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의 책'을 골라놓는다. 타이틀북은 리처드 로빈스의 <세계문제와 자본주의 문화>(돌베개, 2014)다. '생산·소비·노동·국가의 인류학'이 부제. 제목에 걸맞게 분량도 800쪽이 넘어가는 묵직한 책이다.

 

미국의 저명한 인류학자이자 여러 차례 우수 교수상을 수상한 리처드 로빈스는 1998년에 이 책의 초판을 출간한 이후 2013년까지 여섯 차례에 걸쳐 계속 개정증보판을 펴내며 최근의 다양한 통계자료와 사례들을 보강해왔다. 로빈스는 이 책에서 세계를 중심부와 주변부로 나누고 그 중간에 반주변부를 두어 자본주의 문화가 어떻게, 왜 형성되었으며 그에 따른 문제점과 대안은 무엇인지를 대단히 체계적이고 치밀하게 논한다.

전체적인 조감도를 제공해주는 책이라고 할까. 가끔은 각론에서 빠져나와 큰 그림을 보는 게 필요한 법이다. 6판까지 나온 걸로 보아 거의 '교과서'에 해당하는 책이겠다.

 

 

두번째 책은 후안 파블로 카르데날과 에리베르토 아라우조의 <중국뿐인 세상>(명랑한지성, 2014)이다. 저자 소개가 안 뜨는데, 스페인어권 출신으로 보인다(멕시코?). 부제는 '중국식 자본주의의 세계 정복 탐사기'. 제목과 부제만으로도 관심도서에 올려놓을 만하다.

 

 

세번째 책은 이완종의 <이념의 제국>(도서출판선인, 2014). '소비에트연방의 부상과 몰락'을 다룬 책이다. 저자는 러시아혁명사 전공으로 <러시아 10혁명사>(도서출판선인, 2012; 우물이있는집, 2004)를 펴낸 바 있는데, <이념의 제국>은 그 속편 격으로 볼 수 있겠다. 중국에 비하면 러시아 관련서가 가물에 콩나듯한 형편이어서 여하튼 반갑다.

 

 

네번째 책은 지난 겨울 한국사회를 흔들었던 대자보들을 묶은 <안녕들 하십니까?>(오월의봄, 2014).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시리즈의 하나로 나왔는데(<벼랑에 선 사람들>이 이 시리즈의 대표 도서다), 기획의 순발력이 돋보인다. 소개는 이렇다.

2013년 12월부터 두 달간 곳곳에 나붙었던 대자보들 가운데 200여 장을 추려 묶음으로써 ‘안녕들 사건’을 증언하는 생생한 기록이자 사건을 일단락 짓는 매듭이다. 동시에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이 ‘안녕들 대자보’ 이후 각자의 삶에서 어떠한 변화와 고민을 지속하고 있는지를 담아 ‘안녕들 사건’이 향후 어떤 방향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갈 것인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한국의 이념 지형도를 살펴본 <좌우파에서 보수와 진보로>(푸른역사, 2014)다. 이 주제의 학술대회 발표문을 모았다. 2003년부터 2012년까지, 곧 노무현부터 이명박까지 한국사회를 들여다본 사회학자 김종엽 교수의 칼럼집 <좌충우돌>(문학동네, 2014)과 짝지어 읽어봐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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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제와 자본주의 문화- 생산·소비·노동·국가의 인류학
리처드 로빈스 지음, 김병순 옮김 / 돌베개 / 2014년 3월
40,000원 → 36,000원(10%할인) / 마일리지 400원(1%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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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3월 14일에 저장

중국뿐인 세상- 중국식 자본주의의 세계 정복 탐사기
후안 파블로 카르데날 & 에리베르토 아라우조 지음, 전미영 옮김 / 명랑한지성 / 2014년 3월
23,000원 → 20,700원(10%할인) / 마일리지 1,150원(5% 적립)
2014년 03월 14일에 저장
절판

