덕분에 다양한 계층이 참여할 수 있으니 양적으로는 팽창할 수 있습니다. 지식 담론을 형성할만 역량이 우려되기 합니다만 지식은 얇아도 예전보다 공감력이 일반화되기 때문에 '중간지대적 담론'을 형성할 수 있어 오히려 더 고무적입니다.

로쟈 2009-09-19 09:08   좋아요 0 | URL
네, 아직은 가능성이지만요...
 

이번 학기에 20세기 러시아문학을 강의하면서 주요 작가들의 대표작을 읽는다. 그래봐야 국내에 소개된 작품에 한정돼 있으며 또 품절/절판되지 않은 책이어야 한다는 제약이 따른다. 체호프의 <벚꽃동산>에 이어서 고리키의 <어머니>를 읽으려고 하는데, 그렇게 많던 번역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싶을 정도로 품절본이 대다수다. 독자가 아주 없지는 않을 터인데, 제때 찍어내지는 않는 모양이다. 품절/절판된 책들의 출간을 독촉하는 의미로 <어머니>와 몇 작품에 대한 리스트를 만들어둔다. 아래는 <어머니>의 러시아어본 표지 가운데 하나.

М. Горький Мать. Воспоминани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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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16 03: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16 07: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목동 2009-09-16 12:27   좋아요 0 | URL
아들과 어머니(전태일과 이소선여사), '전태일 평전'이 생각납니다.
작가(자신을 칭함):고리키(숙련자), 박범신(노동자), 황석영(노동자), 김훈(기능공)

로쟈 2009-09-16 21:36   좋아요 0 | URL
작가 황석영이 고리키에 가장 근접해보입니다...

indipia 2009-10-05 20:28   좋아요 0 | URL
중학교때 열린책들에서 나온 노란표지의 어머니를 읽고 매우 감동받았던 기억이 나요. 그 감동으로 없는 학생신분에 고리끼책을 어떻게든 사놓고는 읽다가 어려워서 포기했던 책들이 꽤 있었던듯. 여튼...뭣도 모르고 그저 감동받아 변호사되야지 했는데, 고등학교때 어쩌다보니 이과로 왔고 지금은 아주 먼길로 와버렸네요.ㅎ 오랫만에 고리끼 이름을 보니 반가워 댓글남깁니다.

로쟈 2009-10-05 20:46   좋아요 0 | URL
<어머니>를 독파할 정도면 다른 책들도 어렵진 않았을 성싶은데요. 한번쯤 다시 읽어보시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