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귀가 후에 밤참으로 라면을 끓여 먹으며 오늘 온 시집들 가운데 두 권을 읽었다. 며칠 전에 기대감을 적은 김경후의 최근작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창비)과 그보다 앞서 2012년에 나온 <열두 겹의 자정>(문학동네)이다.

읽은 순서는 출간 순서인데 <열두겹의 자정> 이전에 낸 첫 시집 <그날 말이 돌아오지 않는다>(민음사)가 빠졌다. 주문에서 빼놓은 건 아마 배송예정일이 달라서였을 거 같은데 뒤에 나온 시집 두 권을 읽고 나니까 따로 읽어볼 마음은 들지 않는다. 내가 호감을 갖고 읽은 ‘불새처럼‘이나 ‘속수무책‘ 같은 시들이 희소했기에. 흔히 하는 말로 ‘그게 다예요‘에 해당한다(이 시인은 여러 편의 칼리그램(형상시)을 선보이고 있는데 이미 한국시에서도 더이상 새롭지도 않고 놀랍지도 않다).

놀라울 뻔한 시는 <오르간, 파이프, 선인장>의 첫 시, ‘입술‘이었다.

입술은 온몸의 피가 몰린 절벽일 뿐
백만겹 주름진 절벽일 뿐
네게 가는 말들로 백만겹 주름진 지느러미
네게 닿고 싶다고
네게만 닿고 싶다고 이야기하지

이렇게 첫 연이 시작하는데 도발적인 비유(˝온몸의 피가 몰린 절벽˝)와 상투적인 진술(˝네게 닿고 싶다고˝)이 기대반 염려반으로 나뉘다가 결국 염려 쪽으로 기울고 말았다. 마지막 연.

피가 말이 될 수 없을 때
입술은 온몸의 피가 몰린 절벽일 뿐
백만겹 주름진 절벽일 뿐

결국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고 그냥 ‘절벽‘에서 멈춘 시가 되었다.

<열두 겹의 자정>은 사정이 더 좋지 않다. 물론 내 입맛에 맞지 않다는 것일 뿐이긴 하지만 내가 그렇게 취향이 까다로운 독자인 것인지 의구심도 갖게 된다. 더불어 시집 해설을 쓰는 문학평론가라는 직업도 때론 ‘극한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설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김경후의 시는 어쩌면 우리의 삶에서 모든 것을 빼앗긴 후에도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끝까지 따라가는 순례의 여정인 것만 같다.˝(이소연)

그렇지만 김경후의 순례를 따라가는 독자의 여정은 첫 시 ‘토르소‘에서 멈췄어도 무방했을 듯하다.

텅 빈 카페 선반 위
토르소
누군가를 기다리며 한나절
기다리지 않기로 한 뒤
또 한나절
허벅지와 미소
울부짖음과 발바닥
있어선 안 되는 건 이미 모두
없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
그것뿐
벌건 할로겐 램프 아래
벌거벗은
토르소
잊기의
기억

내가 덧붙일 수 있는 건 ‘이것뿐‘이라는 것이다. 더이상 잃을 것도 기대할 것도 없는 토르소의 세계를 김경후는 경험하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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