이념의 제국- 소비에트연방의 부상과 몰락
이완종 지음 / 도서출판선인(선인문화사) / 2014년 3월
30,000원 → 30,000원(0%할인) / 마일리지 0원(0% 적립)
*지금 주문하면 "1월 21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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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들 하십니까?- 한국 사회를 뒤흔든 대자보들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 지음, 안녕들 하십니까 출판팀 엮음 / 오월의봄 / 2014년 3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1월 21일 출고" 예상(출고후 1~2일 이내 수령)
2014년 03월 14일에 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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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인'의 독서카페 코너에 쓴 글을 옮겨놓는다. 이달에 글거리로 삼은 것은 지난달 말에 방한하기도 한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자음과모음, 2012)이다. 다시 읽고 쓴 글이기에 제목도 '다시 읽는다는 것에 대하여'라고 붙였다. 다시 읽은 덕분에 종교개혁(사사키 아타루는 '대혁명'이라고 부른다)에 관한 책들도 여럿 더 구했다. 그가 말하는 '12세기 해석자 혁명'과 관련한 책도 더 나왔으면 싶다. 박사학위논문을 바탕으로 한 주저 <야전과 영원>이 번역중인 걸로 아는데 출간을 고대한다.

 

 

 

독서인(14년 3월호) 다시 읽는다는 것에 대하여

 

일본의 젊은 인문학자 사사키 아타루의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자음과모음)을 다시 읽었다. 처음 나왔을 때 리뷰도 쓰고 2쇄를 찍을 때 편집자의 요청으로 추천의 말까지 붙인 책이지만 다시 읽어도 흥미로웠다. 새로운 것을 읽기보다는 다시 읽는 걸 좋아한다는 게 저자의 독서관이기에, 그의 책을 다시 읽는 건 저자의 독서법을 실천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읽으면 물론 읽고 잊어버린 것을 되살리게 된다. 또한 줄거리나 핵심 주제에 집중하느라 주목하지 않았던 책의 세부에 대해서도 눈길을 주게 된다. 사사키 아타루가 말하는 독서는 그때 비로소 시작된다. 무엇이 독서인가. 니체처럼 자신을 ‘다이너마이트’라고 스스럼없이 말한 저자들과의 만남이다. “서점이나 도서관이라는 얼핏 평온해 보이는 곳이 바로 어설프게 읽으면 발광해버리는 사람들이 빽빽 들어찬, 거의 화약고나 탄약고 같은 끔찍한 장소라고 느낄 수 있는 감성을 단련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그는 말한다. 저자들이란 보통 죽은 자들이어서 서재나 도서관은 마치 ‘공동묘지’ 같다고 한 프랑스 철학자 사르트르를 뛰어넘는다고 할까.

 


책이란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발물 같은 것이기에 책을 너무 가까이하는 건 위험하다. 그렇다고 염려할 건 없다. 우리의 자연스런 방어기제도 이에 맞추어 작동하기 때문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읽어도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고 ‘어쩐지 싫은 느낌’이 들어서 책을 덮어버리는 것이야말로 ‘독서의 묘미’라고 한 작가 후루이 요시키치의 말을 인용한다. 이 ‘자연스러운 자기 방어’ 기제 덕분에 설사 감명 깊게 읽었더라도 곧 잊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읽기는 이러한 본능을 거스르는 행위다. 잊어버린 것을 다시 소환하고 상기함으로써 책이라는 폭탄의 위험성을 감수하는 행위다. 다이너마이트를 끌어안는 행위? 맞다, 그것은 미친 짓이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이 쓴 것은 읽을 수가 없다는 게 사사키 아타루의 생각이다. 다른 사람의 꿈을 그대로 본다면 우리가 미쳐버릴지도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책을 통해서 타인의 생각과 정서, 감각에 접속한다는 것은 섬뜩한 노릇이다. 그것이 진짜 고백을 담고 있는 진짜 책이라면 말이다. 그런 책은 본질상 난해하고 무료하다. 읽을 수가 없다. 가령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 같은 소설이나 황병승의 <여장남자 시코쿠> 같은 시집을 어떻게 읽겠는가.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하지만 그래도 뭔가에 끌려서 읽게 된다면, 읽어버리게 된다면 우리는 자기 안에 똑같은 광기를 품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인생이 바뀔 것이다. “왜 소설을 쓰는가?”란 질문에 “소설을 읽어버렸으니까.”라고 답한 일본 작가 고토 메이세이처럼. 읽어버린 이상 쓰지 않을 수 없다.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는 세계, 독서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불가피한 세계와의 조우다.


