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어제의 저자는 중국사학자 티모시 브룩이었다. 그의 방한 강연과 관련한 기사들을 읽고는 뒤늦게 구내서점에서 <능지처참>(너무북스, 2010)과 <쾌락의혼돈>(이산, 2005)을 구입해서다(<베르메르의 모자>와 <근대 중국의 친일합작>은 서가에 없었다). 조너선 스펜스의 뒤를 잇는 학자란 평판인데, 기대를 가져도 좋을 듯싶다. 인터뷰기사를 옮겨놓는다.  


세계적인 중국사학자 브룩 교수는 최근 완간한 <하버드 중국사>에 대해 “중국인의 관점에서 바라보려 했고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초점을 맞췄다”고 했다.  

경향신문(10. 09. 15) “중국사 공부, 창문으로 집안 들여다보는 일” 

서구 학계에서 조너선 스펜스를 잇는 중국사학자로 명망을 얻고 있는 티모시 브룩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 교수(59)가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미 하버드대에서 명대(明代) 경제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쾌락의 혼돈> <베르메르의 모자> <능지처참> 등의 저서가 국내에 번역돼 한국 독자들과도 친숙하다.  

최근작 <능지처참>(박소연 옮김·너머북스)은 1905년 베이징의 한 광장에서 능지형에 처해진 살인범의 사진이 서구에 던진 충격을 시작으로 중국 고유의 형벌이 ‘잔혹하고 미개한 중국’의 이미지를 유포시키는 과정을 추적한 역작이다. 또 <쾌락의 혼돈>(이정 옮김·이산)은 사농공상의 신분제도와 소농경제를 기반으로 한 명에서 상업이 발달하면서 중국이 동서무역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역사를 그렸다. <베르메르의 모자>(박인균 옮김·추수밭)는 네덜란드 화가 베르메르의 그림을 도상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17세기 중국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브룩 교수의 역사책은 특정한 주제에 집중하고 세부가 풍성해 생생한 느낌을 주는 게 특징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역사학도가 되기 전 토론토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전통적인 사료 대신 지방지·공안·일기·연감 등 당대인들의 실제 삶을 알 수 있는 소소한 자료를 살펴본다. 전체를 통제하려 들거나 어떤 판단을 하기 전에 그 시대를 제대로 복원한다는 것이 역사학자로서 그의 입장이다.

“대학 시절 일본 불교에 대한 책을 읽고 동양에 흥미를 느꼈다. 당시 토론토대에는 일본문화 관련 수업이 없어서 대신 중국어를 공부하다가 중국사에 관심을 갖게 됐다. 모든 문화는 전제와 판단의 근거가 다르기 때문에 다른 문화 속으로 들어가는 건 상당히 힘든 일이다.”

그는 서구학자로서 중국사를 공부하는 걸 “바깥에서 창문으로 집안을 들여다보는 일”에 비유했다. "중국인들은 자기 문화를 바라볼 때 과거와의 관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서구학자들은 그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선입견이 없다. 물론 한계가 있다. 우리가 바깥에서 창문을 통해 집안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 내가 창문을 통해 한쪽 면밖에 볼 수 없다고 고충을 토로하자 내 중국인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안에서 보면 아예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고.” 

그는 역사연구에서 소위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하는 서구적 시선을 극복하고자 노력한다. 서구적 시선은 서구인뿐 아니라 동양인 자신에게도 내면화돼 있다. <능지처참>은 이런 노력이 엿보이는 저서다. 서구인은 능지형의 잔혹함을 비난하지만, 형벌의 이미지는 제국주의 시기인 20세기 전후 서구에서 의도적으로 생산, 소비된다. 이미지와 현실의 괴리는 1905년 중국의 능지형 사진이 조르주 바타이유의 <에로스의 눈물>에서 에로틱한 이미지로 쓰이는 데서 드러난다. 



브룩 교수는 역사를 일방적으로 단죄하는 것을 경계하는데 그런 입장은 <근대중국의 친일합작>(박영철 옮김·한울)에 피력돼 있다. 이 책에서 그는 “항일전쟁 기간 동안 대부분의 중국인은 실제 일본에 저항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은 생존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아편전쟁의 역사를 보면 중국 내 판매상이 없었다면 아편이 대륙 전체로 퍼질 수 없다는 결론을 얻는다. 이는 우리의 친일파 단죄에서도 시사점을 갖는다.

