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사 관련서를 검색하다가 뒤늦게 발견한 책은 로렌 그레이엄의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역사인)이다. 무려 지난여름에 나왔지만 스텔스 기능이라도 장착한 것인지 전혀 감지하지 못했다.

확인해보니 저자는 러시아 과학사를 전문적으로 다룬 학자다(아마도 이 분야의 권위자일듯). <러시아와 소련에서 과학> 같은 저작을 갖고 있다.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은 과학사가의 입장에서 소련의 실패를 해부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소련은 왜 근대 산업국가가 되지 못했을까를 설명하는 책이다. 이러한 논의는 소련 산업화 초기의 오류들을 지적하고 그것들을 고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던 표트르 팔친스키라는 러시아 엔지니어의 인생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저자 그레이엄은 팔친스키의 삶을 통해 테크놀로지를 둘러싼 소련 초창기의 문제점을 짚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궁극적으로 소련 패망의 중요한 원인들 중 하나라는 주장을 펼친다.˝

원서도 구입하려 했더니 재판이 나왔음에도 분량에 비해 비싼 편이다. 영어권에도 이 분야의 독자는 많지 않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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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권의 시리즈로 구성되는지는 모르겠는데(아, 4부작이란다) ‘지배와 저항으로 보는 조선사‘의 둘째권이 출간되었다. <모멸의 조선사>(글항아리). ‘지배권력에 맞선 백성의 몇 가지 얼굴‘이 부제다. 지배와 저항이라는 프레임이 평소 관심사와 맞아서 반갑다.

˝시중에 나와 있는 조선시대 관련 책에서 조선 지배 세력의 통치법이나 백성의 생활상을 분리시켜 각각을 다룬 책은 많지만 이 양자의 관계 양상을 적극적으로 파악하고자 시도한 책은 드물다. 이 책은 바로 이 부분을 정면으로 겨눈다. 특히 양반 관료층의 지배 전략과 통치에 대응해나간 조선 백성의 반응을 계층과 직업 별로 자세히 살피고 있다. 지배 전략을 매개로 관료 세력과 백성이 형성하는 관계 양상을 파악하고, 조선이라는 사회가 이러한 상호적인 힘의 작용에 의해 유지됐음을 드러낸다.˝

전작인 <두 얼굴의 조선사>에도 자연스레 손이 가는데, 흠, 어디에 두었는지 잡히지 않는다. 찾아봐야겠다. 지배와 저항이라는 프레임과 관련해서는 박영규의 <조선반역실록>도 참고해볼 만하다. 이건 어디에 두었는지 생각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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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귀가 후에 밤참으로 라면을 끓여 먹으며 오늘 온 시집들 가운데 두 권을 읽었다. 며칠 전에 기대감을 적은 김경후의 최근작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창비)과 그보다 앞서 2012년에 나온 <열두 겹의 자정>(문학동네)이다.

읽은 순서는 출간 순서인데 <열두겹의 자정> 이전에 낸 첫 시집 <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민음사)가 빠졌다. 주문에서 빼놓은 건 아마 배송예정일이 달라서였을 거 같은데 뒤에 나온 시집 두 권을 읽고 나니까 따로 읽어볼 마음은 들지 않는다. 내가 호감을 갖고 읽은 ‘불새처럼‘이나 ‘속수무책‘ 같은 시들이 희소했기에. 흔히 하는 말로 ‘그게 다예요‘에 해당한다(이 시인은 여러 편의 칼리그램(형상시)을 선보이고 있는데 이미 한국시에서도 더이상 새롭지도 않고 놀랍지도 않다).

놀라울 뻔한 시는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의 첫 시, ‘입술‘이었다.

입술은 온몸의 피가 몰린 절벽일 뿐
백만겹 주름진 절벽일 뿐
네게 가는 말들로 백만겹 주름진 지느러미
네게 닿고 싶다고
네게만 닿고 싶다고 이야기하지

이렇게 첫 연이 시작하는데 도발적인 비유(˝온몸의 피가 몰린 절벽˝)와 상투적인 진술(˝네게 닿고 싶다고˝)이 기대반 염려반으로 나뉘다가 결국 염려 쪽으로 기울고 말았다. 마지막 연.

피가 말이 될 수 없을 때
입술은 온몸의 피가 몰린 절벽일 뿐
백만겹 주름진 절벽일 뿐

결국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그냥 ‘절벽‘에서 멈춘 시가 되었다.

<열두 겹의 자정>은 사정이 더 좋지 않다. 물론 내 입맛에 맞지 않다는 것일 뿐이긴 하지만 내가 그렇게 취향이 까다로운 독자인 것인지 의구심도 갖게 된다. 더불어 시집 해설을 쓰는 문학평론가라는 직업도 때론 ‘극한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설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김경후의 시는 어쩌면 우리의 삶에서 모든 것을 빼앗긴 후에도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끝까지 따라가는 순례의 여정인 것만 같다.˝(이소연)

그렇지만 김경후의 순례를 따라가는 독자의 여정은 첫 시 ‘토르소‘에서 멈췄어도 무방했을 듯하다.