여기까지가 하룻밤 이야기로서 일종의 서론이다. 책을 읽는다는 행위가 일종의 광기이고 도박이라는 점을 미리 밝히고서 사사키 아타루는 본격적으로 혁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파울 첼란의 시구를 제목으로 가져온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의 부제가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이란 걸 다시 확인하게 되는 대목이다. ‘책과 혁명’이라고 했지만, 둘은 접속사 ‘과(and)’보다는 ‘혹은(or)’을 통해 만난다. 사사키 아타루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혁명에 관한 책’이나 ‘책을 통한 혁명’이 아니라 ‘혁명으로서의 책’ 혹은 ‘책이 된 혁명’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례들이 있는가. 서양 종교사학을 전공한 사사키 아타루는 특히 그가 ‘대혁명’이라고 부르는 루터의 종교개혁, 무함마드의 혁명, 그리고 12세기 해석자 혁명을 대표적 사례로 꼽는다. 이러한 사례들을 통해서 그는 “과거의 혁명이 아무리 피로 물들었다고 하더라도 혁명의 본질은 폭력이나 주권 탈취가 아니라 텍스트를 다시 쓰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곧 ‘텍스트의 변혁’이 혁명이다. 그는 말의 넓은 의미에서, 문학이야말로 혁명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예술의 한 갈래를 지칭하는 좁은 의미의 문학이 아닌, 글로 쓰인 것 전체를 통칭하는 ‘문학’이다.

 

 

이 문학 행위는 통상 두 단계로 구성된다. 읽기와 쓰기다. 가령 마르틴 루터가 한 일은 무엇이었던가. 수도원에서 철저하게 성서를 읽는 일이었다. 성서를 읽고 또 읽었고 베껴 적었다. 라틴어도 그리스어도 히브리어도 공부하여 읽었다. 그러한 독서 끝에 그는 당시 기독교 세계의 질서가 성서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다시 말해서 아무런 근거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루터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이 세계엔 교황과 추기경이 있고 대주교와 주교가 있으며 그들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건 성서에 쓰여 있지 않았다. 그럼 뭐란 말인가.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일까?” 키르케고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루터는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이런 질문과 조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성서를 읽고 나자 루터는 이제 쓸 수밖에 없다(루터 전집은 무려 127권에 달한다고 한다). 1517년 루터는 교회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는 95개조의 반박 의견서를 발표한다. 당시 독일은 문맹률이 95퍼센트에 달했던 사회였지만 다행스럽게도 인쇄술의 혁신으로 그의 견해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종교개혁이라는 대혁명의 도화선이 된 것이다. 이어서 루터는 라틴어 성서를 독일어로 옮기는 일에 착수한다. 1522년 9월에 처음 출간된 독일어 <신약성서>(통칭 <9월 성서>)는 가격이 소 한 마리 값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고 한다. 독일어로 쓴다 하더라도 당시는 식자율은 5퍼센트에 불과했으므로 단지 인구의 5퍼센트만이 읽을 수 있을 뿐이었지만 루터는 자신의 문학행위, 곧 글쓰기를 중단하지 않았다. 1519년 루터 책의 출판 부수가 독일 전체 출판물의 3분의 1, 1523년에는 5분의 2에 달했을 정도라고 하니까 거의 전무후무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하여 그는 16세기 최대의 ‘문학자’가 된다. 루터가 “인쇄술, 그것은 신이 내려주신 최대의 은총이다”라고 말한 것도 지극히 온당해 보인다. 