“책을 쓸 때 독자들이 지루해하지 않을까 걱정한다”는 그는 요즘 1610년대에 살았던 명나라 젊은이의 일기를 토대로 당시 양쯔강 삼각주의 생활을 재구성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상하이 서쪽 지하싱 지역에 살았던 이 젊은이는 신사층의 지식인이자 예술가, 예술품 수집가였다. 한편 명대의 상품 가격 변화를 통해 당대의 문화적 가치를 저울질하는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면서도 명대의 상업 발전이 자본주의로 발전할 수 있었는지, 즉 자본주의 맹아론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이다. “발전한 상업경제가 자본주의 발전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인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우선 당시 아시아에서는 에너지 가격이 너무 높아서 공업화에 한계가 있었다. 그리고 유럽의 경우 절대왕정과 상인들의 공조체제가 긴밀했으나 중국의 경우 그렇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브룩 교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케임브리지 중국사>에 맞서는 <하버드 중국사>(6권)의 총편집을 맡아 지난 6월 완간했다. 너머북스가 국내 번역 출간을 준비 중인 이 책에 대해 그는 “중국인의 관점에서 바라보려고 했고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관심을 두었다”고 소개했다. 브룩 교수는 오는 17일 성균관대에서 <능지처참>을 소재로, 서울대에서 <베르메르의 모자>를 소재로 대중강연을 갖는다.(한윤정 기자) 

10. 0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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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 20세기의 책 20권
로쟈의 러시아문학 기행

아트앤스터디 '인문숲'에서 지난 겨울 '로쟈의 러시아문학 기행'의 속편으로 '로쟈의 인문학 서재: 현대 러시아작가 7인을 만나다'를 진행한다(http://www.artnstudy.com/inmoonsoop/Lecture/default1010.asp?lessonidx=off_hwLee07&OVRAW=%EB%A1%9C%EC%9F%88&OVKEY=%EB%A1%9C%EC%9F%88&OVMTC=standard&OVADID=19304485042&OVKWID=221901605542&OVCAMPGID=1491679542&OVADGRPID=10063394430). 일정은 10월 4일부터 11월 22일까지 8주간이며, 시간은 매주 월요일 저녁 7:30-9:30, 장소는 홍대역 부근의 인문숲이다. 19세기 작가들을 다룬 전편에 이어서 20세기 작가들을 다룰 예정이며, 강의 커리큘럼은 국내에 소개된 작가들 위주로 짰다. '7인'이 표나게 강조될 건 없는데, 여하튼 타이틀은 그렇게 나갔다. '20세기 러시아문학으로의 여정'이란 개관 강의에 이어 다루어질 7인의 작가는 다음과 같다. 러시아문학에 관심 있는 독자분들은 참고하시면 좋겠다.    

1. 고리키의 <어머니>  

2. 자먀찐의 <우리들>  

3. 플라토노프, <코틀로반>(=<구덩이>) 

 

4. 파스테르나크, <닥터 지바고>   

5. 불가코프, <거장과 마르가리타>  

 

6.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7. 나보코프, <롤리타> 

 

10. 0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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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문학 독자들이 가장 반가워할 만한 책의 하나는 영국작가 앤드류 노먼 윌슨의 평전 <톨스토이>(책세상, 2010)이다. 나는 후기 톨스토이에 대한 강의도 진행중이어서 지난주에 바로 구입해 읽고 있는데(같이 주문한 원서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리뷰기사들이 이번주에 올라오고 있다. 의무적으로 챙겨놓는다. 

경향신문(10. 09. 18) ‘여자·신·조국’ 세 키워드로 풀어낸 톨스토이

빼어난 소설가이자 명민한 전기작가였던 슈테판 츠바이크는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의 전기를 남겼다. 츠바이크는 톨스토이를 부귀영화를 누렸으나 나병에 걸린 뒤 모든 것을 잃어 영적 고통을 당하는 성경 속 인물 욥에 비유한다. 유서깊은 귀족 출신인 톨스토이는 육체가 건강했고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했으며 13명의 자녀를 얻었고 생전 큰 명예를 누렸다.

그러나 하룻밤 사이 모든 것에 어떤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에겐 어떤 병도, 파산도, 실연도 닥치지 않았다. 톨스토이는 한순간 사물 배후의 ‘무(無)’를 통찰했을 뿐이다. 츠바이크가 탁월한 통찰을 통해 길지 않게 남긴 톨스토이 전기를 영국의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앤드류 노먼 윌슨은 방대한 자료 조사를 통해 812쪽에 걸쳐 써내려갔다. 윌슨은 90권의 톨스토이 전집을 세부적으로 분석한 뒤 그의 생애와 동시대 역사의 상관관계를 꼼꼼히 따진다. 