텅 빈 카페 선반 위
토르소
누군가를 기다리며 한나절
기다리지 않기로 한 뒤
또 한나절
허벅지와 미소
울부짖음과 발바닥
있어선 안 되는 건 이미 모두
없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
그것뿐
벌건 할로겐 램프 아래
벌거벗은
토르소
잊기의
기억

내가 덧붙일 수 있는 건 ‘이것뿐‘이라는 것이다. 더이상 잃을 것도 기대할 것도 없는 토르소의 세계를 김경후는 경험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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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셀러 시집이라고 입소문으로만 듣던 박준의 <당신이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문학동네)를 앞뒤로 읽었다. 그냥 자연스레 와닿는 시들을 좋아하는데, 몇편의 후보작 가운데 ‘이 한편‘으로 고른 시는 ‘꾀병‘이다. 찾아보니 나만의 예외적인 선택은 아닌 듯싶다.

나는 유서도 못 쓰고 아팠다 미인은 손으로 내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었다 ˝뭐야 내가 더 뜨거운 것 같아˝ 미인은 웃으면서 목련꽃같이 커다란 귀걸이를 걸고 문을 나섰다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 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의 길섶마다 열꽃이 피었다 나는 자면서도 누가 보고 싶은 듯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

힘껏 땀을 흘리고 깨어나면 외출에서 돌아온 미인이 옆에 잠들어 있었다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나이에 대한 감이 없어서 그런데 이런 것이 83년생 시인의 일반적인 감각인지 잘 모르겠다. 심증으론 아주 예외적인 것 아닌가 싶다. 내가 읽은 범위에서는 백석 시에까지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다만 이 시인이 ‘미인‘의 손과 곁을 떠나서도 이런 감각과 어투를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실제로 시집에 실린, ‘미인‘과 무관한 시들에서는 나는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하겠다. 1987년의 가족사를 소재로 한 시 ‘눈썹‘도 그렇다.

엄마는 한동안
머리에 수건을
뒤집어쓰고 다녔다

빛이 잘 안 드는 날에도
이마까지 수건으로
꽁꽁 싸매었다

봄날 아침
일찍 수색에 나가
목욕도 오래 하고

화교 주방장이
새로 왔다는 반점에서
우동을 한 그릇 먹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우연히 들른 미용실에서
눈썹 문신을 한 것이 탈이었다

아버지는 그날 저녁
엄마가 이마에 지리산을 그리고 왔다며
밥상을 엎으셨다

어린 누나와 내가
노루처럼
방방 뛰어다녔다

1987년이면 네 살 때 기억을 소재로 한 시다.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고 능청스럽게 가족사의 한 에피소드를 그려내고 있는데 역시나 이런 감각이나 어투는 요즘 시 같지 않다. 시집 제목도 그렇고 산문집 제목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같은 구닥다리 표현이 묘하게 정서를 환기한다. 적당한 분류 범주를 찾지 못해서 임시로 ‘박준적 신파‘라고 부르겠다. 이 젊은 시인은 대체 몇 살의 나이로 어느 시대에 사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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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의 발견‘으로 크리스토퍼 헤이즈의 <똑똑함의 숭배>(갈라파고스)를 고른다. 저자는 미국의 정치평론가. 찾아보니 책의 원제는 ‘엘리트 계급의 황혼: 능력주의 이후의 미국‘이다. ‘엘리트주의는 어떻게 사회를 실패로 이끄는가‘가 번역판의 부제다. 대략 책의 주제와 시각을 가늠해볼 수 있다.

˝엘리트 사회는 무너지고 있다. 이제 새로운 대안을 찾아 획기적이고 참신한 해답을 제시하는 저자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 때다. 성취의 차이를 자연스럽고 바람직하게 받아들이는 능력주의는 사회를 평등하게 만들지 못한다. 실패의 시대에 대해 저자가 제안하는 해법은 단순하면서도 날카롭다. 

미국 국내 문제 전문지 ‘포린 폴리시‘ 우수 선정도서(2012)로 꼽힌 이 책은 ‘포브스‘, ‘애틀랜틱‘ 등 많은 언론의 찬사를 받았으며 전반적인 사회 시스템의 실패를 주제로 삼은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나 마이클 해링턴의 <새로운 미국>처럼,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칠 문제작으로 꼽힌 책이기도 하다.˝

요컨대 미국사회 비평서이면서 엘리트주의 비판서로 읽을 수 있겠다(참고로 <새로운 미국>은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이다). <많아지면 달라진다>(갤리온)의 저자 클레이 셔키는 ˝분노할 준비를 하고 이 책을 읽으라˝고 충고한다. 적폐 청산의 시대적 과제를 떠안고 있는 우리에게도 반성의 기회를 제공해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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