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회의(363호)의 특집은 '번역을 바라보는 8가지 시선'이다. 청탁을 받아 쓴 특집의 '여는 글'을 옮겨놓는다. 이디스 그로스만의 <번역 예찬>(현암사, 2014)과 <작가란 무엇인가>(다른, 2014)에 실린 포크너의 인터뷰를 글거리로 삼았다.

 

 

기획회의(14, 03. 05) 왜 번역이 중요한가

 

다시, 번역을 말한다. 왜인가. 물론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번 특집의 계기가 된 이디스 그로스만의 <번역 예찬>(현암사)도 원제는 ‘왜 번역이 중요한가’이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교양 있는 남녀라면 읽고 공부할 번역물이 없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라고 그로스만은 말한다. 영어권 독자에게만 한정된 얘기가 아니다. 우리도 사정이 다르지 않다. 문학이나 인문사회분야로 한정하면 번역서의 비중이 절반을 넘어선다. 체감으로는 3분의 2는 돼 보인다. 번역물이 빠진 출판이나 독서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라면 번역이 왜 중요한지 말하는 것은 공기가 왜 중요한지 말하는 것만큼이나 중언부언이다. 그럼에도 다시 중언부언하는 것은 번역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보다 더 중요한 것이 그 인식의 공유와 확산이기 때문이다.


번역이론이나 번역비평서, 그리고 번역예찬서까지도 등장했지만 실제 이런 책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은 여전히 제한적이다. ‘만약에 번역서가 없다면’이란 가정이 실감나지 않아서일까. 내친김에 책장에서 번역서를 잠시 빼내보자. 몇 권이나 남아 있는지 눈으로 확인해보면 좀 실감이 날지 모른다. 표준적인 사례는 아니겠지만 시험 삼아 책장 한 칸에서 번역서가 몇 권이나 꽂혀 있는지 세 보았다. 영어와 러시아어 책을 뺀 40권 가운데 번역서가 32권, 국내서가 8권이다. 무려 80%가 번역서인 셈. 짐작컨대 어지간한 독서가라면 이 수치가 결코 50% 이하로 떨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산술적으로만 보아도 이것이 우리의 독서 현실이고 조건이다.


“번역은 보편적이고 계몽된 문명이라는 개념을 형성하는 데 중추적이고 현저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그로스만은 말한다. 하지만 그러한 위치에 걸맞은 대우와 평가를 받고 있느냐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그로스만은 당연히 영어권 특히 미국의 상황을 우려하는데, 우리와는 고민의 방향이 좀 다르다. 일단 번역서의 수가 현저하게 적다는 게 그의 문제의식이기 때문이다. 영어가 국제 공용어로 쓰이고 있는 현실 때문이겠지만, 미국에서 번역서의 수는 서유럽 선진국 및 중남미 나라와 비교해볼 때 처참할 정도로 적다는 게 그의 진단이다.

 


여기서 그의 비교 대상은 문학작품의 번역인데, 세계문학전집이 여러 곳에서 출간되고 있는 우리는 사정이 조금 나을 수 있다. 하지만 세계문학이라고는 해도 일부 언어권(서구와 일본)에 과도하게 편중된 상황은 여전히 개선의 소지가 있다. 우리의 경우도 다른 언어권의 문학 번역이 처참할 정도로 적은 건 마찬가지다. 이러한 결여와 편중은 어떤 문제를 낳는가.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영어 번역자로도 유명한 그로스만은 윌리엄 포크너와 마르케스 간의 ‘연속적인 관계’를 예로 든다. 마르케스는 젊은 시절 포크너의 소설이라면 없어서 못 읽을 정도로 좋아했다고 한다. 마르케스에게만 그런 건 아니다. 포크너는 20세기 중반 중남미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현대 영어권 작가였다. 카를로스 푸엔테스나 바르가스 요사도 포크너에게 진 빚이 크다.