 
순례자와 같은 모습의 톨스토이  

톨스토이의 삶을 돌아볼 수 있는 키워드는 여자, 신, 러시아다. 수도자와 같은 삶을 산 말년의 톨스토이를 보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젊은 날의 톨스토이는 사교계의 단골 손님이었다. 그에겐 원하는 삶을 누릴 재력과 체력이 충분했다. 19세기 러시아에선 아내를 위한 생일선물로 자신의 일기를 읽을 기회를 주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톨스토이의 선물을 받은 18세의 약혼자 소피아 안드레예브나 베르스는 이때 읽은 일기의 충격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했다고 훗날 적었다. “나는 남자들의 방종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되면서, 마음속에서 질투심과 공포심으로 겪은 그 지독한 격통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톨스토이는 어린 시절부터 집안의 하녀를 건드렸고, 성병 치료약을 주기적으로 먹었고, 일기를 건네주기 전까지도 정부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었다. 츠바이크는 이러한 톨스토이를 ‘고백광’이라고 불렀다.

 
톨스토이의 임종 당시 초상  

<전쟁과 평화>에서 <안나 카레니나>를 쓰기까지의 시간과 <크로이처 소나타>와 <부활>을 남긴 시간 사이엔 큰 강이 흐른다. <안나 카레니나> 집필 이후 톨스토이는 오랜 슬럼프에 빠졌다. 많은 평자들은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 이후엔 진정한 걸작을 남기지 못했다고 말한다. 창조 행위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지만, 열정이 투입될 제재가 없었다. 이 시기 톨스토이는 예술가에서 현자 혹은 성자로 발전한다. 윌슨은 “러시아 작가들이 예언자가 되고 싶은 욕망에서 벗어날 방법은, 푸시킨이나 레르몬토프의 경우처럼 요절하는 것밖에 없었다”고 썼다. 톨스토이는 성스러운 농부의 삶을 살려고 했지만, 정작 가장 가까운 사람인 아내 소피아는 이런 톨스토이를 빈정거렸다. 톨스토이가 가난한 노파의 집을 수리하거나 장작을 패주러 다니는 동안, 소피아는 또 다른 아이를 임신해 힘겨워하고 있었다. 소피아는 남편이 ‘로빈슨 크루소 놀음’을 한다고 여겼다.

톨스토이는 당대 러시아에서 가장 유명하고 존경받는 인물군에 속했다. 오랜 차르 체제가 붕괴하고 혁명의 여명이 동터오자, 톨스토이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혁명 세력에 합류하거나 정부에 협조하는 개량주의자가 되는 길. 그러나 톨스토이는 두 방법 모두 택하지 않았다. 칼을 들거나 정부를 따르는 대신, 그는 오직 사유와 글, 생활 방식이라는 무기로 정부와 싸웠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원하시고 예수가 우리에게 가르쳐준 방법론”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0년, 82세의 톨스토이는 평생에 걸쳐 불화한 아내와 함께 살던 야스나야 폴랴나의 영지를 새벽에 몰래 빠져나왔다. 톨스토이가 생애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기차여행 중이라는 소식은 전 세계에 급히 타전됐다. 집을 떠난 지 채 10일이 되지 않은 11월7일, 톨스토이는 야스타포보의 역장 집에서 숨을 거뒀다. 러시아의 차르와 소련의 레닌·스탈린이 모두 불편해했으나, 그의 문학과 삶에 대한 러시아인들의 존경심 때문에 재갈을 물릴 수 없던 유일한 사람은 톨스토이였다.(백승찬기자) 

10. 09. 18.  