루터의 혁명은 비단 기독교의 분열과 개신교의 분화를 의미하는 종교개혁 범주에만 가둬질 수 없다. 그의 혁명은 법의 혁명이기도 했다. 루터 사상의 핵심 개념으로서 ‘양심’이 오늘날까지도 재판의 준거가 되고 있다는 점이 대표적 사례다. 루터의 신학과 루터파 법학이 가져온 혁명적 변화에서 우리는 벗어나 있지 않다. 읽기와 쓰기는 그렇게 법제화로 귀결된다. 법이 바뀐다는 것은 세상의 근거가 바뀐다는 의미다. 혁명은 권력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근거를 새로 마련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읽기다. 나른한 봄날이지만, 당신이 손을 뻗어 닿을 만한 곳에 책이 있기를!

 

14. 03. 13.

 

 

P.S. 다시 읽으니 수정할 대목도 눈에 띄었다. 50쪽에서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물결(The Waves)>은 이미 출간된 제목인 <파도>라고 표기되는 게 좋겠고, 294쪽에서 "푸코도 <성의 역사>를 내주겠다는 출판사를 찾지 못해 상당히 오랫동안 괴로워했으니까요. 당시 명편집자로 나중에 역사가가 되는 필리프(*필립) 아리에스의 형안에 의해 발탁될 때까지는 말이지요."에서 푸코가 출간에 애를 먹은 '처녀작'은 <성의 역사>가 아니라 그의 박사학위논문인 <광기의 역사>였다. 사사키 아타루가 잘못 말했거나 역자가 잘못 옮기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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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원우의 일본론이 출간됐다. <일본 탐독>(글항아리, 2014). "이 책은 그동안 30여 년에 걸쳐 내 나름대로 겪은 일본의 사정과 일본인의 진정성을 솔직하게 밝힌 탐문기이자, 주관/객관의 저울질을 번갈아 해대면서 작금의 형편과 견주어본 일본/일본인의 전신상에 대한, 좀 중뿔날지도 모르는 비판적 고찰이다"라고 작가는 적었다. 일본론이야 모자라지 않게 나와 있지만(막상 떠올리려고 하니까 많지 않다), 중견 작가가 보는 시각은 또 새로울 수 있겠다 싶다. 소개는 이렇다.

 

특유의 시각으로 일본 문화 전반을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일본의 국수주의적 경향 밑에는 ‘머리 없는 세계’와 ‘세계 없는 머리’라는 코드가 숨겨져 있다는 거침없는 해설로 일본 읽기의 정곡에 육박해 들어간다. 한편 일본의 구석구석을 묘사한 것에 견주어 한국 사회의 성숙/미숙을 겹쳐 읽고 또 쓰는 입체적 성찰은 단연 유니크하다. 저자가 일본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몸소 겪은 일본 사회와 일본인 일반의 심부深部에는 한국 사회의 어제와 오늘이 고루 섞여 있는가 하면, 일본의 저작물에 숨어 있는 미덕/미달을 가감 없이 평가하는 담론에는 새로운 설득력이 넘쳐난다.

덕분에 생각난 책은 박경리 선생의 일본론 <일본산고>(마로니에북스, 2013)이다.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에게 미래는 없다'가 부제. 역사를 부정하는 세력이 집권한 터라 마음에 더 와닿는다. 배경은 이렇다.

1926년 출생한 박경리는 만 20세까지의 시간을 온전히 일제 강점기 속에서 지내야 했다. <토지>는 구한말에서 1945년 해방까지의 시공간을 온전히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가의 일본 체험은 아픈 기억이자 굴레였으며, 한편으로 분석과 극복의 대상이기도 했다. <토지> 속에 등장하는 무수한 인물들의 부침과 민족 담론의 양상, 일본의 식민 지배 전략과 한일 문화 비교론, 지식인들의 숱한 논쟁은 바로 그 결과물이다.