흥미로운 것은 포크너 자신이 세르반테스의 열혈 독자였다는 점이다. <파리 리뷰>와의 인터뷰에서 포크너는 다른 사람들이 성경을 매년 읽는 것처럼 자신은 <돈키호테>를 매년 읽는다고 털어놓았다. 물론 그가 읽은 건 영어 번역본인데, 그의 만연체 문장이 세르반테스의 영향이라면 중남미 작가들이 포크너에게서 친밀감을 느끼는 것은 우연히 아니겠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세르반테스가 포크너에게 영향을 주고 포크너는 다시 마르케스에게 영향을 준 것만큼 마르케스는 영어권의 현대 작가들에게 압도적인 영향을 미친다. 토니 모리슨과 살만 루슈디, 돈 드릴로 등의 경우가 그런데, 마르케스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는 이들의 문학을 생각할 수 없다는 게 그로스만의 판단이다. 이것이 언어 간의 ‘생산적 교환’이며 이 교환은 번역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중국의 포크너’로 불리는 모옌의 경우도 고려하면 그 생산적 교환의 범위는 더 확장된다. 문제는 우리다. 노벨문학상에 욕심을 내고 ‘세계문학’에 진입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지만, 그러한 ‘생산적 교환’의 생산적인 사례를 우리는 얼마나 떠올릴 수 있을까(베케트 계보로 묶을 수 있는 이인성, 정영문, 한유주 등의 작가를 떠올려보지만 일례에 지나지 않는다).   

 


말이 나온 김에 포크너를 예로 들자면 우리는 아직 한국어판 포크너 전집을 갖고 있지 않다. 한국 독자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헤밍웨이의 경우도 대표적인 소설들만 묶은 선집이 출간돼 있는 상황이다. 국내에서 그보다 훨씬 적은 독자를 갖고 있는 포크너는 저작권 보호기간이 끝난 직후에 몇 권의 작품이 더 출간되긴 했지만 여전히 그가 쓴 작품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게다가 대표작 <소리와 분노>나 <압살롬, 압살롬>의 새 번역본이 나온 게 한두 해밖에 되지 않았다. 포크너의 영향을 받은 한국소설을 기대한다는 게 아직은 무망할 수밖에 없다.

 


문학동네의 '세계문학전집' 100권 돌파를 기념하여 작년에 나온 <한국작가가 읽은 세계문학>에는 포크너의 <곰>에 대한 독후감도 실렸는데, 필자는 2009년에 등단해 작년에 첫 소설집 <그들에게 린디합을>을  펴낸 손보미 작가다. 포크너가 40대 중반에 쓴 이 작품에 대해 “나도 그 정도 나이가 되면 저렇게 정직하게 작품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마도 너무 큰 소망인 것 같아 그냥 접어두기로 했다. 그 대신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비롯한 다른 작품들을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적었다. 하지만  포크너가 네 번째 장편소설 <소리와 분노>를 쓴 건 작가보다 더 젊은 서른두 살 때의 일이다.


세르반테스와 발자크, 플로베르, 도스토예프스키와 경쟁했던 포크너는 이렇게 말했다. “훌륭한 예술가는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충고할 수 있을 만큼 훌륭하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는 최고의 허영심을 갖고 있지요. 옛 작가를 존경하더라도, 그는 그 작가보다 더 잘 쓰기를 바라지요.” 번역은 바로 이런 작가와, 이런 태도와 만나게 해준다. 한국문학은 ‘한국어로 쓴 문학’라고 정의하는 식의 빈곤한 인식으로는 세계문학과 만날 수 없다. 여전히 한국문학만을, 새로 조합하자면 ‘국내문학’만을 비평의 거리로 삼는, 그래서 번역문학은 들러리 정도로 간주하는 관행도 세계문학과의 거리를 좁히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당연하지만 문제는 문학에 한정되지 않는다.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나 헤겔의 <대논리학>도 새 번역본이 나오지 않아 읽을 수 없는 게 우리의 독서 현실이다. 왜 번역이 중요한가, 한 번 더 목소리를 높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14. 03.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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