  

P.S. 기사에서언급된 츠바이크의 전기적 스케치 외 국내에 소개된 톨스토이 전기는 얀코 라브린과 로맹 롤랑의 것이 있다. 하지만 가장 자세한 건 역시나 쉬클롭스키의 <레프 톨스토이>(나남, 2009)다. 더 소개된다면, 에이헨바움이나 앙리 트로야, 혹은 리처드 구스타프슨의 책이 좋을 듯싶다. 개인적인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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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가 목전인 탓인지 눈에 띄는 책이 드문 주다. 개인적으론 새로 번역돼 나온 러시아소설들, 가령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열린책들, 2010)이나 불가코프의 <거장과 마르가리타>(민음사, 2010)에 눈길이 가는 정도. 피에르 바야르의 신작 <셜록 홈즈가 틀렸다>(여름언덕, 2010)은 챙겨두어야 할 책이었지만 저녁에 서점에 들렀을 땐 깜박했고, 약간 기대했던 책 가운데 가마타 히로키의 <세계를 움직인 과학의 고전들>(부키, 2010)은 들춰보지도 않고 손에 들었지만 자세히 보니 너무 소략해서 실망스럽다(책이라기보단 칼럼집 수준). 리뷰기사를 미리 읽었더라면 쾨슬러의 <한낮의 어둠>(후마니타스, 2010)을 대신 손에 들었을 텐데, 아쉽다. 아, 프리모 레비의 자전소설 <휴전>(돌베개, 2010)도 이주에 나온 필독서다. 일단 <한낮의 어둠>에 대한 리뷰를 '오래된 새책'으로 분류해놓는다. 예전 번역본은 최승자 시인이 옮긴 <한낮의 어둠>(한길사, 1982)이었다. 저자는 '아서 케슬러'로 표기됐었다.    

한겨레(10. 09. 18) 어제의 혁명동지가 내 목을 달라는구나 

헝가리 출신 영국 작가 아서 쾨슬러(1905~1983)의 <한낮의 어둠>(1940)은 스탈린 치하 옛 소련 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한 소설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와 함께 언급되고는 한다.

소설은 주인공 루바쇼프가 감옥에 수감되는 것으로 시작해 결국 총살당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루바쇼프는 10대 후반부터 사회주의 혁명에 몸을 던졌으며 혁명이 성공한 뒤 당 중앙위원회 회원이자 인민위원, 혁명군 사령관을 역임한 혁명 정권의 중추적 인물이다. 그런 점에서 1938년 스탈린에게 숙청당한 니콜라이 부하린을 모델로 삼은 것으로 알려졌는데, 쾨슬러 자신은 “루바쇼프의 삶은 이른바 모스크바 재판에서 희생된 수많은 사람의 종합판”이라고 밝힌 바 있다. 모스크바 재판(1936~8)이란 스탈린 개인 우상화를 위해 수천 명에 이르는 혁명 1세대를 숙청한 일을 가리킨다.

루바쇼프가 평생을 바쳐 복무했던 혁명 조국이 자신의 목숨을 요구한다는 것, 그것도 불명예스럽고 근거도 박약한 반혁명의 혐의로써 그렇게 한다는 상황은 루바쇼프에게는 절체절명의 딜레마이자 아포리아로서 다가온다. 지금보다 젊었던 시절 그는 외국에서 혁명을 위해 싸우다가 적들의 감옥에 갇히고 잔인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은 적국이 아니고 자신은 혁명의 적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조국에 있었지만, 그 조국이 적국이 되었다. 그리고 친구였던 이바노프는 이제 적이 되었다.” 이바노프는 그의 대학 친구이자 오랜 혁명의 동지였으나 지금은 그를 심문하는 자로 처지가 바뀌었다.

모스크바 재판의 배경에는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알력으로 잘 알려진 혁명 노선을 둘러싼 대립이 있었다.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에 맞서는 스탈린의 ‘1국 사회주의론’을 대변하는 소설 속 인물은 이바노프에 이어 루바쇼프의 심문을 담당하게 된 젊은 관료 글레트킨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당에는 두 가지 경향이 있소. 하나는 모험자들로 이루어졌는데, 그들은 국외 혁명을 위해 우리가 획득한 걸 걸고 싸우려고 하오. 당신은 그들에 속하오. (…) 우린 오직 한 가지 의무를 가지고 있소. 그건 사멸하지 않는 것이오.”

루바쇼프의 딜레마를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그 자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글레트킨과 같은 논리로 주변 사람들의 희생을 요구했다는 사실이다. 독일 청년 리하르트, 비서이자 연인이었던 알로바, 그리고 벨기에 항구의 부두 노동자 조직 책임자였던 리틀 뢰비 등이 그들이다. 물론 그는 “‘혁명적 철학’으로 저지른 이 모든 사기는 그저 독재 정권을 강화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심지어 그는 ‘넘버원’(스탈린을 암시한다)을 두고 “그는 권력에서 결코 스스로 사임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폭력에 의해서만 제거될 수 있다”는 견해를, 비록 사석에서이기는 하지만, 내놓기도 했고 그것이 결국 그의 몰락의 빌미가 되었다.