오랫동안 대표적 일본론으로 자리잡아온 이어령 선생의 <축소지향의 일본인>과 같이 읽어봐도 좋겠다...

 

14. 0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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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읽을 만한 책'은 급하게 골라놓는다. 3월도 3분의 1일이 지났으니 지각 페이퍼가 됐다(그래도 시간을 쪼개 쓰느라 이틀이나 걸렸다). 여러 모로 여유가 없어서인데, 읽을 책도 줄여야 하나 싶다. 아직 아침저녁으로 쌀쌀하지만 곧 볕이 좋은 봄날이 오리라. 그때 더 읽기로 한다.

 

 

 

1. 문학예술 

 

정이현 작가가 고른 책은 <파리 리뷰>의 인터뷰집 <작가란 무엇인가>(다른, 2014)다.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 없는 책. "이 책은 인터뷰를 통해 만든 새로운 형태의 ‘작가론’이자 ‘창작론’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시 작가로 구성된 인터뷰어들은 때론 냉철하고 때론 사려 깊게, 공들여 준비한 질문을 던지고 대가의 답을 경청함으로써, 독자에게 깊은 이해의 실마리를 제공한다"고 소개한다.

 

내가 고른 책은 <레너드 번스타인의 음악의 즐거움>(느낌이있는책, 2014)이다. 예술분야는 분야별 안배를 하게 되는데, 오래만에 고른 음악 분야의 책이다. 책은 번스타인의 클래식 해설인데, "‘레니’라는 애칭으로도 불린 번스타인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함께 동시대를 양분했던 ‘스타 음악가’였다. 이 책은 번스타인이 지휘자였을 뿐만 아니라 솜씨 있는 클래식 음악 해설가이자 탁월한 음악교사였다는 걸 보여준다." 베리 셀즈의 평전 <레너드 번스타인>(심산, 2010)도 궁금하게 만들어주는 책이다.

 

 

 

클래식 해설서로는 톰 서비스의 <마에스트로의 리허설>(아트북스, 2013), 이영진의 <마이너리티 클래식>(현암사, 2013)을 더 꼽을 수 있다. 국내서로 번스타인과 같은 명망 있는 지휘자의 해설서로는 금난새의 <클래식 여행>(아트북스, 2012)가 대표급이다. '바흐에서 번스타인까지 위대한 음악가 32인의 삶과 음악'이 부제.  

 

 

 

2. 인문학

 

인문학 분야의 추천도서는 미셸 파스투로의 <곰, 몰락한 왕의 역사>(오롯, 2014)와 홍윤철의 <질병의 탄생>(사이, 2014), 두 권이다. 질병과 문명의 관계를 다룬 황상익의 <콜럼버스의 교환>(을유문화사, 2014)도 거기에 더 얹을 수 있겠다.

 

 

3월이라 '맘잡고 공부'라고 작심할 분들도 많을 싶은데, 몇권의 '공부책'도 읽어볼 만하다. 이원석의 <공부란 무엇인가>(책담, 2014),  한재훈의 <서당공부, 오래된 인문학의 길>(갈라파고스, 2014) 등이 새로 나온 책이고, 조지 스웨인의 <공부책>(유유, 2014)은 이미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책이다. 이원석의 책은 미리 읽어볼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붙인 추천사는 이렇다.

공부란 말에 미소 짓는 한국인은 드물다.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는 통념상 망언에 속한다. 시험공부와 취업공부가 공부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게 우리의 통념이다. 이원석의 <공부란 무엇인가>는 그 통념을 바꿔보자고 제안한다. 공부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짚으며 저자는 "행복은 공부 순"이라고 말한다. 진정 나를 위한 공부란 세상을 위한 공부이기도 하다는 게 비결이다. 자기계발서 권하는 사회를 '거대한 사기극'으로 지목했던 저자는 이제 공부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공부하는 사회에 희망이 있다고 말한다. 당신도 공감한다면 우리에겐 아직 희망이 있다.