그가 자신에게 씌워진 혐의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심문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는 것은 리하르트들에 대한 죄책감과 무관하지 않다.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의 대의를 위해 한 개인의 양심과 자유, 윤리 같은 덕목쯤은 희생시켜야 한다는 글레트킨 쪽의 논리에 그가 적어도 반쯤은 동의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재판정에서의 마지막 진술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당과 당 활동과 화해하지 못한 채 죽는다면, 죽을 수 있는 명분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의 진심의 전부라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혁명가로 평생을 보낸 그가 바로 그 혁명의 조국에서 다름 아닌 반혁명 혐의로 처형당하는 마당에 글레트킨의 논리에 의탁해서 스스로를 위로하고 설득하고자 하는 심리를 이해할 수도 있을 법하다.

루바쇼프 자신의 이런 혼란과 동요에도 불구하고 소설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초심을 잃고 괴물로 바뀌어 가는 혁명 정권에 대한 비판과 경고가 그것이다. “그건 체제상의 과오였다. 어쩌면 그 과오는 지금까지 그가 논의의 여지가 없는 것으로 간주해 온 원칙(그 원칙의 이름으로 그는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켰고, 이제는 그 자신마저 희생되고 있지만), 즉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그 원칙에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로 그 원칙이 혁명의 위대한 동지들을 죽였고, 그들 모두를 미쳐 날뛰게 만들었던 것이다.”(최재봉 기자) 

10. 09. 17. 

 

P.S. <한낮의 어둠>과 같이 읽어야 할 책은 메를로퐁티의 <휴머니즘과 폭력>(문학과지성사, 2004)과 지젝의 <전체주의가 어쨌다구?>(새물결, 2008)이다. 김홍우 교수의 <현상학과 정치철학>(문학과지성사, 1999)에도 <한낮의 어둠>을 다룬 논문이 실려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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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8 0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9-20 08: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9-18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남국<부하린,혁명과 반혁명 사이> (문학과 지성사)의 제6장에 부하린 재판과 이에 대한 아서 쾨슬러와 메를로 퐁티의 평가를 소개했더군요.

로쟈 2010-09-20 08:41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제 책은 어디 박스에나 들어가 있을 거 같아요.--;
 

내일자 경향신문의 '책과 삶' 꼭지를 옮겨놓는다. 신간들 가운데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한겨레출판, 2010)와 <책을 읽을 자유>(현암사, 2010)를 묶어서 다루고 있다.  

경향신문(10. 09. 18) 책을 왜 쓰느냐 묻거든 그곳에 길을 만들려 

한국인의 문해율은 2008년 기준 98.3%다. 문해율이란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의 비율을 뜻한다. 98.3%라면 한국의 성인 가운데 문자를 읽고 쓰는데 어려움을 겪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런데 문자를 읽고 쓸 능력이 있다는 것과 실생활에서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은 다른 얘기다. 튼튼한 두 다리를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등산을 할 수 있지만, 모두가 산에 오르지는 않는다. 그러고보면 읽기·쓰기와 등산은 닮은 데가 있다. 혼자 가든 떼를 지어 가든 산에 오르기 위해선 결국 자신의 다리를 움직여야 한다. 읽기와 쓰기 역시 개인적인 행동이다. 하지만 산이 있어야 산에 오를 수 있듯 읽기는 앞서 쓴 사람이 있기에 가능하고 쓰기는 앞으로 읽을 사람을 염두에 둔 행동이다. 여기, 쓰기와 읽기의 최고 고수들이 쓴 책이 마주보며 놓여있다. 한 사람은 두말할 나위 없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영국의 작가, 한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책은커녕 자신이 욕심내는 책조차 다 읽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리라는 사실을 아직도 섭섭해 하는 한국의 지독한 책벌레다. 살았던 시대와 장소는 다르지만 두 사람이 각각 쓴 책은 투수와 포수처럼 나란해 보인다. 



‘국민공통교육’을 받은 사람치고 작가 조지 오웰(1903~1950)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이력은 명문 이튼스쿨 졸업, 식민지 버마에서 경찰 생활, 파리와 런던에서 최하층민 생활, 스페인 내전 참전 등 ‘20세기 초중반 시대의 격변을 온몸으로 살았다’ 정도로 요약하기로 하자. 그는 소설 <동물농장>, <1984>로 유명한데 이건 그가 쓴 방대한 글에 비하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그는 생전에 소설 6권, 르포 3권, 에세이집 2권 등 11권의 책을 냈거니와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서 수백편의 길고 짧은 칼럼과 서평, 에세이를 썼다. 이 책은 에세이 29편을 골라 번역한 것이다. 
 
표제작인 ‘나는 왜 쓰는가’는 나치의 파시즘과 스탈린식 공산주의, 그리고 자본주의 등 모든 형태의 전체주의에 반대했던 오웰의 작가적 입장이 명확히 담겨 있다. 그는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오웰이 작가의 작업을 정치 선동가의 역할과 동일시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가 말하는 ‘정치적 글쓰기’란 어떤 거짓이나 폭로하고 싶은 것을 ‘미학적 경험’에 입각해 쓰는 것이다. 그는 “<동물농장>이 정치적 목적과 예술적 목적을 하나로 융합해보려고 한 최초의 책이었다”고 고백한다.

글쓰기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정치와 영어’라는 제목의 매우 신랄한 에세이를 볼 필요가 있다. 오웰은 당시 지식인들의 글들을 실례로 들어가며 죽어가는 비유, 지극히 불분명한 표현, 젠체하는 용어, 무의미한 단어들을 집어냈다. 마치 시범을 보이듯 이 책에서 예리한 통찰과 특유의 비유, 신랄한 독설의 진수를 보여준 오웰이 일관되게 강조한 것은 “의미가 단어를 택하도록 해야지, 그 반대가 되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전하고자 하는 뜻을 최대한 분명하게” 한 다음 “뜻을 가장 잘 담을 수 있는 표현”을 택해야 “진부하거나 뒤섞인 이미지, 이미 만들어진 어구, 불필요한 반복, 그리고 허튼소리와 막연함을 대체로 피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글쓰기 6원칙을 제시하는데 이것만 가지고 글쓰기 교재를 써도 될 정도로 포괄적인 동시에 실용적이다. 



이 책은 오웰의 르포집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번역하기도 한 번역가 이한중이 4권으로 엮인 오웰의 원문 에세이 저작집에서 명문(名文)으로 평가받는 것들, 오웰의 인생에서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술회된 것들을 뽑아 시간순으로 배치했다. 오웰은 자신의 전기를 쓰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는데 편역자의 말마따나 이 책은 오웰의 자서전으로 읽을 수도 있다.

오웰은 생애 자체가 워낙 다채로웠다. 그리고 철저히 체험에서 우러나온 에세이들을 썼다. 런던 부랑자들의 삶을 묘사한 ‘스파이크’, 버마 경찰 복무 경험을 그린 ‘코끼리를 쏘다’, 스페인 내전 참전 회고담인 ‘스페인내전을 돌이켜본다’, 생계를 위해 서평을 쓰면서 느낀 역겨움을 여과없이 드러낸 ‘어느 서평자의 고백’ 등 어느 것 하나 지루한 게 없다. ‘빨주노초파남보’가 무지개를 이루듯 29편의 글이 제각각 고유한 색깔을 뽐내며 글쓰기라는 그 무엇으로 향하는 튼튼한 다리를 만들어냈다.



‘인터넷 서평꾼’으로 유명한 ‘로쟈’가 <로쟈의 인문학 서재>에 이어 두번째로 낸 서평집이다. <로쟈의 인문학 서재>가 에세이 범주에 속하는 글들을 모은 것이라면, 이번 책은 본격적인 서평집에 해당한다. 지난 10년간 각종 매체에 썼던 서평, 그의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에 올렸던 글들을 30개의 꼭지로 정돈했다. 
 
로쟈의 서평을 보면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한 장면이 떠오르곤 한다. 주인공 톰 크루즈가 눈 앞에 떠오른 가상의 스크린에 매우 빠르게 명멸하는 화면들을 검색하면서 양손으로 그것들을 이리 저리 짜맞추는 유명한 장면 말이다. 로쟈가 블로그에 공개한 ‘공익적인’ 글들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는 평론가 신형철은 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로쟈는 문학·철학·역사학·사회학을 넘나들면서 배치하기·짝짓기·지도 그리기·교정하기 등등의 테크닉을 발휘하여 저 ‘(인간 행동을 이해하는) 다양한 시스템’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한다.”