 

3. 사회과학

 

사회과학 분야의 추천도서는 아만다 리플리의 <무엇이 이 나라 학생들을 똑똑하게 만드는가>(부키, 2014)와 HR 인스티튜트의 <로지컬 씽킹의 기술>(비즈니스북스, 2014)다. 거기에다 최근에 언급한 <기업은 어떻게 인간이 되었는가>(어마마마, 2014)도 같이 고른다. 기업의 법인화 과정과 그 파장을 다룬다.

 

 

 

몇 권의 사회학 책도 관심도서로 올려놓을 만한데, 엄기호의 <단속사회>(창비, 2014), 한병철의 <투명사회>(문학과지성사, 2014), 그리고 <감시사회>라는 제목이 붙었어도 무방했을 지그문트 바우만의 <친애하는 빅브라더>(오월의봄, 2014) 등이다. 모든 명명은 진단을 포함한다. 우리가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지 주기적으로라도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4. 자연과학

 

자연과학 추천서는 존 잉그럼의 <한없이 작은, 한없이 위대한>(이케이북, 2014)이다. "미생물의 이모저모를 다방면으로 살펴본다. 제목 그대로 한없이 작은 생물이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하고 있는지를 적절히 전문 지식을 곁들여서 재미있게 들려준다."

 

미생물보다 좀 큰 걸 다룬 책으로 플로리안 프라이슈테터의 <지금 지구에 소행성이 돌진해 온다면>(갈매나무, 2014)도 흥미를 끄는 책이다. 부제가 '우주, 그 공간이 지닌 생명력과 파괴력에 대한 이야기'니까 미생물과 무관하지도 않다. 더불어 지식인, 과학자들의 에세이 모음 <미지에서 묻고 경계에서 답하다>(사이언스북스, 2013)도 일독해봄직하다. 자연과학쪽 진학을 희망하는 고등학생들에게는 진로 가이드 역할도 해주겠다. '앎의 한계에 도전하는 용감한 지식인들의 과학 이야기'가 부제.

 

 

5. 실용일반

 

이달의 실용서로는 성우제의 <폭삭 속았수다>(강, 2014)가 올라왔다. 제목으론 어림하기 어려운데, '성우제의 제주올레 완주기'가 부제다. "전직 기자인 저자는 스무날동안 26개 코스 425킬로미터의 올레코스를 완주했다. 그냥 걷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마을 사람, 길을 만든 사람, 길을 걷는 사람들을 만났다. 제주의 빼어난 풍광, 슬픈 역사, 다양한 풍습도 함께 만났다. 1만8000명의 신과 함께 공존하는 제주도의 숨결을 생생하게 느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탄생한 책이어서 제주올레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단순한 가이드북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평이다. 이미 이달의 책으로도 꼽은 적이 있는 듯싶은데, 이 주제의 베스트도서는 서명숙의 <제주 걷기 여행>(북하우스, 2008)과 주강현의 <제주 기행>(웅진지식하우스, 2011)이다. 병독해도 좋겠다.  

 

 

 

0. 일본 난학 

 

내 맘대로 고르는 주제는 '일본 난학'으로 정했다. 최근에 이종찬 교수의 <난학의 세계사>(알마, 2014)가 출간된 덕분인데, 알다시피 난학은 '에도시대에 일본이 네덜란드로부터 받아들인 서양 학문'을 가리킨다. 지난해에 이종각의 <일본 난학의 개척자 스기타 겐파쿠>(서해문집, 2013)가 출간됐고, 그보다 더 전에는 타이먼 스크리치의 <에도의 몸을 열다>(그린비, 2008)이 소개됐었다. '난학과 해부학을 통해 본 18세기 일본'이 부제인 책. 해부학에 대한 관심이 주도한 일본 난학의 형성과정을 살펴봄으로써 근대 학문의 특징과 성격에 대해서도 성찰해볼 수 있겠다.

 

14. 03. 11.