그는 요즘 강조되는 ‘맥락적 책읽기’를 일찍부터 보여줬다. 그의 블로그는 책과 작가에 관한 ‘위키피디아’를 방불케 한다. 시인이자 소설가 장정일이 메인 게스트로 나온 어느 ‘북포럼’에 패널로 나가 발표한 글에서 로쟈는 장정일의 작품이 읽히던 시대, 장정일의 작품세계를 따라가면서 이성복·황지우·유하 등의 시인, 마광수, 밀란 쿤데라, 노무현, 이문열, 황석영, 강유원 등을 줄줄이 떠올린다. 작년에 나온 김규항의 <예수전> 위에 한완상의 <예수 없는 교회>를 겹쳐 읽으면서 ‘혁명’이라는 키워드를 뽑아낸 뒤 에드먼드 버크의 <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 한나 아렌트의 <혁명론>으로 나아가는 식이다. 

이런 일은 그가 ‘지독하다’는 표현으로는 담아내지 못할 정도로 읽어대기에 가능했다. 간간이 등장하는 번역자의 태만에 의한 오역이나 ‘꼴’을 갖추지 못한 책에 대한 꾸짖음은 준엄하다. 그러나 “우리는 똑똑해서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책을 읽으면서 똑똑해진다”고 말하는 로쟈의 책에 대한 태도는 대체로 겸손하고 따뜻하다. 그는 말한다. “책을 읽기 위해서는 책을 쓰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만드는 사람이 있어야 하며, 내게 그 책을 읽을 역량이 갖춰져야 한다. 또 책을 읽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허락돼야 한다”고. 그래서 “고맙다”고. 이번엔 독자들이 로쟈에게 고마워해야 할 차례다.(김재중기자) 

10. 09. 17. 

P.S. 흠, '지독한 책벌레'라는 것이 '로쟈'에 대한 흔한 인상인 듯하다. "닥치는 대로 엄청난 양의 책을 읽어대는" 같은 이미지라면 사실 나와 그다지 닮지 않았다. 나보다 더 많이, 더 집요하게, 더 지독하게 읽는 독자가 왜 없겠는가. 다만 그 '책벌레'가 '공익' 근무요원처럼 매일같이 책에 관한 소개들을 정리하고, 자신이 쓴 리뷰와 잡담을 많은 이와 공유하기 위해 애쓰는 자를 가리키는 거라면 크게 어긋나진 않을 것 같다. 책의 서문에 적었듯이, 지난 3년간의 집중 '복무'를 뒤로 하고 이젠 '예비역'의 자세로 생활하려고 한다. 한데 '후임'은 대체 언제나 배정되는 것일까?.. 

P.S.2. 내친 김에 눈에 띄는 언론리뷰를 더 옮겨놓는다.   

한겨레(10. 09. 18) 인터넷 서평꾼 ‘로쟈’의 비평모음집

그는 책벌레다. 그것도 지독한. 아마도 우리 시대 가장 큰 위를 가진 책벌레일지도 모르겠다. 인터넷 서평이라는 새로운 영역 개척의 선두에 섰던 그의 이름은 이현우, 아니 서평꾼 로쟈다. 인터넷 블로그 ‘로쟈의 저공비행’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그는 깊이 있고도 성실한 서평들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특히나 홀대받던 인문학의 가치를 새롭게 일깨우면서, 실용서의 범람에 지쳐 있던 이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었다. 그 로쟈가 두번째 책을 냈다. <책을 읽을 자유>는 지난 10년간 로쟈의 책 리뷰를 골라 묶은 책이다. 주제별로 수백권의 책들이 들어서 있는 모양은 도서관과 비슷하다. 그러나 이 도서관은 로쟈만의 분류법으로 가꿔져 있으며, 또 언제나 그렇듯 꼼꼼하고 진지한 서평들이 함께한다. 때로는 일부 책들의 오류에 대해 꽤 신랄하게 짚어내고 있어, 독자로서는 거대한 책의 바다를 항해할 때 요긴한 항해도를 얻은 기분이 든다.