 

 

P.S. 이달의 읽을 만한 고전으로는 이번에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수상한 <노예 12년>의 원작, 솔로몬 노섭의 <노예 12년>을 고른다. 영화가 계기가 돼 번역본이 무려 댓 종이나 출간됐다. 노예적 삶에 대한 인식을 확장하는 기회가 된다면 영화를 먼저 보건, 책을 먼저 읽건 순서는 중요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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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회의(363호)의 특집은 '번역을 바라보는 8가지 시선'이다. 청탁을 받아 쓴 특집의 '여는 글'을 옮겨놓는다. 이디스 그로스만의 <번역 예찬>(현암사, 2014)과 <작가란 무엇인가>(다른, 2014)에 실린 포크너의 인터뷰를 글거리로 삼았다.

 

 

기획회의(14, 03. 05) 왜 번역이 중요한가

 

다시, 번역을 말한다. 왜인가. 물론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번 특집의 계기가 된 이디스 그로스만의 <번역 예찬>(현암사)도 원제는 ‘왜 번역이 중요한가’이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교양 있는 남녀라면 읽고 공부할 번역물이 없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라고 그로스만은 말한다. 영어권 독자에게만 한정된 얘기가 아니다. 우리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문학이나 인문사회분야로 한정하면 번역서의 비중이 절반을 넘어선다. 체감으로는 3분의 2는 돼 보인다. 번역물이 빠진 출판이나 독서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라면 번역이 왜 중요한지 말하는 것은 공기가 왜 중요한지 말하는 것만큼이나 중언부언이다. 그럼에도 다시 중언부언하는 것은 번역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 인식의 공유와 확산이기 때문이다.


번역이론이나 번역비평서, 그리고 번역예찬서까지도 등장했지만 실제 이런 책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만약에 번역서가 없다면’이란 가정이 실감나지 않아서일까. 내친김에 책장에서 번역서를 잠시 빼내보자. 몇 권이나 남아 있는지 눈으로 확인해보면 좀 실감이 날지 모른다. 표준적인 사례는 아니겠지만 시험 삼아 책장 한 칸에서 번역서가 몇 권이나 꽂혀 있는지 세 보았다. 영어와 러시아어 책을 뺀 40권 가운데 번역서가 32권, 국내서가 8권이다. 무려 80%가 번역서인 셈. 짐작컨대 어지간한 독서가라면 이 수치가 결코 50% 이하로 떨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산술적으로만 보아도 이것이 우리의 독서 현실이고 조건이다.


“번역은 보편적이고 계몽된 문명이라는 개념을 형성하는 데 중추적이고 현저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그로스만은 말한다. 하지만 그러한 위치에 걸맞은 대우와 평가를 받고 있느냐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로스만은 당연히 영어권 특히 미국의 상황을 우려하는데, 우리와는 고민의 방향이 좀 다르다. 일단 번역서의 수가 현저하게 적다는 게 그의 문제의식이기 때문이다. 영어가 국제 공용어로 쓰이고 있는 현실 때문이겠지만, 미국에서 번역서의 수는 서유럽 선진국 및 중남미 나라와 비교해볼 때 처참할 정도로 적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여기서 그의 비교 대상은 문학작품의 번역인데, 세계문학전집이 여러 곳에서 출간되고 있는 우리는 사정이 조금 나을 수 있다. 하지만 세계문학이라고는 해도 일부 언어권(서구와 일본)에 과도하게 편중된 상황은 여전히 개선의 소지가 있다. 우리의 경우도 다른 언어권의 문학 번역이 처참할 정도로 적은 건 마찬가지다. 이러한 결여와 편중은 어떤 문제를 낳는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영어 번역자로도 유명한 그로스만은 윌리엄 포크너와 마르케스 간의 ‘연속적인 관계’를 예로 든다. 마르케스는 젊은 시절 포크너의 소설이라면 없어서 못 읽을 정도로 좋아했다고 한다. 마르케스에게만 그런 건 아니다. 포크너는 20세기 중반 중남미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현대 영어권 작가였다. 카를로스 푸엔테스나 바르가스 요사도 포크너에게 진 빚이 크다.