책 첫머리에서 지은이는 자신에게 가장 두려웠던 순간은 바로 책을 읽을 수 없을 때라 고백한다. 매일 갈아먹어야 할 양식에 물렸던 시간들이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끔찍했다고 회상한다. 그러나 결국 그는 다시 책으로 돌아간다. 언제나 그랬듯 자신이 숙명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자유는 바로 ‘책을 읽을 자유’라는 것을 깨달았기에. 책장을 넘기다 보면, 로쟈가 이 자유를 정말 만끽하며 살아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600쪽에 이르는 이 책은 올가을 이 땅의 책벌레들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은혜로운 양식이다.(윤은숙 기자)   

한국일보(10. 09. 18) 인터넷 서평꾼 '로쟈'의 세상 꼬집기

'로쟈'라는 필명으로 잘 알려진 인터넷 서평꾼 이현우씨의 두번째 서평집. 블로그를 비롯해 신문, 잡지 등 매체에 지난 10년 간 기고했던 서평들을 한 곳에 모았다. 시인 고 기형도의 <기형도 전집>,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한나 아렌트의 <칸트 정치철학 강의> 등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며 탐독한 147권의 책에 대한 사유의 흔적을 30개의 키워드아래 모았다.

그의 글 곳곳에는 강한 현실비판 의식이 투영돼 있다. 서평을 그냥 글쓰기가 아니라 '비평행위'로 여기는 저자의 자의식을 엿볼 수 있다. '과두정은 부자의 이익을 위한 통치형태이며 민주정은 빈자의 이익을 위한 통치형태'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 구절에 밑줄을 그으며 '강부자 고소영 내각'을 꼬집고, 일본 우익의 사상적 본질을 해명한 마쓰모토 겐이치의 <일본 우익사상의 기원과 종언>을 읽으며 반공주의밖에 내세울 것이 없는 한국 우익의 사상적 빈곤을 비판한다.(이왕구 기자)

중앙일보(10. 09. 18) 노련한 가이드와 함께 오르는 인문학 봉우리 

저자는 ‘로쟈’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인터넷 서평가다. ‘로쟈의 저공비행’이란 그의 블로그엔 매일 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드나든다. 그가 지난 10년간 쓴 147편의 서평을 모아 책을 냈다.저자는 서평을 총 30개의 주제로 분류했다. 예를 들어 ‘폭력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아래 『폭력의 철학』『폭력의 시대』『러시아 혁명』『성스러운 테러』등에 대한 서평을 엮는 식이다.

주제는 매우 광범위하다. 문학, 미술, 고전, 역사, 철학, 학술, 글쓰기, 번역 등을 망라하고 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서평을 비평한 것도 있다. 인문학자(한림대 연구교수)라는 배경 때문인지 인문학적 관심에서 고른 책들이 많다. 재테크 책이나 자기계발서를 편식하는 일반 독자들은 아마 제목도 못 들어본 책들이 태반일 것이다. 하지만 산에 갈 때 반드시 정상에 올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올레길을 걸으며 산을 완상하는 것도 좋다. 올레길을 가다 ‘저 봉우리를 한번 올라가 봐야지’라고 맘을 먹는 것처럼, 이 책을 읽고 ‘이건 한번 읽어봐야지’라는 느낌을 받으면 족하다.

그의 서평은 단순한 책소개를 벗어나 비평에 가깝다. 따뜻한 찬사를 늘어놓다가도 매몰찬 비판을 가하기도 한다. 독자들에겐 독서를 자극하는 강력한 흥분제가 될 것이다.

“나는 김훈의 『자전거 여행』을 에어컨이 고장 나 창문을 열어놓고 달리는 저녁 버스의 형광등 불빛 아래서 읽었다. 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책장을 넘기며 그의 글들을 읽을 때, 나는 이 세상에서 그만 사라져도 좋을 듯 했다.”

올 가을,‘로쟈’라는 유능한 가이드를 따라 ‘책을 읽을 자유’를 누리는 것도 좋을 듯 하다.(정철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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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0-09-18 16:39   좋아요 0 | URL
영어교사들이 로쟈님이 심혈을 기울인 오역 바로잡기를 정독했으면 좋겠습니다.

로쟈 2010-09-20 08:43   좋아요 0 | URL
ㅎㅎ 필요한 독자들에게나 참고가 되면 되는데요.^^;

사과나무 2010-09-19 13:58   좋아요 0 | URL
'한데 '후임'은 대체 언제나 배정되는 것일까?'

신검을 통과라도 해야 군대에 가죠.. 흑흑...


로쟈 2010-09-20 08:43   좋아요 0 | URL
요즘 신검이 그렇게 어렵나요? 여긴 '자원'이긴 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