흥미로운 것은 포크너 자신이 세르반테스의 열혈 독자였다는 점이다.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포크너는 다른 사람들이 성경을 매년 읽는 것처럼 자신은 <돈키호테>를 매년 읽는다고 털어놓았다. 물론 그가 읽은 건 영어 번역본인데, 그의 만연체 문장이 세르반테스의 영향이라면 중남미 작가들이 포크너에게서 친밀감을 느끼는 것은 우연히 아니겠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세르반테스가 포크너에게 영향을 주고 포크너는 다시 마르케스에게 영향을 준 것만큼 마르케스는 영어권의 현대 작가들에게 압도적인 영향을 미친다. 토니 모리슨과 살만 루슈디, 돈 드릴로 등의 경우가 그런데, 마르케스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는 이들의 문학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게 그로스만의 판단이다. 이것이 언어 간의 ‘생산적 교환’이며 이 교환은 번역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중국의 포크너’로 불리는 모옌의 경우도 고려하면 그 생산적 교환의 범위는 더 확장된다. 문제는 우리다. 노벨문학상에 욕심을 내고 ‘세계문학’에 진입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지만, 그러한 ‘생산적 교환’의 생산적인 사례를 우리는 얼마나 떠올릴 수 있을까(베케트 계보로 묶을 수 있는 이인성, 정영문, 한유주 등의 작가를 떠올려보지만 일례에 지나지 않는다).   

 


말이 나온 김에 포크너를 예로 들자면 우리는 아직 한국어판 포크너 전집을 갖고 있지 않다. 한국 독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헤밍웨이의 경우도 대표적인 소설들만 묶은 선집이 출간돼 있는 상황이다. 국내에서 그보다 훨씬 적은 독자를 갖고 있는 포크너는 저작권 보호기간이 끝난 직후에 몇 권의 작품이 더 출간되긴 했지만 여전히 그가 쓴 작품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게다가 대표작 <소리와 분노>나 <압살롬, 압살롬>의 새 번역본이 나온 게 한두 해밖에 되지 않았다. 포크너의 영향을 받은 한국소설을 기대한다는 게 아직은 무망할 수밖에 없다.

 


문학동네의 '세계문학전집' 100권 돌파를 기념하여 작년에 나온 <한국작가가 읽은 세계문학>에는 포크너의 <곰>에 대한 독후감도 실렸는데, 필자는 2009년에 등단해 작년에 첫 소설집 <그들에게 린디합을>을  펴낸 손보미 작가다. 포크너가 40대 중반에 쓴 이 작품에 대해 “나도 그 정도 나이가 되면 저렇게 정직하게 작품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마도 너무 큰 소망인 것 같아 그냥 접어두기로 했다. 그 대신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비롯한 다른 작품들을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적었다. 하지만  포크너가 네 번째 장편소설 <소리와 분노>를 쓴 건 작가보다 더 젊은 서른두 살 때의 일이다.


세르반테스와 발자크, 플로베르, 도스토예프스키와 경쟁했던 포크너는 이렇게 말했다. “훌륭한 예술가는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충고할 수 있을 만큼 훌륭하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는 최고의 허영심을 갖고 있지요. 옛 작가를 존경하더라도, 그는 그 작가보다 더 잘 쓰기를 바라지요.” 번역은 바로 이런 작가와, 이런 태도와 만나게 해준다. 한국문학은 ‘한국어로 쓴 문학’라고 정의하는 식의 빈곤한 인식으로는 세계문학과 만날 수 없다. 여전히 한국문학만을, 새로 조합하자면 ‘국내문학’만을 비평의 거리로 삼는, 그래서 번역문학은 들러리 정도로 간주하는 관행도 세계문학과의 거리를 좁히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당연하지만 문제는 문학에 한정되지 않는다.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나 헤겔의 <대논리학>도 새 번역본이 나오지 않아 읽을 수 없는 게 우리의 독서 현실이다. 왜 번역이 중요한가, 한 번 더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14. 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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